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세례요한의 등장과 회개의 선포 (마 03:1)

첨부 1


마태는 누가처럼 세례요한의 탄생에 관한 기록은 남겨두지 않았다. 다만 그 때에 세례요한이 이르렀고 유대광야에서 회개를 전파한내용만 기록하고 있다 . 당연히 마태의 관심사는 세례요한이 회개를 외쳤으며, 그것도 광야에서 외 쳤다는 내용이었다. 세례 요한은 어찌하여 만인이 들어야 할 회개의 메시지를 예루살렘 성의 번화가에서 외치지 아니하고 사람이 살지않는 땅, 물이 없고 건조한 땅, 광야에서 외쳤던가 사람들더러 들으라고 외치는 것인가, 아니면 듣지 말라고 외치는 것인가 요사이 기준으로 본다면 세례요한의 전도방법은 효율적이기는 커녕 오히려 한 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내용이 좋으면 무엇에 쓸 것인가 정작 그 내용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에서 그것을 떠들면 도대체 어쩌자는 얘기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회개의 메시지를 광야에서 외치고 다녔다. 자신이 자신의 행동을 이해했는지 아니면 요한자신도 모르고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세례요한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지시대로 살았을 뿐이다.

요한으로서는 자신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외치는 자의 소리(사40:3, 요 1:23)임을 인식했고 따라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살았을 뿐이다. 따라 서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옮겨간다.하나님은 왜, 어찌하여 세례요한으로 하여금 아무도 살지 않는 건조한 땅 광야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외치도록 명 하셨는가 이 문제를 이해해야만 회개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광야에서와 회개 는 따로 떼어서 이해할 부분이 아니다. 광야에서를 모르고는 회개 를 알 수 없고 회개가 없는 광야에서 역시 있을 수 없다. 세례요한이 외친 회개의 말씀은 구체적인 현실인 광야에서의 삶이 있음으로 온 전해지고 진실해진다. 다시 말하면 세례요한이 입으로 외친 회개의 선포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말씀이었다면, 그의 광야에서의 삶은 곧 회개 의 구체적인 모습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의 회개 역시 관념과 머리 속에서 만의 회개로는 의미가 없고,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터전 이 광야로 바뀌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자신의 삶의 자리는 여전히 예루살렘 도성이면서, 머리 속으로 회개하고 마음 으로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친다고 회개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회개는 머 리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두 발로 하는 것이다. 두 발을 움직여서 우 리 삶의 터전을 바꾸는 것, 예루살렘 도성에서 광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이사야를 보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 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사40:3) 이 말씀을 New King James Version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Prepare the way of the Lor d; Make straight in the desert a highway for our God.

우리의 개역과 다른 점은(개역성경도 난하주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외 치는 자의 소리가 광야에서 외쳐 가로되라는 첫번째 부분이다. 이 부분을 설명한,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이며 대한성서공회의 번역실장인 민영진 박사의 얘기를 인용해 보자.

마소라 억양 부호들은 이 밖에도 본문 이해까지 돕는다. 예를 들면 사40:3 의 qol qore bammidbar panu derek YHWH는 어디서 끊어 읽느냐에 따라 두가지 번역이 가능하다. 두번째 단어에서 끊어 읽으면, 그 뜻은 한 소리가 외친다 . 광야에서 야훼의 길을 예비하라고가 된다. 개역성서 사40:3도 이렇게 이해하였다. 그러나 세번째 단어에서 쉬었다가 읽으면, 한 소리가 광야에서 외친다. 야훼의 길을 예비하라고가 된다. 마3:3에 인용된 희랍어 칠십인 역이 이런 식으로 읽고 있으며 우리말 개역 역시 마태복음에서는 칠십인 역 을 따르고 있다. (민영진, 국역성서연구, 성광문화사, 1984년 245쪽) 다시한번 설명한다면 두 번역의 차이는 (읽는 사람이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하나는 외치는 자가 광야에서 외치는 것(개역의 마태복음 3장 3절 이나 NKJV의 이사야 40장 3절)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가 광야에서 준비하는 것 (개역의 이사야40장 3절)이다. 전자를 따르면 세례요 한만 광야에서 살면 되는 것이고 후자를 따르면 우리 모두 광야로 나아가야 하는 문제이다. 편하기는 전자이다. 외치는 자는 광야에서 외치고 회개하는 자는 예루살렘 아파트에 앉아서 회개하고… 얼마나 편한가! 그러나 마태복음의 기록(70인역 인용)대로 읽더라도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들 은 사람들이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하여 광야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는 바, 회개를 외치는 자나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나 모두 광야로 나간 것이 사실이 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 40장 3절을 다음과 같은 병렬구조로 놓아 본다면 주 의 길을 준비하는 자가 광야에서, 사막에서, 준비할 것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너희는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즉 광야에서 예비하고, 사막에서 평탄케 하라는 두 구절을 평행구절로 보는 것이 어법상 더 옳다. 그렇다면 정작 광야로 나아가야 할 대상은 세례요한 만 이 아니라 유대인들 모두이며 오늘날 우리들 모두인 셈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우리더러 광야로 나가고 사막에 거하면서 당신의 길을 예비하라고 하시는 것일까 회개라는 것이 마음의 문제라면 구태여 몸이 광야로 나가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는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 하는대로 스스로의 죄를 뉘우치고 통회자복하고, 세상으로 향하던 마음을 하 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라면 구태여 우리가 광야나 사막으로 나가야 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요사이는 어떨지 모르지만 세례요한이 살던 시대 엔, 회개를 위해서 광야로 나아가, 세례요한을 만나야 했다. 이사야의 메시지 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사막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왜 그런가 광야로 나아가 광야생활을 하는 그것이 곧 회개이기 때문이다. 광야란 어떤 땅인가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 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신8:15)에서 알 수 있듯이,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으로, 자신의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이 회개이며 세례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광야로 나가지 않는 회개란 착각이며 관념이다. 먹을 것이 없이 는 살 수 없고 마실 물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이 세상. 뿐만 아니라 권세가 있 어야 하고 명예가 있어야만 사람 행세를 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권세도 영광도 없는 광야의 삶으로 자신을 옮긴다는 것은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계속하여 말씀하는 것처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 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40:6-7)를 믿는 사람들만 광야로 나아갈 수 있고, 사막에서 주의 길을 준비할 수 있다. 인생이란 과연 풀과 같 은가 그 모든 영광은 과연 풀의 꽃 같은 것인가 인생의 강건함과 인생의 아 름다움을 어떻게 한낱 풀꽃에다 비긴단 말인가 언제나 하는 얘기지만, 인생이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풀 같은 인생사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며, 꽃 같은 인생의 영광을 향하여 애쓰고 수고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의 삶은 거의 전부가 풀과 같고 꽃과 같은 인생사에 매달려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광야에서 주의 길을 준비하라는 말씀은 풀과 꽃을 버리라는말씀과 상통한다.

풀과 꽃을 버림이 곧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기다림이며 구함이다. 광야는 풀 이 자라지 않고 꽃을 구할 수 없는 곳이다. 풀을 구하고 꽃을 얻기 위하여 광 야로 나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 세례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은 풀을 버리고 꽃을 버리라는 외침이며, 그 자신이 광야생활을 하는 것은 자신 이 외치는 내용에 대한 보증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서 광야생활을 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말씀에 대 한 모형이며 그림자들이다. 그들이 애굽의 고기가마를 그리워했다는 얘기는 아직도 풀과같은 인생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는 뜻이며,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지 않을 때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었던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가나안)에 대한 기대보다는 풀의 꽃 같은 육신의 영광(애굽)을 더 좋아 했다는 뜻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떤가 정말 회개하고 세례받은 사람들은 애굽적이며 육신적인,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은 영광을 인하여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는 커녕 대부분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풀과 그 꽃 을 남보다 더 많이 얻고자 하지 않는가 광야생활을 통하여 풀이 마르고 꽃이 떨어진 사람은 더 이상 풀과 꽃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 광야의 삶을 산 사람이며 회개한 사람이며 세례 받은 사람이다.

이 백성은 실로 풀인데, 풀인 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더러 광야와 사막으로 나오라는 얘기는, 이 세상에서는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선언이며 ,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서 죽여 없애겠다는 무지막지한 선포이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는가 꽃과 같은 인생의 영광도 남들보다 많이 아니 남들만큼은 누리고, 영원토록 있는 하나님의 영광도 같이 누릴 수는 없는가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요삼1:2) 같은 말씀도 성경말씀 인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해야만 했던 이유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 가나안에 가자 니 광야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빠져 나와야 하 는 이유는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왜 냐하면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마3:2)고 외친 것이다. 우리 말의 개 역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로 되어 있지만, 실상은 이유를 나 타내는 종속접속사 가르(ga;r)를 번역하는 것이 원래의 의미를 살려준다(h[gg iken ga;r hJ basileiva twn oujranw'n. ;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빠져나가 천국으로 옮겨 가야 하는데, 이 과정에 존재하는 것이 광야이다. 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 는대로 천국을 향하여 매진하는 삶이 주의 길을 준비함이며, 주의 첩경을 평 탄케 함이다. 이 일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이 르기를 세례요한의 때부터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고 하셨다.

우리의 삶이 천국을 침노하는 삶으로 바뀌는 것, 풀과 꽃에 연연하던 우리의 삶이 광야에서 죽어 없어지는 것. 이런 것들이 회개의 참 모습이며 이러한 회 개는 요한의 물 세례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요한의 물 세례 역시 단순히 물 속에 잠기는 것이 아니며(물 몇 방울 찍어 바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 도바울이 설명한대로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 는 것(고전 10:1-)이다. 다시 말하면 홍해를 건너는(그다음부터의 삶이 광 야이다) 영적인 사건이 물 세례의 실체이지 물에 들어간다고 홍해를 건넌 것 은 아니란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