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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요 19:17-30)

첨부 1


오늘은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을 입성하실 때 수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며 열광적인 환호를 한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이번 한 주간을 고난(수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전 생애가 수난의 생애였지만 특히 이 한 주간은 주님의 생애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한 주간이었습니다.
3년 동안 같이 지냈던 제자 가룟 유다는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버렸고,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까지도 같이 가겠다고 큰소리 치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철저하게 부인하였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던 군중들의 입은 며칠도 못되어 이제는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는 배신의 소리를 질렀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한 주간이었습니다
4복음서의 많은 부분은 예수님의 마지막 며칠 동안에 된 일, 즉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사건의 기록으로 가득차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아나신 일주일 간의 사건을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 사건은 평범한 사람의 戮습아닌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죽음이기에 이렇게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생명의 종교라고도 부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일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사랑의 절정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로 아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을 아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속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도는 십자가의 의미를 확실히 아는 자입니다.
십자가의 형틀이 사람에게 주는 의미는 고통이요, 형벌이요, 죽음이요, 저주였습니다.
로마인이나 유대인에게 있어서 제일 수치스러운 죽음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인들은 이 처형법을 비로마인들 특히 노예, 강도, 암살자들에게만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결코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랑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치욕적인 형벌과 죽음의 표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참혹한 십자가를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지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셨습니다.
고난 주간을 맞은 오늘도 본문을 통하여 십자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십자가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1.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에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 버린 인생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은 한가지 방법을 마련하셨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롬6:23)이라는 형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흠없는 양이 필요했듯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오셔서 죄에 대한 진노와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하나님이 죄에 대한 진노, 심판, 그리고 형벌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죄인은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만민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시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죄를 용납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이런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제사였습니다.
천사의 예고나(마1:20-23), 세례 요한의 선포(요1:29)는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오신 희생 제물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위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습니다(마20:28).
성경 여러 곳에서 대속물로서의 죄 없으신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는 내가 무죄한 자의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4)라고 증거하였고,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도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요19:6)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도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3:5)고 하였고, 사도 베드로도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벧전2:22)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도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무죄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었고(롬4:25),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딛2:14).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요1:29) 희생의 죽음을, 위하여 죽는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했을 때,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는 죽음! 이것이 곧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입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로서(마1:21)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새' 여기에 무슨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이 간결한 표현속에 인간의 말할 수 없는 잔혹함과 고통과 아픔이 다 들어있습니다.
왜 주님은 우리 때문에 저주스러운 죽음을 죽으셔야 했습니까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우리에게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주님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저주받은 죽음에 대해 한 가지 원칙이 있는데 바로 나무에 다는 것입니다(신21:23). 예수님은 저주받은 자처럼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주간을 맞은 우리들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비참한 죄인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더러움을 보면서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할 수 있는 은혜, 죄에 대해 철저히 회개하며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축복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2. 분리시키는 분기점입니다.
본문 18절에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멸망하는 자와 구원을 얻는 자의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양과 염소, 가라지와 알곡을 분리시킵니다. 십자가는 구원과 심판, 천당과 지옥을 분리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만은 아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죄인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강한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좌우편에 강도 두 명이 같이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에 한편 강도는 주님께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눅23:40-42).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는 죽음 직전에 생전 처음으로 십자가의 본질 앞에 부딪혀 구원을 얻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의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며 십자가의 본질을 왜곡시켰습니다.
로마의 군병들도 예수님을 못 박은 후에 예수님의 겉옷을 네 쪽으로 나누고 속옷은 통으로 짠 것이라 나누지 못하고 제비 뽑아 부수입을 올리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저들은 구원과 생명을 주는 십자가의 본질과 영생에 대한 관심은 안중에도 없었고 얼마 되지 않는 물질에 눈이 어두워 메시야를 보지 못하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왜 그 분이 죽으셔야 했는지 거기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기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건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들의 관심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사는 것, 이것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도 철저하게 타락하였습니다. 메시야가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는 순간에도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가장 가까이 있던 자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혹시 저들의 이런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주님을 가장 가까이 따른다고 하는 내가, 열심히 주님을 섬기며 봉사한다고 하는 내가 십자가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없다면 이것은 분명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하였습니다.
사망이냐 생명이냐 이 두 가지의 길이 십자가에서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의지하는 사람치고 멸망 받을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구원의 완성을 보이는 것입니다.
본문 30절에 ...다 이루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지 약 6시간이 지날 무렵에 예수님은 다시 한번 짧은 한마디를 외쳤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크게 소리 지르시고 운명하시다'라고 기록만 하고 있지 그 큰소리의 내용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지 않는데 사도 요한은 크게 소리 지른 내용이 바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한마디속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어쩌면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내용을 함축한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무엇을 이루었다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요3:14) 지금 그 역사와 그 목적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구약 시대의 제물이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구속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구약에 예언한 모든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안에서 다 성취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시나(빌2:6)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2:8).
33년의 생애 전체가 고난의 연속이었고,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던 십자가의 길을 침묵으로 끝까지 걸으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예수님의 외침은 예언 성취의 선포입니다. 이 외침은 사명 완성의 선포입니다. 이 외침은 성도의 궁극적 승리를 보장하는 선포입니다. 이 외침은 죄와 사망을 깨뜨린 구원 성취의 선포입니다. 이 외침은 성도에게 영생을 보장하는 주님의 선포입니다.
속죄의 완성을 마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은 화목하게 되었습니다(엡2:16).
그러므로 이제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고난 주간을 맞아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저주를 제거하신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를 주님의 오른편에 세우시고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예언성취를 완성하심으로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우리를 누가 정죄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겠습니까
이 십자가의 은혜를 다시 한번 묵상하면서 가슴 깊이 새기는 축복스러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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