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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레데 교회의 겨울 채비 (딛 03: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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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가는 곳마다 동역자를 동반하였습니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한다면 바울의 사역 스타일은 소위 팀 미니스트리(Team Ministry)라 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을 위대한 믿음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주변에 항상 신뢰할 만한 동역자를 두고 함께 하나 님의 일을 했습니다. 전도 여행을 다닐 때도 누군가를 꼭 동반했습니다. 때 로는 디모데와 때로는 바나바와 마가와, 그리고 본문에서는 디도와 함께 다 녔습니다. 일정 기간 바울은 지중해 연안의 큰 섬 중에 하나였던 그레데에 디도와 함께 복음을 전하고 예수께 돌아오는 사람들을 말씀으로 세우는 일 들을 했습니다.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 섬에 남겨 둔 이유 그런데 바울은 그 당시 알려진 전세계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큰 비전과 꿈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맡기신 새로운 사역지를 향해서 떠 나게 됩니다. 떠나가면서 그는 함께 동역했던 디도를 이 그레데 섬에 남겨 놓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두 사람(바울, 디도)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그레데 사람들을 계속적으로 양육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 단순히 개인의 신앙을 자라게 한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제 막 세워진 그레데 교회를 좀더 견고하게 세우는 일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였 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후임 목회자로서 디도를 그곳에 남겨 둔 것입 니다.

저는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 섬에 남겨 둔 두 가지 목적을 통해서 우리 그 리스도인들이 전생애를 통하여 거둘 수 있는 가장 큰 두 가지 보람을 발견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살면서 누릴 수 있는 무엇보다 소중한 보람 중에 하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 사람이 예수를 믿고, 계속 해서 주님 안에서 자라가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이번에 미국에서 열린 얼바나(URBANA:IVF 주최로 3년에 한 번씩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적 청년 선교 대회) 대회에서는 아지쓰 페르난도라는 스리랑카 분이 성경 강해 주강사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 영적으로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은 지금 트리니티 대학 교수로 계신 로버트 콜맨 박사라고 합니다.

페르난도 씨가 에즈베리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콜맨 박사는 그에 게 단순히 교실에서 강의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를 자주 집에 초청하여 같이 식사도 하고 일 주일에 한 번씩 기도도 하면서, 정말 그가 제 3세계의 훌륭한 사역자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같이 교제하면서 일종의 제자 훈 련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얼바나 대회에서 페르난도는 주강사였고 로버트 콜 맨 박사는 세미나 강사였습니다. 콜맨 박사는 자기 제자인 페르난도가 말씀 을 풀어서 강해하는 모습을 눈물을 흘리면서 바라보셨습니다. 자기 제자가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통해서 감동을 끼치는 것을 보고 이 노교수가 눈물 을 흘리면서 감격해 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참으로 사람을 키워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많은 것을 성취하고 많은 것을 남긴다 해도 우리의 삶이 끝나는 그 순간에, 무엇이 이 세상에서 남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것이었 다고 회고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당신에게는 디 도가 있습니까 디모데가 있습니까 정말 내 생애를 통해서 한두 사 람이라도 신앙적으로 깊이 영향을 끼쳐서, 복음을 가지고 또다른 사람들에 게 그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키웠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디도서 전체를 통해서 바울은 디도로 하여금 복음을 전한 사람들을 계속해 서 잘 돌보아 주도록 격려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그레데 섬에서 예 수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세운 이 어린 교회가 견고하게 세워지길 원하는 바울의 애타는 심정이 디도서 전체를 통해서 면면이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을 예수 믿게 하여 신앙이 자랄 수 있게만 하면 되지, 그가 어느 교회에 가든지 교회가 어떻게 되든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하는, 탈교회 적, 무교회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오늘날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 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또한 교회가 잘 세워지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 면 바울은 교회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기 대하시는 세계 복음화에, 세계를 바꾸는 사역에서 심장 역할을 할 수 있다 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중국 내지 선교회를 세워서 중국 선교의 문을 본격적으로 열었던 허드 슨 테일러의 생애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는 우선 중국에 서 의사로서 한동안 일하다가 중간에 영국으로 돌아가 몇 년을 보낸 뒤에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의 전반기의 사역과, 중 국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곳에서 삶을 마칠 때까지의 후반기의 사역에는 차 이점이 있습니다. 처음에 허드슨 테일러는 `복음만 전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병원 사역을 통해서 자기와 접촉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전기(前期) 사 역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서 지난날의 사역을 결산할 때 그의 마음 속 에, 좀더 조직적으로 중국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역이 자라나지 못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자리잡게 됩니다. 그러다 성경을 다 시 읽으면서 그는 교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허드슨 테일러의 후기 사역은 개인에게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교회에 굳게 발을 붙이며 그들의 교회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역량 있는 교회로 자랄 수 있도록 하는 선교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허드슨 테일러는 비로소 중국 땅에 복음이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근본적인 영항을 끼치면서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교회 생활을 통해서 기쁨과 만족과 보람을 얻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을 해도 마음 속에 참된 기쁨과 보람이 없게 됩니다. 또 내 신앙이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나에게만 머물러 있을 때, 살 맛이 안 나는 것입니다. 반면, 주님을 알고 복음을 맛본 사람들에게는 내가 복음을 전하 고 양육한 사람들이 성장하여 주님의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김을 통해 그 교 회가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교회로 성장해 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보 다 더 귀한 보람은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나간 후에 그레데 섬의 이 어린 교회에 위기가 찾아옵니 다. 이것은 일종의 성장의 고통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바울은 그 교회가 자신이 뜻한 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하 여 그는 그레데 교회의 안정을 갈구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실어 이 디도서를 썼던 것입니다.

그레데 교회의 위기 상황 개인에게 신앙의 위기가 찾아오듯이 교회도 신앙의 위기를 겪을 수 있습니 다. 저는 그것을 교회의 겨울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한동안 교회가 순탄하게 부흥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영광스럽게 성장하는 그런 때가 있는가 하면, 어느 순간 갑자기 침체를 겪어 영적으로 어두워지는 위 기를 맞는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겨울을 잘 넘기지 못하면 동사(凍死)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겨울을 잘 넘기면 다시 한번 벚꽃이 만개하는 봄 을 맞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디도서의 마지막 부분을 통해서, 그레데 교회가 경험했던 겨울과 그 겨울의 원인을 살펴보고, 바울이 어떻게 교회가 이 겨울을 극복하여야 할지 가르치고 있는가를 주목해 봄으로써 우리 교회에도 닥칠 수 있는 겨울 을 대비하는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레데 교회의 위기는 한마디 로 말하면 교회 내에 논쟁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던 것과 이단의 침투였 습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단의 침투가 아니라 교인 중에서 이단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사실 밖에서 침투하는 이단은 대비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인 중의 한 사람의 신앙이 갑자기 변질될 때, 그리고 그 잘못된 복음을 퍼뜨리기 시작했을 때가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 다.

먼저, 교회 내의 논쟁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본문에는 어 리석은 변론, 족보 이야기, 분쟁, 율법에 대한 다툼의 순서로 논쟁의 내용 이 언급되어 있는데 원문을 보면 뒤로 갈수록 사용되는 단어가 점점 그 강 도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근거없는 것을 추구하고 그 허황된 것을 근거로 자기 주장을 하고, 그러다가 나뉘어지고 결국에는 싸움으로 발전해 나간 것입니다.

첫째/변론 이 변론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은 강하지만 원문에서는 무엇을 찾는다 , 추구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어리석은 변론 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레데 교회 사람들이 분명한 계시에 근거하지 않고, 즉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채 무슨 진리를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씀과 계시에 근거하지 않은 진리 추구를 바울은 어리석은 변론이라고 말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족보 이야기 여기서 말하는 족보는 우리 조상들의 족보 같은 것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 의 여러 인물들에 관해서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지 않는 이야기 들을 많이 꾸며 댔습니다. 일종의 신화입니다. 즉, 아브라함에 대해서, 이 삭에 대해서, 야곱에 대해서, 요셉에 대해서, 모세에 대해서 성경에 나타나 지 않는 많은 이야기들을 상상으로 꾸몄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파벌을 만들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에게 속한 사람이다, 나는 다니 엘의 신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이다 해 가며 구약성경에 나타난 인물 들을 우상화 시켜서 만들어낸 이야기들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적인 전통을 정당화하려는 현상들이 초대 교회에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진 리를 추구하는 것에서 벗어나 허황된 이야기를 근거로 자기 주장을 하는 모 습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셋째/분쟁 이것은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서로간에 나뉘어지기 시작한 것을 말합니다.

어리석은 변론과 자기 정당화의 주장이 분쟁을 초래한 것입니다.

넷째/율법에 대한 다툼 언제나 그렇듯이 율법에는 두 가지 이단이 존재해 왔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한 율법주의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율법주의는 율법 중에 어떠한 조항을 반드시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율 법주의와 정반대되는 이단은 무율법주의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지 못하니까 율법이나 계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니 아무렇 게나 살아도 상관이 없다는 것으로서 도덕적인 방탕을 정당화하려는 태도입 니다.

바울은 이 두 가지를 다 이단으로 정죄합니다. 율법주의나 무율법주의는 이단입니다. 그러면 율법에 대한 가장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접근은 어떤 것 입니까 율법을 지켜도 구원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습니까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과 율법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구원받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율법 을 지켜야 합니다. 어떤 율법의 행위로도 구원을 받을 수도, 율법을 지킬 수도 없었던... 아니 이미 율법을 깸으로써 하나님의 정죄를 피할 수가 없 었던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구원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율법주의도 무율법주의도 아닙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서 그레데 교회 안에 있었던 위기의 원인을 두 가지로 분석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성도들간의 교제가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서로가 허황된 이야기, 필요없는 이야기로 서로간에 분열을 일으키는, 『 코이노이아』의 실패가 있었습니다.

둘째로, 교리 면에서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믿어야 할 진정한 교리가 무엇인가'라는 교리적인 교육에 서 실패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그레데 교회 안에 찾아온 이러한 겨울을 어떻게 극복하여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바울이 제시한 세 가지 해결 방안 첫째로, 무익한 논쟁을 지양하고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나눌 수 있는 나눔 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8절과 9절을 읽어 보면 특별히 대조적으로 등장하는 두 개의 단어가 있습 니다. 8절의 맨 마지막 부분에는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는 말씀이 있고, 9절에는 반대로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8절에서 바울이 말한 유익이라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무익한 것을 가지고 매달리기 시작하면 교회에 분열이 생길 수가 있고 교제가 깨어 져 어려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유익하다는 것입니까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 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 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8 절).

바울은 정말 유익한 것이란,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여 그들이 새로워져서 주님의 인격으로 닮아가도록 하는 것, 즉 하나님의 후사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출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화(聖 化)야말로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데, 성경 공부할 때 가장 나쁜 태도는 지식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지식만을 얻기 위해서 하는 공부는 우리를 타락시킵니다.

우리가 지식을 받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 말씀을 우리 삶 속에 적용해서 어떻게 해야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주님의 기업 을 받기에 합당한 후사가 될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러한 것을 알게 하는 선한 일을 북돋우는 데에 우리의 모든 일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익을 만드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레데 교회 사람들은 근거도 없는 이야기들을 가지고 자꾸만 자기 의 의견을 내세우거나 성경적인 분명한 율법의 가르침을 떠나서 왜곡된 가 르침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주장하다 보니 그레데 교회 안에 분열과 다툼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어떤 문제에 대해 얼마든지 의견의 불일치 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유명한 어거스틴은 아주 오래 전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대단히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본질적인 것에 관해서는 언제나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 관해서는 언제 나 관용을... .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느냐', `예수님은 누구시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신앙에서 절대적인 문제입니다. 아주 본질적인 문제입 니다. 이것은 타협될 수도 없고 바뀌어져서도 안 됩니다. 이것을 바꾸면 이 단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이 아닌 비본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소위 절대적이지 않은 것에 관해서는 의견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분명히 계시하지 않아 해석의 차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에 관해 서는 서로의 이견을 수용하고 용납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에 관해서는 언제나 일치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중요 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또 구원받음으로 내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주님을 어떻게 닮아가고 있는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정말 중요한 본질적인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들을 유익하 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모일 때마다 공동의 관심사가 될 때 우리 교회는 그만큼 건강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자꾸만 초점을 맞추게 되면 의견이 갈라져 결국 불행한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유익하게 만들기 위하여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룰 것을 바울은 그레데 교회에 기대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교리의 순결을 지킬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 문제에 관해서 바울은 대단히 단호합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10절).

여기에 이단하고 토론하라는 말이 있습니까 이단을 향해서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훈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증인이 오면 같이 토론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똑바로 믿으라고 훈계를 해 야 합니다.

바울은 이단에 관해서는 대단히 단호한 태도를 보입니다. 한두 번 그러니 까 두 번까지는 만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두 번 만나는 것도 무슨 목적으 로 만나야 됩니까 훈계할 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많은 경우 토론할 목적 으로 세 번, 네 번 만나다가 나중에는 오히려 넘어가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한두 번 훈계한 후에는 멀리해야 합니다.

제가 볼 때 그레데 교회의 경우에 이단은 밖에서 침투한 이단이 아니라 안 에서부터 일어난 이단인 것 같습니다. 가끔 우리 안에 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잘못된 경우에는 교 회가 단호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할 때 언제나 이렇 게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도 사랑으로 대해야지,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대할 수가 있는가 그러나 모든 면에서 사랑을 강조하던 바울 사도가 이 교리적인 순결에 대해 서는 아주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 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 하라 하심이라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 그리스도니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요이 6-8절).

요한 1,2,3서는 그 당시 영지주의라는 이단을 경계하기 위하여 씌어졌 습니다. 결국 진정한 사랑이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우리 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인간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서 이탈한 사람과 복음의 진리를 희석시키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 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우리 가운데 그를 포용하 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을 진리를 향해서 복종시키는 것입니까 만약 복종하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잘라내는 수밖에 없습 니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의 순결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편입니다.

잘못하여 이들 이단의 영향을 받다 보면, 이미 구원받았으니까 구원을 잃 어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주님을 위한 순결한 삶은 살지 못합니다. 그 리하여 나중에는 상을 잃어버립니다. 바울의 단호한 경고를 다시 한번 보시 기 바랍니다.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 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요이 9-11절).

그만큼 바울 사도에게는 교리적 순결이라는 것이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이단으로 빠진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포기하게 하던가, 아니면 그들을 떠나야 합니다. 잘못된 영향이 미치기 시 작하면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순결한 공동체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레데 교회에서 일어난 이단들은 상당히 의도적으로 진리에서 이탈했었다 는 흔적을 본문 11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우리 교인들 가운데 이단이 되는 사람을 보면 무엇이 진리인가를 알면서도 그것을 거절하여 의도적으로 이탈합니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가 없는 것입 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멀리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공동체 가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교리적 순결을 지켜야 할 책임이 교회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단을 그냥 놔두게 되면 그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자꾸만 그룹이 형성되고 그것이 교회의 분열을 낳는 결정적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 다.

바울은 위기를 겪고 있는 그레데 교인들의 문제를 수습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서 사람들을 파견했습니다. 먼저 누구를 보냈습니까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때에 네가 급히 니고 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과동하기로 작정하였노라(12절).

그리고 바울은 디도에게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디 도가 이것을 수습하기에는 아직도 어리다고 판단한 바울이 그를 만나 믿음 을 세워서 보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 동안의 지도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아데마와 두기고라는 두 사람의 지도자를 그레데로 보 낸 것입니다.

그는 두 사람만 보낸 것이 아닙니다. 13절에 보면 교법사 세나와 및 아 볼로가 등장합니다. 교법사란 우리식으로 말하면 법률가, 변호사입니다.

세나라는 이름은 로마 명칭입니다. 아마 이방 출신의 그리스도인 변호 사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그는 변호사의 직업을 가지고 동시에 복음을 전하는 순회 전도자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한 사람은 아볼로인데 사도행전에 보면 그는 성경과 말씀에 대해서 능 했던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아주 훌륭한 성경 교사였습니다. 바울은 아데마와 두기고를 먼저 보낼 계획을 세우면서 그전에 세나와 아볼로를 보 냈습니다.

저희로 궁핍함이 없게 하고라는 말은 이 두 사람이 그레데 교인들을 돕는 동안에 그들을 굶기지 말고 잘 대접하라는 말입니다.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14절).

이러한 지도자를 잘 섬기면서 우리는 정말 열매를 가지고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레데 교회라는 이 한 어린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 고 있습니까 아데마를 보내고 두기고를 보내고 또 세나를 보내고 아볼로를 보내고, 또 디도를 불러서 격려하고... . 어떻게 해서든지 이 그레데 교회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이 세워지도록 애쓰고 있는 바울의 그 뜨거 운 심정을 느끼게 됩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러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 위해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 전체적으로 흔들림이 없 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든든하게 서 가는 능력 있는 공동체가 되기 위 해서는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해서, 이단에 속지 않도록, 또 이미 확실한 믿 음을 가진 사람들은 더 견고하게 자라나 하나님이 쓰실 만한 사람이 되도록 서로가 뜨겁게 격려하고, 복음 안에서 뭉쳐야 합니다. 바울이 기대했던 교 회의 모습은 바로 이것입니다.

디도서와 디모데전후서는 바울의 생애에서 마지막 편지들입니다. 바울은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자기가 복음을 전했던 성도들과 그 복음 안에서 세워진 교회가 정말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계속해서 역사를 감당할 수 있도 록 뜨거운 마음으로, 간절한 심정으로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애쓰는 성도들의 공동체가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져 가야 하 는가에 관한 바울의 격려를 가슴 속에 담고 우리의 교회가 지향해야 할 모 습을 그려 봅시다. 서로의 유익을 위한 나눔의 공동체, 교리적으로 순결한 공동체,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을 세워 주기 위해 계속 격려하는 뜨거운 사랑으로 뭉쳐진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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