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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자 청년의 영생의 질문 (마 19: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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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요한일서 1장과 2장을 통해서 신자가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생명 의 사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복음전파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는 공동 체, 교회 안으로의 초청이요,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누리는 생명에의 초 청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과연 우리 안에 이 생명이,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생명의 교제가 있는가 하고 스스로 늘 자문하고 확 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없는 공동체 안으로의 초청은 영적 으로 죽은 일반 세속 단체에의 초청과 다름없는 전혀 무의미한 초청이요, 오 히려 이미 생명을 얻은 자로 하여금 함께 영적으로 말라 죽게 하는 단체 밖 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개인 신자도 과연 내가 날마다 하나님과 살아있 는 생명의 사귐을 가지며, 내 심령과 삶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아 움직 여 역사하심을 체험하는가를 늘 확인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말씀드린 것은 이 생명의 사귐은 빛이신,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사귐인 만큼 이런 하나님과 날마다 사귐을 갖는 자라고 하면 필연적으로 그 사람의 삶도 빛 가운데 행하는 성결한 삶일 수 밖에 없다 하는 것이었습니 다. 비록 죄인인 우리에게 있어서는 아무도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성결한 빛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한한 긍휼과 용서하심,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고, 모 든 불의에서 정결케 하시는 성화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나, 거룩하신 하나님 과 사귐을 갖는 자는 그 자신도 거룩하게 사는 자 일 수 밖에 없다는 원칙 에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결같이 그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빛 가 운데 행하는 삶,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거룩하게 사는 성결한 삶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바로 이것을 보아서, 그가 계명을 지키는가 아닌가, 그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지 아닌지를 보아서, 그가 하나님을 아는지 하나님과 생명의 사귐을 누리는 자 인지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잠깐 계명 순종의 삶이 하나님과의 사귐의 증거가 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계명 순종의 삶이 하나님과의 사귐 의 증거라고 하는 말씀은 어떤 더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씀인데 즉,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내적 생명의 사귐의 외부적 표현이 곧 계명 순종이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누리는 내적 생명의 외부적 표현이요 그 생명의 자기 실현, 자기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계명을 즉, 하나님 말씀을 행한다고 하 는 것은 영적 생명이 맺는 결실,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삶을 가리켜 항상 열매맺는 삶, 30배, 60배, 100배 결실하는 곡식과 같으며, 거룩한 열매를 맺는 삶이라고 로마서 6장에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거룩한 삶, 성결한 삶은 생명 누림의 열매이므로 이 성결한 삶이 없는 사람은 생명의 교제가 없 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만은, 그렇다고 해서 먼저 거룩하게 살아야 참 생명 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순서에 대해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먼저 생명을 얻은 자가 그 생명의 열매로 거룩한 삶이 나타나는 것 이지 내가 거룩하게 살아서 생명을 얻어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순서 를 뒤바꾸면 절대 안됩니다. 순서를 뒤바꿔버리면 바로 율법주의가 되는 것 입니다. 이것은 오늘 드릴 말씀과 관련이 되기 때문에 여기서 한 번 짚고 넘어갑니다.

 그러나 이처럼 계명 순종의 삶이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내적 생명의 사 귐의 외부적 표현이요, 결실이라고 하는 사실은 어떤 더 깊은 원리를 그 안 에 품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생명의 사귐이 대등 한 관계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귐이 아니라 명령자와 피명령자, 명령자와 명령받는 자, 통치자와 피통치자, 하나님과 인 간, 하나님과 그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귐임을 뜻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사귐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통 치라고 하는 형식 안에서, 그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더 나아가서 하 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누리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통치 안에 서 누리는 생명과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님과의 사귐, 그리고 그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참 생명은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일부러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오늘 취급할 본문 가운데 이 부분을 밝혀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취급하는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세 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에 다 같이 나타나며, 그것도 매우 흥미롭게도 세 복음서가 꼭 같이 부자 청년 이야기 바로 앞에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경우에는 그 어린아이를 축 복하신 사건 앞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가 즉 '의' 문제를 다루고, 어린아이를 안수하시고 축복하신 사건은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는 말씀이 가리키듯 누가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가 즉, 누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 고,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세 복음서가 꼭 같이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 을 행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는 말씀이 가리키듯 영생을 얻는 문제를 취 급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비유와 사건들이 각각 의, 하나님의 나라, 영생 을 얻는 것에 대해서 말하지만 의, 하나님의 나라, 영생은 앞에서도 말했듯 이 실제에 있어서는 동일한 내용을 뜻하거나 아니면 상호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들이므로 실제에 있어서 이 모든 비유와 사건은 같은 주제 즉, '누 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주제 를 다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오늘 취급하는 본문 말씀도 지난번 요한 일서에서 취급한 주제 생명,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 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누리는 참 생명, 영 생에 대해서 개괄적인, 서론적인 전체 윤곽을 말씀드렸습니다만은 오늘은 이 생명,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어떻게 받아 누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 본문 말씀을 통해 말씀드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영생을 갈구하는 어떤 청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 고 본문 말씀은 이 청년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여러가지 사실을,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인물에 대해 이처럼 자세히 묘사하는 것은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 이야기와 더불어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어떤 인물에 대해, 그 사람의 배경에 대해서 그렇게 신상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하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우선 이 청년은 영생에 대한 깊은 관심과 그것을 갈구하 는, 소원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영생에 대한 그의 간구가 얼마나 간절하 고 진지했던가는 그가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태도를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17에 보면 그는 힘을 다해 달려와서,예수님께서 그 순간 그동 네를 떠나시려고 했는지 잘 모릅니다만은 어쨋던 힘을 다해 달려와서 급히 달려와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태도에서 영생에 대한 그의 관심과 소원이 얼마나 간절하고 진지 했던가를 엿볼 수 있 습니다. 더욱이 그는 젊은 청년이었다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쓴맛, 단맞, 황금기 다 보내고 늙어 죽을 날을 앞둔 노인이 우리 인생이 결국 이렇

게 끝나고 마는가 라고 하는 어떤 허무감에 사로잡혀서 어디 영생의 길은 없는가 하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 아직도 살 날이 창창한 이 젊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으니 참으로 훌륭하고 모범적인 청년이 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젊을 때에 늙어 죽을 날이 이르기 전에 젊을 때에 조물주를 기억하라고 하는 전도서의 말씀에 철저히 충실한 청년이었다 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우기 그는 부자였다고, 그것도 웨만한 부자가 아니라 심히 부유한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자로 성경은 묘사하고 있고, 누가복음 에 보면 거기에다가 관원이었다고 하니 돈과 권력을 아울러 소유한 사람이 었습니다. 웬만한 사람이면 인생경험이 풍부한 노인이라 할지라도 이만한 재 물과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면 그저 이 돈과 권력을 가지고 인생을 즐 기는 것으로 만족해 버리지 영생에 대해서 새삼스런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 입니다. 더우기 젊은 청년이 아닙니까 한창 인생의 모든 것을 손아귀에 넣 고 즐기고 싶은 마음이 솟을 때가 아닙니까 사실 오늘 우리의 경우를 보아 도 생활에 아무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들, 명예와 지위와 재물과 그런 것들 을 남부러워 할것 없는 사람들은, 다 소유한 사람들은 영생에 대해 그들이 그렇게 재미있게 즐기는 이 세상의 생명이 아니라 또 다른 생명에 대하여 이 야기해 봐야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그 많은 재산과 권력을 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만 가지고서는 안되겠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요, 더 귀한 것, 영생이 있음을 깨닫고 영생 얻기를 소원했습니다. 더우기 혈기방장한 청년임에도 불 구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시자, 내가 어려서부 터 이런 것들을 다 지켰다고 대답할 수 있을 만큼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 다. 이만하면 어느모로 보나 세상적인 안목에서나 신앙적인 면에서나 전혀 흠잡을 데가 없는 모범적인 청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남의 눈에나 자기 눈에 다 같이 육적으로, 영적으로 부유했던, 모자라는 것 이 없었던 부자 청년이었지만 막상 자신의 영생문제에 대해서는 남에게 내보 일 수 없었던 어떤 내적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그는 영생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내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다는 그런 자신이 없었습니다. 만일 그가 내가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 또는 소유하고 있다고 하는 그런 자신과 확신이 있었더라면, 예수님께 이처럼 급히 달려와 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을 했을리가 없 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달려와서 분명히 영생의 길에 대해 가르쳐 줄 수 있는 선생이라고 믿고 꿇어 앉아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 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 이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영생의 길을 물은 그 질 문의 성격에 대해서 즉, 왜 예수님께서 영생의 길을 대답해 줄 수 있었다 고 생각했는지 말하자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나왔는지에 대해서 잠 깐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이 청년이 예수님께 나와서 물은 질문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였습니다. 즉, 그 는 자기가 무엇을 행해서 영생 얻는 길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행위에 의한 영생, 자기 '의', 율법적 '의'에 의한 영생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이 결국 자기 행위에 근거한 영생, 자기 '의', 자기가 이룬 '의'에 근거한 영생을 염두에 두고 한 질문이라는 사실을, 부자 청년과 거의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율법사의 질문인 누가복음 10:25 이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시험하여 가로되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율법 즉,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율법을 행하면 생명을 얻으 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율법사는 자기를 의롭게 보이기 위해서, 자기를 의롭 게 하기 위해서, 달리 표현하면 자기가 의롭다고 하는 자기 주장과 자기 확 신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환언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의로와지는 길, 그리고 영생을 얻는 길을 고수하기 위해서 '내 이웃은 누구니이까 내가

누구한테 더 이웃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부자 청년의 이런 질문 '내가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하 는 질문은 동시에 그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고 나아왔는지를 암시해 주 고 있습니다. 즉, 부자 청년은 선한 선생,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하여 의 로와질 수 있는 인간의 전형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하고 나아와서, 달리 표현 한다면,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하여 의로와질 수 있는 길을 말해 줄 수 있는 선생이라 생각하고 그 방법에 대해 물은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에게서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하여 의로와질 수 있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본 것입니다. 하나의 선한 인간, 그 스스로의 힘으로 영생 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인간의 가능성, 인간의 전형을 그는 본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수수께끼와 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네 가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것에 관해서 묻느냐'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 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유일하게 선하신 분이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대답은 매우 암시적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와질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고 즉, 예수님을 선한 인간으로 보고 질문하는 청년 에게 '어찌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선하시다'고 하는 대답은 예수님은 하나님도 아니시요 선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네가 나를 선한 인간의 전형으로 보고 묻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노니 하나님 외에 어떤 인간도 선하지 못하다는, 악하다는 뜻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 씀에 숨은 더 깊은 뜻은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가 나를 선한 인 간의 전형으로 보고 묻는 질문에 대답하노니 어떻게 인간에게 선한 것이 무 엇이냐고 묻느냐,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다. 이 말씀은 오직 하나님만 이 선의 유일한 근원과 표준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근원적 으로 선하시어서 모든 선의 근원이 되시고,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말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선을 행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자의로, 제 스스로 이것이 선이다, 저것이 악이다라고 정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 즉, 선의 유일한 표준과 근원으로서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그의 계명을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 일 무엇을 스스로 행해서 영생을 얻으려면, 자기 의에 의한 영생을 얻으려 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영생에 들어가기를 원 하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는 말씀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그와같은 말씀에 청년이 그러면 어떤 계명을 뜻합니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열거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부모 를 공경하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을 들은 후 청년은 자신있 게 말했습니다. 이 계명들은, 이 정도는 어려서부터 항상 내가 지켜왔습니 다. 무엇이 더 부족합니까. 율법사의 경우 누가복음 10장에 나타난 율법사의 경우에는 자기를 의롭게 보이기 위해서, 계명을 지키는 일에 관한한 자기가 의롭다고 하는 것을 그 확신과 주장을 고수하기 위해서 내 이웃이 누구오니 이까라고 물었다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를 알지 못하고 스스로 의로와질 수 있다고, 율법은 다 지켰다고 그 정도는 다 지켰다고 고집하는 청년을 예수님께서는 주시하 여 보시면서 사랑하여 말씀하시되 그가 대견해서, 그만큼 율법을 지켰으니 대견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그를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으로 말씀하시되 아직 너에게 부족한 것이, 남은 것이 한 가지 있다. '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표현들은 한결같이 너는 다 지켰다고 장담하나 온전하게 지킨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불완전하다는 말씀 입니다.네가 나를 선한 인간의 전형으로 보고 선한 것에 대해서 물었을 때에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시다, 오직 하나님만이 선의 유일한 표준과 근원이시다라고 하는 말의 뜻을 알지 못하느냐, 너는 하나님의 계명을 적당히 네 수준에서 이해해서 다 지켰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나 네가 보는 선의 표준이요, 네가 생각하는 수준에서 지킨 것에 지나지 않 는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선, 의의 표준이 무엇인지 아느냐 하나님의 계명 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아느냐라고 하는 뜻이 그 속에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가를 일깨우시기 위해서, 그리하여 그 청년이 죄인임을 스스로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 께서는 청년에게 이웃 사랑을 그럼 한 번 실천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 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이웃 사랑이란 네가 그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재산을 하나 남김없이 몽땅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 그 재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에게 다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의를 고집하기 위해서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물은 율법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다 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웃은 나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람, 나에게 가깝고, 잘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사마리아인이라고 개 처럼 취급하는 원수 같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곤경에 처해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 면 기꺼이 그의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다. 그는 나를 멸시하고 미워하고 증 오하는 원수라 할지라도 그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면 그를 긍휼 히 여겨서 그에게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 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이웃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자기를 온전히 희생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자기 포도주와 기름으 로 원수 같은 유대인의 상처를 치료하고 자기 나귀에 태우고 저는 걸어갔으 며, 여관에 맡기고 떠날 때에 자기 돈으로 넉넉하게 지불하다 모자라면 돌 아갈 때 더 주리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상대방의 필요를 완전히 채 워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청년에게 이웃 사랑의 계명을 여러가지 계명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 보라고 하셨는지에 대해서도 잠깐 생 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가는 제일 가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보다는 작은 계명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를 사랑하는 사랑은 영적이고, 내적인 만큼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 실천의 여부나 정도를 가늠하기 힘든 반면에, 이웃 사랑은 구체적인 대 상을 가지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인 만큼 그 실천 여부를 확인하기 쉬운 사랑입니다. 결국 이웃 사랑을 실천해 보라고 한 것은 네가 이 작은 계명도 지키지 못하면서 언제 없어 질지 모르 는 물질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더 큰 계명,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네 생명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 작은 계명 하나도 지키지 못함을 네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지 않느 냐 이래도 네가 죄인임을, 네 힘으로는 결코 의로와질 수 없음을 알 수 없 는가라고 하는 뜻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청년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이 심히 많은고 로 욕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도 못하면서 그러면서 도 자기가 죄인됨을 엎드려 고백하고 회개하지도 못하고 여전히 계명을 지켜 서, 선을 행해서 영생을 얻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의를 고집하 면서 번민과 고통에 휩싸여 돌아가는 청년을 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 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청년이 가지고 있는 재 물에 대한 사랑, 이 세상 것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장애가 된다고 하는 그런 뜻만이 아닙니다. 무언가 자기 것을 많이 가진 사 람, 영적으로 부자인 사람, 자기 의가 많은 사람, 나는 이런 저런 일을 했다 고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 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천국에 들아가는 것이, 영생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 는 것입니다.

매우 의미심장하게도 누가복음을 보면 이 부자 청년의 사건 앞에 어린아이 를 축복하신 사건이 나오고 그 앞에 바로 바리새인과 세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나로 하여금 영적 부자로 살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레에 두 번 금식하며, 십일조를 바치며, 남의 것 착취하지도 않고, 사기쳐 먹지도 않고, 간음 죄도 범하지 않고, 의롭게 살게 해 주시니, 나의 의가 이처럼 풍 성하도록 살게해 주시니 감사하나이다라고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고, 남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은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지 못했다고 했습 니다. 대신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는 세리, 민족의 반역자요, 인간 쓰레기 인 세리가 오히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전도하게되면 여러분 누구나 다 느끼게 됩니다만은 자기는 양심적으로 산 다고 하는 사람 만큼 전도하기가 힘든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는 양심적으로 살아서 나 같은 사람이 구원 못 받으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이 없다하는 사 람만큼 전도하기가 힘든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값없는 생명이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필요하지 앉히요 그 사람은! 이 런 사람들은 자기를 다른 사람들보다 그래도 조금 의롭게, 양심적으로 살았 으니 구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생각 배후에는 무엇을 행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런 가짜 영적 부자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하나님 표준에 통과되는 의는 하나도 없고 가짜 쓰레기 같은 의만 가득한, 이 가짜 영적 부자들은 오히려 그 못난, 모 자란, 수준 이하의 선행 때문에 천국을, 영생을 소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경건한 부자가,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부유한,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켰다 고 할만큼 이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부자 청년의 말을 너 무 평가 절하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양심, 자기 수준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할만큼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부유한, 저런 청년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말씀을 듣고 아직도 예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한 그제자들이, 예수님의 제 자들까지, 그럼 과연 어떤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 '저런 영적 부 자가 구원을 못얻는다면 누가 도대체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께서는 다 할 수 있다 고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영생을 얻는 일은 사람으로는 불가능하고,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 선으로, 자기 행위로 들어갈 수 없으며 오직 하 나님의 능력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청년에게 이웃 사랑을 명하신 다음에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의 첫째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 이웃 사랑을 실천해보라고 함으로 써 그 자신의 죄인된 모습, 이때까지 나는 계명을 다 지켰다고 생각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계명 앞에서 자신이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한 것입니다. 나를 선한 인간의 전형으로 보고 너도 나 처럼 행 해서 자기 힘으로 구원받겠다고 하는 사람아, 헛된 망상을 버려라. 인간으로 서는 생명을 얻을 자가 없고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의의 표준에서 는 죄인이어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인 것을 깨달아라. 그리고 나를 따 르라. 너와 같은 죄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비록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 셨으나 여전히 하나님이신,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나, 내 백성의 영적 가난과 필요를 온전히 채우기 위해서, 그 생명까지 희생한 하나님으로서의 나, 그 백성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원수시하고,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한 원수 같은 너희를 사랑하사, 너희의 영적 필요를 채우기 위 해서 진정한 이웃이 되어주신 그리스도에게서 가능성을 찾으라. 그에게 소망 을 두어라.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선해질 수 있는 가능성 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된 인간을 의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가능 성과 능력을 바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27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 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이 썩어질 육신의 생명을 위한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에서 이 썩어질 육신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의를 추구하는 삶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 다. 영생을 위한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이 질문했습니다. 영생을 위해 우리가 행해야 할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 까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대 답하시기를 너희가 이런저런 선행을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 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스 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나에게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전혀 의가 없음을, 선한 것이 없음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그의 긍휼하심에 나를 맡기는 믿음만이 요구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에 대해 더 깊이 설명하시길 48절 아래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영생은 '하늘로부터 온' 즉,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를,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믿음으로 그가 이루신 구속을 값없이 받아 누리는 것, 그의 피로 이루신 죄사함을 받아 누리는 것이라고 말씀할수있습니다만은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혈육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혈육에 참여한다고 하는 것은 그와 하나됨을 의미합니 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아담의 혈육에 다 참여한 자 입니다. 우리 인간 이 태어난 것을 흔히 부정 모혈로 태어난다고 그럽니다만은 모든 인간은 어 떤의미에서 혈연관계로 맺어져 있습니다. 그 혈육에 참여한다고 하는 것, 한 혈육이 된다는 것은 하나됨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아 담의 혈육에 참여해서 그와 하나된 모든 인류가 아담의 범죄와 그 결과인 사망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이 그리스도의 영적혈육에 참여해서 영적으로 그 와 하나된 그리스도인들은 그에 의에 참여한 바가 되어서 영원한 생명을 그 안에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너무 딱딱하게 되었습니다만은 오늘 드릴려고 했던 말씀의 근본 주제-우리가 복음에 초청을 받는다고 하는 것 은, 우리가 신앙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사귐을 갖는 것 인데, 하나님의 사귐 안에서 영원한 생명 누림을 뜻하는 것인데, 오늘 말씀 의 주제는 그럼 이 생명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 누릴 수 있는가-오늘 말 씀에서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기를 사람의 가능성, 사람의 능력 밖이라고 분 명히 말씀합니다. 제일 위험한 것은 내가 뭘 행해서 구원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 없다고 합니다 다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세례 문 답 때 물어보면 '어떻게 구원얻습니까', '믿음으로 얻지요', '믿습니 까', '예' 합니다만 그 대답하는 신앙고백에 자신이 없고 그와같은 고백 속에 어떤 내적인 감동과 감격이 없는 것은 실제에서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 다. 입만 달작거리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무엇을 받 을 수 있다는 생각에 철저히 젖어 있습니다. 태어나서 이때까지 그런 식의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좀 식자층에서 웬만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욕 이 뭔가 하면 공짜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의식 속에서는 철저히 공짜는 바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찌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준다고 해도 철저히 그런식의 교육과 의식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영생을 준다 하니 까 내가 무엇을 반대급부로 내어놓아야 하고, 내가 먼저 값을 치뤄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믿으려고하고 아주 이렇게 고백을 하는데 속에서는 그것이 정리가 안되어서 실제로는 믿어지지가 않습 니다.

오늘 말씀은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시니 아무 말없이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 누리라는 것입니다. 공짜로 받는 누리는 것이 민망해서 자꾸만 무엇을 해야한다. 비록 내가 죄인 인줄 다 알지요 또 이것이 별로 하나님께 가치가 없다는 것도 인정하지만은 그래도 뭔가를 해야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합니

다. 그러나 영생을 받으면서 내가 뭘 해야 한다. 내가 뭘 갚아야 한다. 또 미리 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적인 윤리 표준에서보면, 또 우리 세 속적인 윤리 표준에서 보면 상당히 신사적이요, 참 좋은 사람 같이 보이지 만 하나님 앞에서는 이것이 굉장히 모독적인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우리가 값주고 살 수 없을 만큼 비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으로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어떤 분이 1억원 짜리의 선물을 주었는데 받는 사람이 너무 미안해서 10원짜리 사탕을 하나 주었다 고 합시다. 그래놓고 나와서는 늘 생각하기를 10원주고 이 구원 이 선물을 샀다고 생각하면, 그 선물을 준 사람한테 얼마나 큰 모독이 되겠습니까 그 리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갚을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실제로 따지면 우리는 하나님께 받기만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걸치고 있는 옷, 여러분이 먹고 사는 것, 그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이 다 뼈빠지게 일했으니까 그것 다 내 손으로, 내 힘 으로 받아 누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생명도 하나님의 은 혜로 사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대신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 물건 값도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의 주머니 사정도 생각지 않습니다. 무조건 사달라고 그러고, 사주면 뻔뻔스럽게도 그저 고맙습니다란 말 한 마디로 끝 이 납니다. 또 어린아이는 어떤 물건을 원할 때, 자기가 값을 치루어야 한다 고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다 주시는 분이시다는 믿 음, 그 하나 가지고 무조건 달라고 하고 졸라댑니다. 그리고 공짜로 받아요 하나도 미안해 하지도 않습니다. 비유컨대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받아 누 림도 이와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너희가 어린아이 처럼 천국을 영접하지, 어린아이 처럼 천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천국을 소유할 수 없다는 말씀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봅시다. 내가 무엇을 해서, 의를 행해서 영생을 소유해보겠 다고한 바리새인들, 자기의 수 많은 영적 부를 하나님 앞에 자랑했던 바리 새인들, 끝까지 예수님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해 보라고 그랬는데도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반문했던 율법사, 모두 다 팔 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줘보아라 하신 그 말씀 앞에도 고꾸라지지 않 는 이 부자 청년은 영생에서 멀어졌습니다. 그저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아무 받을 자격이 없으나 그저 긍휼히 여겨달라고 은혜를 구한 세리와 그리 고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하니 어린아이 처럼 받아들인 삭개오는 영생을 소 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늘 주위로부터 무언가를 얻으면, 반드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그것이 옳 은 윤리라고 하는 사상에 찌들어 있기 때문에 항상 그것이 그물처럼 우리를 둘러 싸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내가 무엇을 드려야 한 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린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특히 구원 문제에 있어서는 영생을, 죽은 영혼이 새로운 생명을 얻는일에 있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할려 고 들면 받아 누리지도 못 하고 이미 공짜로 받아 누려놓고 내가 무엇을 해 서 얻엇다고 생각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적질하는 자요, 하나님을 모 독하는 자요.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은 결코 진정한 마음 에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네가 영생 얻기를 원 하느냐 나를 따르라! 하나님께서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 보내신 성자 하 나님이신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구원 그것을 받아 누리고, 하나님의 가능성을 바라고 추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드린 말 씀, 부자 청년의 비유에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의 첫번째 뜻입니다.두 번째 뜻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말씀 드리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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