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 (눅 14:1-6)

첨부 1


율법사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대충대충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 삶이요, 인생의 의미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으려고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당연히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율법이 그들 삶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긴다거나 우상을 만들어 거기다 절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으며, 안식일을 지키고, 부모를 공경하며, 살인하지 아니하고, 간음하지 아니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윤리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돈 밖에 모르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알고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나님께 입만 열면 감사요 찬양이었다. 우리가 흔히 바리새인들을 비난할 때 인용하는 누가복음 18장 11절 이하의 감사기도는 그들의 진심이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삶이 비난의 대상이어야 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토색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란 말인가 금식도 하지 말고 소득의 십일조도 하지 말라는 말인가 흔히 바리새인들의 교만을 탓하지만 바리새인이라고 어디 교만하고 싶어 했겠는가 정말 토색하지 아니하고는 살 수 없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정직하게 살아왔음을 감사하는 기도가 교만이라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감사헌금이나 감사기도는 바리새인들의 기도와 무엇이 다르며, 어떻게 다른가 바리새인들 역시 안식일을 진심으로 지켰으며, 그렇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보면 그래서는 안된다고, 그러다가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산다고, 그 사람이 미워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에 권면도 하고 경계도 하고 비판도 했을 것이다. 마치 오늘날 기독교인들처럼 불신자들이 지옥 갈까봐 안타까와 전도하는 심정으로.

성경의 드라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리새인이라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정도의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오늘날에는 찾아 보기 힘들 정도의 신앙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이런 바리새인들과의 부딪힘에 그 의미가 있다.

다시말하면 예수는 안식일을 지키는 인간들(신자들,정正)과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인간들(불신자들,반反) 을 모두 지양(止揚)하고 합명제(合命題)로 나타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예수 당시의 유대 사회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사회였기에, 안식일이라는 기존의 틀을 깨고 나온 예수는 반(反)으로 밖에 이해 될 수 없었고, 당연히 시대의 이단자로 십자가에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수의 의미는 바로 이런 부딪힘과 깨어짐에 있었으니 세상의 지혜로 어떻게 하나님의 아이러니를 알 수 있으랴. 성경의 본문으로 돌아가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주의 앞에 고창병(수종)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지금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여러가지로 심사가 뒤틀려 있었다. 갈릴리 촌 구석에서 나타난 예수라는 청년이 유대 땅에 조용한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고, 예수의 등장은 그만큼 자신들의 입지가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것이 너무나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유대 민중들의 반응은 예수에게 호의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 당대의 기득권층인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들은 안절부절 못하는 심정으로 어떻게 하면 소리나지 않게 예수를 처치할 수 있을까에 골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처단하여야 할 것인 바, 따라서 예수가 율법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하나의 좋은 방안이었다.

마침 안식일이었고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으로 예수의 거동이 있었다. 그리고 저희들은 예수를 엿보고 있었다. 어쩌면 바리새인의 두령의 집에 식사하기 위하여 들어가게 된 것 자체가 바리새인들의 음모일 수도 있겠다. 물론 예수도 그들의 시덥잖은 음모를 몰랐을 리 없지만 개의치 아니하고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호랑이 굴로 들어 가셨다. 바리새인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예수는 병자를 보고 지나치는 법이 없이 고쳐주셨고, 지금 예수가 들어간 그 집에도 참으로 불쌍한 병자가 하나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리고 그날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들어 가기만 하면 예수는 안식일을 어기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로서는 땅집고 헤엄치는 것 같은 싸움이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도 솟아날 하늘이 있다는 사실을.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여기서 자세히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 질문을 하셨다는 사실이다.

성경 본문에는 어디에도 저희들이 예수에게 질문한 내용이 없는데 예수는 그들에게 대답하고 있다. 질문이란 꼭 말로 하는 것 만은 아니다. 그들의 심령상태가 예수를 이미 추궁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신앙 생활이 이미 예수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식일의 식사자리에서 그들과 대면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추궁이요 질문인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질문의 내용을 알면 정답은 그리 멀리 있지 않는 법. 예수는 저희들의 반짝거리는 눈이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너희들은 다른 사람을 죽이기 위하여 안식일을 지키고, 다투고 주먹으로 치기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한다. 이사야 선지자가 얼마나 정확하게 정곡을 찔렀느냐.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사58:4). (Indeed you fast for strife and debate And to strike with the fist of wickedness, NKJV) 개역 성경은 금식하면서 다투고 싸운다는 정도로 의미가 상당히 희석되어 있지만 사실 이사야가 의도한 바는 다투기 위하여 금식하고 싸우기 위하여 기도한다는 의미가 아니더냐. 너희들은 금식을 3일 하고 나면 이틀 한 사람을 비웃고 철야기도 한번하고 나면 기도 안하는 사람들을 싸잡아 비난하지 않느냐.

지금도 너희는 너희들의 그 알량하게 지키는 안식일로 나를 잡아 죽이려고하지 않느냐. 어림없다.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오직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느냐 아니냐 였다. 이러한 질문을 이기는 예수의 방법은 도대체 안식일을 지킨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되받아 치는 것이었다. 너희들이 딴에는 안식일을 지킨다고 열심인 모양인데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냐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한 일이냐 아니냐 오늘날도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인지 그 의미는 모르고 주일을 지키느냐 안지키느냐만 따지고 앉아 있다. 그리고 더욱 가관인 것은 주일(안식일)이 토요일이냐 아니면 일요일이냐 하는 따위를 가지고 이단이네 아니네 웃기고들 있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말의 의미를 알아야 안식일을 지키든 말든 할 것 아닌가 교회 나가 한시간 예배 드리고 충성하고 봉사하면 안식일을 지킨 것인가 바리새인들처럼 병자야 그 병에서 고통하거나 말거나 자기만 아무 일도 안하고 있으면 안식일을 지킨 것인가 유대인들에게는 오늘날 같은 주일성수의 개념은 없었다. 다만 안식일에는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되고, 많은 길을 가서도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써 안식일을 지킨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병자를 고치는 것도 당연히 일에 속했고, 일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신자된 의무이자 도리였다.

따라서 저희들이 스스로에게 솔직했더라면 예수의 이 질문에 대하여 병을 고치는 것도 일이므로 안식일에 이를 행하면 안된다고 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에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병을 고쳐도 괜찮다고 하기에는 자기들이 너무 율법에 찌들어 있었고, 그렇다고 병을 고쳐 주면 율법을 어긴 것이라고 몰아 부치기엔 민중의 눈과 자기 양심의 소리에 괴로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율법이 지엄하기로서니 병들어 고통하고 있는 사람을 고쳐주는 것도 못하게 한대서야 말이 되는가고 소리치는 양심의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기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문제는 오늘날의 신자들에겐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일이라고 해서 일을 안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설혹 주일 하루 빼 먹고 자기 볼일 좀 보았대서 별로 시비거는 목사님도 장로님도 안 계시기 때문이다. 그저 한 두번 빠지더라도 나와만 주신다면야 감지덕지 하는 것이 오늘날 목회자들의 사목 행태이다. 신앙이 필수가 아니라 선택으로 전락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수 시대에는 이렇지 않았다. 그 때에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삶이고 전부였다. 그랬기 때문에 안식일 문제로 죽이니 살리니 대판 싸움이 벌어졌던 것이다. 오늘날엔 이런 문제로 싸우지 않는다. 그렇다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철이 들었거나 아니면 안식일의 의미를 알아서 안 싸우는게 아니다. 그저 그런 싸움에는 별로 흥미가 없어졌을 뿐이다.

떡도 안생기고 돈도 안생기는 그런 문제로 왈가왈부하기 보다는 다른 급한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도 오늘날 신자들 보다는 예수시대의 바리새인들이 훨씬 더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적어도 그네들은 오늘날 신자들처럼 형이하학적이지는않았기 때문이다.

하여튼 싸움은 벌어졌고 바리새인들의 등등하던 기세는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냐는 한마디에 한풀 꺾일 수 밖에 없었다. 자, 그러면 예수의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가 한번 대답해 보자.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정답은 합당하다인 것 같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십계명을 설명해야만 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출20:8-10) 분명히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되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병을 고치는 것은 일이 아닌가 이 모순을 적당히 얼버무리면 안된다. 예수라고 봐 줄 수는 없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병폐는 예수의 말은 무조건 옳고 바리새인이나 유대인들의 말은 무조건 틀렸다는 데 있다. 예수의 말이기 때문에 옳아서는 안된다.

옳기 때문에 옳아야 한다. 예수의 질문,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냐 속에는 어떤 면에서 이미 합당하다는 정답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찌하여 그런가에 있다. 십계명에는 너무도 분명하게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되어 있지 않은가 안식일은 문자 그대로 안식하는(쉬는, 일을 하지 않는) 날이다. 엿새 동안은 열심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제칠일 하루는 아무일도 하지 않고 쉬는 날이 안식일이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의 뜻은, 교회 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를 경배하라는 뜻이 아니다. 십계명에 있는 말씀 그대로 엿새 동안 자기 일을 한 사람이 하루를 쉬는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쉬는(안식하는) 날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과연 안식일을 지켰는가 즉 제칠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었는가 바리새인들에게 있어 안식일은 쉬는 날이 아니라 쉬어야 하는 날이었다.

엿새 동안의 일로부터 벗어나서 몸과 마음을 편히 쉬게 하는데 안식일의 의미가 있는 것인데, 저희들은 하나님이 이 계명을 주신 본래 의도는 망각하고, 쉬는게 다시 짐이 되고 일이 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 계명을 주신 것이지 우리를 구속하려고 안식일을 주신 것은 아니다.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제정된 안식일에 걸려 넘어져 오히려 안식일에는 밥도 지을 수 없는 모순에 빠졌던 것이다.

오늘날 주일성수 역시 마찬가지이다. 주일을 지킨다는 말은 성경의 어디에도 없는 개념이고 오직 그 근거로 가져올 수 있는 말씀은 십계명의 안식일 조항인데, 그렇다면 주일성수는 안식일을 지키자고 만든 것인가 아니면 지키지 말자고 만든 것인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엿새 동안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제칠일에는 교회에서 열심히 일한다. 그러니까 결국 제칠일에는 아무일도 하지 말고 쉬라는 하나님의 말씀만 우스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바리새인들의 신앙 행태와 정반대가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밥도 짓지 못했지만 오늘날에는 밥만 지을뿐 아니라 아이들도 가르치고 봉사활동도 하고 그러니까.

그러면 이러한 행위들은 바리새인들과 반대이므로 예수와 하나가 되는가 그럴 수 없다. 바리새인들은 표면적으로나마,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안식일을 지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표면적으로도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안식일이라는 주일에 온갖 일을 하느라고 여념이 없으므로), 내용적으로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예수가 말하는 안식일의 내용을 알았더라면 오늘과 같은 주일성수는 일어나지 않는다).그래서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는 법(마12:45). 예수의 말씀대로 과연이 세대가 바리새인의 시대보다 훨씬 더 악하게 되었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인가 우리의 병폐는 엿새 동안의 삶이 빠져버린 제칠일을 논한다는 점이다.

안식일(제칠일)을 말하기 전에 엿새 동안의 삶이 먼저이다. 다시 한번 십계명을 보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에 쉬기 위해서는 엿새 동안 힘써 자신의 모든 일을 행한 삶이 있어야 한다.

실업자에게 있어 공휴일은 오히려 더 괴로운 법. 열심히 일해 온 삶이 없는데 쉬는 것이 즐거울 리 없다. 쉼이 은총이 되고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이 전제 되어야 한다. 안식일은 엿새 동안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총이지, 결코 그것으로 우리를 구속하려는 무거운 짐이 아니다. 기계도 그렇지만 인간도 무작정 일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의 육체나 정신이 엿새 동안 열심히 일했다면 제칠일에는 쉬어야 한다. 이것은 의무가 아니라 순리이다. 그러나 앞에서 잠깐 언급한 것 처럼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쉴 틈이 없다.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쉬어야 할 때는 쉬어야 하는데 오히려 충성과 열심이라는 미명이 하나님의 계명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러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선 엿새동안 열심히 일한 삶이 있어야 된다고 했는데, 누가복음의 본문에 등장하는 고창병(수종)든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병자가 과연 엿새 동안 자신의 일을 힘써 행할 수 있었을 것인가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병을 몸에 끌어 안고 사는 사람이 자신의 일을 힘써 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만일 우리 같으면 심정이 어떻겠는가 온몸에 수종이 들어 아무 일도 못하고 있는 입장이라면 쉬는날(안식일)이 반갑겠는가, 아니면 지겹겠는가 나 같으면 안식일이고 뭐고 건강한 몸으로 뼈빠지게 일 좀 해보고 싶을 것이다.

이마에 땀을 흘리며 온 몸이 노곤해질 때까지 일하고, 그렇게 일하다가 쓰러져도 오히려 그것이 행복할 것이다. 일이 전제되지 않는 안식만큼 비참하고 초라하고 견디기 힘든 것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일을 하지 못하는 병자에게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아니 무의미한 정도가 아니라 지킬 수 없기에 오히려 병만 악화시키는 해악일 뿐이다. 병자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건강이 먼저 회복되어야 하고, 그래서 엿새 동안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다름이 아니다. 예수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다고 하시면서 자신은 병자의 연약과 병을 담당하러 왔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일은, 병자를 보았을 때 치료하는 것이다.

그것도 힘써 열심히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예수 자신도 제칠일에 아버지 안에서 안식할 수 있다. 예수에게는 이 땅 위의 모든 기간이 일하는 시간이었지, 안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예수가 안식하면 그것으로 병자들의 희망은 사라진다. 병원이 문을 닫고 의사가 쉬러가면 환자는 혼자 아픔을 감당하다 스러져갈 일 밖에 없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는 하나님은 그러므로 오늘도 일할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기에 오늘도 소생하는 환자, 살아나는 주검이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소리 높은 비난에 예수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고 개의치 않으셨다.

그렇다.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고 계시는데 아들된 자로서 어찌 홀로 쉴 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이 땅의 병든 자 상한 자 때문에 아파하시는데 자기가 건강하다고 어떻게 혼자 희희낙락하고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예수가 비록 달력상의 안식일에도 거침없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근거는 이것이다.

안식일이 되어도 안식할 수 없는 병자에 대한 아픔과 사랑, 그리고 그들과 하나되고자 하는 예수의 소망이, 껍질뿐인 안식일을 버릴 수 있도록 했다. 수종든 자를 그 병에서 놓여나게 하는 일은 예수가 이 땅에 온 목적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 갈 수 있고, 병자는 자신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제 병자였던 이 사람에게도 안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아니 병에서 놓여난 그 자체가 벌써 병으로부터 안식하는 것이다. 병으로부터 안식해야만 일로부터도 안식할 수 있다.

그러면 십계명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말은 무엇인가 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서 저자의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히10:1)라는 말의 뜻을 먼저 알아야 한다. 율법은 그림자이다.

따라서 안식일도 참 안식의 그림자요 모형일 뿐이지, 달력상의 제칠일이 본래 하나님의 의도 속에 들어있는 안식일은 아니다. 모형은 실체의 반영에 그 의미가 있다. 제칠일에는 아무일도 하지말고 쉬라는 모형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고 경영하는 경륜을 이해하면 된다. 그리고 그 경륜으로,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삶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실체적인 안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예수의 삶은 하나님의 경륜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모습이었으며,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의미는 달력상의 안식일을 바리새인들처럼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처럼 하나님의 경륜이 몸에 체현된 즉 말씀이 육신이 된(요1:14) 삶을 살아 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땅 위에서는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안식에 들어가기 위하여 힘쓰는 엿새 동안의 삶을 사는 것이다(히4:11).

예수는 율법이 말하고 있는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달력상의안식일)은 일해야 하는 날임을 알고 있었으며, 그 일이란 곧 병자를 건강케, 우물에 빠진 아들이나 소를 건져내는 것임을 선포할 수 있었다.

바리새인들의 착각과 오해는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경륜을 보지 못하고 그 모형과 외모만 읽었다는 점이다. 소프트웨어가 낡았을 때 그것에 의지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생을 하게 되는지. 그게 단순히 손 한번 더 움직이고 발 한번 더 떼놓는 정도의 일이라면 별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만 영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방향을 틀려 잡게 하고 있으니….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말2:7-8) 목사님들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고 율법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을 붙들어 주어야 함에도, 오히려 그들의 입술엔 충성과 열심이 올라 있고, 따라서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걸려 넘어지게 하고 있으니, 그래서 말라기가 오늘에 와서도 성경이구나! 주일 성수 열심히 하는 것은 잘해야 바리새인이 되는 길이다. 설마 바리새인이 되자고 그렇게 열심인 기독교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을 믿어 보자고 하는 그 길에 예나 지금이나 어두움이 그 눈을 멀게 하여 볼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하고 있으니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인간들은 어느 한쪽으로 눈이 고정되기 시작하면,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에서 설명한 것처럼, 좀처럼 다른 세계로 눈을 돌리고자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도 예수의 질문,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냐를 통해 자신들이 지키고 있는 안식일의 모순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으로부터 스스로 탈출하고자 하지 않는다. 안식일의 모순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 요한복음 칠장에서는 할례의 예를 들어 저희들의 허구를 찔러 쪼개지만 저들은 예수 앞에 자신들을 맡기지 않는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할례를 주느니라.

(요7:22) 할례를 주는 것도 분명히 일이건만 할례를 베푸는 것은 괜찮고 병을 고치는 것은 안되는 이런 모순 속에 살던 사람들이 당대의 석학이요 엘리트 집단이었다.

그리고는 이러한 모순을 꼬집는 예수의 질문에 대하여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물론 저들의 침묵은 자신들의 모순을 인정하는 것이며 논리에서의 패배를 시인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말로해서 안되는 싸움이라면, 그래도 꼭 이겨야 하는 싸움이라면 완력이 동원될 수 밖에 없다. 십자가는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질문에 침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경적인 논리나 삶을 가지고 반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은 그렇게 골치 아픈 분이 아니라는,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있다는 억지와 막무가내만 소리를 높일 뿐이다. 이래서 역시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다. 우리는 기독교의 세뇌로부터 깨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대교가 초림하신 하나님을 죽였듯이 기독교는 재림하는 하나님을 죽일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허울로.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살아야 한다. 그래야 예수와 만나 하나님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예수의 말씀이 우리의 병을 고쳐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를 만나고 예수로 살자. 자신 안에서 풀어지지 않는 모순에 갈등할 때 우리는 예수를 만날 것이다. 이 모순과 갈등, 치유되지 않는 아픔은 우리를 영원으로 초대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절망만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사랑의 묘약이다. 성경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절망만이.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