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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날 (암 04:4-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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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스라엘의 무서운 세가지 죄1).도덕적인 부패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4:1상)
바산의 암소는 살만 찐 것이 아니라 제 배만 불린 것이 아니라 우유도 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도 아주 안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유는 내지만 여전히 소는 소란 말입니다.
5장에서는 특히 법정의 불의한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날 운동권에 있는 사람들이나 반체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아모스 선지자를 좋아하는 이유가 사회악을 무섭게 질타하는 이 모습 때문입니다.
특히 종교신앙을 가졌다는 사람들의 상식선에도 이르지 모사는 도덕적인 부패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우리를 향하여 조그마한 도덕성조차도 없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내가 당해야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덕을 세우는 것이 못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유익하지 않습니다.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옳은 말은 백 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유익하지 않은 말은 안한 것만 못합니다.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는 늘 예민하게 느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느끼는 것처럼 나 자신의 죄에 대해서 민감하게 느껴야 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잘 모릅니다.
2)위선죄
“아침마다 너의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현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4:4)
위선죄입니다.
십일조도 바치고 소리내어 광포하면서 낙현제를 드리고 아침마다 희생의 제물을 드립니다.
그러나 요즘 어린아이들 말로 웃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제물은 역겨워 토해 버리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프라카드에 ‘금식기도’라고 써붙입니다.
금식기도할 때에 너무 선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보시기에 역겹습니다.
감리교를 창설한 요한 웨슬레가 어느 곳에가서 설교를 했더니 한 사람이 와서 “목사님 나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나는 죄이닙니다.”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웩슬레 목사님이 하도 역겨워서 노려보고 있다가 “예, 당신의 큰 죄를 위해서 기도해 드리지요” 그랬더니 이분이 깜짝 놀라서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었다고 그럽니까” 하더랍니다.
오늘 이분과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입술로 기도할 때에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하면서 다른 사람 앞에서는 가장 의인입니다.
3).하나님을 찾지 않은 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4:6하, 8절하, 9절하, 10절하, 11절하)
이 예배자들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도덕적인 부패와 위선에 더하여 하나님을 찾지도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기도는 한다고 하면서 자기 말만 중얼거립니다.
오늘날 이름만 가진 명목상의 선지자들이 가득차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두세가지로 나타납니다.
먼저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이들은 어떤 방법을 다해 하나님께 봉사한다 할지라도 결국은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름만 가진 크리스찬이지 결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이들은 “언젠가는 옳게 살겠다. 때가 되면 나도 그렇게 살 것이다.” 라고 기대를 하면서 살 뿐이지 죽는 시간까지 옳은 일 한 번 못해보고 옳은 판단을 따라 살아보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죄중에 헤매 이면서 그 죄가 자기 삶에 유익한 것이고 하나님께 유익한 것이라고 핑계를 하면서 사는 것이 소위 명목상의 신자들의 대부분의 모습입니다.
또 한가지 특징은 죄로 물들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바르게 행하기 위해서 오히려 지금의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특징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면서도 자기들은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멀리 떠나 배신을 하면서 여호와의 날이 빨리 도래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날이 오게 되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2.여호와의 날
“여호와의 날이.....”(5:20)
도덕적인 죄와 위선죄에 더하여 하나님을 찾지도 않은 이스라엘에게 여오와의 날이 도래한다고 아모스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공평과 진리를 추구했더라면, 공의를 따라 갔더라면 여호와의 날이 그들에게도 빛의 날이 되었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들은 그러지를 못했고 그날을 어두움의 날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예물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거룩한 의식이 없어서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사랑과 순종이 결핍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메말라 버렸을뿐아니라 자기 사랑으로 바뀌었고 순종이 아니라 오히려 불순종의 죄를 범하면서 하나님 앞에 목이 곧았습니다.
사랑과 순종이 메말라 버렸을 뿐아니라 공의오 공법도 결핍이 되었습니다.
약한 자가 억눌림을 당하고 가난한 자가 멸시를 당했습니다.
태만과 불의와 사치로 가득 채워진 이스라엘에게 올 것은 심판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는 몸부림을 치면서 잃어버린 이 부족한 부분을 채우라고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날과는 같은 날이면서도 그 개념이 전혀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은 우리 신자들에게는 즐거운 날이요 기대할 만한 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는 두 사람이 같은 밭에서 일을 하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남아 있게 되며 두 여인은 맷돌을 갈다가 한 여인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여인은 그대로 남기움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주의하고 주님의 날이 속히 올 것을 대비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는 부활의 날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우리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재림을 하시게 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무덤이 깨어지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은 저희와 함께 구름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되는데 이것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했습니다(살전4:16-17).
이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날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날은 신약에 나타났고 여호와의 날은 구약에만 나타난 것은 아니나 여호와의 날은 주로 진노의 날, 심판의 날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1).어두움의 날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5:19)
그날은 태양, 달, 별 모든 빛이 다 없어지는 날일 뿐 아니라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날, 하나님이 없는 날, 생명이 없는 날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없이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영아가 세상에 나와서 세가지 공포증세가 나타나는데 첫째는 어두움에 대한 공포라고 합니다.
빛되신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니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는 어두움의 날인 것입니다.
2).분리되는 날
고독한 날입니다. 외로워지는 날입니다.
빛 안에 있으면 서로 보기도 하고 느기기도 하고 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두움에 서는 웃음도 없고 반응도 없고 고독 뿐입니다.
지옥에 가서 우글 우글 같이 몰려 매를 맞으면 덜 하겠는데 혼자 고독을 느껴야 합니다.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3).피할 수 없는 날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5:19)
죄를 범하고 난 다음에는 피할 곳이 없습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피할 수 없고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피할 곳이 없습니다.
4).소망이 끊어진 날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5:20)
그날은 완전히 소망이 끊어진 날입니다.
소망이 없게 되니까 사람이 포기를 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아예 버린 몸이라고 하여 죄에 죄를 더 쌓아습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여호와는 심판을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를 다메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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