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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남궁억이 꾸민 보리울의 무궁화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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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홍천에 모곡이란 곳이 있는데 토박이말로 ‘보리울’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일반 교통으로 가기 힘든 첩첩산중 시골입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해(1918년), 서울에 살던 고관 출신 양반이 이곳 보리울로 이사 왔습니다. 그는 성주 목사, 양양 군수, 내부 토목국장, ‘황성신문’사장을 역임한 남궁억 선생입니다. 남궁억 선생은 민족의식이 강한 감리교인이었는데,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합하자 관직을 내어놓고 배화여학교에서 여학생들에게 한화로 수놓게 하면서 “비록 나라는 잃었어도 민족정신만은 잃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이러한 선생의 교육활동마저 가로막자 선생은 조상들이 살던 보리울로 낙향한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남궁억 선생이 산골로 들어가 은둔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민족운동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선생은 보리울에 학교(모곡학교)와 교회(모곡교회)를 세우고 친히 지도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우리나라 글과 역사를 가르쳤고, 손수 등사판 ‘조선이야기’라는 역사책을 만들어 주변 학교 교사들에게 돌렸습니다. 인근 홍천, 춘천, 평창 등지의 젊은 교사와 목회자들이 남궁억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려 모여 들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십자가당’이란 비밀 지하단체가 조직되었습니다. 그리고 남궁억 선생은 보리울에 무궁화동산을 꾸미고 무궁화 묘목을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무궁화 묘목은 마치 뽕나무 묘목과 흡사했는데, 일제가 1930년대 양잠을 강조하며 뽕나무를 전국에 보급하자 무궁화 묘목을 뽕나무 묘목으로 위장해 전국에 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전국 지방 곳곳에서 무궁화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고 이에 놀란 일경이 수사에 착수하여 보리울의 무궁화동산을 찾아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 ‘십자가당’조직도 일본 경찰 조사망에 걸려 결국 남궁억 선생은 동지 15명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1933년 11월의 일로 당시 선생은 칠십 나이였습니다. 남궁억 선생은 십자가당과 무궁화동산의 주모자로 찍혀 15개월 옥고를 치렀습니다. 고령에 투옥생활은 선생의 건강을 급격히 악화시켰고 결국 석방된 후 5년여 투병생활을 하다가,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나무 아래 묻어 거름이나 되게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별세하셨습니다. 돌아가신 날이 1939년 4월 5일, 훗날 후손들이 ‘식목일’지키게 되는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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