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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집을 위하는 열정이 (요 0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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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들의 본문(요 2:13-22)은 성전정화(聖殿淨化, Tempelreinigung)사건입니다. 대인의 큰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웠을때, 예수께서 예루살렘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막 11:7)에 기도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소와 양과 비들기 파는 사람들, 돈에 혈안이 된 장사꾼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토록 거룩한 아버지의 집이 장사하는 집으로, 강도의 굴혈(막 11:17, 마 21:13, 눅 19:46)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인간들의 탐욕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은, 주의 집이 이토록 더럽게 된데에는 그 당시 성전을 맡아 관리하는 종교지도자들의 탐욕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여 예루살렘성전에 올라가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격분(Eifer, Zorn)으로 가득찼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 (Eifer, Leidenschaft, passion)이”(요 2:17), 그토록 더럽혀진 성전을 그냥 두고만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채찍을 만드셔서 성전을 정결케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본문에서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켜야 할 말씀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주의 집을 위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라(새번역),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내 열정이 나를 불사르리이다(공동번역), 하나님의 집을 위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현대어 성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참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주의 집을 사랑하는 열심(열정)이 불 타 올랐습니다. 이 열정이 성전정화의 동기가 된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열심”이란 말은 “열정”(혹은 정열)이란 뜻도 있고, “고난”(혹은 고뇌)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독일어에서 분명해 집니다. 독일어의 정열(Passion, Leidenschaft)이란 말과 고난(Passion, Leidenschaft)이란 말은 같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바른 목회를 실천하기를 원하는 우리 동역자들의 영성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우리 목회자들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주의 몸된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말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이고,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되는 양떼(성도)들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이사랑이, 이열정이 목회의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고 양떼들을 사랑하는 그 열정이 우리의 몸과 마을을 불살라 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모습입니다. 즉 새로운 교회를 위해 성전인 자신의 몸을 허시고(십자기에서 죽으신), 다시 세우신(부활하신)주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죽고 다시 사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의 영성(Spiritualitat)입니다. 우리 목회자의 영성은 바로 십자가를 지고 죽는 순교자의 영성입니다. 이 같은 순교자의 영성이 있을 때 교회를 새롭게 세울 수 있는, 다시 교회를 살리는 부활의 영성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르트(K. Barth)와 투루나이젠(E. Thurneysen)은 그 당시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는 열정(Leidenschaft)과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교회 갱신의 문제로 고뇌(Leidenschaft)한 것이 그 당시 교회를 새롭게 하는 놀라운 신학을 낳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보렌(R.Bohren)교수는 바르트와 투루나이젠의 신학운동을 그 당시 독일루터교회를 새롭게 한 제 2의 종교개혁이라고 까지 극찬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른 목회를 실천하고 우리의 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교회를 사랑하는 열정과, 교회갱신의 문제로 고뇌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은 열정과 고뇌는 나 자신을 불사르고, 십자가를 지고, 나 자신을 헐어 버리는데 까지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불사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 처럼!
그런데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목회자들인 우리들에게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들에게 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고, 양떼들을 사랑하는 열정이 부족합니다. 양떼들을 위해 목숨을 내 놓는 선한 목자가 아니라 양떼들의 털과 고기를 탐하는 삯군의 모습으로 둔갑해 있습니다. 우리속이 이기심과 탐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짐승의 속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속에 들어와 있는 소와 양과 같은 짐승의 속성을 헐어버려야 합니다. 우리속의 짐승들을 바깥으로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옛사람, 낡은 인간성을 헐고 주님이 거하실 새 성전으로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바로 주님이 거하실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이일을 우리 목회자들부터 해야 합니다. “성전을 헐라”고 다른 사람을 향해 호통을 칠것이 아니라, 나자신 부터 허는 일을 해야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속에 도사리고 있는 짐승의 속성을 쫓아내고, 내속에 자리잡고 있는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헐어 버리고 새로운 성전을 세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이 일을 우리부터 시작하십시다. 우리교회의 모습은 바로 우리목회자들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1991년 11월 제1회수련회 폐회예배 설교)

후기 성령시대
(출애굽기 23:20-33, 갈라디아 2:11-21)

유 경 재 목 사
안동교회, 본회 2대회장

예수님이 승천(昇天)하신 후 오순절(五旬節 Pentecost)에 제자들을 비롯한 신도들 120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는 중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저들 가운데 임재 하셨습니다. 이 때부터 사실상 교회가 시작되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출발하여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세계 속에 전파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역사하심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의 은총을 성령께서 오늘 우리 속에 체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는 교회 성립의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성령이 떠나가시면 교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떠나신 시대를 ‘후기(後期) 성령시대’라고 이름을 붙여 본다면, ‘후기 성령시대’는 발전된 시대가 아닌 교회 소멸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원래 어떤 시대에 ‘후기’라는 말을 붙일 때는 그 시대의 사상이나 문화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발전적인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후기 현대’라고 할 때 그것은 현대의 특징이던 산업화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후기 성령시대’라고 한다면 발전적인 새로운 시대가 교회 앞에 열린다는 뜻이 되겠지만, 여기서는 그 반대로 성령이 떠나가신 시대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붙여본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항상 성령의 역사하심과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성령시대가 끝나는 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때가 될 것이며, 그 때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때가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역사를 만드시는 성령
교회가 항상 교회 되기 위해서는 성령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그것을 좇아 계속 움직여야만 합니다. 잠시라도 방심할 때 성령은 앞서 가시고 교회는 뒤떨어져, 무기력한 교회로 남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끊임없이 활동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성령이 교회에 한번 강림하시면 영원히 그곳에 머물러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큰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기 위해서 부지런히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무궁무진한데 비해 그 은총을 받아야 할 인간은 너무 무지하고 완악하여 “성령께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롬 8:26) 우리를 위하여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 >

인간의 무지를 깨우치고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은총의 세계를 향하여 마음문을 열게 하시기 위하여서는 성령께서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거부한 사람들
오늘의 본문인 출애급기 23장 20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이스라엘 자손들의 길을 지키며, 예비하여 두신 곳으로 인도하실텐데, 그 인도하심을 따르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그 인도에 순종하기만 하면 어렵지 않게 약속의 땅을 점령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행하시어 그들을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가셨습니다. 구름기둥이 그들 앞에서 저들을 인도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였습니다. 구름 기둥이 움직이면 저들도 움직였고, 멈추어 서면 저들도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런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충실하게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 가는 길이 험하고 메말라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저들은 이집트로 다시 돌아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특히 열 두 명의 정탐자(偵探者)를 보내어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답사하고 돌아왔을 때, 그 중 열 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의 사기를 떨어트렸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하여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40년 동안이나 광야 생활을 하게 되는 벌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한 결과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곳에 안주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왕국을 건설하고 예루살렘에 성전까지 화려하게 지었습니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저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런 하나님의 역사를 거부하고, 다만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만을 든든히 세워가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곧 둘로 분단되었고, 그들은 계속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살았던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나타나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을 충고하였지만, 저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유대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거부한 결과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화려한 성전을 다시 건축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율법 전통을 계승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성령은 그들에게서 떠나셨습니다. 유대교는 후기 성령시대에 접어든 것입니다.
성령은 그들에게서 떠나 나사렛의 한 보잘 것 없는 여인인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하셨으며, 그가 태어나셔서 장성하시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님과 함께 하셨고, 예수님은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성령은 그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 하셨고, 그것을 통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소수의 무리들 가운데 다시 성령이 임재 하시면서 초대 교회가 출발하였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거부한 예루살렘 성전에 임재 하시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소수의 무리들에게 강림하신 것입니다.
성령 강림과 더불어 시작된 교회이지만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시작된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예루살렘 성전과 상관없이 활발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면서 성장하여 갔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도 끊임없이 새롭게 전개되는 성령의 역사를 미쳐 따라가지 못하고 머뭇머뭇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예루살렘교회로 하여금 완전히 율법종교에서 떠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저들이 지켜온 율법주의 즉 할례(割禮)를 받아야 한다는 것과 이방인과는 자리를 같이하지 않는다는 전통 같은 것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을 요청하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인 베드로 자신이 아직 이런 율법주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환상을 통해 이 전통에서 벗어나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되고,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에 초청을 받고 그곳에 찾아갔다가 거기에도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역사하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이제는 유대인 안에서만 아니라 세계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할 것임을 강력하게 나타내신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는 대단히 보수적이어서 그 후에도 이방인 선교에는 소극적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또다른 일꾼을 택하셨는데 그가 곧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성령의 역사하심을 충실하게 따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교회의 어느 지도자들 보다 진보적인 신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바울을 받아드리기를 주저할 때 바울은 그들의 도움 없이 이방인 교회의 선두주자격인 안디옥교회를 중심으로 이방인 선교에 그의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구원을 얻는다고 전파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임을 그는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신학적 신념을 가지고 이방인 선교사로 자처하고 나서서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하여 많은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성령은 사도 바울과 함께 하셔서 그의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바울이 아시아 쪽으로 선교하려 하였으나 성령이 막으셨고, 드로아에서 환상에 마케도니아 사람이 나타나 도와달라는 소리를 듣고, 그리로 건너가서 선교하게 됩니다(행 16:6-10). 예루살렘교회가 이런 활발한 성령의 역사를 따르지 못하고 있는 동안, 사도 바울은 그 역사를 활발하게 이방인 모든 지역에 선교를 하였고, 그는 로마까지 갔다가 스페인까지 갈 꿈을 가지고 기도하며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의 역사를 따르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율법주의 전통을 말끔히 청산하지 못하고 머뭇머뭇하는 동안 성령은 저들 가운데서 떠나 이방인 지역으로 나가신 것입니다.
오늘 읽어드린 갈라디아서 말씀은 바울과 게바가 정면 충돌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반영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게바는 곧 베드로의 원 이름입니다. 베드로가 안디옥교회를 방문하여 이방인 교인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예루살렘교회의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자 갑자기 그 먹던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나 앉았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베드로를 면박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예루살렘교회가 이방인 선교에 얼마나 소극적이었나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성령의 역사에 적극 따라 나서지 못한 예루살렘교회는 그후 소멸되어버리고,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방교회가 또다시 성령의 끊임없는 역사에 동참하지 못하고 권위주의에 빠졌을 때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교회를 새롭게 하였던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자기와 일할 사람을 택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로마 교황청을 떠나 마틴 루터에게 함께 하셨고, 요한 칼빈에게 함께 하셔서 교회를 새롭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는 쉬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지역적으로 이동할 뿐 아니라 신학적으로 항상 새롭게 하셨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수립된 신학은 ‘오직 말씀 Sola Scriptura’, ‘오직 믿음 Sola Fidei’,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 Sola Gloria Deo’으로 이것은 오늘 개혁교회 신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후 로마 캐톨릭교회도 반종교개혁(反宗敎改革 Counter-reformation)을 통해서 교회를 새롭게 하고 해외 선교에 힘쓴 결과 역사의 뒤안길로 소멸되지 않고 오늘까지 힘있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티칸 공의회(Vatican Council)를 통해서 과감하게 그 동안 지켜오던 전통들을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많은 개혁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개혁교회를 이단시하던 태도를 버리고 갈라진 형제로 생각하고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에 함께 참여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 후기 성령시대로 접어들었는가
우리 한국 교회는 지금 성령의 역사를 따라 움직이는 교회인가, 아니면 이미 성령이 떠나가신 ‘후기 성령시대’로 접어들어 소멸의 길로 나가고 있는 것인가
한국 교회는 그 동안 기적이라고 부를 만큼 놀라운 교회성장을 이룩하여 세계 교회의 주목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커진 만큼 신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또는 사회봉사적인 면에서 결코 바람직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너무 갑자기 커버린 중학생처럼 몸집은 어른이지만 생각은 어린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바로 그런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중학생이 몸집이 커졌다고 이제는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이 어른 행세를 하려 한다면 어떨까요 요즈음 그런 학생들 때문에 많은 사회적인 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몸집이 커졌다고 이제는 더 이상 성령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이 필요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좀더 미래에 대하여 자기를 열어 놓고 성령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리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학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장로들이 교단의 대사회적 입장을 좌지우지하고, 과거의 사고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변화하는 미래의 사회를 내다보지 못하며, 새로운 신학적 흐름에 대하여 정통이라는 교조적인 칼을 빼어 들고 마구 난도질하는 이런 현상은 성령의 끊임없이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거부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어떤 교단에서 발생한 일은 한국 교회의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교의 교수들의 신학적 입장이 너무 급진적이라고 판단한 정통보수를 자처한 목사와 장로가 교단 총회의 여론을 주도해 결국 그 교수들을 학교에서 몰아 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 여세를 몰아 감독이 되려고 수억의 돈을 물 쓰듯 쓰다가 결국 낙선되었습니다. 그 신학교는 학생들을 졸업시키지 못하고 유급 시켜야 하는 불행한 사태를 겪었고, 교육부의 감사 결과 목회학 박사과정, 선교대학원 과정, 세계선교대학원 등 교단 인가 학위 프로그램에 대해 폐쇄 명령을 내리고, 총장을 해임시킬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교단 신학교에 대해서도 경고를 주는 조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비단 신학교에 대한 경고일 뿐 아니라 한국 교회를 향한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좇아 나가기보다는 자기 비대화에만 힘을 쓰고 있는 한국 교회에 대하여 성령께서 경고를 하고 계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통령이 장로이니까, 교육부 장관이 크리스찬이니까 한국 교회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적극 밀어주리라 기대했었는데, 오히려 철퇴를 맞은 것입니다. 이것이 경고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한국 교회가 이런 철퇴를 맞고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정말로 후기 성령시대로 접어들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 속한 이 교회를 돌아봅시다. 우리는 과연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 부지런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 음성을 따라 순종의 길을 가고 있는가 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역사를 이루고 계신지 영적인 촉각을 곤두세우고 살피고 있는가 늘 기도하면서 성령이 역사하실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가 한번 성령 체험한 것으로 만족하고 안이한 생각으로 오늘에 안주하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회의 변화에는 무관심한 채 그저 교회 안에만 들어앉아 복을 달라고만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 정신을 차리고 성령께서 어디만큼 가고 계신지를 살피고 떨치고 일어나 부지런히 그분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성령이여, 우리에게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성령이여, 기다리셔서 우리와 함께 가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아는 것처럼 행세하지 말고, 솔직히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가르치심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오래 교회당 다닌 것을 자랑처럼 내 세우지 말고, 날마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좇아 자신을 늘 새롭게 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항상 성령의 역사하심을 좇아 나가며 그와 함께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바른목회
(199

5. 6. 제5회 수련회 성만찬 설교)
기쁨을 누리는 교회
(행 2:43-47)

유 의 웅 목사
도림교회본회 제3대회장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이면서 동시에 부활의 종교이다. 십자가의 고난이 부활의 기쁨으로 연결된 것이 기독교이다. 만일 교회가 기쁨을 모르고 고난과 근심에만 매여 있다고 하면 온전한 교회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양 속담에 이런 것이 있다.
“하루의 행복을 위해서는 이발을 하고 일주일의 행복을 위해서는 말을 사고 한달의 행복을 위해서는 집을 사고, 1년의 행복을 위해서는 결혼을 하라.” 이 속담의 핵심적인 뜻이 무엇인가 세상의 행복, 세상의 기쁨은 일시적이며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하루의 행복을 위해서 이발을 하고 1년의 행복을 위해서 결혼을 한다면 평생의 행복을 위한 것은 무엇일까 다윗은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시 16:11).
사도 바울을 보라. 그가 성전에서만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서도 기뻐하고 찬송했다. 그는 건강할 때만 기뻐하지 않았다. 약할 때도 기뻐하였다. 그 약한 부분을 통해서 강해지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놀라운 기쁨을 안고 산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권면하였다. “항상 기뻐하라”고. 그러나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였다. “주 안에서”가 참으로 중요한 말이다.
휴전선 북쪽 북한에는 자유가 없다. 휴전선 남쪽 남한에는 자유가 있다. 경계선이 중요하다. 기쁨의 경계선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떠나면 근심이며, 예수 안에 들어오면 기쁨과 평안이다. 예수님은 기쁨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띄우셨나이다”(시 30:11)라고 고백하였다. 험한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나 교회에 왜 근심과 걱정이 없겠는가 그러나 주 안에서 그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된다.
오늘 본문에 “사람마다 두려워 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두려움이 두려움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하였다. 기적의 기쁨, 상부상조하는 사랑의 기쁨, 성전의 기쁨, 가정의 기쁨, 찬송의 기쁨, 백성들에게 칭송받는 기쁨, 부흥하는 기쁨 등 초대교회는 문자 그대로 기쁨이 충만하였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기쁨을 주는 기쁨의 산실이어야 한다. 교회가 누려야 할 몇가지 기쁨을 오늘 본문에서 생각하려고 한다.
첫째, 예배의 기쁨이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46절)고 하였다. 성전에 모인 것은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었다.
예배는 장례식이 아니라 축제의 잔치이다. 기뻐하고 찬송하는 공동체가 교회이며 축제의 한마당이 예배당이다.
인류의 첫 번째 예배는 아담과 이브가 드린 것이다. 이 예배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기뻐하고 에덴동산을 허락하신 은혜를 감사하는 예배이다. 혼돈에서 질서를, 공허에서 생명을, 흑암에서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뻐하는 예배가 인류 최초의 예배였다.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뻐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또한 죄와 죽음에서 인간을 구원하신 재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신약의 첫 예배는 주일예배이다.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의 날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예배가 신약의 예배이다.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기쁨, 죄악을 이기신 승리의 기쁨이 충만한 예배이다.
1960년대에 많은 장로교인들이 타교단에 몰려간 일이 있다. 그 원인중의 하나는 예배의 축제성과 역동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나친 경건주의와 양반주의 때문에 축제적인 기쁨을 잃어버린 점이 있다. 예배갱신의 과제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창조와 구원, 부활과 승리의 하나님을 모시고 드리는 예배이다. 따라서 창조의 기쁨, 구원의 기쁨, 승리의 기쁨을 나누는 축제의 예배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둘째, 사랑의 기쁨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랑의 교제와 나눔을 통해서 기쁨을 누렸다. 저들은 서로서로 모든 물건을 통용하였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다.
5병2어를 나누어 줄 때 5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가 남았다. 사랑이 있는 곳에 기쁨의 잔치가 있다.
오늘 본문에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하였다. 저희 교회는 금요일 구역예배마다 소박한 음식을 나누며 교제한다. 가족처럼 가까와지고 있음을 본다. 교회는 밥상공동체이다. 성찬공동체이다. 음식을 나누고 성찬을 나누며 영육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교회이다. 사랑이 있으면 모든 시기 질투 이기심은 물러가고 기쁨이 찾아온다.
셋째, 능력의 기쁨이다.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귀신이 떨어지고 병든 자가 낫는 기적이다. 치유의 기쁨이다.
저는 종종 환자가 원하는 경우와 중환자인 경우 안수기도를 한다.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환자가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는 것을 본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기적은 지금도 가능한 것이다. 이런 능력의 기쁨, 치유의 기쁨, 기적의 기쁨은 교회에 주신 은총 중의 하나이다.
넷째 전도의 기쁨이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하였다. 만일 멸망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 하였다면 얼마나 큰 비극인가 그러나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날짜를 잘 계산하느라 했지만 여행을 하는 도중 그만 기차 안에서 분만을 한 여인이 있었다. 아기낳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므로 소란과 법석을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승객들은 기차안에서 아기를 낳았다고 재수 없다거나 기분 잡쳤다고 하지 않는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축하하고 혹은 성금을 걷어 주기도 하고 평생 승차권을 주기도 한다. 왜 새 생명의 기쁨 때문이다.
전도는 새 생명의 출산이다. 지옥자식이 천국백성이 되고 마귀자식이 예수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전도이다. 아버지는 잃은 아들이 돌아왔을 때 동네잔치를 하였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는 것이 전도이다. 새 생명의 기쁨, 구원의 기쁨이 날마다 더해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의 법궤를 다윗성으로 가지고 들어오다가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며 춤을 추었다. 그의 아내 미갈은 이것을 보고 체통없다고 비난하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운명은 상이한 결과를 가지고 왔다. 다윗은 성군중의 성군이 되었고 크게 쓰임을 받았다. 그러나 미갈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행한 여인이 되고 말았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고 찬송하는 신앙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근시과 걱정을 안고 온 성도들이 기쁨을 안고 나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회이다. 십자가의 고통만 부각되는 교회가 아니라 심자가의 은혜로 인한 기쁨도 제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예배의 기쁨, 사랑의 기쁨, 능력의 기쁨, 전도의 기쁨을 누리는 교회가 되도록 하는 것이 오늘 목회의 중요한 역할이다.
(199

8.

8. 23 제8회수련회 개회설교)
지방자치의 이상과 우리의 현실 / 조창현
손인웅 설교문 덕수교회.제4대 회장(직접 타자4쪽제8회 수련회)

指導者의 人格이 살아있는 삶
-벧후 1장 5-11절-
김동건 목사
(전주중부교회, 대표회장)

우리 모두가 痛感하고 있는 대로 우리는 지금 위기상황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내부의 첨예한 의견대립도 위기지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꺼져 가는 심지, 맛을 잃어버린 소금으로 보고있다는 것이 더 큰 위기입니다.
우리의 위기는 우리만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타교단과 전체 교회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회 전반에 있는 反則文化도 따지고 보면 교회의 책임임을 부인할 수 없기에 오늘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위기상황을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서야 교회가 바로 서고 나라도 바로 선다는 것을 痛切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21세기가 이제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만약 우리가 舊習을 벗지 못하고 머뭇거리면 우리는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져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삶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도록 부르신 잔치입니다. 순종해서 예복을 입고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83회 총회에서 일어난 부총회장 선거와 관련된 불미스러운 사건은 우리 모두를 경악케하고 있습니다. 이는 만대에 이르도록 부끄러움을 금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분명 진상이 밝혀져야 합니다. 또한 책임있는 사람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또 있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낳은 과열된 선거분위기입니다. 이에 대한 회개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부총회장 선거결과는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한 실망을 넘어 분노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일들에 선행하는 것은 指導者의 人格을 回復하는 일입니다. 사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지도자의 인격이, 신앙인의 인격이, 그리고 목회자의 인격이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프레드릭 도날드는 ‘무엇이 죄악이냐’는 질문에 첫째 人格 없는 知識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밖에도 양심 없는 쾌락, 일없는 건강, 도덕 없는 상인, 원칙 없는 정략, 仁道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종교가 죄악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인격 없는 지도자입니다. 이들은 자기 이익을 위하여,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하여 검은 것도 희게, 흰 것도 검게 만드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기주의, 기회주의, 개인주의에 빠져 교계와 사회와 국가를 위기로 몰아가고 파멸로 이끕니다. 옷로비 의혹 사건과 조폐공사 파업유도 청문회를 보면서 지도층 인사들의 인격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외국인들이 한국 기독교에 대해서 신앙의 열도나 선교열은 좋으나 사회에 나가면 세상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을 곧 잘 지적합니다. 창공 김재준 박사도 “우리 한국 교회 성도들은 신앙생활은 잘하는데 생활신앙이 약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실상 교회 지도자들의 이중적인 인격의 모습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불꽃같은 눈으로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선 교회 지도자의 바른 인격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특히 우리 목회자들에게 원하시는 일은 구원사역과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일일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목회자이며 설교가인 존 스토트는 “목회는 예수의 人格을 닮게 하는 일”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일생을 살아갈 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와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목회자가 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정신과 삶을 닮아 가는 人格者가 되는데 있을 것입니다.
물론 목회자에게는 명예로운 야망도 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성공의식도 필요합니다. 물량적이고 가시적인 업적도 요구됩니다. 그러나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人格에 접촉되고 동화되어 예수의 인격이 목회현장에서 재성육되도록 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것이 곧 경건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목회는 목회자 자신의 열심이나 노력, 혹은 업적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적 신앙과 체험적 인격 그리고 간증적 삶의 총체적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人格의 水原 즉 그 원천으로부터 예수의 영성과 덕성 그리고 심성의 온갖 자양분을 길어 그것을 섬기는 목회현장에서 풍요롭게 흘러 넘치게 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목회의 성공적인 테크닉이 아니라 예수의 인격이 드러나는 목회자의 인격적 갱신입니다. 우리는 이상적인 초대교회의 발전과 성장이 베드로의 인격적 변화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3년 동안 예수의 뒤를 따를 때에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더 생각하는 제자였지만(마 16:23)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충만을 받고 난 후 그의 인격이 케리그마적 인격으로 변화되었고 그의 목회는 나눔의 공동체를 실현하는 위대한 목회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切實한 변화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뉴 밀레니움 시대를 백 여일 앞두고 새로운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敎會 指導者의 人格이 살아 숨쉴 때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지금의 위기가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회인 것입니다.
(199

9. 9월 실천대회 여는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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