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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너진 꿈을 회복하라 (창 3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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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무너진 꿈을 회복하라는 제목으로 요셉시리즈를 시작하겠습니다.
앞으로 얼마동안 이 요셉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 종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첫째는 생존하는 수준의 삶입니다. 영어를 써서 죄송한데요. 써바이블 라이프입니다. 연명하는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도는 수준입니다. 서커스단에 가면 마술사가 접시 세네개를 놓고 계속 돌리는 것이 있습니다. 떨어뜨리면 안되니까, 애를 써서 조금도 여유가 없이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돈이 있고 없고 문제가 아니라. 삶의 목표가 주말에 있습니다. 언제 주말오나 생존하는 수준의 삶입니다. 두 번째 succeess life입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세상을 보람을 사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을 열지 않고 영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두 종류가 있는줄 압니다. 생존하는 수준과, 그 다음에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신앙세계에 들어오면 한차원 더 높은 삶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뭐냐면 성공하는 수준의 인생입니다. 영적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여러종류의 차원이 있겠지만은 제가 오늘 여러분과 집중적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남을 살리는 인생입니다. 오늘 여러분들 때문에 남이 살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자기가 제대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서 자기만 산 것이 아니라 자기 가족과 민자기 민족과 그 당시 당대 최고의 이집트를 살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제게 간절한 마음은 하나님! 이 시리즈가 시작되고 같이 적용될 때에 세 부류가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이 한국교회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는 썩어지는 하나의 밀알이 됨으로 말미암아. 오늘 이렇게 현수막에 써놓았습니다만은 주여 한국교회를 거룩으로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노란 유채밭이 안보이십니까 여러분에게 이 계절의 향기를 전해주고 싶고, 거룩으로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나는 마음이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 다음세대가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우리가 토요일마다 3대가 복을 받는 제목을 가지고 기도했던 내용이 무엇입니까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요, 요셉의 하나님인줄로 믿습니다. 어떤 뜻입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삭의 정직으로 연결되었고, 이 이삭의 정직이 야곱의 최선의 삶과 연결이 되었고, 이 야곱의 최선의 삶이 요셉의 형통한 삶으로 귀결되었으니 다음세대가 요셉이 받았던 복을 받게 하옵소서! 그래서 다음세대를 살릴 것입니다. 또 하나 요셉은 예수님의 삶의 모형이었습니다. 요셉은 구약에서 나타난 예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정도로 예수님의 삶의 구약의 상징으로,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예수의 삶을 살고 싶은 것입니다. 제자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특성을 지니는 것입니다. 특징을 지니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되고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요셉을 같이 말씀을 나누면서 더욱 우리교회에 제자훈련이 더 힘있게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크게 요약하면 구원의 역사입니다. 조금 더 다른 차원에서 보면 다른 차원에서 성경을 이해를 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다루시는가에 대한 스토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깊이있게 생각하면 성경은 하나님은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약속하신 말씀들을 이루어 놓으신 행적기요, 언약의 서판이요, 은혜의 돌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요셉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끊임없는 주의 인도의 삶이 그를 끊임없이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수성가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신수성가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자수성가라는 말은 사전적 의미로서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사람이 자신이 힘으로 한 살림을 이룬 사람을 말합니다. 요셉은 팔려간 사람이었습니다. 노예였습니다. 감옥의 죄수였습니다 아무 자격도 없던 그가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간 신수성가의 사람이었습니다. 역사상 노예가 총리가 된 케이스가 없습니다. 세계사의 어떤 경우에도 노예가 당대 최고의 총리가 된 적은 없었습니다. 노예가 제국을 지배했던 것으로 우리는 영적으로 기가 막힌 은혜와 꿈을 가질수 있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마귀의 포로였습니다. 마귀의 노예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젊은이들은 과거의 악습의 고리를 끊지 못하여 반복적인 죄악을 짓는 형제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만큼 귀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다시는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노예와 같은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나라의 왕자로, 황녀로 택함을 입고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삶의 반전의 역사를 우리가 경험한 사람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요셉을 통하여 평화로운 삶과 고통스러운 삶의 양면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양탄자 위를 걷는 안락하고 평안한 삶만 아닙니다. 신앙생활에도 산과 골짜기가 늘 반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창공의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메마른 땅을 걸어가는 골짜기의 삶도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이 두가자기 다 필요한 것입니다. 축복을 통해서는 천국의의 옷자락을 이 땅에서도 예고편으로 맛 볼 수가 있다면 역경을 통해서는 우리가 이 땅에 젖어드는 중독되는 깨어남을 누릴수가 있습니다. 이일을 위해서 우리는 누구에겐가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역할모델을 두고 누군가에게가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인생은 이 땅에서 태어나서 아무도 독불장군이 없습니다. 독불장군이 뭔지 아십니까 독일장군과 불란서 장군이 독불장군이 아닙니다. 독불 장군은 없습니다. 영향을 받고 살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어떤 사람은 한순간의 죄로 지치고 곤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정적으로 어려움과 고통가운데 정말 부정적인 영향을 받고 인생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못된 영향력, 죄책감, 사람들을 통하여 영향을 받는 인생들이 아니라, 요셉처럼 꿈이 있는 인생,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함께 하실 때 얻는 신수성가의 은혜. 노예가 당대 최고의 경제를 인도하는, 지도자로서 반전의 역사를 꾸려나갈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 창37:1-11절까지는 크게 세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 아버지 야곱이 한 아들을 지극히 편애하는 장면이요, 두 번째는 그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충성을 다하는 내용이요, 세 번째는 형들의 시기와 질투와 이기와 답답함을 모습을 보여주는 세 장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잘아시는대로 야곱은 요셉을 말년에 낳았습니다. 야곱은 정실부인이 둘이었고 첩이 둘이었습니다. 남자는 좋아할지 모르겠는데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그리고 진짜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을 하루같이 14년을 고생고생하여,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늦동이로 낳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깝지가 않았습니다. 지극한 사랑을 퍼부었습니다. 요셉은 두 번째의 장면은 성실성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너무 사랑하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 앞에 충성을 다하는 것은 누구나 당연한 반응이라고 공통된 반응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눈이 거기에 멈춘다면 영적으로 큰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요셉의 삶에서 살펴볼 것은 요셉의 성실함입니다. 요셉의 삶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 앞에는 충성된 삶을, 사람들에게는 성실한 삶을. 그래서 요셉과 관련된 모든 사람 앞에서 성실함을 보였습니다. 성실함이 뭔가를 보았더니 여기서 성실은 내적인 온갖 갈등과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자신의 삶을 추스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다 안고 살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자신의 삶을 일관되게 추스린 하나님 앞에서는 충성되게, 사람들 앞에서는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요셉의 스토리에서 보아야할 신비중에 하나이며, 우리가 앞으로 보아야할 내용입니다. 세 번째 장면은 형제들의 분노였습니다. 형제들의 분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당시의 이스라엘의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형제들이 요셉에 대해서 화가나서 그냥 시기하고 질투해서 미워했다 그러면 그것은 조금 얕은 물가에서 깊이를 못 본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게 된 이유가 몇가지 있지요. 6-7절을 보니까 쭉 이하에 뭐가 나옵니까 네 곡식단과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자기를 위하여 절을 하더라. 그것도 조금 안좋은 것이었지만. 조금 안좋은 것이었지만. 형들 입장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3절이었습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은 야곱의 새로운 이름이지요. 그를 어떻게 했다고 했습니까 깊이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깊이 사랑해서 어떻게 했지요 채색옷을 지어 입혔다고 했습니다. 알렌로스라는 창세기의 정통한 주석학자가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 야곱의 채색옷을 준 행위는 단순히 요셉을 사랑하고 편애정도가 아니고 이것은 맡아들 르우벤으로부터 장자권을 빼앗아 자신이 사랑했던 라헬의 장자였던 요셉에게 주려고 했다고 합니다. 물론 아버지 입장에서는 별 의도없이 할 수 있었겠지만, 그것을 보는 형제들의 입장에서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채색옷의 어원은 긴 소매가 달려있는 채색옷이라는 뜻입니다. 이 옷은 작업복도 아니고 평상복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옷의 용도가 아니라 의미인데, 소매가 달린 옷은 아무나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이것은 왕이나 주인이 입는 옷이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옷에 의해서 신분이 결정되었습니다. 왕이 즉위하거나 신이 큰 공을 세우면 어김없이 소매가 달린 긴 옷을 입혔습니다. 따라서 소매가 달린 긴 채색옷이 요셉에게 주어 졌을때 아버지는 무심결에 장자권을 누구에게 주려고 한것을 드러낸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히브리민족에게 있어서 장자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축복권과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야곱은 이 장자권의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평생동안을 이 장자권 때문에 고통하고 힘들게 살았습니다. 가족의 많은 고통이 이 장자권에 의해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10명을 제쳐두고 요셉에게 채색옷을 주었다는 것은 그런 마음이기 때문에 요셉은 형들은 참으로 힘들었고, 어떤 면에서 시기와 질투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이런 사실 앞에서 이런 내용이지만, 이 요셉시리즈를 다루는 가운데 우리 온 교회 교우들이 신앙의 장자권을 회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신앙과 은혜의 축복권으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붙잡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요셉을 더 잘이해하기 위해서 요셉의 가정을 알아보는 것은 더욱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 창 37장 앞에서 창27장에서부터 요셉의 소절을 죽 이어보면요 요셉은 축복된 환경도 있었고 정말 혼란한 답답한 환경도 같이 경험했습니다. 축복된 환경은 어느 teen ager가 자기 증조할아버지는 아브라함이고 자기 할아버지는 이삭이고 자기 아버지는 야곱이고 그중에 한사람이라도 얼마나 좋겠어요 그 누가 이런 가계를 이은 사람이 있겠어요. 그러나 요셉의 개인 입장에서는 너무나 혼란스러웠어요. 자기 아버지 야곱은 사기꾼이었습니다. 창세기 27장에 보니까 자기 외할아버지 라반이 뭐라고 평가하느냐면 그에 이름을 야곱이라고 함이 너무나 마땅하다라고 그랬어요. 야곱은 뭐에요. 속이는자. 발뒤꿈치를 붙잡는자. 사기꾼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능숙하게 사람을 속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넷이었어요. 헷갈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보니까 아버지가 야반으로 도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어릴때 야곱이 자기 외할아버지 라반과 어려워지니가 그냥 도망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굿바이 키스도 안하고 그냥 도망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가 큰 아버지 에서와 만나는데 거기도 복잡한 일이 많고, 세겜에서의 비극을 기억하십니까 여러분 야곱의 딸 디나가 성폭행을 당했을때, 형제들이 가만히 있지 안하고 복수의 칼을 가지고 어떤 면에서 광란을 벌였습니다. 세겜의 모든 남자를 다 살육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릴때 어머니 라헬이 일찍 죽었습니다. 10대 초반에. 일찍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할아버지 이삭도 15살 때 죽었습니다. 17세밖에 안된 이 요셉이 이 험학한 또 축복스러운, 혼란스러운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37:4을 보면 그 형제들이 아비기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날마다 요셉을 찌르고 왕따 시켰습니다. 우리중에 이만한 고통과 좌절된 상황이 있겠습니까 이런 어려운 가운데서도 왠만하면 방한구석에서 청소년기를 실망하며 좌절하며 살 수 있었을텐데 요셉은 고귀한 성품과 믿음직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되고 있었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심령이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요셉은 은혜를 계속 견지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이게 하나님이 주신 꿈인지 아닌지. 그리고 이 꿈을 요셉은 42장까지 잘 유지했습니다. 계속 기억을 했습니다. 여러분! 요셉이라고 날마다 꿈을 꾸었겠어요 아마 몇 번 안꾸었을텐데 그런데 요셉은 꿈을 기억하고 끝까지 잘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내가 갖고 있는 꿈인지, 내꿈이고, 개꿈인지 어떻게 구별하는지 아십니까 내가 가진 꿈은 조금 갖고 있다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꿈은 계속 지속될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사람과 하나님의 사람의 차이는 하나님이 내 생애동안에 주신꿈을 약화시키지 아니하고 끝까지 유지할수 있느냐가 결정타입니다. 예수믿고 구원받으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한번 얼핏, 지나가는것처럼 주셨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때를 기억하고 집중해서 한결같이 달려오는 사람이 있고, 어허! 그냥 스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남을 살리는 요셉의 꿈이 내것이 되기 위해서 제가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좌절된 상황에서도 꿈을 유지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할 일은 뭐냐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모든 상황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단어를 기억하십시오. 주권과 섭리를 모든 상황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오늘날 이것을 신앙에 대한 재해석을 행7:9절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조상, 요셉의 형들이 질투하고 그를 팔았더니,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서, 팔려가는 상황. 시기받는 상황, 질투받는 상황.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서, 오늘 연세된 어른이나 아이나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신 비젼과 꿈을 견지해야할 자세중에 하나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이것을 여러표현으로 감당할 수 있지만 여러분이 간직하십시요.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계셔서 이것들이 형들의 질투와 형들의 돌팔매질 가운데서도 우리를 견디게하는 요건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저와 함께 하는 사람임을 특정하는, 확인하는 하나님이 저와 끝까지 함께 합니다. 작은일에도 충성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모든 자리에서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살아있을 때는 아버지에게, 노예로 팔려 있을때는 주인에게 감옥에 있을때는 동료에게. 한결같이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주어진 충성된 사람들에게 다음길을 열어 주시는 것에 대해서 요셉은 모델케이스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또 하나 깨달아야 할것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면요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질투에도 불구하고 충실하고 의로우신 자를 끝까지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원하는 사람.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에는 다른 사람들의 질투에 눈에 부딪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형들의 질투심에 부딪히고 성실하고 충성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 주위에는 이런 일들이 자주자주 일어납니다. 우리 일에 충성에 다른 사람의 질투와 미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좌절해서 충성된 자리에서 떠난 분은 안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닌 것입니다. 맡은 일에 충성함으로 받는 질시나 고난은 어떤면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불의한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충성되이 이루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질시와 미움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요셉처럼 충실되지 못한 열한 아들가운데서 요셉처럼 맡은 일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쉽게 좌절할수 있는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분명히 유지하고 있을때 이것이 요셉의 인격적 다이나미스와 그의 삶의 역동성과 행동의 탄력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목적과 확고성에 있을 때 요셉은 그가 가진 꿈을 끝까지 견지할수 있었습니다. 꿈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독교 교리 문답가운데 아주 중요한 하이델베르그라는 문답이 있는데 하이델베르그 신조란에 가보니까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섭리란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들을 붙들어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전능하고 창조적인 능력이다. 그러므로 풍년과 흉작, 음식과 마실물, 건강과 질병, 번영과 가난. 이 모든 것이 우연히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 손에서 오는 것이다. 이것을 여러분이 기억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성의 확고함속에 오늘 이 예배를 드리면서 진정한 안식을 얻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감각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이 섭리가운데서 요셉처럼 성실함으로 적은 일에 충성되어 남을 살릴까라는 것을 계속 궁리하는 저오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중요한 것은 요셉은 고통과 문제와 실패가운데서 교훈을 받았습니다. 실패를 통해서 뭘 배우느냐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통해서 어떤 것을 교훈받는냐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실패를 통해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의 실패를 통해서 배우는 것도 소중합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통해서 많이 배웠습니다. 그가 6살 때 외할아버지 라반의 집에서부터 야반도주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야반도주를 하는 것을 보면서 떳떳하지 못한 인간관계는 좋은 것이 아니구나! 그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큰 아버지를 보면서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요셉이 보면서 정직하지 못한 인생의 결과는 두려움이겠구나! 요셉은 그것을 보고 배우니까 정직하게 살아서 손해볼 것 있겠지만, 겉으로는 그러나 그 내면은 손해볼 것이 없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했던대로 창34장에서 자기 동생 디나가 폭행당한 것을 보복하기 위하여 형들이 칼들을 휘둘렀을때에 요셉은 그 사건을 통해서 뭘 배웠습니까 잔인한 복수는 가문의 실추와 생명의 위태로움까지 생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그로하여금 훗날 용서의 사람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또한 세겜의 복수사건 이후에 벧엘에 올라가서 제단을 다시 쌓았습니다. 회복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때 요셉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구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는거구나! 그냥 삶 깊이 교훈으로 받아들였고, 된 것입니다. 고통과 미움도 껴안는 것을 배웠습니다. 요셉은 자기 엄마가 먼저 죽었습니다. 어릴때 죽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더 할아버지 이삭이 살아있었습니다. 아마 요셉에 멘토로 영향을 미쳤던 것이 제가 볼 때에, 그리고 성경학자들이 볼 때에 이삭이 요셉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포용과 용서와 우물을 파는 것을 모두 얘기해 주었을 것입니다. 야곱과는 다른 인격을 할아버지 이삭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우리 모두가 좋은 신앙의 할아버지를 갖고 있을 때 영향을 받는 것과 이치가 같은 것이겠지요. 그 이삭을 통하여 요셉은 온유와 포용과 인내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삶의 어려운 환경, 고통과 어려운 상황속에서 특별히 남의 실패를 보면서도 좋은 교훈으로 받아들였고 자기의 약점고 부족함이 오히려 강점으로 승화할수 있도록 성실성을 배가 시켰습니다. 일본에서 일본사람들에게 정신적 지주로 일컬어지는 저 마쓰케다 곤노시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쓰시다 그룹의 창업자인데요. 자기는 배운적도 없고 초등학교밖에 안나오고 아무런 배경도 없는 그가 일본 최고의 경영자가 되었습니다. 때에 마쓰시다 고노세케는 이렇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할수 있었고 몸이 약했기 때문에 운동을 열심히 해서 건강해 졌습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여기며 언제나 언제나 공부하였다. 약점을 장점으로 바꾼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제 제가 지난 2-3주간 제 마음에 부딪혔던 기사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 기사를 소개하겠습니다. 이 기사는 신앙적인 기사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 신앙적인 마음에 감동을 자아내게 된다면 오늘 요셉이 가졌던 그 꿈을 가지고 무너진 꿈을 회복하겠다는 분들이 이 간증을 들을때 하나님이 길을 열어준다는 것을 믿고 제가 이 기사를 좀 소개하겠습니다. 경어는 생략하고 기사를 소개하겠습니다. 김충배 육사교장이 강연한 내용이었습니다. 어른이 없이 자라난 다음 세대를 위하여 우리가 과거의 어떤 골짜기를 지나고 여기까지 왔는지. 곤란과 어려움에서 여기까지 왔는지를 다음세대사라들이 조금 알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해서 쓴 강연입니다. 경어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1억 4천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대신에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하는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어 주었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혀서 빌렸다. 고졸 출신 500명의 파독 광부를 모집하는데에 4만 6천명이 모였다. 그중에는 정규학사출신도 수두룩 했다. 파독광고 면접을 볼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합격한 사람도 많았다. 서독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하여 온 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가 흘리는 눈물이 있었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어린 간호사는 흩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어린 간호사들에게는 병들어 죽은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간호사들은 죽어서 딱딱하게 굳은 시체를 이리저리 닦았다. 하루종일 그 시체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m 더 깊은 자리에서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을 했다. 하루 여덟시간 일하는 독일 사람들에 비해그들은 10시간 이상으로 일을 하는 것을 보면서 서독 신문과 방송은 대단한 민족이라면서 가난한 광부와 간호사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할수 있을까 저들이야말로 코리아 엔젤이라고 했습니다. 얼마후 서독의 리부케 대통령의 초청으로 박대통령이 서독을 가게 되었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의 일원은 무엇보다더 한국 광부와 간호사를 격려하기 위하여 광부에게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소식에 수백명이 강당에 모였습니다. 박대통령과 수행원이 강당에 도착했을때 작업복을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렸습니다. 먼저 육영수 여사가 시체를 닦는 간호사들에게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고향에는 연락이 잘 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순간 간호사들이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고, 그것이 신호가 되어서 간호사, 광부할 것없이 울기 시작했다. 음악을 연주하던 광산악대들도 꺼억거리며 울었다. 행사장 중간에 있던 박대통령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았다. 간호사들에게 둘러싸여 울던 육영수 여사는 울다가 그만 주저앉으려고 그랬다. 주위에서 간신히 육여사를 부추겼다. 먼저 나온 기자들은 이 광경을 취재하려고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사진을 찍던 카메라사들도 함께 울기도 했다. 취재기자들도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광산의 사장도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나서 15분후쯤 박대통령 내외는 단상에 올랐다. 광부들로 구성된 악대들이 애국가를 연주했다. 박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애국가는 갈수록 이어가지를 못했다. 후렴으로 넘어가는 부분에서 합창은 흐느낌으로 변했다. 마지막 소절, 대한사람 대한으로에서는 가사는 들리지 않고 대신 통곡이 들리기 시작했다. 박대통령이 손수건으로 닦고 올라가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준비된 원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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