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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울때 (요 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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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오늘 읽은 요한복 음 11장에는 나사로 집안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나사로 집안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예수님이 그 식구들을 편애하 시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습 니다. 5절을 보십시오. 성경은 공공연히 대놓게 이렇게 말하 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예수님께서 삼 남매를 '사랑하셨다'는 것 입니다. 예수님이 한 가족을 각별히 사랑하셨다는 내용은 이곳 말고는 성경의 다른 어 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 니다. 더군다나 3절을 보면 그 가족들도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전 갈하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습 니까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 었나이다.
나사로가 예수님 의 사랑을 특별히 받는 자라 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본 주변 사람 들도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 는가(36절) '도대체 그를 얼 마나 사랑하셨기에 저토록 눈 물까지 흘리는가'하는 이야 기입니다. 예수님이 이 가정 을 특별히 총애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있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누구를 편애한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 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넓고 큰 품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의 품에 안기는 자 는 그 누구도 사랑이 모자라 서 마음의 병이 생긴다든지 소외를 당해서 상처를 입는다 든지 하는 일이 절대 없습니 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만 족스럽게 사랑하실 수 있는 완전한 사랑의 소유자이십니 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예수님이 나사로 삼 남매를 유달리 사랑하신 것처럼 표현 되고 있는 데 대해 의아스럽 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호기심이 나서 이 본문의 내용을 원문으로 읽어보 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 로와 그 자매들을 사랑하셨 다
하는 내용에서 '사랑하셨 다'는 말이 원어로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나 하고 살펴보았 습니다. 헬라어에서 '사랑하 다'라는 말은 여러 가지 단어 로 표현됩니다. 우리가 그 중 적어도 세 가지 정도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아가페'와 '필로스'와 '에로스'가 그것입 니다. 흔히 이 세 단어를 의 미의 뉘앙스에 따라 '아가페' 는 하나님의 사랑이나 무조건 적인 사랑을 말하고, '필로스' 는 친구간의 사랑을 말하고, '에로스'는 남녀간의 육체적 인 사랑을 말한다고 설명하기 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의 경우에는 '아가페'라 는 말과 '필로스'라는 말이 별다른 구별 없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원어를 가지고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사랑이다' 라고 결론 짓기도 어렵고,'이것은 인간 적인 사랑이다' 라고 결론짓 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 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가지고 계속 묵상하는 가운데 저는 예수님이 사람이셨다는 사실 에서, 다시 말해 예수님의 인 성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 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 었습니다. 예수님은 한동안 유대 나라에 계실 때는 하나 님이셨지만 동시에 사람이셨 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정을 나누면서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이라는 것은 아 무에게나 흩어줄 수 있는 그 런 관대한 것이 아닙니다. 정 이라는 것은 마음이 특별히 가는 사람에게 따라가게 마련 입니다. 마음이 가면 자연 정 이 흐르고, 정이 흐르면 남보 다도 더 애정을 갖고 대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애정을 일컬어서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 수님이 나사로와 그 누이동생 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으신 것 역시 이러한 인간적인 면 모의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 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연유로 해 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그렇 게 각별한 애정을 쏟으시게 되었을까요 저는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 각합니다. 우리가 대충 알고 있는 상식만 가지고 정리를 해 봐도 나사로의 가정은 약 간 특이한 가정입니다. 먼저, 부모님이 안 계신 것 같습니 다. 삼 남매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삼 남매는 10대 청소년들이 아닙니다. 예수님 과 거의 비슷비슷한 세대들이 니까 20대 후반이나 30대 초, 중반 정도 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 남매가 다 결혼하지 않고 셋이 한 집 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러한 배경에 대해 자세한 설 명을 하지 않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 없지만 뭔가 곡절이 있는 집안 같이 느껴집니다.
생활 형편은 부모들로부터 얻은 것이 많았는지 그런 대 로 여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 다. 이것은 요한복음 12장에 서 마리아라고 하는 그의 누 이동생이 예수님에게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트려 가지고 발을 씻기는 장면을 봐도 충 분히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입 니다.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 가 든 옥합을 가지고 있었습 니다. 요즘 시가로 따지면 500만원 내지 600만원 가는 패물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5, 6 백 만원 짜리 패물을 끼고 있 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경 제적으로 꽤 여유가 있는 집 안이 아니고는 그런 고가의 패물을 구비하기가 힘든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 니다. 따라서 나사로의 집안 이 적어도 그 정도 여유는 있 는 집안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시자 세상의 구원자라는 것을 철저하게 믿었던 얼마 안 되 는 사람들 중에 속해 있었습 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예수님께서 특별히 나사로의 가정을 부담 없이 드나들게 되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 다. 더욱이 예수님이 유대 지 방으로 자리를 옮기셔서 사역 을 하시며 예루살렘을 드나드 실 때에는 그야 말로 하루 하 루가 영적으로 치열한 전투를 하는 나날이었습니다.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예 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감시했 고, 말 한마디 한마디를 책잡 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 습니다. 그런 영적 전쟁을 하 루종일 치르고 나면 유달리 몸이 피곤한 때도 있었을 것 이고 또 마음이 무거울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럴 때면 예수님은 자기도 모르게 제자 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별로 멀지 않은 베다니라는 동네로 발걸음을 옮기셨고, 자연스럽 게 나사로의 집으로 들어가신 것 같습니다. 나사로의 집은 찾아가기만 하면 항상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침대 옆에 예쁜 촛대가 서 있는 아담한 침실이 예수님을 위해서 항상 준비되어 있었을 것이라 생각 됩니다. 제자들이 묵을 만한 큰 거실이 준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삼 남매는 언제 예 수님이 들려도 변함없이 반갑 게 맞아 주었을 것입니다.
나사로의 집이 예수님이 어느 때나 찾아가 사랑 받고, 인정받고 평안하게 쉴 수 있 는 안식처였다는 것을 생각하 면 예수님이 그들 삼 남매에 대해 각별한 정을 느끼실 만 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원래 머 리 둘 곳이 없는 떠돌이 신세 였습니다. 갈릴리에는 그래도 자기가 몸 붙일 집이라도 있 었지만 유대 지방은 마땅히 몸을 둘만한 거처가 없었습니 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일컬어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에게 나사로의 집 안은 예수님이 머리 둘 곳이 되었고 마음의 보금자리가 되 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 연 더 자주 들리게 되고 만나 면 더없이 반갑고 더없이 가 까워지면서 주님과 그 가정 식구들 사이에는 정이 오갔습 니다. 이렇게 주고받는 정들 이 점점 많아지다 보니 사람 들 사이에 예수님이 그 가정 을 각별히 사랑하신다는 소문 도 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지금이야 예수님께서 누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 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아니시고 하늘에 계시 는 영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 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똑같 이 사랑하시고 우리를 사랑하 시되 완전하고 한이 없는 풍 성한 무궁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다소 인간적인 면이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 사로의 가정에 짙은 구름이 덮이기 시작했습니다. 집안의 기둥이요, 두 여동생이 하늘 처럼 믿고 있었던 오빠 나사 로가 병석에 들어 눕게 된 것 입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자 그 병은 점점 위독하게 되 어 생사의 기로에 설만큼 숨 가쁜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 다. 요즈음이야 응급실도 있 고, 금방 입원할 수 있는 병 원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 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 니 그 식구들이 얼마나 난감 했겠습니까 그래서 그의 누 이동생들은 급하게 사람을 보 내어 예수님에게 사랑하는 자 가 병들었노라고 전갈을 했습 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예수님은 얼굴조차 비치지 않 습니다. 그러는 사이 환자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 다. 그런데 그 때에도 예수님 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두 자매는 장례도 손 수 치뤄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 망을 안고 거의 매일 통곡하 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저는 숨가쁘게 돌아가는 이 집안의 불행을 보면서 삼 남매가 유달리 예수님의 남다 른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 에 그 마음의 고통이 훨씬 더 심했고 더 많은 마음의 상처 를 입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예수 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 들은 예수님이 만병을 통치하 는 의사이시라는 것도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특별히 사람을 보내 어 전갈까지 했던 그들이었습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님이 며칠이 되도록 나타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틀림없이 이런 의 심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정 말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 는 것일까 그분이 정말 우리 를 사랑하시는 건가' 연약한 인간인지라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사 랑을 믿었던 만큼 그들의 마 음에는 더 커다란 시험이 찾 아온 것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처럼 주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있는 신앙의 위기는 언제 든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 런 점에서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어떤 경우에 예 수님의 사랑을 의심할 위험에 빠질 수 있는지, 어떤 경우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있는 시험에 빠지게 되는지에 대해 몇 가지를 함께 살펴보 면 좋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불행이 닥칠 때
우선 먼저 나사로처럼 병 으로 쓰러지는 것 같은 갑작 스런 불행을 당할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가 쉽 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람이 젊은 나 이에 병으로 쓰러진다는 것은 보통 모순이 아닌 것처럼 받 아들여집니다. 그렇지 않습니 까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있어서도 안 되 는 일처럼 우리는 해석을 합 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 라면 모든 질병에서 그를 지 켜주는 것이 정상이고 아프지 않는 것이 정상이고 역경의 바람이 불 때는 안전하게 비 켜 가도록 해 주시는 것이 정 상이라고 우리는 늘 생각합니 다.
나사로와 그 누이들도 틀 림없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 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특별 히 자기들을 사랑하신다는 것 을 마음으로 알고 있었습니 다. 그렇기 때문에 병 따위는 예수님이 우리 집을 드나드시 는 이상 두려워 할 이유가 전 혀 없다고 큰 소리 치며 살았 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빠가 병이 들어 급기야 젊은 나이 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 갑작 스런 불행 앞에서 그들의 믿 음이 흔들리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 았을까요 충분히 그럴 수 있 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시험이 어디 나사로 집안에만 불어닥치는 줄 아십 니까 우리 역시 그런 시험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 사로 삼 남매가 우리에게 던 져 주는 굉장히 중요한 메시 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 리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이 우 리 앞에 나타나도, 그리고 그 불행을 통해서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의 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요,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 다.
왜냐하면 나사로가 병이 든 배후에는 사람이 깨닫기가 어려운 심오한 하나님의 뜻, 선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 십시오. 예수님은 두 누이동 생들이 보내온 전갈을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 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 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 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쉽 게 말하면
안 죽는다. 걱정 하지 마라. 오히려 네가 병이 들었음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예수님이 모 든 사람에게 찬송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나사로의 병과 죽음 뒤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오하고 사랑이 넘치는 목적과 뜻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 문에 어떤 갑작스런 불행을 당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날 정말 사랑하시나 하고 의심하 는 것을 어리석다고 하는 것 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 면 이런 저런 고통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을 통해 우리 자신들이 깊은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 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원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병으로 고통 하는 분이 계십니까 병으로 쓰러져있습니까 사업에 실패 했습니까 사기를 당했습니 까 내 힘으로 지고 갈 수 없 는 어떤 무거운 짐으로 어깨 가 짓눌리고 있습니까 인생 을 사는 것이 두렵습니까 이 모든 불행들이 우리에게 찾아 올 수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 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 라고 하더라도 이런 일이 있 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면 솔직히 우리 마음속에 이런 갈등이 생기기 쉽습니다. '정 말 주님이 날 사랑하시나 사 랑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저나 여러 분이나 그와 같은 섭섭한 감 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마음의 귀 를 기울여 주님의 음성을 들 으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있 는 고통을 기억하면서 그 음 성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 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 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 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너의 실패는 망할 실패가 아 니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 님이 영광 받으시고 내가 영 광 받기 위함인 것인 줄을 너 는 믿기를 바란다.하시는 주 님의 음성을 조용히 들으십시 오.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해도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 습니다.
응답이 지체될 때
둘째로는, 응답이 지체될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의 심하기 쉽습니다. 나사로의 병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 되어 갔습니다.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 다.
하고 주님께 기별을 보 냈건만 예수님은 나타나지 않 으셨습니다. 이 말에서 우리 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 님께 자기 오빠가 지금 위기 를 당해서 죽어간다는 사실을 전하면서도
주여, 와 주십시 오.라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했습니다.
주님, 만약에 시간 이 없으면 멀리서 말씀 한마 디만이라도 하세요. 그러면 우리 오빠 살아납니다.
이런 소리도 안 했습니다. 어떤 조 건도 내밀지 않고
주여, 사 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 말 한마디만 전한 것입니 다. 왜 그렇습니까 그 말씀 만 들어도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가장 좋은 길을 선택 하시고, 가장 좋은 해답을 주 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 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오시지를 않았습니다. 초를 다투는 위기에서는 한 시간이 1년처럼 길어 보이지 않습니 까 마리아는 10분이 멀다 하 고 문 밖을 내다보며 마을로 올라오는 조그만한 오솔길에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나타 나기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 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시 지 않았습니다. 오빠가 마침 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 고 장례식도 치뤘습니다. 그 런데도 주님은 나타나지 않으 셨습니다. 주님은 그 당시에 요단강 근처에서 일하고 계셨 습니다. 성지 순례 가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요단 강에서 예루살렘까지 오는데는 걸어 서도 하룻길이면 충분합니다. 오신다면 벌써 왔을 텐데 지 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럴 때 마리아와 마르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요 '예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일까 사랑한다 면 이럴 수 있을까' 분명히 마음의 상처가 컸을 것입니 다. 예수님은 나흘 후에야 비 로소 나사로의 집안을 찾아오 셨습니다. 그때 마르다가 예 수님을 만나자마자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 이다(21절). 마리아도 예수님 을 만나자 마자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 더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아 니하였겠나이다(32절). 이 말 을 바꾸면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빨리만 오셨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이 주저 없이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예 수님의 지체하심으로 인해 두 자매가 입은 마음의 상처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주님의 사 랑에 대해 실망을 하고 있었 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마르다는 오늘 우리에게 또 한가지 값 진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아 무리 응답이 늦어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 다.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만일 여러분 가운 데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잘 못된 것인가를 보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비록 더 디지만 그들에게 찾아 오셨 고,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의 고 통을 당할 때마다 마리아 형 제처럼 주님 앞에 빨리 가서 알려야 됩니다.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 다.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실직을 당했나이다.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의 집안에 고통이 들어왔습니 다.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의 자녀가 지금 집을 뛰쳐 나갔습니다.
무슨 내용이든 지 좋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이 지만 때로 이런 어려움을 당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다 주저하지 말고 예수 님께 가서 알려야 됩니다. 시 편 50편 15절 말씀을 기억하 시기 바랍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 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 리라.
환난을 당할 때 부르 라고 했습니다. 환난 날에 주 님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 렇게 하기만 하면 주님이 우 리를 건지시리라고 약속하셨 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 려운 일을 당할 때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그것이 무엇이든 지 예수님께 나아가 아뢰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분 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 다. 우리가 예수님께 아뢰었 다고 해서, 기도했다고 해서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대로 금방 응답이 오는 것은 아니 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 님 앞에 우리의 고통을 아뢰 면 금방 응답이 올 때도 많지 만 지독하게 응답을 안 해 주 실 때도 많은 것입니다. 기도 해도 응답이 오지 않을 때마 다 우리는 마음에 시험을 받 습니다. '주님이 정말 날 사랑 하시나 사랑한다면 어떻게 이렇게 잠잠할 수 있을까' 저도 그런 심정을 가질 때가 많았거든요. 여러분도 마찬가 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맥클라랜이라는 영국의 유 명한 설교자가 요한복음 11장 을 놓고 이런 재미있는 표현 을 했습니다.
나사로의 식구 들에는 예수님의 더디 오심이 사랑의 지연이었다. 사랑하시 기 때문에 지연하신 것이다.
옳은 말이라고 봅니다. 예수 님이 이틀을 일부러 지체하신 것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 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는 것 입니다. 예수님이 비록 늦게 응답하신 것같이 보이지만 그 것은 최상의 응답이었고 결과 적으로는 예수님의 응답이 절 대 늦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적시 적타의 응답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사로가 살 아났고, 살아난 나사로를 통 해서 예수님이 영광 받으셨으 며, 주변에 있는 많은 유대인 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 응답이 늦은 응답입니까 어떻게 시효가 끝난 응답입니 까 어떻게 때를 놓친 휴지 조각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 다는 것입니다. 우리 보기에 늦게 온 응답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가장 적절할 때 주신 응답이었습니다. 따 라서 우리는 응답이 늦는다고 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 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합니다.
참 믿음이 무엇입니까 응 답이 없을 수록 더 잘 믿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아마 아 직 믿음이 적은 분들이나 교 회에 다니신 지 얼마 안되시 는 분들은 속으로 이렇게 말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야, 말 참 잘 끼워 맞춘다.' 아마 그렇게 생각하실 지 몰라요.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성경의 진리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 시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과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을 받아 누렸던 위대한 선배들을 보십 시오. 우리가 그들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 까 진짜 믿음이란 하나님이 응답 하지 않으실 때 더 잘 믿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30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 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 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하나님이 기다리신다는 것입 니다. 왜 기다리실까요 우 리가 원하는 대로 달라고 할 때 그냥 주려고 하니까 때도 안 맞고 우리에게 유익이 안 되겠기에 하나님이 응답을 지 체하시는 것입니다. 조금 기 다렸다 주심으로 오히려 우리 에게 더 큰 유익과 기쁨이 될 것을 하나님이 내다보시기에 적절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 시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을 누가 나쁜 것이라 말할 수 있 겠습니까 하나님의 기다림은 절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리고 주님께서 더 나아가 뭐 라고 말씀하십니까
무릇 하 나님을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레미야 애가 3장 25,26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무릇 기다리는 자 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 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 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기다릴 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주여,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사랑하 는 자가 직장을 잃었나이다.
하고 기도할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지독하게 대답 안하 고 계실 때도 있다는 것을 기 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랑이나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됩니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 리가 참을 수 있습니다. 기다 릴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에 「우리」지에 실렸던 어느 형 제의 간증을 제가 소개합니 다. 오늘 이 본문의 의미와 너무 상통하고 또 기다림을 통해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 의 좋은 예증이 되기 때문에 제가 말씀 드립니다. 아마 언 젠가 제가 한번 인용했던 일 이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 렇다 하더라도 다시 한번 들 어보십시오.
어떤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대학생입니다. 그는 믿음이 굉장히 좋았을 뿐 아니라 꿈도 많았고, 머리 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대학 을 졸업할 즈음에 몸에 갑자 기 이상이 생겼습니다. 온몸 에서 기운이 빠지고 모든 일 에 의욕을 잃어 가는 병이었 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며 진찰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확한 병명을 찾아내 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병명이 밝혀지긴 했는 데, 근육무력증이라고 하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이 병 은 갈수록 근육에서 힘이 빠 져서 나중에는 드러누워 말라 죽게 되는 그런 병이었습니 다.
아직 새파란 학생이, 그것 도 예수님을 그렇게 잘 믿는 학생이 이런 병에 걸렸으니 얼마나 눈앞이 캄캄했겠습니 까 치료받을 길이라도 있으 면 좋으련만 그 병은 치료가 불가능한 그런 병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연필마저 들 힘 조 차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습니 다. 자연히 방안에 쳐 박혀서 누워 있는 시간이 매일 매일 연속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 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입을 다무신 채 가만히 계셨습니 다. 조금 기운이 나면 옆에 있는 책을 겨우 들고 책을 읽 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 금 더 기운이 나면 일어나 앉 아서 신문에 있는 중요한 내 용들을 스크랩하기도 했습니 다. 그렇게 하면서 5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런 병이 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주 여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 다.
하고 구하면 하나님이
오냐 알았다. 가만히 기다려 라.하고는 금방 고쳐 주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습니다. 5년이 차갈 무렵에 하나님께 서 그를 기적적으로 고쳐주셨 어요. 저는 그 내용을 잘 알 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루 아침에 고쳐 주신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고쳐주신 것입니 다.
그런 후에 한 10여 년이 지난 다음에 그는 캄캄한 터 널 같은 그 고통스러웠던 5년 을 돌아보면서 <우리>지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왜 하 나님께서 이런 불필요한 것처 럼 보이는 어려운 상황을 주 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하 나님께서는 저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셨다는 것과 그 일을 위해 저를 준비시키셨음을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공적인 기업 경영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준비가 꼭 필요했 습니다. 한가지는 기업을 하 나님의 뜻대로 정직하게 경영 할 수 있는 신앙적 준비이요, 또 한가지는 다방면에서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광범위한 지식을 준비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병중에서 이 두 가지를 준비시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5 년 동안 읽었던 책과 모든 자 료들이 그 뒤 10년 동안 회사 를 경영하는데 꼭 필요한 기 본적인 재산이 되었던 것입니 다. 질병도 그것이 죄로 말미 암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귀한 은혜인 것을 다시 한번 깨닫 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 것이 질병이든 그것이 실패든 성공이든 하나님이 주신 것이 면 그것은 귀한 것입니다. 장 애물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훌륭한 기회가 됩니다.
저는 그 글을 읽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는 이랜드(E-Land) 그룹을 경영하고 있는 박성수 사장입 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일 어나는 불행한 일은 절대 의 미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 배후에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 함이요.
하는 하나님의 선하 신 뜻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 이 믿으셔야 됩니다. 그 뜻이 있기 때문에 불행을 당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여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 나이다.하고 아무리 부르짖 고 부르짖어도 1년이 가도, 2 년이 가도, 3년이 가도 대답 을 안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서도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의심해서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때가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붙들고 있었던 주님의 말씀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상상의 나래를 펴 고 이 본문을 다시 한번 검토 해 봅시다. 예수님이 베다니 를 찾아 오셨을 때 나사로를 장례한 지가 이미 나흘이 지 났다고 했지 않습니까 심부 름꾼이 가서 연락하는데 하루 정도 걸렸을 것입니다. 예수 님이 일부러 이틀을 지체하셨 습니다. 또 예수님이 베다니 로 오시는데 하루 정도 걸렸 을 것입니다. 이렇게 계산하 니까 나흘이 됩니다. 만일 이 계산이 맞는다면 예수님이 나 사로가 병들었다는 연락을 받 았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숨 을 거둔 때인지도 모릅니다. 또 그렇지 않다면 소식을 전 했던 사람이 밤길을 이용해서 다시 돌아갔을 때는 아마 그 밤에 무슨 일이 터졌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간에 우리는 두 가 지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나사로가 아직 의식이 남아 있을 때 심부름 갔던 사 람이 돌아왔다고 가정해 봅시 다.
아, 예수님이 뭐라고 하 시대
그러자 그 사람이 이 렇게 전했습니다.
그분이 이 렇게 말씀하시던대요. '이 병 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 의 영광을 위함.'
아,그래 죽을병이 아니라고 그러더냐 감사하구나.
그런데 나사로 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 지 않습니까 본인은 의식이 없어졌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얼마 나 허황하겠어요 얼마나 마 음이 텅텅 비겠느냐는 말입니 다.
또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야 심부름 갔던 사람이 예수 님의 말씀을 들고 도착했다고 해 봅시다.
예수님은 안 오 시냐
네, 예수님이 오시지 는 않고 이런 말씀을 하시던 대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 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 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 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 니라.'
죽을 병이 아니라 벌써 죽었는데
죽은 시체를 앞에 놓고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어 떻게 들렸겠습니까 그 모호 한 말씀 앞에 그들은 마음에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입게 되 었을 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 와 같은 때에 우리도 자칫 잘 못하면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 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말 씀에 대해서 우리가 불신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마르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의 지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도무 지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하고 관계가 없는 허황된 말씀처럼 들려도 그 말씀을 의심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고 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의 심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입 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리아 와 마르다도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시험을 받았 지만 나중에 지나고 보니 주 님의 말씀이 참이더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는 말씀대로 나사로가 살아났으 며,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 다는 말씀대로 그를 통해 모 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영 광을 돌리는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의지했던 말씀이 우리 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말씀 때 문에 주님의 사랑을 의심해서 는 안됩니다. 나사로와 마르 다와 마리아가 우리에게 그런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입 니다. 이 메시지를 꼭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대 로 성경 말씀이 우리가 안고 있는 실제적인 문제에 대해서 항상 입의 혀처럼 원하는 대 로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닙니 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는 저 보다도 훨씬 더 하나님의 사 랑을 많이 받기 때문에 응답 도 훨씬 많이 받는 분이 계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 가 경험하는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입의 혀처럼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일례로 어떤 사람이 병이 들었다고 합시다. 그에게 오 늘 본문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라는 말씀이 얼마나 눈에 확 들어오겠습니까 병 든 사람에게 이 말씀은 그야 말로 생명수입니다.
아, 주 여, 감사합니다. 나를 두고 하 신 말씀인 줄 믿습니다. 주 님!하고 얼마나 철저하게 붙 들겠습니까 그 말씀이 생명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가 죽었다고 합시다. 죽을 수 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 고 해서 예수님이 나사로 살 리듯이 그를 다시 살려주십니 까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 다. 살려주시지 않습니다. 이 럴 때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 들이, 특히 그의 식구들이 볼 때 그 말씀이 얼마나 무의미 한 말로 여겨지겠습니까 그 래서 '하나님이 나를 진짜 사 랑하실까' 하는 의심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직장이 여의치 않아 가지고 생활이 자꾸 쪼들려 간다고 합시다. 성경을 읽다 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 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 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먹고 마시는 것, 다 내가 알아서 너희에게 주마.
하시 는 말씀을 볼 때 얼마나 눈이 번쩍 뜨이겠습니까 그래서 그 말씀을 붙들고
주여 믿습 니다. 내가 주님의 나라를 마 음에 먼저 두고 생각하면 주 님이 내 직장, 내 생활, 내 가 족들이 살아갈 모든 길을 준 비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 고 믿고 있는데 1년이 가도 일자리가 없고, 2년이 가도 일자리가 없다면 그 마음에 얼마나 시험이 되겠습니까 '내가 지금 지푸라기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 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 잘못하면 우리 마음에 시 험이 찾아 올 수 있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말은 거짓말 이야.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 라는 것은 믿을 수가 없어.'하 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입 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고 의지 한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실 제적인 효과나 응답을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절대 그 말 씀을 의심하면 안됩니다. 아 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어떤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또 어떤 면에서 믿었던 말씀 때문에 실망했다 할지라도 주님의 사 랑을 의심하면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한복음 11장의 주제가 되는 25절 때문입니 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 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때문에 우리는 실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 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이 하신 말씀은 영원토록 진리입 니다. 비록 우리의 실제적인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대답이 되지 않을 때에라도 그 말씀 은 진리입니다. 지금 우리 눈 앞에서 어떤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말씀이 주 의 말씀이 아니라고 부인하면 안됩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효력이 없어도 내 자손을 통 해서 열매 맺게 될 것이기 때 문입니다. 그리고 설사 내 자 손이나 그 어떤 사람에게도 우리가 믿었던 말씀이 실제적 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되지 않을 때에는 주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그것이 축복 으로 임할 수 있기 때문입니 다.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이 십니다. 그는 지금 우리 현실 만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아니 십니다. 우리의 현실은 부활 이요 생명이신 주님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이어져 있습니다. 가운데 죽음이라는 매듭이 있어서 마치 현실과 저 세상이 나누어진 것처럼 보일 뿐이지 사실은 부활이고 생명이신 주님 안에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연 스럽게 영원히 사는 하나님 나라로 옮겨지고 있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그 모든 세계의 주가 되시고, 부활이요 생명 되신 주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반드시 이루어 지는 말씀이기 때문에 나의 문제에 대해 실제적으로 해답 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 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된다 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 분, 이제 말씀을 정리해 봅시 다. 병이 들었습니까 경제적 인 위기를 만났습니까 사기 를 당했습니까 아니면 자녀 가 말썽을 피웁니까 인생을 살기가 두렵고 자신이 없습니 까 그런 일이 내 앞에 일어 났다고 해서 우리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 뒤에는 이런 말씀이 새 겨져 있습니다.
이 병은 죽 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광을 위함이니라.
우리가 이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가서
주여, 사 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사랑하는 자가 경제적으로 어 려움을 당합니다.
하고 우리 의 모든 아픔을 주님께 다 아 뢰었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습 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 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됩 니다. 왜냐하면 응답이 지체 되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응답은 항상 최상입니다. 가장 알맞 은 때에 우리에게 임하기 때 문입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 라.는 말씀 붙들고 있었는데 죽었습니까 소망의 불이 꺼 졌습니까 무산된 소망이 때 로 마음을 아프게는 하지만 그렇다고 주님의 사랑을 의심 하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 까 그 말씀은 부활이요 생명 이신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영원히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어느 때인가는 나에게 이루어져 축복으로 안겨질 것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했던 말씀이 실제 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이 정말 날 사랑하 시나 하고 의심하는 어리석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허리띠를 조 여 매고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이 축복해 주실 줄 분명히 믿습 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특별한 자녀라 는 것을 한순간도 잊지 마시 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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