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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시 5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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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과 아침과 정오! 이것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하루의 시간을 측정하는 기본적인 순서입니다. 보통 우리는 아침과 정오와 저녁인데 반해, 저들은 저녁과 아침과 정오가 됩니다. 저들은 하루의 시작을 해뜨는 아침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해지는 저녁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고통의 극한 상황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사랑하는 동류들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뼈아픈 배신과 배반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는 다윗의 목숨까지 해하려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시 55:4-5). 이 때는 아마 그의 아들 압살롬과 아히도벨에게 배신을 당할 때인 듯 합니다.
그는 그러한 고통 중에서 내가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으면 훨훨 날아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싶다고까지 하였습니다(시 55:6-7). 그러면서 그가 고통의 아픔을 감수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 하겠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
Ⅰ. 시간 속에 머물고 있는 다윗임을 알려 줍니다.
시편 55편 17절에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인간 다윗은 저녁과 아침과 정오 속에 숨쉬고 있는 존재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는 저녁과 아침과 정오를 벗어날 수 없는 시간의 한계 속에 머물고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시간에 의해서 제약 당하고, 시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사람은 시간 속에서 출생하고, 시간 속에서 살다가, 시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상실되게 됩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라는 이 말은 시간이 저녁에서 아침으로, 아침에서 정오로 쉬임없이 흘러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시간은 미래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부지런히 흘러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녁과 아침과 정오를 잘 잡아 선용하는 자는 축복의 성공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받은 저녁과 아침과 정오는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입니다. ‘시간이 돈’이란 말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 시간이 결코 내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세네카(Seneca)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우리들의 것이 없다.’고 하였지만 이는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모르고 한 말입니다.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일정한 시간을 받아 사용하는 시간을 맡은 청지기일 따름입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 그것은 물건처럼 잡을 수도 없는 것이고, 색깔처럼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떤 중량처럼 무게를 측량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고백 속에는 시간이 신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만약 아무도 묻지 않으면 나는 아는 것 같다. 그러나 묻는 이가 있어서 시간에 관하여 그에게 설명하려 할 때 나는 아무 것도 모르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도, 그 누구도 저녁과 아침과 정오(시간)를 쌓아 둘 수가 없습니다. 지나가 버린 저녁과 아침과 정오를 되돌려서 새롭게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시간을 더 빠르게, 아니면 더 느리게 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사람에게는 그것을 경험하는 현재뿐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절대적 현재’ ‘지나가는 현재’ ‘흘러가는 현재’라고 하였습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현재는 종결과 시작’이라고 하였습니다. 페레(. Ferre)는 ‘현재만 실존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멈출 줄 모르는 저녁이고, 아침이고, 정오입니다. 결코 돌아서거나 멈출 줄 모르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시간의 거리에서는 스톱(stop)이란 사인(sign)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하면 그 누구든지 이 저녁과 아침과 정오를 만나게 될 뿐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저녁과 아침과 정오라고 하는 하나님의 창조적 시간 속에 숨쉬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저녁과 아침과 정오 속에서, 온갖 인생의 희비애락을 씹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Ⅱ. 기도하는 다윗을 보여 줍니다.
시편 55편 16절에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1절에는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간구할 때에 숨기지 마소서」라고 하였습니다. 2절에는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17절에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다윗은 자기에게 다가온 저녁에, 아침에, 정오에 하나님께 근심하여 탄식하는 소리를 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근심하여 탄식함’은 끙끙 앓는 소리를 뜻합니다. 간절한 부르짖음, 뜨거운 부르짖음, 마음을 찢는 부르짖음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간절한 기도를 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녁과 아침과 정오의 기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의 기도란 무슨 뜻인가

1. 정한 기도 시간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서 6장 10절을 보면 「다니엘이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더라고 한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훗날에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3시(오전 9시), 6시(12시), 9시(오후 3시)로 정례화 되었습니다(행 2:15, 3:1, 10:1-3).
이것은 하루 세 번의 기도 시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정한 기도’를 뜻합니다. 규칙적인 기도를 뜻합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일정한 규제를 뜻합니다. ‘규제’란 ‘얽매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저녁과 아침과 정오를 효과 있게 선용하는 지혜입니다. 세월을 아끼는 지혜도 됩니다.
모든 생활 여건이 다변화 되어 가고 다양화되어 가는 현대의 삶 속에서,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습관은 참으로 요긴합니다. 우리들의 삶에 형식이 전혀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일정한 ‘틀’에 내가 얽매인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자유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한다는 것은 참으로 효과적이고,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삶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규례를 따라 안식일에 회당에 나가셨습니다. 규례를 따라 감람산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이른 아침에도 산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하고 있는 정한 기도 곧 새벽 기도회, 삼일 기도회, 금요 기도회 등을 위시하여 가정 예배, 직장 예배 그리고 여러 류의 그룹 기도회는 참으로 축복받은 일입니다.

2. 정규적인 힘의 공급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체의 움직임에 일정한 에너지의 공급을 정규적으로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보통 하루 24시간 동안에 세 번씩 일정한 양의 공기와 음식물을 공급받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아침 식사, 점심 식사, 저녁 식사입니다.
바로 저녁과 아침과 정오의 일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아 새롭게 되는 순간이 됩니다. 그래서 다니엘도 그렇게 기도했고, 다윗도 그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저 칼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로마 정복에 실패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알프스 산을 넘은 그의 군대들에게 군량미의 공급이 중단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로마의 젊은 장군 시키피오가 남쪽 해상을 이용하여 그의 수도 칼타고를 먼저 점령하여 불을 질러 버렸기 때문에, 그 결과 보급이 중단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보급이 차단된 부대에 무슨 승리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저녁과 아침과 정오의 기도! 그것은 자신과 세상과 마귀를 이기는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는 시간입니다. 본문의 다윗의 경우, 그의 동류들의 반란과 배약과 배은을 이겨내는 승리의 비결이 된 것입니다. 정규적인 힘의 공급이 바로 저녁과 아침과 정오의 기도였습니다.

3. 계속적인 전진을 의미합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의 기도! 그것은 쉬지 않는 기도입니다. 계속되는 기도입니다. 멈출 줄 모르는 기도입니다. 그 결과는 계속되는 저녁과 아침과 정오 한가운데를 힘있게 나아가고 있는 비결이 됩니다. 그렇다면 저녁과 아침과 정오의 기도는 요원의 전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야 할 길은 요원합니다. 물리쳐야 할 대적들은 실로 중다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이를 목적지는 필연적인 코스(course)입니다. 결코 취소되거나 변경할 수 없는 영광의 길입니다. 최후 승리 얻기까지 필승을 하고 말아야 될 과제입니다.
여기에는 저녁과 아침과 정오의 기도로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하였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얻음이 있을 것이요, 찾는 자에게 찾음이 될 것이요, 두드리는 자에게 열려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헨리 무어 하우스(H. M. Hause)가 큰 선물 꾸러미를 들고 집안에 들어섰을 때, 휠체어에 앉아 있던 딸이 아버지를 반기며 맞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빠! 그것이 뭐예요”라고 물었습니다. “응. 엄마에게 줄 선물이란다. 엄마 어디 계시니”라고 헨리 무어가 묻자 딸은 엄마는 이층에 계시다고 하면서 “아빠! 그것을 제가 엄마에게 갖다 드리면 안될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헨리 무어는 “아니 너는…” 하면서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자기의 딸을 의아스럽게 바라보았습니다. 사실 그 딸은 소아마비를 앓아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딸은 재빨리 “아빠! 나는 이 선물 꾸러미를 들고, 아빠는 나를 안으면 되잖아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오, 그래. 그러면 되지!” 하면서 헨리 무어는 딸을 안아 올렸습니다. 결국 그 딸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그 선물 꾸러미를 자기가 들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혼자서는 걸을 수 없는 장애를 가진 딸은 자기보다 힘센 사랑하는 아버지의 힘을 빌린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딸을 위하여 기쁘게 자기 힘을 보태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시 55:22). 수고하고 무거운 온갖 류의 인생고의 짐을 하나님께 맡겨 버리는 것이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할 일 중에 하나입니다(마 11:28).
계속적인 전진은 저녁과 아침과 정오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힘을 받게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고 하였습니다(삼상 12: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은 저녁과 아침과 정오의 시간의 한계 속에 살던 유한의 실존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와 그 죄로 인한 온갖 류의 뼈아픈 환난 속에서 아파하던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하고 살던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리를 분명히 들으신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살 수 있다는 이 행복의 특권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정한 기도, 무시 기도, 특별 기도… 등 닥치는 세상의 환난들을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 분의 도움을 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 분께 기도하여, 그 분이 맡기신 일을 감당함이 축복입니다.
우리들 중에 밀레의 ‘만종’이란 그림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 그림은 젊은 부부가 부지런히 일하다가 교회당 종소리를 들으며 하던 일손을 멈추고,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엄숙히 기도 드리는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고상하고 멋진 장면입니까 참으로 멋지고 멋진 장면이지 않습니까
금년도 기울어지면서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 경향인들에게는 멋지고 복된 저녁이요, 아침이요, 정오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한평생의 시간들 중에 가장 최고의 저녁이요, 아침이요, 정오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기도와 최고의 제물을 주께 드리는 어간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전, 하나님의 궁전이 그 완성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저녁! 하나님이 주신 아침! 하나님이 주신 정오를 선용하는 여러분에게 복이 있으라! 영광이 있으라!-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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