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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의 배려 (살후 01:1-4)

첨부 1


I.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관계 사도 바울이 그의 제 2 차 선교 여행 때 빌립보에서 피신하여 마게도니아 도의 수도인 데살로니가를 찾아갔다. 그 곳은 물론 이방인들의 도시였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섞여 사는 도시였다. 바울은 가죽을 이겨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론하는 것이었다. 복음을 반대 하는 유대인들의 방해와 선동 때문에 바라는 만큼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 가 없었다. 갓난아기 같은 교회를 남겨 둔 채 그 곳을 떠나야만 했다.

열심히 가르치느라 노력을 했지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기에는 시간이 모 자랐을 것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이방인(헬라)의 역사관과 종말관이 유 대인과 그리스도인의 그것들과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회 의 초신자들이 바울의 종말 사상(역사의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많았다. 따라서 데살로니가를 떠나야 하는 바울의 마음은 무거웠을 것이고, 마치 젖먹이 아이를 남겨 두고 떠나 는 어머니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베뢰아를 거쳐 아덴에 이르른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염려와 책임 의식 때문에 좌시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자기 대신 디모데를 데살로니 가로 보내어 그 교회 형편을 살펴보도록 했고, 고린도로 돌아온 디모데의 보고를 들은 그는 곧 붓을 들어 감사와 애정과 깊은 배려의 편지를 써 보 냈던 것이다. 즉 데살로니가 교회가 비록 어리지만 잘 자라고 있다는 소식 을 듣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고 종말 사상 때문에 다소의 마찰이 있다는 소 식에 대해서 바른 교훈을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리스도인의 올바 른 삶의 태도를 가르쳐 주려는 생각을 하면서 첫번째 편지를 썼다. 그것 이 아마도 AD 40년대 말이나 50년대 초일 것이다.

그런데 데살로니가후서라는 책은 어떻게 그리고 왜 생겨났는가 하는 것이 학계에서는 문제가 되어 있다. 재래적 이해는 다음과 같다. 데살로니가 전 서를 보낸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상한 소식이 바울에게 들려 왔다. 즉 바 울이 말하기를 혹은 바울에게서 온 편지에 위하면 종말은 이미 왔고 예 수는 이미 재림했다고 한다면서 바울이 가르친 종말관과는 다른 종말관을 가진 자들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생활 태도가 방종하고 게으르고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다급 하게 다시 붓을 들어 그들의 그릇된 종말관을 시정해 주고 올바른 윤리관 을 가르치기 위해서 둘째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죽은 후에 바울의 이름으로 쓴 글이라고 주 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 학설을 설명하거나 반박하거나 혹은 동조하는 학술적 토론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David L. Barr의 An Introduction:New Testament Story, 2nd edit, pp.72-76을 참고하라). 다만 재래적 견 해에 입각해서 이 본문을 해석하고 거기서 교훈을 얻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하는 데 역점을 두려는 것이다.

 II. 원문비평 오늘의 본문에는 원문비평적 문제가 될 만한 것이 별로 없다. UBS Greek New Testament가 제기한 문제를 우리도 취급하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1:2가 세 가지 종류의 읽기를 보여준다. 로 나타 나는 A F G I K L 075 등 대문자 사본, 많은 소문자 사본, 여러 고대 역본, 여러 교부들의 인용구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로 나타나는 B D P 0111등의 대문자 사본과 33 1739 1881 1912라는 소문자 사 본 그리고 old latin 번역 두개와 ㅋ틱역 두개가 있다. 세번째로는 으로 나오는 몇 개의 고대 역본들이 있다. 첫째와 둘째는 양에 있어서 첫 째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만 그 질에 있어서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다. 그 래서 UBS 위원들은 그 확실성을 C급으로 보고 첫째를 본문에 넣으면서 괄호를 치기로 한 것이다. 1절에 이 나왔기 때문에 제 2 절에도 의당 그렇게 나왔을 것이고 어떤 사본들이 실수로 제 2 절에 을 뻬먹 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둘째를 지지하는 편에서는 제 2 절에 원래 이 없었는데 어떤 사서자(寫書者)가 제1절과 조화시키느라 고 그것을 삽입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III. 본문의 구성 데살로니가 후서 전체의 맥락 속에 본문의 위치가 어떠하며, 본문이 내부 적으로 어떤 사상 구조를 가지고 있는 지를 살펴보아야 올바로 의미를 파 악할 수 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를 대략 대소지(大小旨)로 나누어 보면 아래와 같다.

인사 1:1-2 감사 1:3-12 본론 2:1-3:5 주제:주의 날 2:1-12 감사와 기도 2:13-3:5 선한 행실을 권하는 말 3:6-15 맺는 말(축도와 자필 해명) 3:16-18 데살로니가 후서는 (1)주님의 재림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고쳐 주고, (2)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생활 원칙을 가르치려는 목적을 가지고 기록된 편 지이다. 이러한 목적을 서신 형식을 가지고 달성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연 히 앞과 뒤에 인사(greeting)라는 형식이 붙게 되고, 앞부분의 인사를 이 어 감사의 글이 따르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말이 두 번 (1:3;2:13) 나오는데 오늘의 본문은 그 첫 번 것에 해당한다.

본문의 내용을 다시 분석해 보면, (1) 1:1-2 인사 (2) 1:3 감사 감사의 이유(1:3b).

(i)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이 엄청나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 (ii) 그들이 빠짐없이 서로 사랑하고 그 사랑이 풍성해지고 있다는 것 (3) 1:4 자랑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인내하고 신앙을 견지한다 는 것이 감사할 만한 일이고 아울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게 자랑할 만한 일이다. 그래서 바울과 그의 일행은 그 일로 자랑하고 있다.

(4) 1:5-10 환난의 긍정적 의미 환난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표 환난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한다(1:5) 성도에게 환난을 주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정당한 보응을 하신다(6) 환난을 당하는 성도에게는 주님의 재림의 날 안위를 주신다(7)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보응하신다(8) 그들은 주님의 면전에서 즉 그 영광의 어전에서 쫓겨나 영원한 멸망을 받 을 것이다(9) 그날은 주님이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영광과 찬미를 받는 날이다(10) (5) 1:11 바울과 그 일행의 기도 a.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들이 되기를 b. 그들의 모든 선한 뜻과 믿음의 행위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성취되 기를(11) c. 궁극적으로 주 예수의 이름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의하여 영광을 받고, 그들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영광을 받게 되기를 IV. 주 해 < 1절 > 헬라-로마의 편지 형식은 서두에 발신인을 주격 명사로 나타내는 법이다.

이 편지의 발신인 세 사람의 이름이 주격으로 나열되어 있다 ; , , . 실루아노는 실라와 동일인으로서 바울의 제 2 차 선교 여행 때부터 수행하기 시작한 사람이다. 디모데는 바울의 제 일 차 선교 여행 때 개종한 사람으로서 제 2 차 여행 때 발탁되어 전도 팀에 가담한 사람이 다.

발신인 다음에 반드시 나오는 수신인(受信人)은 여격(dative 與格)으로 나 타난다. [테 에클레시아 데살로니케온] 은 데 살로니가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에게라는 말이다. 여기서 교회라고 말한 것은 우리가 신학적으로 생각하는 복잡한 개념을 가진 낱말이 아니라, 다 른 적당한 말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 사람들이 재래적으로 사용하던 낱말을 전용(轉用)한 것이다. 즉 기독교가 만든 단어가 아니고 세속적으로 사용 하던 단어를 빌어서 새로운 의미를 함축시켜 사용한 것이다. 세속적으로 는 어떤 도시의 시장이나 동네의 어른이 소집 명령을 내릴 때 모이는 군중 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즉 + 불러낸다는 기본 개념을 가진 단어로 서 기독교의 교회는 하나님이 불러 모은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를 수식하는 말이 뒤따라 나온다. 하나님 우리 아버 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이란 말로써 세속적인 인간 공동체와는 다른 존재임을 밝힌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자식을 낳는 것처럼 성령을 통하여 성도들을 다시 낳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죄를 용서하셔서 하나님의 권속이 되어 하나님을 아빠하고 부를 수 있게 해 주셨기 때문에 특수한 공동체가 되었고 그것을 교회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며 주(곧 하나님)님이라고 믿는 신앙 공동체가 교회이다.

 < 2절 > 헬라인들의 편지 서두에 나오는 인사는 거의 예외 없이 [카이레인] 이란 말이었고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것이었다. 서양 사람들의 생활 철학이 거기에 담겨 있다. 즉 기쁨을 얻는 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던 것 같다. 사람은 기쁨을 얻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한다. 기쁨을 얻어서 좋아 하는 사람도 있고 아무리 얻으려 해도 얻어지지 않아 슬퍼하기도 한다. 때 로는 힘들게 얻었던 기쁨이 사라지고 말아 다시 슬픔을 안게 된다. 이것이 세상의 기쁨이다. 그러나 바울은 재래적인 헬라식 인사 을 지양하 고 [카리스] 라는 말로 대치했다. 이 라는 말은 그 어원이 의 어원과 동일하다. 즉 (기쁨)에서 온 것이다. 우리말로 은혜라고 번역하지만 은혜가 뭐냐고 물으면 대답이 매우 궁하다. 본문에 의하면 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로부터 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세상에서 인간이 만들어 내는 기쁨은 임시 적이고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기쁨은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공짜로 얻는 기쁨이고 무한하고 완전한 기쁨이다.

그것을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를 남에게 빌어 주는 이상 더 훌륭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바울은 우선 헬라적 인사 용어를 개작(改作)해서 썼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 았다. 그는 히브리인으로서 그의 뇌리(腦裡)에는 히브리적인 사고가 가득 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히 히브리인들이 통용하는 [샬롬] 이라는 인사를 첨부한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물론이고 이 땅의 많은 사람은 평안 한 삶을 추구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이 획득하는 평안은 언제나 불완전하 고 임시적이다. 얻었던 평안을 놓치는 순간 사람들은 낙심하고 슬픔에 빠 진다. 그러기에 영원하고 완전한 평안을 사모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평안 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가지기를 빌고 있는 것이다.

< 3절 > 고린도로 옮아 온 바울은 디모데를 통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의 현황을 보고 받았을 때 매우 기뻐하며 편지(데살로니가 전서)를 썼고 그 초두에 그 교 회의 믿음, 사랑, 소망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을 적었었다(살전 1:2-3). 이 둘 째 편지에서도 인사 직후에 감사하는 말을 적었다. 그 교회 가 매우 어리고 배운 것이 많지 않아서 바울의 염려의 대상이 되어 있고, 실제로 받은 보고대로 몇 가지 문제점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지만,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적인 또는 도덕적인 문제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에 의한 구원과 그의 능력과 지혜에 의한 보존과 양육의 사역에다 비교한다면 극히 작은 것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우선 바 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개종하여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과 그들의 신앙 생활이 향상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 을 수 없었다.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찌니 이것이 당연함 은. 옛날에는 서로 남남이요 원수로 지내던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 어 한 형제자매가 된 것을 생각하면서 그 은혜를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버려두면 멸망의 자식으로 남아 있을 것인데 하 나님께서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주심으로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건이 벌어 진 것이다. 그 일을 꾸미시고 실행하시는 하나님께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한 일이다.

바울은 여기서 감사의 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개종시킨 다음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셔서 보 호하시고 양육도 하신다. 사람에 따라서 성령의 감동을 뿌리치고 그의 보 호와 양육을 마다함으로 성장이 더디고 제자리걸음을 하기도 하지만, 데살 로니가 교인들은 믿음이 누구보다도 풍성하게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확고 하고 흔들리지 않는 모범적인 믿음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가진 것은 하나 님의 보호와 양육하시는 은총의 소치로 보았기에 바울은 하나님께 그 사실 을 두고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또 하나의 감사 조건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사랑이 날로 충실해지고 풍성 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믿는 증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물론 입으로 고 백하고 마음으로 다짐도 해야 하는 일이지만, 사실 믿는 사람은 예수와의 관계 속에 있게 되는 순간부터 실존적인 변화가 생기게 되고, 사고와 행동 이 하나님 나라의 법과 원칙을 따르는 자가 되어 간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랑을 원칙으로 하는 삶을 살게 된다. 정상적이 신자라면 믿는 만큼 사랑 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 사랑이 풍성해지고 있다 는 것이다.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가 그들 가 운데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바울은 보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 의 사랑의 모습을 여러 가지 수식으로 부연(敷衍)하고 있다. 다 각기 서 로. 데살로니가 교인의 수가 얼마인지는 몰라도 '다' ([판톤] )라 는 표현으로 보아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교 인이 빠짐없이 다 사랑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현대 교회는 극히 소수만이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과 비교할 때 데살로니가 교회는 참으로 놀라 운 교회라 할 수 있겠다. 다라는 말 가지고도 모자라 각기( 헤 노스 헤카스투)란 말을 첨가했다. 공동체가 단체적으로 협력해서 사랑을 베푸는 일도 있을 것이고, 각자가 개별적으로도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이 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일방적(一方的)인 것이 아니고 쌍방 적이고 상 호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 4절 > 이 절은 3절에 나타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 성장의 보고를 들 은 바울과 그 일행의 반응을 말하고 있다. 남들의 반응은 어떻든 간에 우 리가 친히 ([아우투스 헤마스] ) 즉 우리들 자신은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 자랑함이라. 바울과 그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하 나님의 교회들에게 자랑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세속적 공동체는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 안에 있는 신앙 공동체만이 이 사실 에서 의미를 찾고 감명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4 절에서 바울은 데살로 니가 교회를 자랑하는 근거를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힌다. 너희의 참는 모 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라고 밝혔다. 너희의 참는([하이스 안에케스테] )은 지금도 너희가 참고 있는이 라는 현재 진행적 사건을 말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아서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게 됐고 마침내 바울이 거기서 추방을 당했고, 그후에도 박해가 계속된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박 해와 환난을 참아내고 믿음을 지키고 있으니 모든 교회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 5-10 > (이 부분은 오늘의 본문에서 제외되어 있다. 그러나 한 마디로 간추린다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심판주이셔서 박해와 환난을 공연히 받게 하시지는 않 으신다는 것이다. 박해하고 환난을 일으키는 자들을 심판하여 멀리 쫓아내 어 멸망을 받게 하시고, 지금 박해와 환난을 당하면서도 참고 믿음을 지키 는 자들에게는 마침내 안위安慰 [아네시스] )를 주시기 위해서 주 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 11절 > 데살로니가 교회를 두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뿐 아니라 여기서는 또 하 나님께 그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린다는 사실을 밝힌다. 감사도 항상( )드리고 있는데(1:3) 기도도 항상( )드린다고 말한다. 전도자가 피 전도자에 대해서 가지는 모범적 책임 의식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바울은 그가 전도하여 믿게 된 개인이나 교회를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한 것을 그 의 모든 서신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의 기도의 내용은 두 가지로 나타나 있다. 하나는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옵소 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불러내셔서 당신의 자녀를 삼으셨고, 그의 나 라의 시민을 삼으셨고, 하나님의 교회의 회원이 되게 하셨다. 그 부르심에 는 목적이 있고, 그가 주신 자격과 신분이 있고, 거기에 따르는 임무와 사 명이 있다. 맹목적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무위도식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목적을 두고 부르신 일에 합당한 자가 되고 그 일을 감 당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인간을 어리석어서 그 것들을 깨닫기가 어렵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 시고 이루실 이도 하나님이시다. 둘째 간구도 결국 대동소이하다. 모든 선 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옵소서. 자구적으로 번역한 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모든 선한 뜻과 믿음의 행위를 성취 하옵소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믿음의 역사(에르곤 피스테오스) 는 믿음을 가지고 하는 일(work of faith)을 가리키는데, 믿음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가 믿음을 가지고 행하는 일 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완성되도록 해 달라는 간구일 것이다. 그렇다 면 위에 있는 모든 선한 뜻도 신자가 가지는 선한 의도를 가리키는 것이 고,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성취되도록 해 달라는 간구일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성도가 됐고 하나님의 자녀 가 됐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됐으니, 거기에 따라 선을 행하려는 좋은 뜻을 가지게 되고,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수 있고, 악마의 방해로 인해서 자력으로는 수행할 수 없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하나님 의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 12절 > 그러나 이 기도의 목적이 인간의 성취욕을 만족시키거나 기쁨을 얻게 하려 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 시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 덕택으로 너희도 그(예수) 안에서 영광 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으시는 이 궁극적 목적 달성 은 자연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며, 죄 있는 인간의 재간이나 계획이나 의도 로써 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 도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V. 사 역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있는 데살로니가인 들의 교회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3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 대하여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 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합당한 일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무 척 자라고 있으며, 여러분이 모두 각각 서로 사랑하는데 그 사랑이 늘어가 고 있기 때문입니다.

4 그래서 우리 자신은 여러분이 모든 박해와 환난을 견디면서 나타낸 인 내 와 믿음에 대하여 하나님의 교회들 가운데서 여러분을 자랑하고 있습니 다.

‥‥‥‥‥‥‥‥‥‥‥‥‥‥‥ 11 이 일 때문에 우리가 또한 언제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것 은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만들어 주시고 모든 선한 의지와 믿음의 사역을 능력으로 이루시기를 바라서입니다.

12 그리하여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여러분 가운데서 영광을 받고, 또 여러분은 그 분 안에서 영광을 받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VI. 메 시 지

1.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 일행의 전도를 통해서 생겨난 교회이다. 박 해 때문에 전도자들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나가야만 했고, 교회는 고아 처럼 남겨졌었다. 그런데도 데살로니가 교회는 신앙이 무럭무럭 자라고 사랑에 있어서 모든 교회에게 자랑할 만큼 모범적이었다. 박해와 환난이 계속되는 가운데도 그들은 잘 참아 냈고 신앙이 더욱 튼튼해졌다. 바울이 볼 때 얼마나 흐뭇하고 자랑스러웠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그 이유 를 찾아 볼 수 있다고 본다.1) 교회가 자라고 발전하는 원인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에 있다. 사도 바울은 언제나 그것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편을 본다면 어느 면으로 따져도 불리하고, 교회가 존립되리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처지였다. 지도자는 떠났지요, 사방에 서 반대자들, 아니 박해자들이 교회를 공격하지요, 받은 교육이나 훈련은 극히 미약하지요, 깜박거리는 꺼져가는 등불에 불과했었다. 그런 처지에 서도 그 교회가 훨훨 불이 붙고 생기를 얻어 인근에 소문난 교회가 됐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그 배후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를 드 린 것이다. 교회는 인간만의 공동체가 아니다. 세속적인 인간들의 공동체 라면 이상에서 말한 여러 가지 역경 속에서는 부서지고 깨지는 것이 예사 (例事)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 주체가 하나님이시고 불러모으신 당사자가 하나님이시다. 신자 하나 하나도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를 통하여 귀하게 만들어진 존재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부성적(父性的) 사랑으로 돌 보심을 받고 있는 존재들이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서 자라난다.

2) 교회는 전도자와 사역자들의 깊은 배려와 부단한 돌봄을 통해서 육 성된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의 애틋한 배려와 관심이 없었더라면 바로 자랄 수 있었겠는가. 불가항력의 상황 때문에 자기가 세운 교회를 버리고 떠나야만 했으나, 결코 그의 마음까지 떠난 것은 아니었다. 늘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보호와 간섭을 의탁했고, 몸으로 갈 수 없기에 차선책 으로 사람을 보내어 대신 돌보게 했으며, 또는 편지를 써서 상세하게 가르 치고 지도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전도자의 이러한 지성 어린, 책임 적 배려와 수고가 있었기에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만큼 씩씩하게 자랄 수 있었겠다고 생각된다.

3) 교회가 건실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올바른 사상적 지도가 필요하다.

생각이 올바라야 행동도 올바라진다. 갓난아기 같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제대로 자랐다는 것은 바울의 올바른 사상 교육, 신앙 교육 덕택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들이 감정적으로 흥분하여 한 때 떠들썩하고 생기 가 있어 보이지만, 많은 경우 곁길로 나가다가 파탄이 나는 것을 볼 수 있 다. 그것은 건전한 지성적, 의지적 교육과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가 알차게 바르게 자라기 위해서는 건전한 신학, 건전한 사상 교육이 필요하다. 바울의 정통적 바른 복음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자란 교회이기에 데살로니가 교회는 자랑할 만한 교회가 된 것이다.

4) 데살로니가 교회가 잘 자란 또 하나의 원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 자 체의 인내와 자제와 노력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박해와 환난을 당한 당사자들이 그 괴로움을 참아 낸 그 자체가 장한 것이다. 믿음을 결 단이다. 믿음이 흔들리기에 안성맞춤인 상황에서도 믿음을 굳게 지키기로 결단하고 참고 나간 그들의 노고가 아니었더라면 데살로니가 교회도 자랑 스러운 교회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2.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1:11-12) 우리들의 기도는 많은 경우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간구한다. 사실 우리가 간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경우도 있다.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을 구하기 쉽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것들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하여 드린 기도를 보자.1) 하나님이시여,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부르심에 합 당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은, 마귀에 자식들이 되어 멸망 속에 있는 사 람들을 불러내셔서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당신의 나라의 시민이 되게 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 나라의 시민답게 되고 또 살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2) 하나님이시여, 당신이 불러내신 사람들은 이제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성공적으로 성취 해야 하겠고 그것이 단신이 그들을 부리신 목적이 아닙니까. 당신의 능력 을 그들에게 부으셔서 그들로 하여금 모든 방해와 역경을 극복하고 그것들 을 다 성취하게 하옵소서.

3)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간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욕구 만족이나 자 아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의해서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받는 영광만이 참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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