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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자청년 (마 19: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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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요한일서 1장과 2장을 통해서 신자가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생명 의 사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복음전파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는 공동 체, 교회 안으로의 초청이요,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누리는 생명에의 초 청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과연 우리 안에 하나님과 더 불어 누리는 생명의 교제가 있는가 하고 스스로 늘 자문하고 확인해야 합니 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없는 공동체 안으로의 초청은 영적으로 죽은 일반 세속 단체에의 초청과 다름없는 전혀 무의미한 초청이요, 오히려 이미 생명을 얻은 자로 하여금 함께 영적으로 말라 죽게 하는 단체 밖에 되지 않 기 때문입니다. 개개인 신자도 과연 내가 날마다 하나님과 살아있는 생명의 사귐을 가지며, 내 심령과 삶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아 움직여 역사하심 을 체험하는가를 늘 확인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말씀드린 것은 이 생명의 사귐은 빛이신,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사귐인 만큼 이런 하나님과 날마다 사귐을 갖는 자라고 하면 필연적으로 그 사람의 삶도 빛 가운데 행하는 정결한 삶일 수 밖에 없다 하는 것이었습니 다. 비록 죄인인 우리에게 있어서는 아무도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정결한 빛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한한 긍휼과 용서하심,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고, 모 든 불의에서 정결케 하시는 성화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나, 거룩하신 하나님 과 사귐을 갖는 자는 그 자신도 거룩하게 사는 자 일 수 밖에 없다는 원칙 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결같이 그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빛 가운데 행하는 삶,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거룩하게 사는 성결한 삶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가 계명을 지키는가 아닌가, 그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지 아닌지를 보아서, 그가 하나님을 아는지 하나님과 생명의 사귐을 누리는 자인지를 알 수 있다 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계명 순종의 삶이 하나님과의 사귐의 증거가 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계명 순종의 삶이 하나님과의 사귐의 증거라고 하는 말씀은 어떤 더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씀인데 즉, 하 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내적 생명의 사귐의 외부적 표현이 곧 계명 순종이라 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누리는 내적 생명의 외부적 표현이요 그 생명의 자기 실현, 자기 표현이라 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표현을 빌자면 계명을 즉, 하나님 말씀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영적 생명이 맺는 결실,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 의 삶을 가리켜 항상 열매맺는 삶, 30배, 60배, 100배 결실하는 곡식과 같으 며, 거룩한 열매를 맺는 삶이라고 로마서 6장에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거룩한 삶, 성결한 삶은 생명 누림의 열매이므로 이 성결한 삶이 없는 사람은 생명의 교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만은, 그렇다고 해서 먼저 거룩하게 살아야 참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순서에 대해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먼저 생명을 얻은 자가 그 생명의 열매로 거룩한 삶이 나타나는 것이지 내가 거룩하게 살기 때문에 그래서 생명을 얻어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순서 를 뒤바꾸면 절대 안됩니다. 순서를 뒤바꿔버리면 바로 율법주의가 되는 것 입니다. 이것은 오늘 드릴 말씀과 관련이 되기 때문에 여기서 한 번 짚고 넘어갑니다.

그러나 이처럼 계명 순종의 삶이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내적 생명의 사 귐의 외부적 표현이요, 결실이라고 하는 사실은 어떤 더 깊은 원리를 그 안 에 품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내적 생명의 사귐이

대등한 관계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귐이 아니 라 명령자와 피명령자, 명령자와 명령받는 자, 통치자와 피통치자,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그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귐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사귐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통치라고 하는 형식 안에서, 그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누리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통치 안 에서 누리는 생명과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 나님과의 사귐, 그리고 그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참 생명은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일부러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오늘 취급할 본문 가운데 이 부분을 밝혀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취급하는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세 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에 다 같이 나타나며, 그것도 매우 흥미롭게 세 복음서가 꼭 같이 부자 청년 이야기 바로 앞에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는 사 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경우에는 그 어린아이를 축복 하신 사건 앞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가 의 문제를 다루고, 어린아이를 안수하시고 축복하신 사건은 천국이 이런 자 의 것이니라고 하는 말씀이 가리키듯 누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가 즉,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고, 부자 청년 의 이야기는 세 복음서가 꼭 같이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행해야 영 생을 얻겠습니까' 하는 말씀이 가리키듯 영생을 얻는 문제를 취급하고 있습 니다. 이 모든 비유와 사건들이 각각 의, 하나님의 나라, 영생을 얻는 것에 대해서 말하지만 의, 하나님의 나라, 영생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실제에 있어 서는 동일한 내용을 뜻하거나 아니면 상호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들이므로 실제에 있어서 이 모든 비유의 사건은 같은 주제 즉,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주제를 다룬다고 할 수 있 습니다. 즉, 오늘 취급하는 본문 말씀도 지난번 요한일서에서 취급한 주제 생명,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누리는 참 생명, 영생에 대해서 개괄적인, 서론적인 전체 윤곽을 말씀드렸습니다만은 오늘은 이 생명,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어떻게 받아 누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영생을 갈구하는 어떤 청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 고 본문 말씀은 이 청년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여러가지 사실을,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인물에 대해 이처럼 자세히 묘사하는 것은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 이야기와 더불어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어떤 인물에 대해, 그 사람의 배경에 대해서 그렇게 신상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하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우선 이 청년은 영생에 대한 깊은 관심과 그것을 갈구하 며, 소원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영생에 대한 그의 간구가 얼마나 간절하 고 진지했는가는 그가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태도를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17에 보면 그는 힘을 다해 달려와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단맛, 쓴맛, 황금기 다 보내고 늙어 죽을 날을 앞둔 노인이 우리 인생이 결국 이렇게 끝나고 마는가 라고 하는 허무감 에 사로잡혀서 어디 영생의 길은 없는가 하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 아직은 살 날이 창창한 이 젊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으니 참으로 훌륭하고 모범적인 청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젊을 때에 늙 어 죽을 날이 이르기 전에 조물주를 기억하라고 하는 전도서의 말씀에 철저 히 충실한 청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우기 그는 부자였다고, 그것도 어지간한 부자가 아니라 심히 부유한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자로 성경은

묘사하고 있고, 누가복음에 보면 거기에다가 관원이었다고 하니 돈과 권력을 아울러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웬만한 사람이면 인생경험이 풍부한 노인이 라 할지라도 이만한 재물과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면 그저 이 돈과 권 력을 가지고 인생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 버리지 영생에 대해서 새삼스런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더우기 젊은 청년이 아닙니까 한창 인생의 모든 것을 손아귀에 넣고 즐기고 싶은 마음이 섰을 때가 아닙니까 사실 오늘 우리의 경우를 보아도 생활에 아무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 명예와 지위 와 재물과 그런 것들을 다 소유한 사람들은 그들이 그렇게 재미있게 즐기는 이 세상의 생명이 아니라 또 다른 생명에 대하여 이야기해 봐야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그 많은 재산과 권력을 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만 가지고서는 안되겠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요, 더 귀한 것, 영생이 있음을 깨닫고 영생 얻기를 소원했습니다. 더우기 혈기방자한 청년임에도 불 구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시자, 내가 어려서부 터 이런 것들을 다 지켰다고 대답할 만큼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만하면 어느모로 보나 세상적인 안목에서나 신앙적인 면에서나 전혀 흠잡을 데가 없는 모범적인 청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남의 눈 에나 자기 눈에 다 같이 육적으로, 영적으로 부유했던, 모자라는 것이 없었 던 부자 청년이었지만 막상 자신의 영생문제에 대해서는 남에게 내보일 수 없었던 어떤 내적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그는 영생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내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다는 그런 자 신이 없었습니다. 만일 그가 내가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 또는 소유하고 있 다고 하는 그런 자신과 확신이 있었더라면, 예수님께 이처럼 급히 달려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을 했을리가 없기 때 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달려와서 분명히 영생의 길에 대해 가르쳐 줄 수 있는 선생이라고 믿고 꿇어 앉아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하 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 이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영생의 길을 물은 그 질 문의 성격에 대해서 즉, 그가 왜 예수님께서 영생의 길을 대답해 줄 수 있 었다고 생각했는지 말하자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나왔는지에 대해서 잠깐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이 청년이 예수님께 나와서 물은 질문 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였습니다. 즉, 그는 자기가 무엇을 행해서 영생 얻는 길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행위에 의 한 영생, 자기의 '의', 율법적 '의'에 의한 영생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 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은 결국 자기 행 위에 근거한 영생, 자기 '의', 자기가 이룬 '의'에 근거한 영생을 염두에 두 고 한 질문이라는 사실을, 거의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율법사의 질문인 누가복음 10:25 이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시험하여 가로되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율법 즉,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율법을 행하면 생명을 얻으 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율법사는 자기를 의롭게 보이기 위해서, 자기를 의롭 게 하기 위해서, 달리 표현하면 자기가 의롭다고 하는 자기 주장과 자기 확 인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환언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의로와지는 길, 그리고 영생을 얻는 길을 고수하기 위해서 '내 이웃은 누구니이까 내가 누구에게 더 이웃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부자 청년의 이런 질문 '내가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하 는 질문은 동시에 그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고 나아왔는지를 암시해 주 고 있습니다. 즉, 부자 청년은 선한 선생,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하여 의 로와질 수 있는 인간의 전형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하고 나아온 것입니다. 달 리 표현한다면,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하여 의로와질 수 있는 길

을 말해줄 수 있는 선생이라 생각하고 그 방법에 대해 물은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하여 의로와질 수 있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본 것입니다. 하나의 선한 인간, 그 스스로의 힘으 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인간의 가능성, 인간의 전형을 본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수수께끼와 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네 가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것에 관해서 묻느냐'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 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유일하게 선하신 분이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대답은 매우 암시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와질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고 즉, 예수님을 선한 인간으로 보고 질문하는 청년 에게 '어찌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선하시다'고 하는 대답은 예수님은 하나님도 아니시요 선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네가 나를 선한 인간의 전형으로 보고 묻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노니 하나님 외에 어떤 인간도 선하지 못하다는, 악하다는 뜻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숨은 더 깊은 뜻은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가 나를 선한 인간의 전형으로 보고 묻는 질문에 대답하노니 어떻게 인간에게 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느냐,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다. 이 말씀은 오직 하 나님만이 선의 유일한 근원과 표준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근원적으로 선하시어서 모든 선의 근원이 되시고,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말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선을 행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자의로, 제 스스로 이것이 선이다, 저것이 악이다라고 정해서 지키 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 즉, 선의 유일한 표준과 근원으로서의 하나 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그의 계명을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 라서 무엇을 스스로 행해서 영생을 얻으려면, 자기 의에 의한 영생을 얻으 려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영생에 들어가기를 원하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는 말씀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그와같은 말씀에 청년이 그러면 어떤 계명을 뜻합니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열거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부모 를 공경하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을 들은 후 청년은 자신있 게 말했습니다. 이 계명들은, 이 정도는 어려서부터 항상 내가 지켜왔습니 다. 무엇이 더 부족합니까. 누가복음 10장에 나타난 율법사의 경우는 자기 를 의롭게 보이기 위해서, 계명을 지키는 일에 관한한 자기가 의롭다고 하 는 것을 그 확신과 주장을 고수하기 위해서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물 었다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를 알지 못하고 스스로 의로와질 수 있다고, 율법을 다 지켰다고 그 정도는 다 지켰다고 고집하는 청년을 예수님께서는 주시하 여 보시면서 사랑하여 말씀하시되 그가 대견해서, 그만큼 율법을 지켰으니 대견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그를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으로 말씀하시되 아직 너에게 부족한 것이, 남은 것이 한 가지 있다. '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표현들은 한결같이 너는 다 지켰다고 장담하나 온전하게 지킨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나를 선한 인간의 전형으로 보고 선한 것에 대해서 물었을 때에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시다, 오직 하나님만이 선의 유일한 표준과 근원이시 다라고 하는 말의 뜻을 알지 못하느냐, 너는 하나님의 계명을 적당히 네 수 준에서 이해해서 다 지켰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네가 보는 선의 표 준이요, 네가 생각하는 수준에서 지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보 시는 선, 의의 표준이 무엇인지 아느냐 하나님의 계명의 수준이 얼마나 높 은지 아느냐라고 하는 뜻이 그 속에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이 얼마나 엄중한가 하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 그리하여 그 청년이 죄인임을 스스로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

께서는 청년에게 이웃 사랑을 그럼 한 번 실천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 님께서 요구하시는 이웃 사랑이란 네가 그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재산을 하 나 남김없이 몽땅 팔아서 가난한 사람, 그 재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의를 고집하기 위해서 내 이웃 이 누구니이까라고 물은 율법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웃은 나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람, 나에게 가깝고, 잘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사마리아인이라고 개 처럼 취급하는 원수 같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곤경에 처해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면 기꺼이 그 의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다. 그는 나를 멸시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원수 라 할지라도 그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면 그를 긍휼히 여겨서 그에게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요 구하시는 이웃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자기를 온전히 희 생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자기 포도주와 기름으로 원수 같 은 유대인의 상처를 치료하고 자기 나귀에 태우고 저는 걸어갔으며, 여관에 맡기고 떠날 때에 자기 돈으로 넉넉하게 지불하다 모자라면 돌아갈 때 더 주 리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상대방의 필요를 완전히 채워주는 사랑이 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여러가지 계명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이웃 사랑의 계 명을 실천해 보라고 하셨는지에 대해서도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가는 계명보다 작은 계명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영적이 고, 내적인 만큼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 실천의 정도나 여부를 가늠하기 힘 든 반면에, 이웃 사랑은 구체적인 대상을 가지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 체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인 만큼 그 실천 여부를 확인하기 쉬운 사 랑입니다. 결국 이웃 사랑을 실천해보라고 한 것은 네가 이 작은 계명도 지 키지 못하면서 더 큰 계명,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네 생명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 작은 계명 하나도 지키지 못함을 네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지 않느냐 이래도 네가 죄인임을, 네 힘으로는 결코 의로와질 수 없음을 알 수 없는가라고 하는 뜻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 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청년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이 심히 많은고 로 욕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도 못하면서 그러면서 도 자기가 죄인됨을 엎드려 고백하고 회개하지도 못하고 여전히 계명을 지켜 서, 선을 행해서 영생을 얻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의를 고집하 면서 번민과 고통에 휩싸여 돌아가는 청년을 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 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청년이 가지고 있는 재 물에 대한 사랑, 이 세상 것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장애가 된다고 하는 그런 뜻만이 아닙니다. 무언가 자기 것을 많이 가진 사 람, 영적으로 부자인 사람, 자기 의가 많은 사람, 나는 이런 저런 일을 했다 고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 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천국에 들아가는 것이, 영생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 는 것입니다.

매우 의미심장하게도 누가복음을 보면 이 부자 청년의 사건 앞에 어린아이 를 축복하신 사건이 나오고 그 앞에 바로 바리새인과 세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나로 하여금 영적 부자로 살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레에 두 번 금식하며, 십일조를 바치며, 남의 것 착취하지도 않고, 사기쳐 먹지도 않고, 간음 죄도 범하지 않고, 의롭게 살게 해 주시니, 나의 의가 이처럼 풍 성하도록 살게해 주시니 감사하나이다라고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고, 남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은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지 못했다고 했습 니다. 대신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는 세리, 민족의 반역자요, 인간 쓰레기

인 세리가 오히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전도하면 누구나 다 느끼게 됩니다만은 자기는 양심적으로 산다고 하는 사 람 만큼 전도하기가 힘든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는 양심적으로 살아서 나 같 은 사람이야 말로 구원받을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만큼 전도하기가 힘든 사람 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값없는 사랑이 필요없다고 생각합니 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치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다른 사람들보다 그래도 조금 의롭게, 양심적으로 살았으니 구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생각 배후에는 무엇을 행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런 가짜 영적 부자들, 하나님께서 요구하 시는 하나님 표준에 통과되는 의인은 하나도 없고 가짜 쓰레기 같은 의인만 이 가득한, 가짜 영적 부자들은 오히려 그 못난, 모자란, 수준 이하의 선행 때문에 천국을, 영생을 소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부유한 이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할만큼 경건한 사람이었습니 다. 여러분, 부자 청년의 말을 너무 평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자 기 양심, 자기 수준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할만큼 경건 한 사람이었습니다.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부유한, 저런 청년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 을 듣고 아직도 예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한 제자들까지 과연 어떤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일까 '저런 영적 부자가 구원을 못얻는다면 누가 도대체 구 원을 얻는 것일까' 하고 반문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께서는 다 할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영생을 얻는 일은 사람으로는 불가능하고,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 선으로, 자기 행위 로 들어갈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뜻입 니다.

예수님께서는 청년에게 이웃 사랑을 명하신 다음에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의 첫째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 이웃 사랑을 실천해보라고 함으로 써 자신의 죄인된 모습, 이때까지 나는 계명을 다 지켰다고 생각했으나 하 나님께서는 그 계명 앞에서 자신이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따 르기를 원한 것입니다. 나를 선한 인간의 전형으로 보고 너도 나 처럼 행해 서 자기 힘으로 구원받겠다고 하는 사람아, 헛된 망상을 버려라. 인간으로서 는 생명을 얻을 자가 없고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표준에서는 죄인 이어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아라. 그리고 나를 따르 라. 너와 같은 죄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비록 육신을 입고 죄인의 모습 을 취하셨으나 여전히 하나님이신,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나, 내 백성의 영적 가난과 필요를 온전히 채우시 위해서, 그 생명까지 희생한 하나님으로서의 나, 그 백성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원수시하고,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한 원수 같은 너희를 사랑하사, 영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진정한 이웃이 되신 그리스도에서 가능성을 찾으라. 그에게 소망을 두어라.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선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된 인간을 의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가능성과 능력을 바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27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 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 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이 썩어질 육신의 생명을 위한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에서 이 썩어질 육신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의를 추구하는 삶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영생을 위한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질문했습니다. 영생을 위해 우리가 행해야 할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이런저런 선행

을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 도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그의 긍휼하심에 나를 맡기는 믿음만이 요구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래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영생은 '하늘로부터 온' 즉,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를, 그의 살과 피를 먹 고 마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믿음으로 그가 이루신 구 속을 값없이 받아 누리는 것, 그의 피로 이루신 죄사함을 받아 누리는 것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은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혈육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혈육에 참여 한다고 하는 것은 그와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아담의 혈육에 다 참여한다고 그럽니다. 우리 인간이 태어난 것은 흔히 부정 모혈로 태어난다고 그럽니다만은 모든 인간은 혈연관계로 맺어져 있습니다. 그 혈육 에 참여한다고 하는 것, 한 혈육이 된다는 것은 하나됨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아담의 혈육에 참여해서 그와 하나되는 인류가 아담의 범죄와 그 결과인 사망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이 그리스도의 영적혈육에 참 여해서 영적으로 그와 하나된 그리스도인들은 그에 의해 참여한 바가 되어 서 영원한 생명을 그 안에서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너무 딱딱하게 되었습니다만은 오늘 드릴려고 했던 말씀의 주제-우리가 복음에 초청받는 다고 하는 것-우리가 신앙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사귐 을 갖는 것인데, 하나님의 사귐 안에서 영원한 생명 누림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그럼 이 생명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 누릴 수 있는가 오늘 말씀에서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기를 사람의 가능성, 사람의 능력 밖이 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제일 위험한 것은 내가 뭘 행해서 구원을 얻는다 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 아니라고 말은 합니다. 세례 문답 때 들어보면 '어떻게 구원얻습니까', '믿음으로 얻지요', '믿습니까', '예' 합니다만 그 대답하는 신앙고백에 자신이 없고 그와같은 고백 속에 어떤 내 적인 감동과 감격이 없는 것은 실제에서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만 달작 거리지 진심으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무엇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철저히 젖어 있습니다. 태어나서 이때까지 그런 식의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좀 식자층에서 웬만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욕이 뭔가 하면 공짜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의식 속에서는 철저히 공짜를 바 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찌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준다고 하니까 내 가 무슨 보답으로 내놔야 하고, 내가 먼저 값을 치뤄야 받을 수 있는 것으 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믿으려고 고백을 하는데 속에서는 그것 이 정리가 안되어서 실제로는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영생은 하나님이 주시니 아무 말없이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 누리라는 것입니다. 공짜로 받는 것이 민망해서 자꾸만 무엇을 해야한 다. 비록 내가 드리는 것이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것도 다 인정하지만 그래 도 뭔가를 해야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으면서 내가 뭘 해야 한다. 내가 뭘 갚아야 한다. 또 미리 값을 치뤄야 한다는 것은 인간 적인 윤리 차원에서는, 또 우리 세속적인 인간 표준에서 보면 상당히 신사적 이요, 참 좋은 사람 같이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이것은 굉장히 모독적인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우리가 값주고 살 수 없을 만큼 비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으로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해서 어떤 분이 1억원 상당의 선물을 주었는데 받는 사람이 너무 미안해서 10원짜리 사탕을 주었다고 합시다. 그래놓고 나와서는 늘 생각하기를 10원 주고 이 선물을 샀다고 하면, 그 선물을 준 사람한테 얼마나 큰 모독이 되 겠습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갚을 수 있는 자 가 아닙니다. 실제로 따지면 우리는 하나님께 받기만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 분이 걸치고 있는 옷, 여러분이 먹고 사는 것, 그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 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이 다 뼈빠지게 일했으니까 그것 다 내 손으로, 내 힘으로 받아 누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생명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이 있으 면, 그 물건 값도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의 주머니 사정도 생각지 않습니다.

무조건 사달라고 그러고, 사주면 뻔뻔스럽게도 고맙습니다란 말 한 마디로 끝이 납니다. 또 어린아이는 물건을 원할 때, 자기가 값을 치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는 내가 필요한 것을 모두 주시는 분이시다는 믿음, 그 하나 가지고 무조건 다 달라고 졸라댑니다. 또한 공짜로 받고 미안하다고 그러지도 않습니다. 비유컨대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받아 누림도 이와같 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너희가 어린아이 처럼 천국을 영접하지, 어린아이 처럼 천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천국을 소유할 수 없다는 말 씀의 뜻이 이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봅시다. 내가 무엇을 해서, 의를 행해서 영생을 소유해보겠 다한 바리새인, 자기의 수 많은 영적 부를 하나님 앞에 자랑했던 바리새인 들, 예수님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해 보라고 그랬 는데도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반문했던 율법사, 모두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줘보라 하신 그 말씀 앞에도 고꾸라지지 않는 이 부자 청년 은 영생에서 멀어졌습니다. 그저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아무 받을 자격 이 없으나 그저 긍휼히 여겨달라고 은헤를 구한 세리와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하니 어린아이 처럼 받아들인 삭개오는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 다. 우리가 이 사실을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늘 주위로부터 무엇을 받으 면, 반드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그것이 옳은 윤리라고 하는 사상에 찌 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도 항상 내가 무엇을 드려야 한다 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린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특히 구원 문제에 있어서는 영생을, 죽은 영혼이 새로운 생명을 얻는데에 있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할려 고 들면 받을 수도 없을 뿐더러 이미 공짜로 받아 누려놓고 내가 무엇을 해 서 누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적질하는 자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 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은 결코 진정한 마음에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네가 영생 얻기를 원하느냐 하나님께서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 보내신 성자 하나님이신 그 리스도에게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 그것을 받아 누리고, 하나님의 가능성 을 바라고 추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드린 말씀의, 부자 청 년의 비유에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의 첫번째 뜻인 것입니다.

앞의 말씀에서는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은 부자 청년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신 이 예수님의 대답이 의미하는 첫번째 의미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선해질 수 있 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자신도 선을 행하여 영생을 얻기 원해서 선행을 통한 영생을 묻는 청년에게 예수님은 계명 중의 하나인 '이웃 사랑을 실천해 보라 '고 하셨습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켰다고 말하는 부자 청년이 실제에 있어서는 지킨 것이 아니요,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불 의한 자요,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선행을 통한 영생, 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니 아예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의와 영생의 가능성과 그 근거를 네 자신에게, 인간에게서 찾으려고 하지 말 라, 아예 그 생각을 버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 영생의 가능 성을 네 자신에게서 발견하려 하지 말고 나에게서,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라 하신 것입니다. 선을 행해서 영생을 얻겠다는 생각을 아예 포기하고 그리스 도 안에서 값없이 의로 주어지는 의와 영생을 그저 받아 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원하셨던 것은 너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하나님의 엄중한 이웃 사랑의 계명 앞에서 이제껏 자기의 힘 으로 선을 행해서 영생을 얻겠다는 모든 노력이 헛된 노력이었고, 자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불의한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내가 죄인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오직 주만이 구원과 생명의 길 되심을, 오직 주 안에서 나의 영생이 가능함을 믿나이다' 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을 예수님 품 안에 던져 내 맡기심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임하는 영생의 나라, 천국에 대해서 세례 요한이나 그리 스도께서는 말씀하시되 그 외친 제일 첫 마디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임하는 영생의 나라, 그 영생에 들어 가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먼 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되었다,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 니다. '나는 죄인이요, 나에게는 의가 없다'고 시인함으로써 나의 가능성, 인간의 가능성을 철저히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가 이처럼 죄인됨을 고백하고 마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면 회개 는 우리에게 절망스러운 것, 죄인이니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기다려야 하는 절망스러운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죄인임을 시인하고 고백하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 하나님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용서하고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바라고 그의 긍휼하심에다 자 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요. 예수님을 만났거나 또는 하 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참 믿음의 소유자들의 간구는 '주여, 긍휼히 여기어 주십시요'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오니 내 안에서는 더 이상 영생의 구원의 가능성이 없나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용서하시고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주의 긍휼을 의지하오니 나를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이와같은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무릎 꿇는 자는 그 순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며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생 명을 받아 누리는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직 이와같은 믿음으로 하나님 의 긍휼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그것에 나 자신을 맡기는 믿음으로 우리는 영 생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의 특징은 시종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나는 죄인이요, 구원의 가능성이 나에게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요, 오직 모든 가능성 은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긍휼과 사랑에 두고 이를 붙잡는 것입니다. 나에 게는 의로운 것이 없습니다. 내가 뭐 받을 만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요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자기 부정의 태도, 자기 의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 의 의를 붙잡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롬 10:3을 보면 바울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습니다. 이 유대인, 구약 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 이스라엘 사람들, 이 사람들이 망해 버 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으나 십자가에 못박고 또 그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를 온갖 핍박으로 박해하던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이었습니다. 이 불쌍한 사실을 두고 바울 사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왜 유대인이 이처럼 하 나님의 복음에 참여하지 못하는 줄 아는가' 그것은 이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안식일에 적 군들이 달려와 목을 쳐도 감수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에게는 열심이었 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하자면 옳은 열심 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의 내용을 설명하여 말하기를 '자기 의를 고 집하다가 하나님의 의를 배척하는 민족'이었다는 것입니다. 제 스스로 뭔가 선을 행해서 영생을 얻었다고 날뛰다가, 정작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 혜를 거부하는 민족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망하였다고 바울 사도는 한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는 말씀의 두번째 뜻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내용에 따르면,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계명 즉, 율법의 말씀은 이 부자 청년으로 하여금 그가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동시 에 자신에게는 영생의 가능성이 없음을 깨달아서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하려 는 즉,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의 정체를 드러내서,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해서 스스로 정죄받아 나는 구 원받지 못할 죄인임을 깨닫게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 라' 이웃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신 의도가 그저 네가 죄인임을 깰달아 그리스 도를 의지하라 즉, 청년으로 하여금 스스로 죄인임을 깨달아 그리스도를 의 지하게 하려는 그런 목적으로만 주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와같은 계명을 말씀하신 것은, 이웃 사랑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저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의도뿐이고 실제로 그렇게 행하는 의도는 없는, 그런 시도도 하지 않는 빈말에 지나지 않는 계명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9장 본문 말씀을 주의 깊게 읽으면 누구나 느끼듯이 이 계명은 그저 빈말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저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말씀만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렇게 행하라고 주어진 말씀입 니다. 이 계명을 말씀하신 의도는 먼저 부자 청년으로 죄인임을 깨달아서 그 리스도를 의지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생명을 얻게 하려는 동시에 믿게된 경우, 그 청년으로 하여금 그 계명을 실제로 실천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시려는 이 두 가지의 의도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라' 이 간단한 말씀 속에 율법의 이중 기능 즉, 하나는 죄의 정체를 드러내어 우리로 하여금 죄 인임을 깨닫게 하고, 따라서 나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으니 그리스도를 의지해 야겠다는 이런 기능과 동시에, 그처럼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난 다음에는 계 명을 실제로 순종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게 하려는 이 두 가지 기 능이 거기에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간단한 말씀 속에 이처럼 복잡한 내용이 함축되어 있을 수 있는가 또 어떻게 그 한 마디 동일한 말씀 이 그런 이중적인 뜻을 가질 수 있는가 의아해 하는 분을 위해서 좀더 구 체적인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로마서 6장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은혜가 더욱 풍성 하도록 우리가 계속 죄에 머물러야 하겠는가 그리스도 안에는 무한한 죄사 함, 용서가 있으니 이제는 죄짓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 는 것에 대해서 특별히 마음 쓸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건 그렇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생각은 안해도 되지 않는가, 왜냐하면 죄를 지어도 이미 무한한 용서를 이루셨으니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것이며, 오히 려 죄를 범하면 범할수록 그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상대적으로 더 풍성해질 것이니 오히려 더 좋은 것이 아닌가' 이와같은 어리석은 가상적 인 질문에 대해 바울이 반문하기를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 믿음 으로 그와 하나되어 그 안에 있는 영생을 누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냐 고 힐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얻는다고 하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곧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요 즉, 하나님 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던, 계명을 지키지 않던 불순종의 삶과 관계를 끊는 것 이요, 거기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 는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새 생명 의 특징은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것, 불의의 삶을 청산하고 모든 지체 를, 모든 삶을 의를 행하는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 거룩한 열매 맺는 삶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구원 자체가 하나님을 불순종하여 죄와 사망 가운데서 헤매는 상태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서, 하나님을 순종하여 생명 을 누리는 새 생명을 얻게하는 것인데 죄를 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이 새로 얻는 구원의 생명을 버리고 다시 죄와 사망 가운데 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니, 기껏 죄와 사망에서 종노릇하는 것을 해방시켜주 었더니 다시 죄에게 종노릇하겠다고 부득부득 걸어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

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서, 해방시켜서 자유롭게 하나님 을 섬기라고 해 주었더니, 고기가 먹고 싶어서, 죄짓던 생활이 그리워서 다 시 애굽으로 돌아가겟다고 아우성치는 이 이스라엘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된 다스림 안에서 생명을 누리며 사는 이 순종의 삶 을 은혜로 우리에게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또 죄를 짓는다고 하는 것,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 생명 즉, 영생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기껏 생명을 주었는데 다시 죽음의 상태로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계명 순종과 생명을 누리는 삶이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번에도 거듭 주의를 환기시켰습니 다만 우리가 계명을 순종해서 그 보답으로, 그 댓가로, 그 보상으로 생명 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계명 순종의 삶과 생명 누림이 밀접 한 관계에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생명의 본질이 바로 순종의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새 생명, 영생 은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는 형식으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순종의 형식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계명, 율법의 이중 기능 즉, 죄인임을 깨닫게 해서 그리스도 를 의지하게 함으로써 새 생명을 얻게 하고, 또한 계명을 순종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생명의 삶, 계명을 순종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생명을 누리는 이 삶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율법의 이중 기능을 다른 각도에서 한 번 살펴보기로 합시다. 조금 이해를 돕기 위해서 율법의 첫째 기능이 우리로 하여금 죄의 정체를 드러내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은 죄다, 가장 큰 죄다. 이와같은 율법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살면서도 죄가 죄인줄 모릅니다. 이와같은 율법이 있으면, 아! 그와같은 것이 죄로구나, 죄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의 정체 를 드러내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이 율법의 첫째 기능 즉, 이렇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뭐 한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말하자면, '율법에 비춰보니 아!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로구나' 하는 이 런 깨달음이 있는 자는 그 깨달음 이전에 또 다른 깨달음이 있어야 됩니다.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거룩하고, 신령하고, 선하고, 의로운 계 명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어떤 계명을 두고서 이것은 하 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요, 이것은 옳고, 선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법에 비추어서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계명에 비추어서 내가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먼저 그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요, 거룩하고, 선하고, 옳은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믿음이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 명을 얻은 사람 즉, 모든 중생자는 이미 하나님의 율법이 선하고, 신령하며, 옳다는 것을 인정한 사람이요, 따라서 모든 중생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 하고 그대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다 기초적으로 경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계명 앞에 '내가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의 사랑이 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의지 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이전에 나를 정죄하던, 나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던 그 계명이 나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 계명을 기뻐하게 됩니다. '아! 저것이 옳구나, 저렇게 살아야겠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고 하는 소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첫번째 현상입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거듭거듭 말하기를 중생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선하고 신령한 것으로 인정할 뿐 아니라, 그 율법 행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기뻐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생명, 새 생 명의 본질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계명, 하나님의 율법이 옳고, 거룩하다고 인정하는 마음이 없다거나, 계명을 기뻐하고 그것을 행하기를 원하는 소원 이 없다면 이 사람은 중생한 사람,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시작된 새 생명의 소원보다, 그것이 외치는 소리보다 우리 육신의 정욕이 외치는 소리가 더 커서 거기에 눌려 지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이와같은 이중 기능이 가장 아름답게 이루어진 실례를 우리는 삭 개오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자기 의를 자랑하는 바리새인과 회개하는 세리의 이야기로 시작한 후에 어린아이 안수 사건이 나오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바로 부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소경의 이야기가 나오고 이어서 삭개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순서로 배열된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부자 청년과 삭개오가 이 초두에 있던 바 리새인과 세리의 전형, 또는 실례로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자기 의를 고집하 던, 자기가 선을 행해서 영생을 얻겠다고 하던 부자 청년은 '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이웃 사랑의 계명 앞에서 스스로 죄 인임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 계명을 실행하지도 못하고 근심하면서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자타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세리 삭개오는 그저 예수님께서 주신 다고 하니 어린아이 처럼 영생을 받아 누렸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저 은혜로 값없이 영생을 받은 삭개오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가 진 재산 전부를 남에게 끼친 해를 보상하는데, 그리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데 사용함으로써 그처럼 경건한 부자 청년도 실패한 이웃 사랑의 계명 을 이 세리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가 훌륭하게 실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은혜로 받은 영생에 대한 보답으로 이웃 사랑 을 실천한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누리게 된 영생, 이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그가 얻은 새 생명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처럼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삶이며, 거룩하 고 선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삶인 것을 그는 직감하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일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런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갖고 있는 오해가 예수 믿어 공짜로 값없이 구원얻어 그 다음에 게명을 순종해서 거룩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구원 을 얻었으니 이제 내가 하나님을 순종하므로 보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의무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큰 잘못인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죄에 찌들어서 우리가 원하는 삶이란 너무나도 뻔하잖습니까 남을 억 누르고 남의 것을 빼앗고 착취해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입니다. 내 자식, 내 가족, 내가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입니 다.

이것이 과연 참된 삶일까요 이것이 아름답고 고귀한 삶일까요 아무도 그 렇다고 생각지는 않을 것입니다. 서로 잡아먹고 약육강식하는 그와같은 삶이 결코 고귀한 삶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모든 계명들, 그것이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 같으나,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의 계명대로 그대로 산다고 하면, 그것처럼 고귀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삶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그 삶 자체가 가장 귀한 복입니다. 그것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아름 다고 귀한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여러분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신 새 생명, 그것은 바로 이와같이 고귀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 계명 앞에서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나에게로 와서 영생을 얻으며 하나님의 거룩하고 고귀한 계명을 순종하라'는 삶, 그 거룩한 생명의 삶을, 그 생명을 지속적으로 누리며 살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 '나를 따르라'는 말씀의 또 다른 뜻은,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게된

자에게 이루어진 삶, 요구되는 삶은 전적 헌신의 삶, 예수 그리스도께 나를 전적으로 드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네 전 재산을 다 포기하라는 말씀을 듣 고 재산을 포기하기 보다는 그가 그처럼 갈망하던 영생을 포기하는 이 청년 의 행동에서 볼 수 있듯이, 부자 청년에게 있어서는 영생보다 재물이 더 귀 했던 것입니다. 영생이 재물보다 더 귀했다면 그는 재물을 포기했겠죠. 또,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재물을 포기하라 한 것은 그 저 재물만 포기하라 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전부를 포기하라 하신 것입니다.

자기 전부를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는 전적 헌신의 삶을 요구하신 것 입니다.

이 말씀과 관련된 19:27의 말씀을 보면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 으리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모와 아내와 남편과 자식과 재물을 다 버리 고 주를 좇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전적 헌신의 삶은 특별한 사명을 받 은 사도나 목사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믿는 자에게서 전적으로 헌신을 요구하신다 고 말하면, 대개 사람들은 그것은 목사나 할 수 있는 것이요, 특별한 은혜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것은 대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잘못된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첫째는 세상 재미도 손에서 놓기 싫고, 구원은 받고 싶다는 생각 때문 입니다. 세상 재미도 적당히 보고 구원도 받고 싶고 그래서 주일 날에 열심 히 와서 찬송, 기도하고 그 외에 나머지 6일 도안은 제멋대로 적당히 살아 갑니다. 이것은 비유컨대, 생명과 사망 중간 지점에 서 있겠다고 하는 뜻인 데, 사람이 죽기도 하고 동시에 살기도 할 수 있습니까 죽거나 아니면 산 것이지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식물인간 상 태라면 모르겠습니다만, 만일 영적으로 식물인간 상태라면 그것은 참 형편없 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함께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것은 특별한 사명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는 명 령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흔히 열심인 신자들에게 발견되는 한 가지 오해인데,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일, 신앙생활은 교회 내에서 주일날, 수요일, 금요일에만 할 수 있는 것이요,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만 경건한 일이요, 하나님의 일이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몇 몇 신자들, 교회 직분자들끼리 어울려 다니면서 모여서 하는 일 그것만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 은 어디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모든 인간관계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 니다. 부부 간에서, 부모 자식 간에, 직장에서, 직장 동료 간에서 하나님의 뜻, 말씀을 따라 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 장소가 어디거나 그 대상이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삶 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몸 담고 사는 세상 환경은 악하고 일그 러져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일그러진 부부 관계, 원수 같은 부모 자식 관계, 시기, 질투, 약육 강식의 직장 동료 관게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나 자신 의 희생하는 사랑을 통해, 하나님 주신 힘으로 그 뜻을 이루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교회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삶, 삶의 모든 부분에서 전적인 헌신,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만 을 위해서 사는 삶이 이루어지길 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모 든 장소에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 순종의 삶이 이루어지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영역에서 전적 자기 부정의 삶, 여기서 자기 부정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위해 사는 삶이 아 니요,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 이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말씀들일 것은 이와같은 헌신의 삶,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삶은 인간 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포기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 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부자 청년이 슬퍼하면서 돌아가자 예수님께서는 말 씀하시기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불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경악했습니 다. 심히 놀랐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보다 더 심한 말이 경악했다, 'shock' 를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저런 경건한 사람,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부 자인 사람이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과연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주시하면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함이라.

이 말씀의 첫번재 의미는 지난 번 말씀드린 대로 사람이 자기 선행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의와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말씀을 듣고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물은 이 제 자들의 반문에는 또 다른 의미 즉, 영생을 얻기 위해서 부자 청년처럼 그가 가진 모든 것, 그 자신 전부를 포기해야 한다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 사 람이, 그래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는 의미도 그 속 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인간인데 과연 누가 자신을 전적으로 포 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헌신의 삶을,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순종하며 살 수 있겠는가 네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네 가진 것을 모두 팔아 이웃을 사랑 하라는 이런 삶을 과연 누가 살 수 있겠는가 제자들의 이러한 반문은 당연 한 것이었고, 옳은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확인하시기를 사 람은, 인간은 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삶, 그것 은 사람의 힘으로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되면, 다 행해서 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계명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 영생을 얻은 자가 그 후 날마다 하나님의 계명 을 순종하여 사는 삶 안에서 영생을 지속적으로 누리는 것은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신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을 얻었지만 구원 얻은 다음부터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보답해서 열심히 내 힘으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이런 보답과 감사의 삶이 당연히 내 힘으로 내 열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잘못된 생각입니다.

로마서 7:14 이하에 보면 바울은 중생한 자에게서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며 그 계명대로 행하기를 원하는 소원이 간절함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백 번이면 백 번, 죄의 힘에 눌려서 패배하며 죄의 노예로, 포로로 사로잡혀가는 것을 봅니다. 자기 힘으로 도저히 죄의 힘, 자신의 부패, 곧 타락한 성품, 자연인 속에서 역사하는 죄의 세력, 육신의 정욕과 싸워 이길 수가 없음을 발견합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계명을 행할 수가 없음을 발견합 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여러분께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려고 많이 노 력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성공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부자 청년 처럼 '난, 다 행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부자 청 년 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적당히 할인해서 행한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의 힘으로는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체험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려는 소원은 그처럼 간절한데 내가 아무리 할 려고 해도 맨날 죄와 싸워 지니, 그것이 너무 답답하고 비참해서 바울은 탄 식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에서 구하려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번 더 나 자신을 부정하지 않 으면 안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계명을 행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부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계명을 행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부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한 바울 사도께서, 자기 자 신에게서는 죄와 싸워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악함과 무력함을 발견하지만 그

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 자신에게서는 죄에 대한 승리를 확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8:1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느니라'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연인으로서의 바울에게 있어서 는 전혀 불가능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게에게서는 생명의 성령의 법 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부터 해방시켰음을, 자신을 해방시켰음을 발견합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따라가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 이면 반드시 살리리니, 여기서 영은 성령님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몸의 행실, 육신의 정욕에 따라 행하는 일을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육신의 정욕, 죄의 세력 을 죽이시는 능력이 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날마다 받으며, 생명을 누 리는 삶이 가능하다고 그는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의 힘주심과 인도하심 안 에서 생명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나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받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으며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으며, 이처럼 성령님께서 참 된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케 하시려고 날마다 지속적으로 힘주시는 것입니다.

첫 시간 설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귐 안 으로 들어가며 그 사귐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 살아 움직이는 생명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께 서 죄인을 사랑하시는 무한한 긍휼로 그 아들에게 주사 우리로 하여금 받아 누리게 하신 것이요, 그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구속을 통하여 받아 누리게 하셨고, 성령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사 이 생명의 사귐 안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케 하시는 능력 이 되사 날마다 이 생명의 살아 있는 움직임, 활동이 있게, 열매가 있게 하 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철저한 자기 부정입니 다. 나는 의가 없다, 나는 의로울 수가 없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내 삶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자신의 능력을 부정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는 것과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신뢰하 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지는 의와 생명을 받아 누리며, 그 다음에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 어지는 성령님의 힘으로 사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 도 할 수 없사오니 오직 주를 의지하나이다' 하는 것이 신자의 삶의 기본 태 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내어 맡기는 삶, 어떤 사람은 성령님은 능력 덩어리여서 뭘 받아 가지고 내가 그 능력을 가지고 어떻게 하는 것으로 생각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과 꼭 마찬가 지로 인격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듯이 우리는 성령님 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이 자기 부정의 삶과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태도, 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상기하기를 원합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던 부자 청년은 계명 순종에 실패한 반면, 철저히 자기를 부정한 세리 삭개오는 은혜로 영생을 얻고 새 생명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의해서, 성령님의 힘 주심에 의해서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계명을 순종하는 삶 안에서 생명을 계속 누린 것을 기억합시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가 예수를 믿을 때나, 이미 그리스도를 믿은 신자에게서나 늘 자기 부정이 요구되고, 자기 부정,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태도가 요구되고, 오직 그리스도를 의 지하는 것, 그리스도 안에 내 모든 것을 던져 넣는 것, 그리스도를 의지하 는 것, 그를 따르는 삶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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