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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을 간과한 두아디라 교회 (계 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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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물결』이라는 유명한 책을 쓴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가 최근에 또 하나의 베스트셀러를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힘의 전환』이라는 책인데, 여기서 그는 앞으로의 세계를 지배하는 사람은 첫째로 지식을 가진 자, 둘째로 권력을 가진 자,셋째 로 부요함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꼭 예언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사람들이 너무도 목말라 하는 그런 요소들을 잘 지적한 듯합니다.

토플러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우리는 이 세 요소를 거의 광적으로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 다. 더 많은 지식과 더 많은 권력과 더 많은 부요를 좇아서 헤매는 사람들, 그들은 우상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조상님들이 서낭당에 가서 물 떠 놓고 비는 것만 우상 숭배가 아닙니다.

문명이 발달한 만큼 우상의 성격도 간교해졌다고 말할 수 있 습니다. 마귀는 현대인들을 공략하기 위해서 현대적인 우상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지식의 우상, 권력의 우상, 부요의 우상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하나님을 믿고 있 는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오늘 이 우상 앞에 항복하며 쩔쩔매고 있 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얼마나 지식에서 자유합니까? 당신은 얼마나 권력에서 자유합니까? 당신은 얼마나 물질에서 자유합니 까? 당신 자신은 우상 숭배자가 아닌지 하나님 앞에서 자문해 보십시오.

교회 안에도 이 우상의 영향력이 미친다는 것은 너무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앞 장에서 공부한 버가모 교회를 위협하고 있 던 우상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우상, 지식의 우상, 건강 의 우상입니다. 나에게 권력이 주어질 수만 있다면, 나에게 지 식이 주어질 수만 있다면 양심까지도 팔아넘길 수 있었던 버가모 주민들의 모습은 현대인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 건 강을 위해서 아스콜레피온에 찾아가 그 신 앞에 절하고 기도하 는 버가모 사람들의 모습이나 병 고침을 위해 성경적이지 못한 치유의 수단 앞에 영혼을 파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나 같은 것입니다.

주께서 버가모 교회를 향해서 지적하고 있는 죄는 이러한 우상 숭배의 죄와 또 하나 음행의 죄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죄가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도 동일하게 지적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 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버가모 교회는 지식과 권력과 건강의 우상을 추구하다가 결국 우 상 숭배와 음행의 죄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서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합니다. 바로 물질적인 풍요 의 욕망을 이용해서 그들로 우상 숭배와 음행의 죄악에 빠져들게 했던 것입니다.

저는 현대의 가장 간교한 우상은 물질이라는 우상이라고 생각합 니다. 오늘날의 모든 도시를 점거하고 있는 가장 거대하고 힘 있는 물질의 우상, 두아디라는 바로 이 우상 앞에 서 있었 던 것입니다.

두아디라는 버가모에서 동쪽으로 약 64km 떨어진 곳에 위 치한 도시로서, 별로 큰 도시는 아닙니다. 그러나 직조,염색, 피혁, 도기업 등이 성행했고 특별히 옷감 장사로 유명했습니 다. 또 이런 산업의 발달로 오늘날의 노동조합과 비슷한 길 드라는 동업 조합이 발달했습니다. 여성으로서 일찌감치 해외 진출을 시작한 사업가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두아디라 도시가 배출했던 유명한 여성 사업가 중의 한 사람이 사도행전에 나오 는 자주 장사 루디아입니다. 이 여인이 마케도니아 빌립보에 왔었는데, 장사하려고 소아시아에서 유럽까지 진출했던 것입니다.

두아디라 사람들은 부지런히 돈을 모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하나님의 사업에도 아주 열심으로 투자했습니다. 19절 을 보십시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 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여기에서 사업은 비지니스(business)가 아니라 주님의 일입니다. 그들은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 살면서 열심으로 주 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믿고 봉사하고 인내하는 아름다운 교회였 습니다. 그들은 에베소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 뿐만 아니 라 에베소 교회가 잃어버리고 있던 사랑까지도 가지고 있었습니 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에 출발을 잘 했다가 첫사랑을 잃어버 려서 주님 앞에 거의 버림받는 교회로 전락해 가고 있던 반면 에,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보다 나중에 좋은 일을 더 많이 했 다고 말씀하십니다. 물질적인 축복을 받고 있던 교인들이 열심 을 다해 주님을 섬기면서 더욱더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던 번영의 교회, 이것이 두아디라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물질의 축복 속에서 주님을 섬기던 두아디라 교회가 서서 히 그 생명을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직면한 위기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주님은 이 교회를 향해서 무엇을 권면하십니까? 두아디라 교회의 실수 첫째로, 그들은 이세벨을 지도자의 자리에 용납했습니다 이세벨은 아합 왕의 부인으로서 이미 구약에 나타났던 인물입니 다. 아합 왕 당시에 아합 왕의 통치력도 막강했지만 그 부인 의 영향력도 그에 못지않았습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우상 숭배의 죄악에 빠져들게 했고 도덕적으로도 문란한 생활 을 하도록 부추겼습니다. 20절을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 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많은 학자들은 이 이세벨이 두아디라 교회 지도자의 부인이 아 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추측은, 구약 시대에 이세벨이 이 스라엘 백성들을 우상 숭배의 죄악으로 유도했던 것처럼 어떤 특정한 여인의 영향이 그 당시 두아디라 교회의 교인들에게 미 친 것이라는 가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여인은 아마도 경제 적으로 대단히 부요한 여인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헌금을 많이 해서 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여인일 것입니다.이것 때문에 두아디라 교회는 이 여자를 쉽게 지도자의 자리에 용납 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두아디라 교회는 중요한 실수를 범하고 있 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평가하는 데 그의 신앙보다도 물질을 우선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물론 이 여자가 신앙이 전혀 없는 여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여자에 게 붙은 명칭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 세벨을….

자칭 선지자라는 것을 보아서, 이 여인은 아직 교회 안에서 공식 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지도자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영향력을 상당히 갖고 있는 여인임은 틀림없습니다.

여하튼 이 여인이 물질적인 풍요함으로 교회 안에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 갔다면, 이 교회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이러한 풍토가 조 성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를 쉽게 정죄할 수 없음을 압니. 우리도 바로 그 정죄 속에 빠질 수 있 는 연약함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각성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이세벨의 철학을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 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 운데 던지고.

문맥을 잘 살펴보면, 여기서 말하는 간음은 반드시 육체적인 것 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 여인의 잘못 된 사상을 동조하면서 그것을 따라가는 영적인 음행을 언급한다 고 볼 수 있습니다.23절에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고 말씀합니다. 이세벨의 잘못된 사상을 수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세벨의 잘못된 철학과 사상이 무엇일까요? 성경학자들 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두아디라 도시가 자랑하고 있었던 것은 동업 조합입니다. 그곳에서 장사를 잘 하려면 특별한 절 기마다 조합 내에서 지내는 제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제사 지 내는 대상은,제우스의 아들인 아폴로였습니다. 아폴로 신에게 제 사를 드리고 또 그의 관심을 사면 장사가 잘 된다고 해서, 그 곳 상인들은 정기적으로 아폴로 신전 앞에 절을 하고 그의 도 움을 빌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위기가 있습니다. 이 도시에 살면서 장사를 하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여호와 하나님밖에 숭배할 수 없 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폴로 신에게 제사하는 문제 에서 갈등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마도 이세벨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영향력을 끼쳤을 것입니다.

이 도시에 살면서 조합에 들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장사를 할 수 있단 말이오. 그리고 장사할 때 관습적으로 문화적으로 절 한번 한다고 해서 신앙이 더럽혀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 오. 열심히 돈을 벌어서 많이 헌금함으로써 열심히 주를 섬깁시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에서 이윤을 취하기 위해서 이세 벨의 철학에 동조하게 되고, 이세벨은 이 교회 안에서 사람들 을 거느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옛날 이야기입니까? 오늘날 이윤 추구를 위해서는 수단 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다는 사고 방식이 얼마나 통하고 있 습니까? 장사하는 순간만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좋고, 기독교적인 생각을 고집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중에는 그리스도인다운 양심을 팔아 버리고 맘몬의 제단 앞에 무릎 꿇는 자들이 없습니까? 어느 신 문을 보니까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교회 건축 헌금을 갖고서 돈 놀이를 하다가 그 돈을 모두 잃었다고 합니다. 목표를 달성하 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습니까? 그리스도 인들이 날마다 부딪치는 윤리적인 딜레마를 이런 삶의 현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비기독 교적이고 반성경적인 철학을 따르도록 선동하고 있는 이세벨의 유혹 앞에 한덩이가 되어서 돌아가고 있던 그녀의 제자들 때 문에, 이 교회는 심각한 윤리적인 딜레마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세벨의 철학을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회개의 기회를 거절했습니다.

21절에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에 게는 하나님 앞에서 맑은 양심을 지키는 것보다 황금과 권력과 출세가 더 중요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급하지 않 았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일이 급해 보이니까 거기에 매달리고, 그러다 보니까 자신의 모습이 서서 히 부패하고 변질되어 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맘몬의 신이 가져다 주는 그 추악함을 볼 수 있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 었으되 그 기회를 거절한 두아디라 교회의 비극이 우리의 비극 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경고의 말씀 2장 22,23절에 두 가지 경고가 나옵니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 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 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 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침상에 던진다는 것은 병 나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23절에서는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겠다고 했 습니다. 질병과 사망은 종종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 들을 훈계하고 일깨우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수단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0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이 말씀의 배경은 성찬식에 관한 것입니다. 성찬식은 하나님과 내가 바른 관계에 있는가를 검토하는 자아 성찰의 시간입니다.

깊이 자기 자신을 살피지 못하고 타락하고 변질되고 부패해 가 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 하는 자녀들을 징계하기 위해서 채찍을 드십니다. 징계는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에게만 있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1장 30절 은 그 징계의 세 가지 단계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나를 약하게 하십니다. 자신의 몸이 갑자기 약해지면,이것 이 혹시 나를 사랑하는 징계의 채찍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도 깨닫지 못하면 침상에 눕게 하십니다.

누워서 곰곰히 생각해 보도록 말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육 체적인 사망을 주십니다.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 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들,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들의 목숨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십니다.

우리는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를 침상에 눕게 하시고 목숨을 앗아가겠다고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책망 앞에 서 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 25절에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말씀합니다. 그 앞 절에서는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었던 것, 그것은 주께서 칭찬하셨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말하는데 거기에서 더 욕심을 내지 말라는 것 입니다. 우리가 언제 잘못됩니까?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하면서 조금 더 해 보려고 욕심을 낼 때, 뜻하지 않았던 큰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 하나님을 아 버지로 섬기면서 무엇을 더 욕심 내려 합니까? 서양 속담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

우리가 죽고 나서 입게 될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가져갈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주를 위하여 이 땅에서 남겼던 고귀한 삶의 발자취만이 영원히 하나님 앞에 기억될 것 입니다.그러므로 다른 것을 잡으려고 하지 말고 주님이 인정하 시고 칭찬하시는 그것을 굳게 잡고 사십시오.

약속의 말씀 주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두 가지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첫째/철장의 권세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돈에 매달리는 것은 결국 권력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나중에 주님과 함께 만국을 다스릴 자라는 것을 알면, 이 세상에서의 시시한 권력 추구를 위해 기를 쓰고 덤벼들 필요가 없다는 것 입니다.

둘째/새벽별 히브리 사람들은 새벽별을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간을 알리는 신호로 이해합니다. 별은 언제나 왕의 상징입니다. 새로운 나라의 왕, 새로운 시대의 왕, 이 새벽별은 누구입니까? 요한계시록 22장 16절을 보면, 그 새 벽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새로운 세대의 왕,다가올 시대의 왕, 저 영원한 나라의 왕이신 새벽별이신 그리스도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만국을 다스릴 자들입니다. 우리 가 온 세상을 다스릴 그 그리스도의 제자들임을 안다면, 이 세 상에서 작은 것을 조금 더 얻기 위해서 발버둥칠 필요가 있느 냐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지나치게 물 질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은 참된 의미의 내세 신앙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천국의 주인이고 우리가 다가 올 저 영원한 나라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조 금 더 잘살고 조금 더 못사는 것이 그렇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장로님 한 분이 부산에 살았는데, 그 분은 자수 성가해서 큰 회사의 중역이 되셨습니다. 그 어머니는 경건한 기 도의 어머니였고,자식들도 다 잘되었습니다.그 어머니는 옛날 콩 나물 장사를 하면서 자식들을 기르던 그 조그만 집에서 살기를 언제나 고집하셨다고 합니다. 자식들이 자기들 체면을 생각해서 라도 어머니에게 좋은 집으로 이사가시라고 권면했더니, 한번은 이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위해서 좋은 집 주기를 그렇게 원한다면,내가 원하는 집을 지어다오. 그렇게만 해 준다면 내가 이사하마.

『어머님, 염려 마시고 어떤 집인지 말씀만 하십시오.』 내가 원하는 집은 바닥을 다 금으로 깔아야 하느니라. 그리 고 집에는 열두 개의 기둥을 세워야 하는데, 그 열두 개의 기둥도 다 금으로 입혀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열두 개의 문 이 있어야 하는데, 그 문도 다 금으로 입혀야 하느니라.

『어머니, 무슨 농담을 하십니까? 세상에 그런 집이 있습니까?』 없다면 말아라.나는 이미 그런 집을 하늘에 가지고 있단다.

이 경건한 신앙의 할머니의 교훈! 주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한 영원한 나라가 있고 그 나라의 주인 이신 그리스도가 내 삶의 주인이 되셨다면, 너무 욕심 내지 마십시다. 사담 후세인의 교훈을 기억합시다. 그가 망한 것은 쿠웨이트의 유전을 욕심 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 작은 욕심 때문에 서서히 병들고 추해져 가고 있 는 내 모습! 지금까지 잘 달려 왔지만 그것이 잘못될 수 있 는 가능성 앞에 섰던 두아디라 교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분노하 시고 책망하시고 경고하시면서 말씀하시던 그 주님이 우리를 향 해서, 우리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주여, 우리를 더욱 순결하게 세워 주시옵소서.

번호:103/210 등록일시:94/12/03 11:34 길이:213줄 제목:(수) 김상복목사 / 사랑은 불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은 확실히 사랑하십니까? 김상복 목사 사랑은 불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6절).

저는 어렸을 때부터 고린도전서 13장을 즐겨 읽고 암송해 왔습니다. 그런데 13장 말씀 가운데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6절 말씀이 가장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말씀이 구체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이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 즉 그 가슴에 사랑이 있는 사람들은 불의한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불의는 우리 마음 속에서, 또한 우리 삶 속에서 여러 모습으로 표현 되는데 이 모든 불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곧 사랑뿐입 니다.

불의하다는 것은 똑바르지 않다, 곧지 않다, 구부러 지다, 의롭지 못하다, 옳지 못하다라는 뜻입니다.성경 에는 이러한 추상적인 의미의 불의함에 대한 구체적인 예들이 나와 있습니다.

불의(不義)의 의미 주로, 주께서 불의하다고 말씀하셨던 경우들을 중심으로 불의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자기 멋대로 사는 것 누가복음 13장에서 예수께서는 넓은 길과 좁은 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27절)고 하셨습 니다. 지옥을향하여 가는 사람들,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 세상의 길을 가는 사람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 하고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들을 향해 불의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길을 끝까지 마다하는 사람들은 결국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멸망의 길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와 예배 드리는 생활을 하면서도 예수 그리 스도를 자신의 영원한 생명의 길로 선택하지 않았다면 아직까 지도 불의의 길로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사랑할 때 우리는 불의에서 떠나고 불의를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둘째/정직하지 않은 생활을 하는 것 누가복음 16장 1-8절에 보면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가 나옵 니다. 즉, 불의한 직장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불 의한 종업원은 주인에게 손해를 입히는 사람입니다.

국회의원이나 장관, 대통령은 나라 살림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나라 살림은 국민들의 세금을 가지고 운영됩니다. 그런데 그 세금이 국고라고 해서 마음대로 쓰고, 정작 국민을 위해서는 한 푼도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불의한 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펜 하나라도 당신 것이 아닌 회사 것을 집에 가 져와서 사용한다면 그것은 회사에 해를 끼치는 불의한 행위입니다. 자신이 일한 대가인 월급 외에 회사 물건들을 집에 갖다 놓은 것이 있다면 도로 회사에 갖다 놓기 바랍니다.

어떤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가져온 물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건 자신이 일하는 곳의 주인 것을 축내는 사람은 불의한 사람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 (義)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일하는 곳의 주인들에게 절대로 손해를 입혀서는 안 됩니다.

또 이것은 물건 뿐만 아니라 시간이나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만약 현재 몸담고 있는 회사의 사장을 욕하고 비난 한다면 그것은 그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행위입니다. 그 사장 에게서 월급을 받으면서 그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아니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그것은 불의한 일입니다.

또 만약에 여덟 시간 일한 대가를 받고 있다면 여덟 시간 일을 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그런데 월급은 여덟 시간치 받고 실제 일은 다섯 시간밖에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일입니다. 최근에 한국 경제가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일하지 않으려는 풍토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국민이 불의한 삶을 살면 나라 경제가 어지러워집니다.

셋째/정직하지 못하게 돈을 버는 것 누가복음 16장에는 불의한 재물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 니다(9,11절). 이것은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번 돈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의(義)를 좋아합니다. 정직한 것을 좋아합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사업하고 정당하지 않게 돈을 버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불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넉넉지 않게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힘과 지혜와 건 강과 시간으로 그분 앞에서 떳떳한 사업을 함으로써 의로운 사업가 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 입니다.

넷째/하나님과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누가복음 18장에는 불의한 재판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재판 관은 하나님도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까 이 세상에서 두려운 존재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이 나라에 공의가 강물같이 넘쳐 흐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돈 없고 권력 없는 사람들은 늘 법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억울한 일을 겪고도 아무 소리 못 하는 일 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국민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공정해야 합니다. 하나 님을 두려워하고 인간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국민 들의 마음 속에 이 나라에서는 법이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준다 하는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국민들의 가슴은 한으로 가득 할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법조계에서 일할 때 항상 의(義)를 추 구해야만 합니다. 이 땅에 오직 공법이 물같이 정의(正義) 가 하수같이(암 5:24) 흐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가슴 속에 있어야만 합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다섯째/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고 자기 영광만 구하는 것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 7:18).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를 보내신 하나 님의 영광을 추구했기 때문에 자기 속에는 불의가 조금도 없다 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를 보내신 자가 누구입니까? 오늘까지 우리를 길러 주고 먹여 주고 살게 해 주고 신앙을 갖게 해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가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출세하거나 일이 잘 풀릴 때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나라 운동선수들 중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기에서 이기면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체육인 뿐만 아니라 엔지니어, 학자, 음악인, 사업가 등무엇을 하는 사람들이든 간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때에 불의한 자처럼 그 영광을 자기가 독차지하는 일이 없이 주께 영광 돌리는 의로운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992년도 KBS-TV 중학생 퀴즈 대회에서 강 성진이라는 중 학교 3학년 학생이 왕 중 왕이 되었습니다. 소감을 묻는 사 회자와 전국의 시청자들 앞에서 그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 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부모, 선생님, 교회 목사님들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성공의 배후에 부모님, 형제, 스승, 동료, 부하 직원 등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준 도움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도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섯째/윤리 도덕 상실 사도행전 1장 18절을 보면 가룟 유다를 불의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불의의 삯으로 밭을 샀기 때문입니다. 그는 윤리도 도덕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몇 푼의 돈에 눈이 어두워 스승을 팔아먹었습니다. 자신의 영리(營利)를 위해서라면 자기 부모도,선생도, 선배도 배신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불의한 사람입니다.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모시고, 윗 사람을 윗사람으로 알아보는 윤리와 도덕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의로운 삶입니다. 아무리 언론의 자유가 있어도 일국의 대통령은 대통령입니다. 대통령을 함부로 비난하는 발언은 삼가야 합니다.

몇 년 전에 국무총리가 대학생들에게 혼이 났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불의했습니다. 물론 정의를 위해서 싸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로운 일은 정의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정의를 불의한 방법으로 이루 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방법이 아닙니다.

일곱째/황금 만능주의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 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사마리아인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사람의 눈을 속이는 마술로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나타나 예수의 이름으로 더 큰 이적을 행 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능력으로 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시몬은 베드로에게 많은 돈을 주며 성령의 능력을 달라고 했 습니다(18,19절).

마술사 시몬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살 수 있다고 믿고 하나님의 능력도 돈으로 사려고 한 것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 돈 이면 최고다라고 생각하는 사고 방식은 불의합니다.

사실 현대는 자본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면 그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며 하나님의 능력마저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을 가졌던 시몬을 보고 불의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모든 불의한 것들에 대해서 나 열해 놓았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29-31절).

불의에서 떠나는 길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불의에서 떠날 수 있을까요? 불의에서 떠나는 길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의 영원한 삶의 길로, 곧 좁은 길 로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를 알면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다.예수 를 알면 인간에 대한 사랑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길은 의로운 길이요 예수를 믿지 않는 길은 불의한 길입니다.

둘째로,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구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으면 모든 불의한 것들을 싫어하게 됩니다.그래서 사랑 이 있는 사람의 삶 속에서는 의(義)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습니 다.

셋째로, 내 마음 속에서 불의한 것이 발견되면 즉시로 그 죄를 자백하여 깨끗해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 마음 속에도 불의한 것들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식어질 때,불의의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조금씩 나타날 때, 그 때마다 지체하지 말고 즉시 그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예수 그리 스도의 보혈의 피로 자신의 불의한 영혼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불의에서 떠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사랑으 로써 불의를 극복하고 의를 드러내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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