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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본이 되는 교회 (살전 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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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도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1994년이 가고,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리는 1995년이 왔습니다.
지난 일년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 한해였습니다.
특별히 어려운 일들이, 아픔의 일들이 많았던 고통스러운 한해였기에 다시 우리마음이 서글퍼 집니다.
입에 다시 담기조차 싫은 끔찍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비행기 참사, 여객선 참사, 또 성수대교 붕괴, 지존파 사건, 박한상 사건, 가스폭팔사건,등 어처구니 없는 참사와 우리마음에 불신을다시한번 심어준 세금비리사건등이 있었습니다.
또 국제적으로 끔찍한 전쟁사건은 쉬지않았고, 테러와 비행기 납치사건, 기아와 엄청난 천재지변도 있었습니다.
이제 그 수많은 일들이 채 정리되지 않았지만 1995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보호의 장벽이 열리고 세계의 모든 것들이 밀려들어오며, 나만의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세계적인 삶의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새 해가 다가온 것입니다.
채 정리되지 않고, 안정되지 않은 불안한 현실이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라도 꾸준히 신앙을 지키고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우리의 시대적 사명일 것입니다.
어지러움과 불안정 속에서도 이 사회와 이 국가를 새롭게 변화시킬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오늘 1995년 새해 첫 주일을 맞이하여 저는 일 년 동안 우리 교회가 목표하고 이루어 나가야 할 말씀을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교 여행에 디모데와 실라와 함께 데살로니가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의 교인은 대부분 이방인이었고 약간의 유대인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3주간 동안 성경을 가르치고 그들의 신앙을 지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 있던 유대인들이 폭도들을 선동하여 바울 일행을 방해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밤중에 베뢰아로 피신하였고 아덴을 거쳐 나중에는 고린도까지 옮겨 갔습니다.
교회를 세우기는 했지만, 많은 시간 동안 말씀을 가르치지 못했고 또 그들을 지도할 수 있는 신앙 지도자도 세우지 못한 바울은 무척이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걱정했습니다.
더우기 폭도들의 기세가 대단하였기 때문에 환란과 핍박에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ㅇ르 것이냐는 것 때문에도 바울은 무척이나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를 통해 바울에게 들려진 소식은 바울의 걱정을 순식간에 씻어 주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의 전도를 받고 철저한 신앙으로 무장하였고 환란과 핍박에도 전혀 글하지 않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교회가 부흥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또 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본이 되는 신앙은 이미 마게도냐와 아가야 등 여러 지방에 소문이 자자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격려하는 내용과 교회 안의 신앙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적어 편지로 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저는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를 ‘본이 되는 교회’로 정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도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많은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이 말씀을 준비하게 된 것입니다.
“ 또 너희가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도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처럼 칭찬받고 모든 면에 본이 된느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교회가 본받을 수 있는 모범적인 교회, 본이 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이겠습니까
본문의 데살로니가 교회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역사하는 믿음을 가진 교회입니다.
본문 5절에서 사도 바울은 “ 너희의 믿음의 역사” 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役事)란 한 마디로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역사하는 믿음이란 일하고 실천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역사하는 믿음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에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 (마 17:20)
또 히브리서 11:1에는 “믿음은 바라본 것들의 신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셨고, 약 2:26에는 “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즉 역사가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나무는 푸른 잎도 없고 열매도 없으며 또한 자라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나무는 무성한 푸른 잎과 좋은 열매로 보는 이를 즐겁게 합니다.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죽은 믿음은 어떤 사람에게도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자신에게도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믿음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힘과 소망을 주고 삶의 활력을 얻게 합니다. 또한 자신도 성장하고 열매 맺기까지 놀라운 생명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구약 율법에 비늘 없는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늘 없는 고기는 세차게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비늘 있는 고기만 세찬 물결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믿음, 역사하는 믿음은 환란과 핍박, 곤고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어떤 유혹이나 거센 파도에도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신앙을 지키며 성장하고 열매맺는 신앙이 바로 역사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 역사하는 믿음, 살아 있는 믿음, 데살로니가 교인등리 칭찬을 받았던 이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놀랍게 성장하고 본이 되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살아있는 믿음. 역사하는 믿음을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성경에서는 가장 말씀을 가까이 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믿음을 성장 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거룩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일하게 하는 확신을 줍니다.
또 말씀은 힘을 줍니다.
또 말씀을 계속하여 먹는 사람은 확신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계속 공급받으며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산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의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 안요한 목사-절망적인 상황-아버지께서 들려주시던 말씀-
“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우리 성도님들도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여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능력의 믿음,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성도들의 본이 되시는 믿음의 소유자가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사랑이 있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댓가를 바라고 베푼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값없이 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더우기 그 사랑은 희생과 봉사의 사랑이었습니다.
또한 그 몸까지 아끼지 않으신 거룩한 희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수고가 깃든 사랑.
자기 희생을 감수한 사랑이야말로 빛을 발할 수가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사랑에는 수고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아내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또한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 남편을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우리 또한 자식들을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수고하는 사랑, 이것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다른 교회들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입으로만 하는 사랑,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 희생과 수고가 포함된 사랑의 본을 그들은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사랑에 대한 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요 13:11-18에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는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노 사도의 간곡한 권고의 말씀입니다.
사랑은 어떤 빛보다 강한 빛과 영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희생이 따를 때 더욱더 그 깊이가 더해질 수 있습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
희생이 따르지 않는 사랑이 지나치면 의심으로 변하고 맙니다.
남편에 대한 지나친 사랑은 의부증으로, 아내에 대한 지나친 사랑은 의처증이란 병적 증세로 나타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사랑의 희생이 따른다면 희생이 깊은 만큼 사랑도 깊어집니다.
초는 녹아 없어지지만 그 가운데서 빛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광채는 희생하는 수고에서 나는 것입니다.
수고하는 사랑이 넘쳐나는 교회, 생활에 본이 되는 교회, 사랑의 빛을 발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힘을 다하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세번째로 소망을 가진 교회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 꿈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젊었다 하더라도 늙은 사람입니다.
소망이 없는 나라는 부강해 보인다 하더라도 망한 나라입니다.
기독교에는 절망이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서로 속이고 속는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때로 소망이 없는 것처럼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바로 모든 꿈과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겐 절망이나 실망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이 소망은 인내로 성취하게 됩니다.
인내가 없으면 소망은 무가치하게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바로 이 소망을 이루는 인내를 가진 것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나이든 노인에게 ‘이 다음에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으면 대부분이 ‘하기는 무얼 해요 죽어야지’ 하는 절망의 말을 합니다.
소망이 없는 대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을 모신 사람은 꿈과 소망을 소유하게 됩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은 절망이나 늙음이나 근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소망을 갖지 못하도록 여러가지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눈앞에 벌어지는 여러 가지 참담하고 뼈아픈 사건들은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도록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참 소망을 예수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 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분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는 자는 기다릴 줄을 압니다.
천 년을 하루같이 여기고 환란과 핍박을 참고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어제 뿌린 씨를 오늘 거둘 수는 없습니다.
하루 이틀 잘한다고 열매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땀과 눈물을 흘리며 씨뿌리고 잘 가꾸어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소망도 우리가 가진 인생의 꿈도 이러한 참고 견디는 인내가 있어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 놀라운 역사하는 믿음과 수고하는 사랑과 인내하는 소망으로 놀라운 칭찬을 받고 본이 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도 이 희생의 사랑, 믿음의 역사,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본이 되는 성도, 본이 되는 교회, 본이 되는 멋진 인생을 살아 나가시는 1995년 한 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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