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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와백합화의비유 (마 0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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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대자연을 소재로 해서 말씀 하셨던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 를 보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담겨진 깊은 뜻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연을 매우 친근하게 느끼시고, 자연 속에서 생활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연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 받아 들이셨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들도 죄로 인해서 어두워지지 않은 맑은 심령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우리 눈 에 보이고, 우리 귀에 들리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 물로서 하나님의 뜻이 그 속에 담겨져 있고, 모든 자연을 바라보노라면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령의 눈은 어두워지고, 감각은 무디어졌습니다. 우리의 영성은 너무도 둔해졌습니다.그래서 보려고 애써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고 귀를 빼어도 들 어오는 하나님의 소리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것을 보고, 다른 소리를 듣는 잘못을 범하고,병들어 버린 상태 에 빠지기도 합니다.

 예를들면, 한송이의 백합화를 보면서 아, 아름답구나! 하나님의 솜씨가 어쩌면 저렇게 오묘하실 까 이런 아름다운 꽃을 만드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저 꽃이 얼마짜리인가 이 꽃을 보낸 사람의 생각은 무엇이지 하는데 먼저 마음 이 갑니다.

참새를 보고도, 순진무구하게 자유와 평화로움과 아름다움을 생각하기 보다는 경 제성을 먼저 따지게 되고, 인간관계 속에서 형성된 새로운 가치기준을 가지고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연을 말씀의 교과서로 사용하셨습니다.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縯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좋은 교재로 사용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백합화와 새를 소재로 했습니다만, 사실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는 것은 이 두가지 뿐이 아닙니다.

하늘을 보아도,산을 보아도, 흐르는 물을 보아도, 바람 소리를 들어도,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도, 이름 없는 들풀을 보면서도 우리는 생각을 할수가 있습니다.하나 님의 음성을 들을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과 특별히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뜻과는 구별된다는 의미에 서 그렇게 부릅니다.

이 자연계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 같은 조건으로 주십니다.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동서양을 구분하지도 않습니다. 모두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 연 조건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그 속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을 캐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오히려 섬기기도 하고, 전혀 다른 면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을 받아서 성령의 충만한 가운데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보이는 모든 자 연과 들리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면 겸낮백합화와 새,그리고 모든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를 원하는 멧세지는 무엇입니까 내가 너를 사랑한다 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 는 말씀입니다.

보잘것 없는 저 백합화도 아름답게 만드시고 보살피시며, 새 한마리도 돌보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생각해 보면,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피조물에게 주시지 않고 사람에게만 주신 선물 중에서도 가장 귀중 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생각하는 능력 즉 이성 입니다.

생각을 할 때 에도 몇가지 영역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추리적인 기능입니다.

이 쪽에서 바라보고 있지만, 저 쪽에는 무엇이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그리 고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다음에는 저런일이 벌어 지겠구나, 미루어서 생각하는 것 을 말합니다.

 다음으로는 비판능력이 있습니다.

크냐 작으냐,싸냐 비싸냐, 이 속에 사랑이 담긴 것이냐 아니냐,하는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여러가지 조건이나 상황을 종합하고 분석하는 능력 이 전제 되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영탕용선물을 주고 받고, 조그마한 선물 하나를 가지 고 기뻐하기도 하며 슬퍼지기도 하고, 행복해 하기도 하고 작은 오해가 죽음을 불러

오기도 합니다.

동물에게는 사는데 필요한 먹이와 생식 본능을 제외한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지극한 사랑의 표현입니 다. 이런 감정과 이성이 있음으로해서 삶이 더 재미있어 지고,풍요해 지는 것입니 다. 종교가 있는 곳에는 예술이 꽃피게 됩니다. 특히 기독교는 가는 곳마다 찬란한

문화를 이루어 왔습니다. 음악,미술,문학,연극,건 스포츠 등을 통해서 더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을 긍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사고가 잘못되기 시작하여 타락하고 불신앙적으로 기울어지고 나면 오히려 불행을 자초하게 됩니다. 의심이 생기게 됩니다. 한번 의심이 생기면

매사를 좋지 않은 방향으로만 생각하게 됩니다.의심이 의심을 낳고, 꼬리에 꼬리가

이어집니다.

저녁에 조금 늦게 오는 남편을 두고, 좀 바쁜 일이 있나보다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또 늦은 남편을 위로하면 좋은데, 이걱정 저걱정하다보면 자동차 사고라 도 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다치지는 않았을까 혹시 죽지는 않았을까 그러면 나 는 이 애들 데리고 어떻게 살지 그리고 남편에 대한 신뢰감이 없으면, 이 사람이 어디로 새버렸나 지금 무슨 일 을 하고 있을까 별의 별 생각을 다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함께 지내는 이웃과 형제들, 성도들끼리도 돌아 서면 믿지를 못해요.

그래서 자꾸 전화를 해서 그의 생각을 확인하려고 들고, 전화를 놓고 나면 그래도

미심쩍어서 또 불안해 지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미워하고 욕하는 것 같아서, 자기가 먼저 헐뜯고 욕하고 나 서는 후회하는 일을 반복하고.....

대부분이 자기가 남의 흉을 잘보고 뒤에서 헐 뜯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 람을 믿지 못합니다. 그 사람도 자기와 같은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이란 좋은 방향으로 나가면 아름답고 행복한 것인데,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의심하게 되고,번민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잘되는 병원이 정 신병원입니다. 기도원마다도 보면 이런 사람들로 가득차 있어요. 얼마나 불행한 일 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지 말라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나쁜 방향이나 불신앙적인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생각을 하나님 편에서,하나님의 사랑으로 보고 해석해야지 의심하고 불안해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보다 중요한 것을 먼저 생 각하라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우리들은 아이들을 보기만 하면 공부하라.공부하라 하는 데,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건강입니다.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양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공부는 좀 못해도 양심이 바른 어린이를 우리는 공부잘하는 아이보다 칭찬해 주어서 자존심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성품입니다.

점수 한두점 더 얻기 위해서 정다운 친구를 시기질투하고 남을 어떻게 하든지 걸 어 넘어 뜨리는 성품이 되어 버린다면 무엇인가 잘못 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곧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이 생명은 우리 마음대로 어쩔수 없는 것입니다. 나와 모든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 께만 있다.즉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렸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다음에 문제를

풀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게 되면 재산이 없어져도,병이 들어도 감사할 수가 있게 될 것입 다.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는 많은 문제들이 대부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보면 사람들이 가지는 걱정이 대개 어디서 오느냐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 다.내일 더 잘 먹고 입으려고 계획하는 것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더 좋은 내일을 생각하며 염려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것은 부자나 가난하자가 다 같습니다.

가진 사람은 더 많이 가지려고,더 많은 쾌락를 즐기려고 더 많이 염려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음식 과 목숨,몸 과 의복을 비교하셨습니다.

몸을 위해서 의복이 있고, 목숨을 위해서 음식이 있다는 것을 우굔다 잘 압니 다.그런데 실제 생활에서보면 그 반대로, 음식을 위해서 목숨이 있고 의복을 입기

위해서 몸이 있는 것 같이 살아가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옛날에도 오늘과 거의 같았는가 봅니다.

화려한 옷치장을 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정말 몸을 혹사한다는 생각이 들정도에 요. 식도락을 위해서 뛰어 다니는 사람들 보세요.

 EX 진주 목걸이-모파상작

지나친 욕심은 불행을 가져옵니다.

 또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교훈은 너희들이 아무리 염려 걱정을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염려가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효력을 발휘 하지 못합니다. 전혀 무용한 것입니다.

오히려 염려와 걱정을 하게 되면, 기분이 나빠지지요.다른 사람의 기분도 상하게 하지요,일이 잘 안되지요, 정신이 몽롱해지지요, 건강 잃어버리지요 무엇하나 제대 로 되는 일이 없어습니다.

 우리들이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극히 제한된 인생을 산다는 것 입니다.

제한된 능력으로 살고,제한된 지혜를 가지고 삽니다. 시간도 제한 되어 있고, 우 리가 사용할哺있는 물질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은 그 돈을

마음대로 쓸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내 돈을 내 마음대로 쓰는데 누가

뭐라고 하느냐고 말했던 사람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우리는 잘알고 있습니다. 자기 의 수중에 있는 돈이라도 쓸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걱정에 벗어 날수 있습니까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의 전부를 위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만드신 만물을 사랑하셔서 저 공중의 새 한마리도 저렇게 관심을 가지고 먹이시고 돌보시는 데, 하나독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 을 먹이시지 않겠는가 생각해 보세요.

저 들의 백합화도 그렇게 아름답게 입히시고,기르시는 데 하나님의 자녀를 돌보고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가만히 뒤돌아 보면, 우리의 걱정과 염려는 믿음이 없는 데서 오늘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믿음이 병들었기 때문에 걱정이 생긴 것입니다.

너를 만드신 분이 누구냐 너를 지금까지 지켜주신 분이 누구냐 너를 죄에서 구원해주신 분이 누구냐 너의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책임져 주시고,생명까지 붙들어 주실 능력이 가지 신 분이 누구냐 하는 것을 백합화와 새를 보고 생각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적어도 두가지 걱정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 지 못했다면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수는 없습니다.

첫째는 죽음의 문젭니다.

둘째는 저주 받을까 하는 두려움의 문젭니다.

이 것들은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부활의 주님의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 에 다 해결 받은 문제들입니다.

----1세기의 초대 교회에서 기록된 크리스챤 문서들-성경이 아닌 성경 밖의 문서들-을 찾아보면 에수님을 사랑했고, 그리스도를 좇았던 많은 제자들 의 이름이 나오는데 재미나는 사실 하나를 발견 했습니다. 사람들의 이름 가운데 티테디오스(Titedios)라는 이름이 참 많았습니다. 티테디오스 죤 (요한), 티테디오스 바울, 티테디오스 알미니우스 등... 티네디오스라는 말은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사람 들의 본 이름이 아니라, 이름 앞에 붙였 던 하나의 별칭이었습니다. 예수님 을 믿은 후, 그들의 삶이 변한 다음에 붙였던 하나의 애칭이었을 것입니다.

초대 크리스챤들이 왜 이런 이름을 많이 가수를 그들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었을때,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의 아버지 이시며, 자기의 하나님인 것을 알았던 그 순간 그들은 그들의 염려를 다 하나님께 부탁할 수 있었고 비로소 염려에서의 해방이라는 놀라운 삶을 얻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부터 여러분의 이름 앞에 티테니오스라는 이름을 붙이시기 바랍니다.

티테디오스-결코 열려하지 않는 사람

우리는 이미 하나독해결해 주신 문제의 보따리를 아직도 끌어 안고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염려와 근심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작 우리가 해야할 중요한 걱정과 염려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해야할 일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하 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나라가 잘되기를 걱정해야 합니다. 왕자는 자기

아버지가 잘되어야 다음에 자기도 왕이 될수있습니다. 아버지가 사람들로부터 높임 을 받고 존경을 받아야 자기의 장래도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과거의  강때문에 받아야할 심판과 영 원한 멸망에서 건짐을 받았는데, 이제는 우리의 모든 운명과 우리의 미래는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믿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죽으나 사나, 생시에나 꿈결에나 하나님의 일만 생각해야 합니 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 다. 하나님의 의 는 곧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상태 를 말합니다. 그런 곳이 곧 하 나님의 나라지요.

 그러면 모든 다른 것들은 더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덤으로 주시겠다 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따라오는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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