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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기도합시다 (약 05: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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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선교사로 유명한 데이빗 리빙스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쉽다. 정말 어려운 것은 한 사람을 사 랑하는 것이다.

이 의견에 동의합니까 우리가 나는 이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을 사랑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추상적인 고백입니다. 정말 어렵지만 꼭 해 야 할 일은 우리 곁에 있는 이웃 한 사람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제가 리빙스턴의 말에 한마디를 덧붙인다면,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고백 하는 것은 쉽지만 정말 어려운 것은 그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곁에 있는 형제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과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아주 유익하고도 독특한 이웃 사랑 방 법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웃 사랑을 구체 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특별히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고통을 겪을 수 있 는데 그 중 가장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고통이 바로 육체의 질병입니다. 지 금도 몸이 아프고 불편해서 고통받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설명하는 구절들이 있습니 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말씀들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 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이 말씀들을 볼 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 는 데 있습니다. 병자를 고치는 것이 주님의 주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인자가 온 것은 사람의 병을 고치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없습니 다. 그러나 주님은 실제로 많은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병 고치는 일이 주님 이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길을 가다가 또는 사람들을 만날 때 병자를 보시면 그 마음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넘 쳐 그들을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만지며 그들의 병 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웃 사랑의 한 방편으로 고통받는 이웃, 특별히 질병으 로 고생하는 이웃을 위해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근 당신 주변에서 육체적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그 이름을 불러 가며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 는 주장은 한낱 말뿐인 것 아닙니까 본문 야고보서 말씀에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인 교회 안에 병자를 치유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주셨 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본문을 주해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치유의 권능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교회의 얼마나 큰 손실이며 비극인가! 주님은 우리가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병 든 이웃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을 치료할 수 있는 놀라운 권세와 능력이 나 타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몸이 아프면 우선 무엇부터 합니까 기도한다 구요 아닙니다. 먼저 집안에 있는 상비약을 찾아 먹습니다. 그런데도 몸이 아프면 병원으로 달려갑니다. 아프다고 해서 교회부터 찾아오는 사람은 없 습니다.

본문은 어떻게 말합니까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병원을 찾아 갈 것이요라고 말했습니까 제가 지금 아플 때 병원에 가지 말라는 애기 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제가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것은 병원에 가는 것까지는 좋은데 하나님께 매달릴 생각을 안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 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13,14 절).

이 말씀에서 교회의 장로들이란 요즘 말하는 장로를 지칭한다기보다 교회 의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할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교회의 지도자들을 청해 기도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말씀이 실효를 거두려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치유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 도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병든 자를 치유할 수 있는 놀라운 권세와 능 력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해 기도 받아 야 합니다. 병원에 가지 말고 약도 먹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극단적으로 해석하면 이단이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병원을 찾아가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 병을 고치는 것을 잘못이라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아플 때는 의사의 도움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교회에 아픈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병들었을 때 교회에 알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 다. 교회에 나오지 않아서 심방하면 그제야 아픈 사실을 말합니다. 이는 성 경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아플 때 교회에 알려서 기도해 주고 기도 받는 가운데 치유의 역사를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구원받은 사람들이 함께 주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소위 구속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돌보면서 위하여 기도 할 때 질병을 치유받는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치유 공동체로 만드 셨습니다. 모든 치유의 역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약을 먹고 의사가 치료하지만 결국 병을 낫게 하는 능력의 원천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질병 가운데 있을 때 그 사실을 교회에 알려 서로를 위해 기도하면 그 병이 낫게 됩니다. 성도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 신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서로를 세워 가게 됩니다. 서로 위해서 기도할 때 하 나님의 도우심이 함께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볼 때 성도들은 서로 기뻐하며 은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자연히 사랑의 공동체로, 치료의 공동체로 세워져 갑니다.

본문 말씀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지, 질 병으로 고통받는 성도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응답받는지가 나와 있습니 다.

교회 안에서의 중보 기도의 조건과 중보 기도를 통한 복을 살펴봅시다.

(1) 믿음 믿음이 없이는 우리 이웃을 위해 기도할 수 없습니다. 15 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 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믿음의 기도가 병든 자를 구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사도 야고보가 야고 보서 전체를 통해 계속 강조하고 있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야 고보서 1 장 6,7 절을 보십시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 하지 말라.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기도할 때 주님이 나를 도와주신다, 나를 치유하신다는 확실한 믿음이 없다면 기도해도 소용 없 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는 사실을 참으로 믿지 않는다면 왜 기도합 니까 적당히 기도하면 응답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믿고 기도해야 합 니다. 놀라운 사실은 믿음으로 기도해서 응답받으면 믿음이 더해진다는 점 입니다.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으면 하나님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조차 병에 걸려 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제가 감기에 들었는데 한 달이 지나도 낫질 않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도 감기에는 꼼짝 못합니다. 왜 하나님은 고 통을 허락하실까요 어쩌면 그와 같은 고통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악에 무릎 꿇어 기도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고통 역시 주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평신도로서 기독교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C.S. 루이스에게 이런 일화 가 남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캠브리지 대학의 위대한 교수였던 루이스를 찾아와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째서 이 세상에는 그렇게 설명할 수 없는 고통 이 많습니까 루이스는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안 그래도 사람이 교만한데 고통마저 없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더 오만 방자해졌겠습니까』 우리는 고통을 겪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고통당해야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기도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조건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중보 기도의 조건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축복이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에 응답받게 되니까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게 됩 니다. 이웃의 아픔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심을 체험하게 되므로 더 큰 믿음을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우리에게 더 훌 륭한 믿음을 안겨 줍니다.

(2) 죄의 고백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응답받을 수 있는 두번째 조건은 죄를 고백 하는 것입니다. 죄의 고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놀라운 축복 가운데 한 가 지가 거룩한 삶입니다. 죄를 고백할 때 성도들의 거룩한 삶, 성화의 삶이 이루어집니다.

본문 16 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서로 기도하라고 하기 전에 강조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질병은 죄 때문에 생긴다는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모든 질병 이 죄 때문에 생긴다면 15 절 말씀에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는 구절은 빼 버려야 할 것입니다. 혹시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모든 질병이 반드시 죄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님을 말해 주고 있습니 다.

그런데 간혹 죄 때문에 그에 대한 징벌로 질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러 므로 질병에 걸렸을 때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혹시 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힐책하고 연단하기 위해 이 질병을 내리신 것은 아닌지,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해 육신의 고통을 허락하신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웃을 바라보면서 병에 걸린 사람들이 모두 무슨 죄를 지 어서 벌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성경에 바 로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들입니다. 욥 의 친구들은 인과 응보의 법칙에 따라 욥이 죄 때문에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어라고 결론을 내립니까 욥의 고 통은 욥이 지은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변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나 자신의 죄 는 철저히 다스려야 하지만 이웃을 정죄하는 일은 삼가야 합니다. 이웃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벌 받은 것이라고 쉽게 말하는 경우가 많은 데 이는 큰일 날 소리입니다. 그런 기준은 본인에게만 적용하십시오.

자기 자신이 아픈 경우에는 나에게 어떤 잘못이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십 시오. 범위를 확장시켜서 내가 속한 공동체,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혹시 교인들이 지은 죄가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라고 한 것은 교회 전체가 죄를 고백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혹시 우리들의 부족함 때문에, 우리들의 연약함 때문에 한 형제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교회에 어려움이 닥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 다. 때때로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 전체를 흔들어 깨우기 위해 공동체 안의 어떤 성도들에게 고통과 어려움을 허용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고 교회 내의 문제도 나 자신의 일로 여겨 주님 악에 죄를 고백하는 시 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교인 전체가 더욱 기도할 수 있도록, 더욱 하나님 악에 엎드릴 수 있도록 어려움에 처하게 하십니다.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볼 수 있도록 고통과 역경을 허용하십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는 말씀은 개인이나 한 가정에만 국한된 말씀이 아니라 교회 전체,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사회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치고 바로잡아 새롭게 하시기 위해 그와 같은 고통을 사회 전체에 허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역대하 7 장 14 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 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 지라.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그 땅을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겠다는 약속입니 다. 그 땅을 치유하시겠다는 말씀은 개인 뿐만 아니라 가정을 고치고 한 사 회를 고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거신 조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악한 길에서 떠나 회개하고 겸손하게 주님 악에 기도하여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이때 주목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 공동체 답게 성전을 중심으로 기도를 한 사실입니다.

성전에서 이웃을 위해 기도할 때, 가정과 사회와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기도 내용은 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잘못 때문에 지금 교회가 어려움에 빠져 있고 각 가정이 고통을 당하는 것 은 아닌지, 우리의 실수와 연약함과 우리의 나태함 때문에 힘겨운 삶을 살 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악에 꿇어 엎드려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여 무릎 꿇어 기도하 면 그 땅을 고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 해당된 교훈이 아닙니다. 동일한 사상이 신약성경에도 강조되어 있습니 다. 마태복음 18 장 18-20 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 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 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 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면 땅에서 무엇을 구하든지 하늘에 서 뜻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두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무릎 꿇어 기도할 때 하늘을 움직일 수 있다, 주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다는 엄청난 말씀입니다.

그런데 두세 사람이 아무데서나 기도하면 그렇게 된다는 문맥은 아닙니다.

18 장 15 절 말씀부터 살펴보면 이것은 교회적인 상황임이 드러납니다. 교 회에 범죄한 사람이 있으면 권고하고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가 나서서 이를 바로잡을 것을 말하면서 두세 사람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 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정말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죄를 고백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죄를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십니 다. 병 낫기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치유하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기도는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단순히 병 낫기를 소원하는 것이 아니라 혹시 이 질병이 나의 죄와 게으름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닐까,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에 생긴 것 은 아닐까 하여 엎드려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살필 때, 그 기도는 우리의 병을 고칠 뿐만 아니라 우리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간절한 기도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믿음을 가져야 하고, 죄를 고백해야 함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셋째로 간절히 기도해야 함을 공부하겠습니다. 본문 17 절 말씀을 봅시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야고보는 중보 기도의 예로 엘리야의 기도를 들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 리와 본성이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처럼 실수할 수 있고 게으름 피울 수 있고 연약해질 수 있고 참을성 없이 행동할 수 있는 엘리야가 기도 로 하늘의 문을 열 수 있었다면 우리도 그와 같이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엘리야의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간절히라는 단어 에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하늘에서 비가 멈추기도 하고 내리기도 했 습니다. 그러면 간절한 기도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엘리야의 기도 생활을 연구해 보면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악을 써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리만 높이면 무조건 간절한 기도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은 너 무 조용조용 기도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때에 따라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궁금해 하는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간절한 기도의 핵심은 계속적인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하나님이 즉 각 응답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술을 부리듯 기도가 끝나자마자 소원이 이루 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병 낫기 위해 기도하면 그 즉시 병자가 자리에 서 일어나고 병세가 호전된다면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물론 때에 따라서는 즉각적인 응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무 변화 없이 모든 상황이 그대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당신은 기도하기를 멈추겠습니까 엘리 야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계속 기도했습니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 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단번에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게 하 시겠습니까 이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신뢰를 높이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한 번 기도해서 이웃의 병이 나았다면 그에게 더 이상 관심을 쏟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신통한 능력이 있다고 교만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꾸준히 계속해서 기도하게 하시는 가운 데 우리 이웃을 치유하고 그를 새롭게 만드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열왕기상 17 장에 엘리야의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장소는 사르밧 과 부의 집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는 떡을 만들 기름과 가루가 끊이지 않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7 절에 보니 이 집에 문제가 터 졌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병들어 죽은 것입니다. 말씀을 읽어 봅시 다.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 가 숨이 끊어진지라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17,18 절).

한국 사람도 이와 비슷한 푸념을 잘 늘어놓습니다. 갑자기 고통스러운 일 을 당하게 되면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이 고생이냐는 넋두리부터 합 니다. 우선 내 잘못 때문에 일이 잘못되었으려니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다 음에는 제 삼자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립니다. 사르밧 과부의 경우 아들이 죽은 탓을 엘리야에게 돌립니다.

며느리가 들어온 다음 그 집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시어머니들은 모든 게 사람 하나 잘못 들여놓은 탓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 심리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에게 아들을 죽게 했다고 덤터기를 씌웁니다. 엘리야가 이 억울함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보십시오.

엘리야는 두말 않고 아이를 달라 해서 다락으로 올라갑니다. 아들의 죽은 시체, 즉 문제를 안고 자기 다락에 올라간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기를 원망 하고 비판하고 손가락질하는 여인과 시비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문제를 가지고 곧장 자기가 기도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사정을 아 뢰었습니다. 문제를 내려놓고 기도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부딪치는 문제들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고 이해가 안 되 고 해결할 길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쓸 수 있는 방법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 악에 엎드리는 일입니다.

20 절부터 읽어 봅시다.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그 아이 위에 몸 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엘리 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20-22 절).

엘리야는 한 번 기도해서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 자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의 소리를 듣고 응답하셨습니다. 결국 엘리야는 하 나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기도한 셈입니다.

엘리야의 기도하는 모습은 변함이 없습니다. 열왕기상 18 장을 보십시오.

갈멜 산 정상에서 벌어지는 한판 승부는 하나님이 참 신(神)이심을 보여 준 사건이었습니다. 이 일 후에 엘리야는 3 년간의 가뭄을 끝내고 비를 내려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42, 43 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비다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 라보고 고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지금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엎드려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단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하는데 한 번 기도했을 때 비가 쏟아지지 않았습니 다. 사환에게 이르기를 일곱 번까지 가서 보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머리 를 무릎 사이에 넣고 꿇어 앉아 간절히 기도했으나 즉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한두 번 간구해서 응답이 없으면 포기하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동분서주하기도 합니다. 그 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응답이 올 때까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가 44 절에 나옵니다.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 어나나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 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사환이 일곱 번째 가서 겨우 발견한 것이 뭡니까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입 니다. 아직 비는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 이것이 희망의 징조였습니다.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드디어 큰비로 변하여 이스 라엘 땅에 쏟아졌습니다.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는 3 년간 가뭄으로 고생하던 이스라엘 땅에 단비를 내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엘리야는 즉각적인 응답이 없다고 해서 실망하 거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신뢰했음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성실성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자비와 성실과 은혜로 엘리야에게 임하여 역사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간절히 기도하여 하늘 이 비를 내린 것처럼 우리도 간절히 기도할 때 이 땅의 역사를 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로 이웃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웃을 고통에 서 구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웃의 가정을 구할 수 있고 한 사 회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웨슬리 듀웰은 『기도로 세계를 움직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은 중보 기 도를 통해 세계를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 역시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의 삶으로 제한을 받으신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 기도 없이도 일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기 도를 통해 개인을 치료하시고 가정을 바꾸시고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 한 사 회를 움직이시고 역사를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통해 세계를 통치하기로 작정하셨다면 그분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까지 아무것도 하실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통해 세계를 통치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기 도 사역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역사를 움직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이웃을 돕고 하나님과 함께 이웃을 치유하 고 이웃의 삶을 바꾸는 사역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중보 기도 사역에 동참합시다. 교회가 하나 되어 성도들이 서로의 짐을 내려놓고 위해서 기도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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