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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맛을 잃은 소금 (눅 14: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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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4장은, 지금까지 언급해 온 바와 같이, 부르심에 관한 내용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부르시며, 왜 부르시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 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하는 점들이 예수의 관심사였다. 하나님이 우 리를 부르셨다면, 여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부르심은 하나의 과정이지, 그것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에베소 성도들을 향한 자신 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 바 있다.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 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 … 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엡1:17-18) 아브라함에게 있어, 하나님의 부르심은 가나안 땅이라는 목적지를 바라보게 했으며, 노아에게 있어서는, 방주라는 새로운 세계를 그리게 했다. 그리고 부 르심과 완성 사이에는 끊임없는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가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기존의 관계와 세계 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질서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대기 속으로의 몰입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는, 이러한 기존의 관계나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가 하나의 관건이 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라는 개체를 보존하고자 하며, 이러한 개체의 보존을 종교적인 구원으로 생각한다. 개체의 보존이 조금 폭 넓은 개념이 되면, 가족 공동체의 보존과 번영이 되고, 지역 이기주의가 되며, 나아가서는 애국애족이 된다.

결국 우리가 애국지사라고 떠 받드는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자기(ego)라는 개 체의 개념을, 우리나라라는 데까지 좀 폭넓게 가지고 산 사람에 불과할 뿐이 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애국자를 만들고자 하심이 아니며, 가정에 충 실한 가장을 만들고자 하심도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삶에서의 탈피를 요구한 다. 우리 가정이나, 우리 나라라는 개념은 결국 자기라는 틀이 존재하기 때문 에 등장하는 개념에 불과하다. 자기라는 개체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모든 생 각과 모든 행동이 자기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나라를 위해 희생한 다는 개념은 희생이 아니라 자기 목숨에 대한 집착일 뿐이며, 아내나 남편을 위해서, 혹은 자식을 위해서 나 자신은 버리고 살아왔노라는 고백도, 모두다 자신을 위해서 산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실제로는 자신을 위하여 살았으면서도, 포장은 너를 위해서 살았다 고 한다. 그래서 마흔이 넘은 주부는, 어느날 거울 앞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 을 바라보며, 남편과 자식을 위하여 살아온 날들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어진 다. 그러나 남편은 젊은 여자들이 가득한 다른 세계에서, 일과 씨름하며 모든 시간을 보내며, 자식들도 이제는 자기 시간에 몰두한다. 그러므로 나오는 것 은 한숨이요, 들어가는 것은 회의다. 이게 뭔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내가 남편을 위해 어떻게 희생해 왔는데…. 내가 자식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그러나 이런 푸념은 남편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모든 남편들에게 물어 보자 . 처자식을 위하여 일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를. 남편도 일이 좋아서 그렇게 늦게까지 일 앞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하지 않으면, 처자식 을 제대로 거느릴 수 없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럴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아내는 자기 혼자 남편을 위해 살고, 남편은 바깥에서 자기 재미만 보고 다니는 사람처럼 생각한다.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식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머니로서야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며, 자신이 야 굶더라도 자식부터 챙겨 먹였더니, 이제는 다 컸다고, 누가 그렇게 낳아서 길러 달랬느냐고 반문이다. 또는, 세상에 어느 어머니는 안 그러느냐고 당연 시한다.

나는 지금 인간 세상의 윤리도덕적인 타락을 염려함이 아니다. 세상에는 모두 억울한 사람들 뿐인 것이 하도 이상해서 그 원인을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다 . 남편은 남편대로 억울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할 말이 많고, 자식들이라고 어디 입이 없겠는가 문제는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살았다고 하는 그 허무맹랑한 생각에 있다.

남편은 처자식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며, 아내도 남편과 자식을 위하여 사 는 것이 아니다. 모두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았을 뿐이다. 남편이 건강하도 록 보약을 챙겨 드린 것도 실상은 자신을 위함이며, 자식들을 진자리 마른자 리갈아 누인 것도, 솔직히 말하면, 그것이 자기의 기쁨이었다. 남편 역시 마 찬가지이다. 처자식을 위하여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수고하 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남편을 위하고, 아내를 위하여 살았다고, 주장하 며, 그것으로 억울해 한다. 내 젊음을 어디서 보상받느냐고 하소연한다. 죄란 이런 것이다. 실상은 자기가 좋아서, 자기를 위하여 살았으면서, 말로는 남 편이 좋아하니까, 아니면 아내를 위해서 살았다고 늘어놓는다.

우리는 모두다 자신을 위하여 살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타(利他)란 없다 . 뿐만 아니라 희생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에게는 그것이 자신을 위하고, 자신이 좋아서 산 삶이었을 뿐이지, 처음부터 우리를 위하여 희생한다는 생각은 결코 없었다. 다만 사도 바울이 예수의 죽음에 그러한 의미를 부여했고, 또 그러한 의미부여가 사실이더라도, 예수는 그것으로 우리에게 무슨 보상을 요구하거나 하지 않는 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찬송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다. 다만 그의 죽음이 결과적으로 우리 를 위할 뿐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예수를 위해, 하나님을 위 해, 아니면 사람들을 위해서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우리의 삶이 결과적으로 누군가를 위한 삶이어야 한다. 예수는 스스로의 삶을 살았을 뿐 인데, 그것이 결과적으로 우리를 위한 삶이 되었듯이,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하여 산다는 의식이 있는 한, 그것은 항상 우리에게 의가 되고 자존심이 되어, 우리가 사는만큼 살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싸우고 싶 고, 정죄하고 싶어진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신세타령이나 하면서 억울해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이타(利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기(利己) 에 있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이타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이기가 본능이다.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 사람이 이기적으로 살면, 적어도 다른 사람에 대하 여, 서운해 하거나, 억울해 할 일이 없어진다. 다른 사람들이 잘 사는 것에 대하여 시기할 필요도 없어지며,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내가 못사는 것에 대하 여도 억울해 할 일이 없어진다. 우리는 남을 위해 살기 전에 남에게 서운해 하거나 억울해 하는 것부터 버려야 한다.

모든 사람이 이기적으로 살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항변할 필요는 없다.

이미 모든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새삼스럽게 이기 적이 되라는 얘기가 아니다. 이기적이 아닌 것처럼 사는 그 속에 숨어있는 이 기를 지적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이 지적은 정죄를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속에는 이기가 가득 차 있으면서, 겉으로 이타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타하려는 마음만 버려도 진일보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기보다 이타를 좋아한다. 이기적이 되라는 나같은 사람의 얘기는 환영받지 못한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이기보다 이타 를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이기적이라는 반증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사과가 훨씬 더 맛있어 보인다. 사람들이 이타를 동경하고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는 것은 지금의 삶이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타로 살 기 전에 우리가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적당히 얼기설기 꿰매어 쓸 일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타할 수 없다는 사실에 도달해야 한다.

사람들이 말로는 천하 없는 소리를 해도, 구원이라는 개념을, 천국이라는 장 소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천년만년 살고지고로 생각하는 한, 그 는 이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며, 이기의 틀을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 서의 구원은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타라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이타하는 삶을 살도록 하심에 있다. 이러한 이타는, 이타 자체가 곧 이기요, 이기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것이 곧 이타가 된다. 예수의 삶도 이런 것이었다. 곧 부분은 전체로 녹아들고, 전체는 부분 으로 이루어지는 것.

그러므로 개체의식에서 전체의식으로의 전환이 곧 구원이며, 영생이다. 성경 이 귀에 따갑도록 지체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도 모두다 이런 연유에서다. 지 체는 그것 자체로는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손가락은 전체의 부분일 때에만 아름다움이지, 잘려나간 손가락, 전체의 부분이 아닌 개체로서의 손가락은, 끔찍함이요, 징그러움이다. 손가락이 자신을 위하여 일을 하는 것은 자신을 위함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곧 전체를 위함이요, 다른 지체를 위함이다. 그 러므로 손가락은 다른 지체에 대하여, 자랑할 수 없으며, 서운해 할 수도 없 다. 누가 누구를 위할 수도 없지만, 그 누구도 자기 아닌 다른 지체를 위하지 않는 존재도 없다.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라는 개념은 이러한 지체 개념에서다. 그리스도가 머리요, 우리는 그 몸의 지체라는 말은 사도 바울의 전문용어였다. 머리와 손 가락이 별개의 개체일 수 없듯이, 우리와 그리스도, 우리와 하나님 역시, 그 러하다. 타락이란 원래 하나로 존재해야 하는 전체의 부분들이 어떤 이유에 의해서 갈라져 있는 것을 말한다. 머리와 손가락의 분리. 발가락과 다리의 분 리. 이런 현상은 손가락에게만 비극이 아니고, 온 몸의 아픔이다. 예수 그리 스도의 십자가는, 이러한 분리에 대한 하나님 쪽의, 하나되고자 하는 움직임 이다. 그러나 이미 잘려진 존재는, 잘려진 개체로서의 삶이 전 우주인 줄 알 고, 그 잘려진 존재를 영속시키는 분단의 영구화가 곧 영생인 줄 알고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와 당신의 하나됨에 그 궁극의 목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분단된 상태로 너무나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렇게 분단된 채로 사는 것이, 이제는 더 편하고, 더 재미 있게 되어버렸다. 동독과 서독이 통일되고 나서 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보라. 나아가서 남한과 북한이 통 일 되었을 때를 가정해 보라. 지금 남북한 모두, 그저 꿈에도 소원이 통일인 것처럼 날뛰고 있지만, 사실 남북한 모두다 통일 그 이후를 감당할 능력이 있 는지 미리 생각해 보아야 한다. 김일성 일신교의 교조에 미쳐 있는 북한. 자 본의 달콤함에 썩어있는 남한. 미친 사람과 썩은 사람이 하나가 된다 누가 누구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이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다른 두 체제의 통일은, 달콤함 보다는 쓰디쓴 맛이 훨씬 많은 법이다. 소위 이 시대의 지도자연 하는 사람은, 이 어려움을 볼 줄 알아야 하고, 이 어려움은 도외시한 채 무조건 통일에만 매달리는 사 람들에게 돌 맞는 자리에 나갈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 우리는 남북한이나 동서독 보다 훨씬 더 많은 세월을 나누인 채 살 아왔다. 그러므로 그 체제의 상이함도 훨씬 크고, 그 생각의 간격도 훨씬 넓 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람의 하나됨은 남북한의 통일 보다 훨씬 더 많고도 복 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저 천국에 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 이 아니다. 천국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바에야 통 일 되지 않고, 따로따로 사는 것이 훨씬 더 편하다. 그러나 세상사에서도 그 렇지만, 믿음의 영역에서도, 사기꾼들은 그저 무조건 앞뒤 안재고 통일만 하 면 다 되는 줄 알고 있다. 합방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 역시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통일 그 이후이다.

예수께서 누가복음 14장의 이전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경계했던 바는, 너 희가 과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할 수 있느냐는 것과, 너희가 하나님과 하나 가 되었을 경우, 과연 하나님처럼 살 수 있겠느냐는 점이었다. 하기 때문에 예수는 천국의 달콤함을 강조하며, 천국을 바겐세일하러 다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국에 오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왔더라도 끝까지 완성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제시하면서, 우리에게 다시 한번생각할 것을 요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예수에게 천국의 모습과, 하나님과 하나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상징이 곧 소금이었다. 하나님과 하나된다는 것은 곧 소금의 삶이다. 천국의 삶을 살고 영생의 삶을 사는 것도 다른 것이 아니다. 곧 소금 이 되는 것이며, 소금으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 뿐 아니라, 산상수훈에 서도 예수는 우리를 향하여, 세상의 빛이며, 세상의 소금이라고 한 바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소금이어야 한다. 소금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소금으로 살아야 한다. 소금은 소금이 되려고 노 력하지 않는다. 그냥 소금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정과 부패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소금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 아직은 기독교인이 아니며, 다만 기독교인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 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는다(요1:13). 다만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거듭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소금이 되고, 세 상의 소금으로 사는 자가 곧 기독교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가 기독교인이라는 자랑을 하기에 앞서, 소금이 되어 있는가, 그리고 소금으로 사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소금의 소금됨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도대체 소금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세상의 소금으로 사는 것인가 단지 썩어가는 세상의 방부 제 역할이나 하면(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소금인가 성경 본 문을 보자.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하리요. (Ka lo;n ou\n to; ala eja;n de; kai; to; alamwranqh', ejn tivni ajrtuq hvsetai 이 말씀은 누가복음 14장의 결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어떤 면에서 지금까 지 말해온 모든 내용은 이 34절을 위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원어 성경(Aland Text)에는 그러므로(ou\n)라는 접속사가 들어있다. 본문의 접 속사를 제대로 살려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었다면, 어떻게 짜게할 수 있겠느냐 맛을 잃은 소금(2/2)이호식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14장의 내용들. 안식일을 지키고, 사람들을 점심식사 에 초대하고, 하나님이 베푸신 혼인잔치에 나아가는 것. 그리고 비용예산을 잘하여 망대를 완성하고, 전쟁에서 이기는 모든 일은, 소금의 모습이며, 소금 의 삶이다. 우리가 소금이라는 것을 단지 바다에서 건져올리는 천일염 따위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소금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 땅의 기독교인이며,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가리킴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식생활에 있어서의 소금 만 큼이나 중요하며, 좋은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며, 사람들을 초 대하여 식사 대접을 하는 일도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문제 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소금의 모양, 소금의 외모일 뿐, 정작 소금의 맛은 아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찾는 좋은 일을 한다고 하자. 그러나…. 우리 는 이 그러나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예수를 믿는 사람의 맛,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맛이 나지 않는다면, 이런 우리를 하나님은 어디에다 쓰겠는가 정말, 맛을 잃은 소금을, 우리 같으면 어디다 쓰겠는가 땅에다 쓸 것인가 거름에다 쓸 것인가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소금의 맛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이것도 따지고 보면, 우스운 일일 뿐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소금은 그냥 소금일 뿐, 사실, 맛을 잃은 소금이란 없기 때문이다. 생각하여 보자. 소금이 어떻게 맛을 잃을 수 있는가 빗물에 씻기면 소금 맛이 좀 싱 거워지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비오는 날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법. 일단 소금이 된 이상, 그 소금이 다시 맛을 잃는다는 것 은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런 입장에서 기독교인들이 소금으로 살려고 애쓰며, 노력하는 모든 것 과 죄를 짓지 않으려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든 것을 책망한다. 무릇 모든 기 독교인은 소금이고, 소금이어야 한다. 소금이 아니면 기독교인이 아닐 뿐. 하 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의롭다고 해도 거기서 거기이며, 죄를 짓는다 고 해도 그렇지 않은 사람과 오십보 백보일 뿐이다(욥35:6-8). 하나님은 우리 가 죄를 지었다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소금이 아니라고 바깥에 내다 버릴 뿐이다.

그러면, 예수는 어찌하여 맛을 잃은 소금에 대하여 언급하시는가 예수께 서 생각하는 맛을 잃은 소금이란 대체 어떤 소금을 말하는가 맛을 잃은 소금이란 소금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소금의 역할을 못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소금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가 소금이 아닌 것은 아니 다. 소금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상 그는 분명히 짠맛을 가지고 있고, 소금으로 서의 구실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즉 가짜 소금은 아니라는 뜻이다.

오늘날에는 소금도 가짜가 많아서, 우리가 본문의 말씀도 이름만 소금이고, 실제는 유리조각 같은 가짜소금을 일컬음이구나로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가짜 소금이라면, 예수의 언급대상이 아니다. 예수는 분명히 소금은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가짜 소금을 경계하고자 본문의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고, 좋은 소금이면서도, 맛을 내지 못하는 경우를 가리 켜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소금이 맛을 내지 못하는가 좋은 소금이면서도 소금의 맛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꼭 한번 있을 수 있다.

소금, 그 자체로 있는 경우이다. 즉 다른 개체들 속으로 녹아들지않는 소금 은 절대로 소금의 맛을 낼 수가 없다. 그가 아무리 좋은 소금이라도, 자신의 개체, 그것으로 존재하는 동안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소금은 다른 개체들 속 에 녹아 들어갈 때에만 소금의 맛이 있다. 그래서 예수가 말씀하신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의 잃었으면(mwranqh')은 어리석다는 개념의 단 어이다. 어리석은 소금이라고 하면 말이 이상하게 되니까, 의역하여 맛을 잃 은 소금이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맛을 잃은 것은 결과적인 사건이고, 그 이전 에 이미 어리석은 삶이 전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소금이 어리석게 되었다는 말의 의미는 소금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상실했다 는 뜻이다. 자기가 왜 그렇게 소금의 결정으로 존재하는지, 그 궁극적인 의미 를 망각했기 때문에, 다른 개체 속으로 녹아드는 삶을 버리고, 홀로 독야청청 , 소금의 결정으로 남아 그 개체의 영구보존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경 우 이런 소금을 어디에다 쓸 것인가 배추 속으로 녹아들지 않는 소금. 소금 의 결정, 그것만 유지하기를 좋아하는 소금. 무엇 때문에 소금이어야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소금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하 나님은 염분 그 자체이고, 우리는 그 염분을 간직한, 하나님의 지체를 일러 기독교인이라 한다. 그러므로 염분을 가지고 있지 않은 소금이 있다면, 그것 은 가짜 소금일 것이고, 하나님과 하나된 지체의 삶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 체 속으로 녹아들지 않고 개체의 보존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소금 즉 맛을 잃은 소금이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당신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는 것은 우리도 당신같은 소금이 되어 만물 속에 녹아드는 삶을 위해서이다. 이렇게 녹아드는 것이 곧 다스림이며, 상대를 정복함이다. 소금과 배추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소금이 배추를 다스리는가 아니면 배추가 소금을 다스리는가 말할 필요도 없이 소금 이 배추를 다스린다. 그러나 다스리는 소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오직 배 추만 남아서 사람들의 입맛을 돋운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리이다. 땅을 정복 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라니까, 그저 만물 위에 군림하고, 만물 에 대하여 행패나 부리라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니,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군림이 아니라 섬김이며, 하나님의 영생은 개체의 보존이 아니라 오히려 개체의 사라짐이다.

그러므로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고, 예수 때문에 그 목숨을 잃 으면 얻을 것이다. 나라는 개체를 천국에 고이 보존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멸망이며, 예수 때문에 나라는 개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은, 그러므 로 당연히 천국에 자기 집 한칸도 마련되어 있지 않는 사람은, 그것이 곧 구 원이며, 그가 있는 그곳이 곧 천국이다.

하나님은 이런 천국, 이런 소금의 삶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통일이 되어도 문제이고, 되지 않아도 문제이다. 우리는 통일 이후를 바라보고, 하나가 된 다음의 삶을 미리 그려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삶을 내가 진심으로 원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런 생각과 고민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의미가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 가 엄청난 낭비이며 손해일 뿐이다. 미리 앉아 생각해 보자. 과연 내가 나 자 신을 버릴 수 있는지. 그것도 소금이 아닌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사람들은 흔히 나의 못된 습성이나 나쁜 성질을 버리는 것을 나를 버리는 것으로 착각 들 하고 있다), 소금이 된 나, 하나님의 삶을 사는 나를 버릴 수 있겠는지.

나를 버리자고 신앙 생활을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쓸모 없는 것이 기독교인이다. 세상에서도 잘 살려고 온갖 사람들과의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고, 천국에 가서까지 한자리 해 보겠다 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다. 하나님은 이런 욕심장 이들을 원하심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은 천국에서 빠지더라도 다른 사람이 들 어 가기를 원하는 사람. 자신은 녹아지면서 더 아름다운 전체를 이루는 사람 을 원하신다. 그리고 당신의 열심과 당신의 능력으로 이런 사람을 만들어 가 신다. 엿새가 차기까지. 그래서 안식하실 수 있을 때까지.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눅14:35) 성경에 대하여 귀를 열고, 마음을 열자. 언제나 그렇듯이 나타난 현상이 중요 한 것이 아니다. 감추어진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하여 듣는 귀, 보는 눈이 중요하다. 고민이 없는 세대. 갈등이 없는 시대. 어쩌면 그렇게 예수의 우려대로, 어쩌면 그렇게 예수의 탄식대로 가고 있는지. 귀를 열고 예수의 우 려와 예수의 탄식을 들어 보자. 귀를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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