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찌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전 15:1-20)

첨부 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가시면류관에 찔린 얼굴, 예리한 창칼에 찢겨진 옆구리, 쇠못으로 박힌 손과 발,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흘러내린 붉은 피로 유혈이 낭자한 채 그분은 숨을 거두셨습니다. 아주 외롭고 고독한 수모의 죽음이었습니다. 은 30과 스승을 바 꾼 가룟 유다, 겁에 질려 비겁했던 제자들, 독선과 형식에 사로잡힌 종교지도자들, 민심과 이반(離反)된 헤롯 왕, 정의에 앞서 처세술에 능한 빌라도, 주책없이 끌려 다니는 군중들이 서로 야합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 그 시체는 용감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묻혔고, 빌라도는 그 무덤을 경비병들로 하여금 삼엄하게 수비하게 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일 때보다 무덤을 경비하는 데 더 많이 신경을 썼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살아 생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3일에 살아나리라'(마 16:21)고 말씀하신 것이 유대 사회에 널리 퍼져있었기 때 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3일은 어김없이 다가왔고, 그리고 우리 구세주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지진이 난 듯 땅이 흔들렸고 이 때문에 무덤들이 많이 열렸으며 무덤들이 열리니 무덤에 갇혀있던 시체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철통같이 수비하고 있던 경비병들은 혼비백산하여 다 도망 을 가고 말았습니다.

안식 후 새벽 미명에 당시 풍습대로 예수님의 시체에 기름을 바르기 위하여 여인들이 무덤 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무덤을 막았던 돌문이 열려져 있었습니다. 당 황한 여인들에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체 로 변하였고 그를 가두었던 무덤은 텅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을 아십니까 바로 우리 기독교는 무 덤이 없는 생명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는 교주들의 무덤이 다 있습니다. 불교의 석 가는 인도 창수성 안에 그의 무덤이 있고, 유교의 공자도 창평향추 읍(邑)에 그의 무덤이 있 습니다. 회교의 모하멧은 메카에 그의 무덤이 있는데 회교도들은 그 무덤을 루비와 사파이 어와 다이아몬드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는 그 무덤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합니다.

인도에서 선교사 한 사람이 노방전도를 하는 중에 설교를 하고 있는데, 이슬람교도 한 사람 이 끼어 들었습니다. '우리 이슬람교도는 당신 네 기독교인들이 갖지 못한 것을 한 가지 갖 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선교사가 '그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이슬람교도는 '메카에 가면 관이 하 나 있는데 그 안에는 모하멧의 시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관(棺)을 보면서 우리 교도들은 그가 살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리고는 이어서 하는 말이 '그러나 당신 네 기독교 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더라도 빈 무덤 밖에는 없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선교사가 '고맙습니다. 당신이 하신 말씀이 정말 옳으십니다. 그러나 바로 그 말씀이 야말로 당신의 종교와 기독교의 무한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무덤이 빈 것 은 우리가 믿는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지요'라고 힘주어 말했다고 합 니다.

바로 우리의 구세주 예수만이 무덤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들은 기뻐하고 아주 큰 소리 로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보통 '부활장'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5장 1절에서부터 끝 절인 58절까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내용만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는 부활을 믿지 못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하면서 탄식하며 묻고 있습니다.

유명한 헬라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불멸'은 믿으면서도 죽은 자의 부활은 믿 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어떤 고린도 교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부활을 믿기는 믿되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육체 대로 부활할 것이다'라는 사상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고대 애굽에서부터 내려오는 사상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의 무덤에는 방부제 처리를 한, 왕의 시체가 든 금관이 있고, 그 곁에는 먹을 곡식과 여비가 놓여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왕이 육체대로 부활하면 왕궁까지 올 여비와 먹을 곡식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사람이 죽어 입관할 때에 물에 불린 쌀을 입에 잔뜩 집어넣는다든지 노자 돈 이라 하여 동전이나 혹은 신발을 관(棺)에 넣어 주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대로 부 활한다면 부활은 오히려 슬픈 일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잘못된 부활관을 바로 잡기 위해서 이 서신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확실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 당시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을 놓고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 를 보았다는 것은 '유령을 보고 착각했거나 환상을 본 것이지 어찌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너무나 사모하고 그의 부 활을 기대했기 때문에 동산지기를 보고 착각했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미 이루어진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성으로 서 완전히 죽으셨고, 그리고 영원하고도 완전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한 신자의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 시(時)에 있을 것이고, 불신자의 부활은 대심판 시에 있을 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 부활에 대해 401번이나 언급하고 있고, 또한 성경은 주 님의 부활을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다는 것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부활하신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에게 보이셨습니다(마 28:9:요 20:16-17).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에게(고전 15:5:눅 24:34)와 엠마오 도상에서 글로바와 그 의 친구에게도 보이셨습니다(눅 24:13-34). 도마 없는 10제자에게(눅 24:36-)와 디베랴 바다 에서의 일곱 제자들에게(요 21:1-)도 보이셨고, 또한 도마와 함께 한 열한 사도들에게 보이 셨습니다(요 20:26-). 승천하실 때에는 500여 형제들에게 한꺼번에 보이셨습니다(고전 15:6).

감람산에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행 1:6), 다락방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 며(눅 24:36), 산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마 28:16). 뿐만 아니라 육신의 형제 야 고보(고전 15:7)와 그리고 핍박자 바울(고전 15:8)도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였습니다. 이것 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어느 특정인에게만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여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 습니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4장 25절에 보면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 한 과부에게 뿐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령한 비밀은 받는 자 밖에는 알 사람이 없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비밀을 아 무에게나 보여주지 않듯이 그리스도의 부활도 미리 선택한 자들에게만 보이셨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2절에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했고, 사도행전 13장 48절 에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부활을 증거할 수 있는 자에게만 보여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8절에서 우리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면서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느낄 수 있고(눅 24:39:요 20:17, 27), 만져볼 수도 있는 살과 뼈를 가지고 있었으며(눅 24:39), 음식을 먹을 수도 있는 실제적인 몸이셨습니다. 예수 님 스스로가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영은 나와 같은 살과 뼈가 없느니라'(눅 24:31)고 말씀 하셨습니다. 반면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닫혀진 문안으로 들어가거나 금시 사라질 수 있을 만큼 아주 특별하게 변화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셔서 저 와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의 풍성한 열매로 맺혀지게 할 믿습니다.

둘째로, 부활을 전파한 사람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 어 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본문 12절)고 하였습니다. 그렇 게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목격하고 목격한 그들이 전해 준 부활을 왜 없다고 하느냐 왜 믿 지 못하느냐 왜 의심하느냐 하고 탄식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의심하는 도마에게는 직 접 못자국과 창자국의 흔적을 만져 보도록 까지 허락하셨고, 제자들과는 함께 식사도 하셨 으며, 성경을 풀어 주시기도 하셨고, 또 제자들은 음성과 얼굴로 예수님을 알아보기까지 했 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는 구약성경이 증거하였고, 예수님 자신 또한 여러 번 증거하셨습 니다.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많은 성도들이 부활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 습니다. 부활을 전하다가 스데반이 순교를 당했고(행 7장), 야고보가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 니다(행 12장).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 당했으며, 그밖에도 당시에 부활을 목격했던 제자들 대부분이 다 부활을 증거하다가 순교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크고 잔인한 방법이라 해도 그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초조해 하지 않고 자기의 차례를 기다렸다가 기 꺼이, 담대하게 죽어갔습니다.

2세기 로마의 트라얀누스 황제 때, 안디옥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호송되어 맹 수의 밥이 되었습니다. 그는 구원의 진리와 부활의 확실성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자신을 박 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만약 기독교의 이 모든 것이 허무맹랑한 것이라면 내가 무슨 까닭으로 여기 구속을 당하고 있겠는가 또 이것이 거짓이라면 무슨 까닭으로 여기 구속을 당하고 있겠는가 또 이것이 거짓이라면 무슨 까닭에 내 몸을 불 속, 칼 앞에, 사나운 짐승 앞에 갖다 놓도록 하겠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얼마나 확신했고 얼마나 자신감이 있었으면, 목에 칼이 들어오고, 불 에 타 죽고, 기름가마에 던짐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까지,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담 대히 죽어 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도 부활이 거짓으로 조작된 사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 까 참을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죽는 사람은 더러 있으나, 거짓을 위해서 자신의 귀중한 생 명을 바칠 사람은 없는 법입니다.

셋째로, 부활은 성도의 소망 전도서 3장 1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씀하셨 습니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이 육체로는 영생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불완전 합니다. 조금만 다쳐도 부러지고, 눌려도 부서지고, 충격을 조금만 가해도 불구의 몸이 되는 일이 많습니다. 사소한 병만 걸려도 이기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런데 학은 천 년, 거북이는 만년을 산다고 하며, 미국의 자생하고 있는 세라이어 나무는 칠 천년을 산다고 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만물의 영장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 음받은 우리가 짐승이나 식물만치도 오래 살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성령 충만했던 성도들이 그토록 거짓을 위해서 담대히 죽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은, 본문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고전 15:19)고 말했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 면 남이 놀 때 놀지 못하고, 남이 잘 때 자지 못하며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한 것이 미련 한 일들이 되고 말 것이요, 쓰고 싶을 때 쓰지 못하고, 재산과 생명을 바쳐가며 교회를 세우 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모든 일들이 어리석은 일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에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 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 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썩을 것이나 욕된 것, 약한 것이나 육의 것으로 심었으나 즉, 다시 말하면 죽 었으나 부활한 몸은 썩지 아니할 것이요, 영광스러운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강 한 것으로, 신령한 것으로, 해와 같이 빛나는 영화로운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썩지 아니할 몸으로 부활하니 무덤이 필요 없고, 영광된 몸으로 부활하니 교통사고 날 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되니 죄지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은 불구자에게도 소망이 되고, 건강한 자에게도 소망이 됩니다. 젊은 사람에게 도, 노인에게도 소망이 됩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도, 죄 때문에 마음이 괴로운 사람에게 도, 그리고 문제 때문에 앞이 캄캄한 사람 모두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삶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에 사는 이유가 없을 것이며, 전파하는 것도 헛되 고, 믿음도 헛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다 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 의 소망을 가진 바울은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하고 반문했습니다.

무덤은 예수님을 더 이상 붙잡아 둘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은 강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은 더욱 강합니다. 어둠보다 빛이 더 강하고, 불의보다 의가 더 강하며, 거짓보다 진실 이 더 강한 법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곧 참이 거짓을 이겼다는 것을 말하고, 선이 악을 이겼다는 것을 말합니다. 빛이 어두움을, 사랑이 미움을, 하나님이 사탄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십자가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끝을 맺 었다면, 그분의 사역은 불완전했을 것이고, 만일 무덤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그대로 계셨다 면, 그분은 패배자로만 알려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가 결코 십자가로만 끝나지 않았고, 무덤이 결코 무덤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 다. 하늘의 권세와 승리의 은총에 의해 영원한 생명이 하늘나라까지 이어지게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계절이요, 대자연의 생명을 약동케 하는 4월하고도 오늘 23 일은, 우리 주님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인류의 죄를 담당하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님께서 살아 계실 때 예언하신 그대로, 3일만에 부활하신 기쁨으로 충만한 최고의 날입니다.

이 부활의 계절에, 그 부활의 능력과 함께 하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부활의 주님은 여러분의 환경과 생활을 새롭게 부활시키실 것이며, 여러분의 직장과 사업을 새롭게 하시고,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를 새롭게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이번 부활절을 통하여 부활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하시고 확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 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 습니다. 천지가 무너지고, 지금 당장 생명의 위협이 다가온다 해도, 우리의 주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신앙과 곧 있게 될 성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소유하시기를 바랍니 다. 그리고 이 부활의 메시지를 온누리에 전하는 사명을 주님 오실 때까지 잘 감당합시다.

그래서 여러분의 부모, 자녀, 형제, 친척, 그리고 이웃의 많은 불신자들까지 이 부활의 기쁨 에 함께 동참하는 은혜와 복을 받게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