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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아우토반에 뿌린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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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경제사정을 보면 1인당 GNP 87불, 한국은행의 외화 보유잔고 2,300만불, 연간 물가상승률 42%, 실업률 23%, 민간저축율 3% 등으로 빈곤국가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했다. 그런 가운데 5.16이 일어났다.

5.16을 일으킨 박정희 소장은 이듬해인 1961년 가을 최초의 해외방문으로 미국을 찾았다. 그러나 미국을 방문한 박 전대통령은 케네디를 위시해서 미국 의회 지도자들로부터 차디찬 냉대를 받고 돌아왔다. 당시 4.19 혁명 이후 군인들에 의한 쿠데타 정권을 도와서는 안된다는 미국 여론의 빗발친 냉소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풍전등화의 어려운 역경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뜻밖에도 서독의 뤼프케 대통령으로부터 공식 초대를 받는다. '2차 대전 후 폐허가 된 땅에서, 더구나 공산주의 세력과 대치하면서 오늘의 위대한 경제건설과 번영을 이룩한 서독의 부흥상을 샅샅이 보고 오겠다'며 1964년 12월 6일 독일로 떠났다.

12월 7일 아침 9시 40분 뤼브케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수상 등의 영접을 받으며 우리 일행은 독일에 도착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박 대통령의 손을 꽉 잡았다. 그는 통일의 그날까지 경제발전을 위해 힘쓸 것을 간곡히 충고했다. 그리고 전폭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박대통령이 서독 국민으로부터 이처럼 기대 이상으로 크게 환대를 받게 된 것은 이미 1963년부터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들이 현지에서 성실하게 일해준 덕분이었다. 당시 서독 언론들은 우리나라 간호사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거의 매일같이 대서특필로 소개하였고, 이국만리 타향에 와서 그토록열심히 일하고 있는 젊은 여성들의 헌신적인 근무태도를 격찬하고 있었다. 이국 땅 낯선 곳에서 환자들의 아픈 몸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가족처럼 정성껏 간호하는 젊은 여성들의 헌신적인 간호활동은 모든 독일 국민의 가슴 속에 따스한 정을 주었고 동양의 '프로세인'으로 끝없는 애칭을 받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우리 간호사들이 서독 파견에 성공한 것은 이미 60년대 초에 가톨릭 계통의 민간협력차원에서 취업알선으로 30명 내외의 간호사가 서독의 병원에 파견되어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 한국 간호사들이 서독에서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이 독일정부까지 알려진 것이었다.
이들 덕분에 한국을 바라보는 서독국민의 열기는 대단하였고, 그 후에는 2억 마르크에 달하는 제2차 경제 원조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만일 그 당시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이 근면하고 성실한 모습이 없었던들 우리는 서독정부로부터 재정원조를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박 대통령의 방독이 그토록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1964년 12월 8일 아침 10시 55분, 방독 중이던 박 대통령은 뤼브케 서독 대통령의 안내로 루르 지방 광산 도시에 도착해 수많은 한국 간호사들과 광부의 앞에 섰다. 고생하는 젊은이들을 위문하고 격려하기 위해 찾아간 박 대통령을 맞아 국민의례가 행해졌다. 애국가를 한소절 한소절 부르다 '대한사람 대한으로...'하는 대목에 이르자 어느덧 목멘 소리로 변했다. 간호사들은 손수건을 꺼내기 시작했고, 대통령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이역만리 먼 곳에서 고생하는 간호사들과 고아부들은 자기나라 대통령을 보자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간호사 여러분, 광원 여러분,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그러나 대통령의 연설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장내 여기저기서 흐느끼기 시작했고, 끝내는 대통령 자신도 울고 말았다. 장내는 눈물바다로 변했다. 곁에 있던 육영수 여사도, 뤼브케 서독 대통령도, 그리고 수행원들도 모두 울었다.

끝내 연설은 중단되고 밖으로 나오는 데 한시간이 걸렸다. 간호사들이 줄지어 손을 내밀고 '각하, 손 한번만 쥐게 해주세요. 우리를 두고 어떻게 떠나십니까?' 목메인 소리로 대통령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간신히 아우토반에 올랐다. 고속도로 차 속에서 눈물을 멈추려고 애쓰는 모습을 본 옆자리의 뤼브케 대통령은 '각하, 울지 마십시오. 잘 사는 나라를 만드십시오. 우리가 돕겠습니다. 분단된 두 나라가 합심하여 경제부흥을 이룩합시다.'라고 위로하며 자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박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는 앞자리에 앉아 칠순의 노(老) 대통령이 40대의 가난한 대통령에게 격려하는 우정어린 대화를 통역하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창밖의 석양의 황혼길 철광산업으로 보이는 한 공장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만이 하늘 높이 내뿜고 있었다.

아직도 우리 기억에 생생한 간호사 파독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난에서 벗어나보려는 극동 조그마한 나라의 몸부림이었다. 그것은 196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경제발전의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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