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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때와 아내, 그리고 간음 (눅 16: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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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상기하시기 바란다. 무엇이 지혜며 무엇이 진정한 우리 것인지. 또한 우리가 매일같이 섬기고 있는 대상은 무엇인지.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삶으로는 불의한 재물을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닌 지 돌이켜 보자. 그러나 이 말에 주눅이 들거나 스트레스를 받거나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고발이나 정죄가 아니라, 다만 우리가 어느 시대 어떤 공간을 살고 있는가를 직시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응시야말로 구원의 첩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 든 사람에게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어린 자는 어린 자로, 큰 자는 큰 자로 대우하고 요구하며, 또한 죽은 자는 죽은 자로 대접하고, 자는 자는 자는 자로 상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구원 이 다르며 자는 자의 구원이 다르다. 어린 자에게는 어린 자의 구원이 있으며 , 큰 자에게는 큰 자의 구원이 있다. 그래서 어느 상태건 이젠 되었다고 멈출 수 없으며, 이젠 섰다고 자고할 수 없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흐 름을 타는 것이다.

전도서 기자의 넋두리를 들어보자.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전3:1-9) 날 때는 나는 것이 구원이고 죽을 때는 죽는 것이 구원이다. 역시 지킬 때는 지키는 것이 구원이며 버릴 때는 버리는 것이 구원이다. 교회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도 세울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다.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 의 교회라고 하더라도 헐 때에는 허는 것이 구원이며, 세울 때에는 세우는 것 이 구원이다. 물론 이처럼 옛것을 허무는 것은 새것을 세우기 위함이고, 잠잠 한 때를 보내는 것은 장차 말할 때를 기다림이며, 오늘 전쟁하는 것은 내일 화평하고자 함이다.

사람들의 병은 항상 하나님이 세워두신 자신의 때를 놓친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금식해야 할 때 먹고 마시며, 오히려 먹고 마셔야 할 때에는 금식 한다고 야단이다. 모여야 할 때에는 흩어지며 흩어져야 할 때에 모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모임이나 금식이 아니라, 지금이 과연 모일 때며, 지금이 정말 금식할 때냐 하는 점이다. 전쟁과 평화는 그것 자체로는 좋은 것 (善)도 아니고 나쁜 것(惡)도 아니다. 전쟁해야 할 때에는 전쟁하는 것이 선 이며, 평화롭게 지내야 할 때에는 또한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 선이다.

누가복음의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과 선지자 그리고 하나님 나라 의 관계성도 이와 같은 것이다. 16절을 보자.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 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율법과 선지자의 역할이 요한의 때까지 라는 사실이다. 즉 율법이라는 것은 사람을 한 평생 내내 주관하는 것이 아니 라, 요한의 때를 지나게 되면 더이상 그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 로 아직 요한의 때를 지나지 않은 사람은 율법을 한 획도 버리지 않고 온전히 지키는 것이 그의 구원이며, 그러나 요한의 때를 지난 사람은 더이상 율법 아래 머물러 율법적인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 또한 그의 구원이다.

그러나 이 요한의 때는 인류 역사의 시간표 위에 찍혀 있는 어떤 점을 지칭하 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순전히 개개인의 신앙 생활에서 일어나는 내면적 이며 개인적인 시간으로, 이천 년 전에 왔다간 세례 요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천 년 전의 세례 요한은 다만 상징이며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면 우 리들 각자의 신앙 생활이 요한의 때를 지났는지, 아니면 아직 지나지 않았는 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예수의 말씀으로라면 16절에서 보는 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침 노해 들어가는 삶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침노해 들어가는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요한의 때를 지난 것이고, 이런 삶 이 없다면 우리는 아직 요한의 때를 지나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 라에 상대되는 개념은 세상 나라인데,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나타나는 두 주인이란 곧 이 두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나라를 동시에 가질 수가 없으며, 하나밖에 없는 우리 의 몸으로는 어느 쪽이든 한쪽으로만 침노할 수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나 라를 향하여 침노해 가고 있다면(이 경우는 세상 나라를 등지고 사는 것이다) , 우리는 요한의 때를 지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제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 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이 아직 세상을 향한 침노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아 직 요한의 때를 지나지 못했음이요, 따라서 아직 율법 아래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요한의 때를 지나는 경험을 한 사람도 그가 구체적으로 천국을 향한 침노의 삶을 살지 아니하면 결국 다시금 율법 아래 매여 율법의 요구에 붙잡힐 수밖에 없다는 점을 우리는 지난 호에서 살 펴본 바 있다.

즉 세상과 율법은 컴퓨터의 하드 웨어와 소프트 웨어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세상이 없는 율법은 무의미하고 또한 율법 없는 세상은 존재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더구나 오늘 같은 세상에서 율법이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세상은 그야말로 단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러기에 소프트 웨 어인 율법을 버리는 것으로는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결국은 하드 웨어인 세상에서 미련이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미련이 온전히 없어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로 전심전력 침노해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 말은 거꾸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모든 노력을 경주할 때 비로소 세상에 대한 우리의 미련이 사라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광야로 나아가야 했던 바, 이 광야란 무너져내린 세상의 별명이며, 인간들의 육신적인 능력이 맥을 추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에 의해서만 연명이 가능한 은혜의 공 간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율법이란 무엇 때문에 주어졌는가. 율법이 세상을 구동시키 는 일종의 운영체계같은 소프트 웨어라면 하나님은 왜그같이 쓸데없는 것을 주어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시는가. 무너뜨릴 세상이라면 무엇 때문에 아름 답게 만드셨으며, 그것으로 온전케 하지 못할 율법이라면 무엇 때문에 인간들 에게 지키라고 말씀하셨는가.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말씀에 헷갈릴 수밖에 없 었던 이유가 이런 데 있다. 구약의 약속은 분명히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 게는 복을 주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저주가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래 서 이들은 불철주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이런 바리새 인들에게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는 예수의 생각은 정말 가당치도 않는 발상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예수는 지금까지 율법의 의와는 전혀 상관없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고서도 여전히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가.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인가, 아니면 율법을 버리라는 말씀인가. 이 말씀은 두 말할 필요없이 율법의 한 획도 버려 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며,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것이 더 쉬울 거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누가복음 15장을 통하여 우리 의 육신적인 노력이나 율법적인 행위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의롭게 만들지 못 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본 바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에서는 아버지를 섬 겨 명을 어김이 없었던(즉 율법을 한 획도 버리지 않고 모두 지켰던) 큰 아들 이 아버지 앞에 의인으로 선 것이 아니고, 비록 아버지의 말씀이라고는 단 한 귀절도 지킨 적이 없었지만 아버지의 은혜로 말미암아 둘째 아들이 먼저 아 버지 앞에 의로워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는 이 말 씀은도대체 누구를 향하여 하는 말인가.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율법이 한 획이 라도 떨어질세라 전전긍긍하며 신앙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지 않는가 말이다.

예수의 말씀은 이처럼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언제나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 투 성이이다. 율법으로는 절대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얘기를 한 게 불과 삼십분 도 지나지 않았는데, 천연덕스럽게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 의 없어짐이 쉬우리라고 하고 있으니! 그러나 이게 모순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바리새적인 신앙 생활을 하 고 있다는 반증이다. 율법으로는 절대 의로워질 수 없다는 말도 진리지만 율 법의 일 점 일 획도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말도 진리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이것은 그동안 여러 부분을 통하여 여러가지 모양으로 얘기해 왔던 내용이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계속하는 것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율법 의 기능에 대하여 오해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은 율 법은 그것으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율법은 그 일 점 일 획이 모두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지 결코 우리더러 행하여 지키라 는 게 아니란 말이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정죄하면서도 마음이 편할 수 있었던 저변에는, 자기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생 각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 생각이야말로 율법의 일 점을 버린 데 기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히 인간적으로 해석하여 이 정도만 하면 하고 넘어 간 데 기인한다.

이런 양상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이지, 네 이웃을 네 자동차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 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이웃을 자기 자동차만큼도 사랑하지 못하면서도 그래도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해야 되지 않느냐고 우긴다. 정말 그렇다.

그 말이야 백 번이고 지당한 말씀이다. 우리가 우리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 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매 주일 교회 가서 예배드리는 것도 헛것이고,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되는 것도 모두 헛일일 뿐이다. 성경 말씀이(율법이라고 표현해 도 마찬가지다) 일 점 일 획도 버려지지 않는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즉 우리 가 제아무리 헌금 많이 드리고, 제아무리 철야기도 많이 하더라도, 그리고 제 아무리 땅 끝까지 복음을 전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우리 이웃을 우리 몸 처럼 사랑하지 못한다면 이런 모든 신앙의 행위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 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런 말씀을 적당히 해석한다. 사람이 어떻게 그 의 이웃을 그의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가. 그저 그의 자동차처럼만 사랑해도 아주 훌륭한 것이지. 세상에는 그의 이웃을 자기 집 쓰레기통 보다 사랑하지 않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적어도 우리 자동차만큼은 사랑하지 않는가.

이런 생각이 곧 율법의 일 점을 버리고 일 획을 떨어뜨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안식일을 지키라이지,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면 한 번쯤은 건너뛰어도 괜찮다는 말씀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네 이웃의 어떤 것을 탐내지 말라지, 속에서 탐심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훔쳐오지만 않으 면 괜찮다는 말이 아니다. 속에서 탐심이 일어났다는 그 자체로 이미 율법을 어긴 것이고, 율법의 한 귀절을 범했다면 이미 그 모두를 범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약2:10-11, 갈3:10).

율법이 100%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욥 같은 사람이나 바울 같은 사람 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율법이 일 점 일 획도 떨어지 지 아니하기에 하나님 앞에서는 바라바 같은 강도도 죄인이며 욥 같은 의인 도 죄인인 것이다. 이래도 우리가 교회에 나가야 되고, 하나님께 예배 를 드려야 되는가. 교회 일이 곧 자기 일인 것처럼 충성하고 봉사하는 사 람이나 그렇지 아니한 사람이나, 금식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나 밥 먹는 걸 금식하듯이 하는 사람이나, 따지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며 또 이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 율법은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는 역할을 한다(갈3:22).

그리고 율법이 온전케 된다는 말은 곧 율법의 이 역할이 온전히 수행된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오히려 완전케 하려 함이라(마5:17)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의미에서의 완전 이다. 즉 율법은 우리를 의인의 자리로부터 죄인의 자리로 바꾸어 앉힘으로 그 목적이 달성되며, 이 목적을 이루는 것이 곧 율법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아직도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드리는 신앙 생활을 함으로써 의 로워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사람들을 이단이 니 사탄이니 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면,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일 점 일 획도 버림이 없이 온전히 지키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특히 하늘 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는 주님의 말 씀이나,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 전1:15-16) 한 베드로 사도의 지적 앞에 허리를 동이고 똑바로 설 일이다.

말씀이 우리에게 율법적으로 적용되면 그 말씀은 우리를 죽이는 사역을 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사람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자기 의가 살아 있는 사람은 죽여야 하고(이게 이 사람의 구원이며, 이 사역을 담당하는 일 꾼이 옛언약의 일꾼 곧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儀文의 직분이다. 고후3:7) , 요리조리 빠져 도망가는 사람을 제대로 죽이기 위해서는 칼이 잘 들어야 한 다. 그런데 단칼에 사람을 찔러 죽여야 할 그 칼이 듬성듬성 이가 빠져 있다 면, 그것으로 누구를 죽이겠으며, 그러니 그것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

예수께서 말씀하신 율법과 선지자는 바로 이런 칼이다. 하나님이 이스라 엘을 죽이기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칼. 그러나 인간들은 이 칼의 이를 무수히 빼버리고 칼날을 녹슬게 함으로 그 칼에 맞고도 죽지 않으며, 이렇게 죽지 않은 것을 가지고 마치 그것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았기 때문인 양 자랑한다. 세례 요한은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마지막 칼이다(이 요한의 문제 는 「말씀 안으로」 창간호에 실렸던 마태복음 강해, 세례 요한의 등장과 회개의 선포나 요한과 엘리야 등을 다시 한번 참조하시기 바람).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 예수의 다음 말씀을 잘 생각해 보자.

31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32 비유 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 과 같도다 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 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눅7:31-34) 32절은 비유며,33절과 34절은 그 해석이다. 즉 세례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아 니하고(금식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한 삶은(하나님 앞에 경건한 모습이다 ) 이 세대를 향하여 부는 피리이고, 인자가 와서 먹고 마신 삶은(하나님 앞에 개판치는 삶이고 그야말로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이 세대를 향한 애곡이다( 이 관계성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로 구체적인 설명은 약한다, 독자 여러분의 묵상을 바란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세대 사람들이 요한의 삶도 따라 살지 않 고 예수의 삶도 따라 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요한이 금식하며 경건한 삶을 살아 유대인들에게 신앙의 본을 보였더니(이것 이 곧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삶을 더욱더 북돋우는 피리다) 그들의 반응은 귀신 들렸다(즉 狂信者)는 것이고, 예수는 금식도 아니하고 표면적인 경건 의 모습도 유지하지 아니했더니 그를 향하여 하는 말이 순 세상적인 인간이고 죄인의 친구라는 것이다. 이게 인간의 모습이다. 백 점을 맞은 사람 앞에서 는 우리가 어떻게 백 점을 맞을 수 있느냐고 도망가고, 삼십 점을 맞은 사람 앞에서는 그것도 머리냐고 비아냥댄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드리지만 하나님의 요구는 언제나 백 점이다. 율법을 지킴에 있어 백 점이 아니면 영 점이나 다 를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구십구 점 이하에게 내리는 벌은 사망이 고.

그러므로 아직 안식일을 지키는 개념으로 주일날 교회 나가 예배드리는 사람 이 있다면, 그는 지금까지 단 한번이라도 주일을 빼먹은 적이 없어야 하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 이 말 앞에서 당당할 수 있다면 나는 그에게 존경과 감탄을 보낼 것이며, 아울러 우리가 율법의 행위를 통해 서도 의로워질 수 있다고 성경을 고쳐 쓰는 작업에 앞장설 것이다. 그러나 단 한번이라도 안식일을 어긴 적이 있거든 두번 다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지 말 일이다. 그런 주장을 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잘못으 로 사망 아래서 오도가도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

율법은 결국 사람을 사망 아래 가두는 것이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보는 때가 곧 요한의 때의 절정이다. 역사적으로 세례 요한이 골백번 왔다 가더라도 이 사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또 실제적으로 이런 삶을 살지 아니하면(즉 율법에 게 죽임당하지 아니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철저하게 율법적이어야 한다. 율법 아래 있을 때 철저히 율법적이지 않은 사람은 하나 님의 나라를 침노하는 일에 있어서도 오로지 매진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 때 가 어느 때이든 자기 때에 참으로 진지한 사람만이 자기 구원의 길을 가고 있 는 사람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약간은 엉뚱하게 보이기도 하는 예수의 다음 말씀은 바로 이러한 때를 염두에 두고 보아야 제대로 이해가 되는 말씀이다.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이에 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 말씀은 아내나 간음의 영적인 의미에만 집착해서는 안 되는 말씀이다. 오 히려 불의한 청지기 비유로부터 두 주인에 이르는 전체적인 흐름에서 이 말씀 이 왜 나왔느냐를 생각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사람 앞에 높임을 받기 원하 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때가 오면 그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 미움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누구나(그가 죽지 않고 계속 산다면), 재물을 향하여 달려가는 시절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나 라를 향하여 달려가는 시절이 있으며, 역시 율법으로 사는 시절이 있는가 하 면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시절이 있다.

요한의 때를 지나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침노하는 삶을 살지 아니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율법 아래 산다는 증거이며, 이런 사람이 그냥 율법만 버리는 것. 이것이 곧 간음이다. 여기서 아내는 그가 더불어 사는 대상이다. 율법을 한 획도 남김 없이 이루지 아니한 사람은 율법을 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의 마침이 이루어진 사람이 더이상 버리운 여자 에게 미련이 남아 있는 것도 간음이라는 사실.

그리스도에게 있어 세상과 율법은 우리가 더불어 살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 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세상은 진리의 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 진리의 영에 기웃거리는 것도 자신의 때와 본분 을 망각한 행동이지만(이런 면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좇아 다닌 것은 영적 인 허영이며 일종의 간음이다.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세례 요한 밑에서 좀더 율법에 철저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 을 얻고, 이제 나타난 세상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침 노하는 삶을 살아야 할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버려진 여자에게 장가를 가는 것이야말로 번지수를 전혀 잘못 짚은 것이다.

윤리 도덕적, 율법적인 잔재가 아직 자기 속에서 분명히 정리되지 않은 사람 은 율법을 버려서도 안 되고, 세상을 버려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그의 아내이기 때문이며, 이런 아내에 대한 어설픈 죽음은 진짜로 죽을 수 있 는 기회를 앗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의 때를 분명하게 지나온 사람은 율법이나 세상이 그리스도에게 버림받은 아내라는 사실 또한 분명히 안다. 그 러므로 이들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면 그것이 곧 간음이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 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라.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 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약4:4-5)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시기하기까지 사모하고 있는데, 우리의 발걸음은 어 디를 향하는가. 질투라는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넌 대체 어딜 보고 있는 거야. 내가 지금 여기 눈앞에 서 있는데…. 하나님이 우릴 보고 부르시는 노래다. 물론 핑곗거리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율법으로부터 자유로 운 영혼은 이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침노의 삶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야 한다. 자신의 약함을 변명해서도 안 되고, 주변의 환경을 핑계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결코 세상의 아름다움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아니며, 세상의 지 저분함을 뜯어 고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도 아니다. 다만 율법과 세상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라는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다. 조용히 앉아 깊이 묵상하자.

글/ 이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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