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찌하여 지금은 (요 13:36-38)

첨부 1


성경의 어디를 들추어 보더라도 우리는 이와같은 장면들을 흔하게 만날 수 있 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은 안된다고 하는 것을 인간들은 할 수 있다고 한다든 지, 아니면 하나님은 된다고 하는 것을 인간들이 안된다고 우기고 있는 장면 들 말이다. 본문의 말씀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다. 예수님은 베드로더러 네 가 지금은 나를 따라 올 수 없다고 하시는데, 베드로는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고 충성을 표하고 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베드로의 마음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베드로를 모독하는 처사일 것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모습을 어느 정도 이해하였다면, 베드로라는 사람이 자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정도로 약삭빠른 인물이 아니 라는 것을 아셨을 터이다. 베드로는 순수했고 또한 열정적이었다. 그리고 그 만큼 주님을 사랑했다. 베드로는 정말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도 있겠다 싶어 이런 고백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웃기지 말라는 것이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웃기지 말아라. 너는 나를 위하여 목숨 을 버리기는 커녕 오히려 나를 모른다고 세번씩이나 부인할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예수님은 어찌하여 당신이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이 처럼 냉정하게, 칼로 무 자르듯이, 배신을 선언하시는가 도대체 예수님은 베 드로가 당신을 부인하리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을까 그리고 또 한가지 덧붙 인다면,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목숨까지도 내어 놓 을듯이 덤벼드는 풍토에 대하여 예수님은 과연 무어라고 하실 것인가 고맙다 고 하실 것인가 아니면 웃기지 말라고 하실 것인가 우리가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과 그리고 그 이후의 부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요한복음 13장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어떠한 결과에는 그 결과를 가능케 한 원인이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신통력 으로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한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13장의 전반적인 흐름 속에는 이미 베드로의 부인이 잉태되어 있다. 문제는 아직 결과로 나타나지 않은, 감추어진 부인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이 눈이 있다 면 우리도 이러한 예언을 할 수 있다.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만드는 것은 아 니지만, 한 마리 제비가 하늘을 날면 머지않아 봄이 오리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베드로의 말이나 행동 속에 이미 당신에 대한 거부와 부인이 나타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베드로의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 당시의 베드로로서는 충분히 그랬다. 여기에 베드로와 주님 사이의 간격이 있다.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는 베드로의 고백도 진 실이고, 너는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없다는 주님의 책망도 진실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어떻게 서로 다른 두개의 진실이 공존할 수 있는가

이런 것을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 한다. 지금 주님과 베드로는 서로 같은 침 상에 누워 있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13장은 예수 님과 제자들 사이의,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들을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 교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기들이 아무리 주님을 위하여 산다고 하더라도 베드로 같은 열심이나 충성이라면 그것은 주님을 부인하는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요한복음 13장을 개괄해 보자.

요한복음 13장은 최후의 만찬이 시작되는 장이다. 이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제자들 중 하나가 자기를 팔리라는 사실을 언급하 고 있다. 이후에 이어지는 요한복음 14장에서 17장은 소위 다락방 강화로 일 컬어지는 기독교 복음의 정수들이다. 예수님은 이런 복음의 정수들을 제자들 만 있는 자리에서 가르치셨다. 물론 13장에는 가룟 유다가 있었지만 14장부터 는 명실공히 제자들에게만 진리의 핵심을 전하셨다. 요한복음 13장은 이렇게 중요한 가르침이 시작되는 장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여기서도 주님과 제자들은 서로 맞지 않는다. 제 자들로서는, 주님께서 수건과 대야를 들고 자기들의 발을 씻긴다는 것은 상상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황송한 일이었고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제자인 내가 주님의 발을 씻겨 드려야지 어떻게 주님께서 나의 발을 씻길 수 있다는 말인가 오늘날 우리라면 어떻게 반응했을 것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베드로 의 반응이 옳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요13:8)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는 쉬워도 주님의 섬김을 받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우 리가 주님을 위하여 죽을 수는 있지만,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을 수는 없는 문제이다. 옛날 베드로가 그랬듯이 오늘날 신자들도 주님을 위하여 죽으려고 하고, 주님으로 하여금 나의 발을 씻기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서 그것이 주 님을 사랑하는 일이고 주님을 위한 충성인 줄 안다. 그러나 주님 생각은 그렇 지 않았다. 주님이 우리의 발을 씻기셔야 하고,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셔 야 한다는 사실을 주님은 알고 계셨다. 그랬기 때문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다 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요13:8)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 한마디에 베드로는 그만 기가 죽어버렸다. 그러 나 베드로가주님의 의도를 제대로 알아서 자신의 발을 주님께 맡기는 것은 아니다. 다만 뭐가 뭔지는 잘 모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과 상관이 없 다니까, 자신의 이성이나 의지와 상관 없이 자신의 발을 맡기는 것이다. 여기 서 보면 베드로는 주님의 의도나 생각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주님과 떨 어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주님을 좋아하 고 주님과 같이 있고 싶어 하더라도, 주님의 의도를 제대로 읽지 못하면 항상 베드로 같은 부인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주님의 의도를 제대로 읽을 수 없었음에도 어찌하여 주님 을 좋아하며 따라 다녔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정확해야만 요한복음 13 장의 흐름이 제대로 드러나고, 베드로가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를 수 없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아는대로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은 주님이 그들을 불렀을 때부 터, 보통의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을 해내는 예수를 보아 왔다. 어부인 자신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고기를 잡는다든지, 자 신으로 하여금 물 위를 걷게 하신다든지, 나사로를 살리고 귀신들린 자를 깨 끗하게 하는 주님의 능력을 보면서, 3년반 정도로 추정되는 예수님의 공생애 를 함께 지내왔다. 이제 정말 예수는 그의 마음 속에서 확고부동한 메시야였 으며, 다윗의 나라를 재건할 왕으로의 등극이 목전에 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가이사의 군대가 제아무리 강하고, 헤롯의 창검이 제아무리 날카로워 도, 시공을 초월하고 영육을 넘나드는 주님의 능력을 어찌 따를 수 있으랴.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이러한 믿음으로 충만해 있었다.

이것은 베드로의 믿음이 특별히 뛰어났다기 보다는 세상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정도의 믿음은 가질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생각해 보자. 자기 눈 앞에서 죽은 자가 살아나고, 자신이 직접 물 위를 걸어가고,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어른 오천명을 먹이는 예수의 능력을 직접 보고서, 그 정도의 믿음 이 안생겼다면 그것이야말로 참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에게 있어 예수님은 자신이 깍듯이 받들어 모셔야 할 주님이 었고, 스승이었으며, 왕이었다. 이런 예수께서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담은 모습으로 자신의 발을 씻기려고 자기 앞에 서셨다. 당연히 너무 기 가 막히고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베드로가 자신의 발을 주님께 내어놓 지 못한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자신의 주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베드로는 주님께 책망을 듣는 것이다. 주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 예수의 강함에 대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러한 능력과 강함이 없어진듯이 보이자(예수가 십 자가에서 죽어버렸다는 사실은, 인간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누가 뭐라고 하더 라도, 예수의 무능이요, 약함이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미련 없이 예수 를 부인하고 예수를 떠나간 것이다. 베드로와가룟 유다의 차이점이 있다면, 가룟 유다는 머리회전이 빨라 예수가 잡히기 전에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미리 발을 뺀 사람이고, 베드로는 워낙이 둔한 사람이라 예수가 잡히고 십자 가에서 완전히 죽은 다음에야 예수에게서 미련이 떠난 사람이라는 점일 것이 다.

그러나 아직 예수가 그렇게 잡히기 전, 자신들에게 그동안 보여준 능력의 주 님으로 계시는 동안에야 예수는 그들의 확실한 스승이었고 확실한 주님이었다 . 이것이 병이다. 강한 자 앞에서는 한없이 약하고, 약한 자 앞에서는 더없이 강한 인간들의 속물근성이믿음이란 허울을 뒤집어쓰고 이렇게 횡행하는 것 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 람이나, 예수님이 장차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영생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소 유한 분이기 때문에 그 앞에 부복하는 사람은, 말로는 하나님을 위하여 죽기 까지 하겠노라 고백하더라도, 본문의 베드로에게 떨어진, 닭 울기 전에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책망을 피할 수 없다.

본문이 나오게 되는 이런 배경을 이해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너희들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렇게 열성적인 제자들 가운데 어쩌면 그렇게 하나도 가룟 유다를 제지하지 않 았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 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 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 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요13:21-26) 우리가 아무리 양보하고 보아 주더라도 여기서 한가지 이해 못할 내용은 어찌 하여 베드로나 요한이 가룟 유다를 잡고 결투를 벌이지 않았느냐 하는 점이다 . 사실 베드로 정도의 다혈질이라면 나중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의 종 인 말고의 귀를 벨 일이 아니라, 이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가룟 유다의 목을 베었어야 옳았다. 우리가 아는대로 가룟 유다의 배신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 에서 죽으신 것이라면, 가룟 유다의 그러한 배신에 대한 정보를 미리 확실하 게 알고도 대처하지 않은 베드로나 요한은 가룟 유다의 공동정범이라 하여 지 나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지금 누가 당신을 배반할 것인지 분명하게 일러주고 계시는데, 그런 내용을 모두 듣고 난 다음에도 가룟 유다에게 뺨 한대 때리지 않던 베드로가,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고 하고 있으니, 우리 같으면 베드로의 그 시 커먼 속을 모르겠는가 주님을 죽이고 배반하는 일에 공동정범으로 끼어들어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노라 한다. 이래서 주님은 외롭다. 자신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는 사람들 속에서의 외로움. 바닷물 한 가운데서 식수가 없어 목말라 하는 목마름도 이런 열성적인 추종자 가운데 서의 외로움 보다는 덜하리라.

그러면 베드로는 어찌하여 주님의 이러한 충격적인 선언 앞에서도 아무런 행 동을 취하지 아니하였던가 첫째로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주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베드로가 지금껏 보아온 주님의 능력은 가이사의 백만 군대가 오더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을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그런 주님의 능력이 건재한데 가룟 유다 제까짓 게 뭐라고 주님을 팔아 넘기거나 배반하거나 할 것인가. 유다가 제정신이 아 니어서 주님을 배반할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주님이 유다의 배반 따위에 넘 어가서 십자가에 매달릴 수 있는 분인가. 어림 없는 일이다.

베드로 생각에는 주님이 지나치게 예민하셨을 수도 있고, 설혹 가룟 유다의 배신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지금껏 그래 오셨듯이, 이미 대비책 을 충분히 마련하고 계시리라고 믿었을 수 있다. 만일 생각이 이러함에 이르 렀다면 베드로로서는 가룟 유다의 배신이야 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 횡재나 다름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무슨 말인가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모습은 마치 돈키호테를 연상케 할 만한 저돌성을 보인다. 그러나 저돌적인 사람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잘못은 꼼꼼하지 못하다 는 점이다. 앞뒤를 재지 못하고 그저 나설 데 안 나설 데를 잘 분간하지 못한 다. 물론 이런 스타일이 꼭 필요한 일이나 대상이 있다. 그러나 상당 부분은 실수와 시행착오로 얼룩지기 쉽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하 여 쉽게 뉘우치기도 하지만, 그러나 다음번에도 여전히 자신의 그러한 단점들 을 버리지 못하고 되풀이한다.

그러다보면 자신과 대조적인 사람에 대하여는, 때로는 무시하기도 하지만 상 당 부분은 열등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가룟 유다는 베드로 같은 저돌적인 사 람과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과 그 집단에 있어 재정을 담당했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베드로 같은 저돌성의 기분파 에게 조직의 재정을 맡긴다면 대충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파산 선고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매우 치밀한 사람이었다. 언제 자세히 언급할 기 회가 있겠지만, 가룟 유다는 정치적인 전략이나, 민심을 모으고 여론을 형성 하는 데에 아주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 하는 논쟁이 있었고, 조직의 재정을 맡고 있는, 오늘날로 말하면 정당의 사무총장 정도 되는 자리에 가룟 유다가 있었으니, 베드로로서는 속이 뒤틀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곧 주님께 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로마의 주구들을 몰아내고 독립된 이스라엘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 너무나 뻔한 상황에서(요한복음 12장 참조), 자신 보다 더 주님 께 충성하거나 아니면 능력이 뛰어나거나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밥이 입으로 들어가겠는가 그런데 주님께서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팔아 넘기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만하면 횡재라고 한 말을 이해하실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어디 주님이 가룟 유다의 배신 정도에 하실 일을 못하실 어른인가. 그렇다면 가룟 유다야 말로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아주 결정적인 헛다리를 짚는 것이다. 이걸 잡아 줘 내가 나서서 가룟 유다를 흠씬 두들겨 패면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것이고, 그러면 자비심이라면 둘째 가기를 서러워하시는선생님이니까 보나 마나 유다의 잘못을 덮어주실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여전히 가룟 유 다는, 전 보다 주님의 총애가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나의 막강한 라이 벌이 아닌가. 다 된 밥에 코 빠뜨릴 일 없지. 인생이 아깝기는 하지만, 가룟 유다, 저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내어버려 두자.

그리고 주님께는 나의 충성심을 다시 한번 보여 드리자. 가룟 유다가 빠져나 간 그 자리를 확고부동하게 움켜쥘 수 있는 나의 충성심을 보여드리는 것이다 . 그런데 어떻게 나의 충성심을 보여드리나. 이런 계산에 여념 없는 베드로에 게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 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요13:33) 아니 주님은 자꾸 어딜 가시겠다는 거야. 그리고 왜 우리는 주님 가시는 곳에 올 수 없다고 하시는 거지. 아마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곳인 모양이지. 그렇 다면 … 그래. 바로 이거야.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물어보고 그 길이 아무 리 어렵더라도 그 길을 따라 가겠다고 고백하는 거야. 틀림없이 전에 가이사 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했을 때와 같은 칭찬이 있을지도 몰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 겠나이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 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렇다. 우리의 부인이 끝나려면 닭이 울고 새벽이 와야만 한다. 어두움이 걷 히고 햇살이 들면, 내가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노라 한 말의 의미가 무 엇이며, 내가 주님을 따른다고 한 말 뒤에 숨겨진 세상적인 계산이 드러나리 라. 이걸 똑바로 본 사람들 만이 주님 가신 길을 걸을 수 있고, 주님 가신 곳 에 이를 수 있다.

베드로는 어찌하여 지금 따를 수 없었는가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그것은 아직 닭이 울지 않아서라고.

닭아, 빨리 울어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