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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만 바라보자. (히 12:1-2)

첨부 1


뉴져지주에 있는 큰 정유 회사의 페리 사장이 언젠가 알래스카에 담당 책임자를 보내기 위하여 한 사원을 불렀습니다.“자네는 떠날 준비를 하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가”라고 물으니 그는 10일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또 한 사원에게 물으니 그는 3일이면 된다고 했습니다. 사장은 또 다른 사원에게 역시 똑같이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지금 당장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사장은 그 사람을 책임자로 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주님을 따르고 싶다고 말하자 주님은 그에게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깊이 생각도 해봐야 하고 집에 가서 정리할 일이 많으니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순종의 교훈을 말해 주는 대목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과 싸우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일 것입니다. 훌륭한 신앙을 갖는 것은 물론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마라톤 선수가 갈증과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 여러 가지의 고비를 넘기면서 꾸준히 뛰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기자도 이런 경기장의 모습을 연상하며 기록했습니다. 신앙생활은 마치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경주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어떻게 경주할 것인가」.이것은 운동을 하는 선수들의 고민 뿐 아니라 우리들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본문에서 믿음의 경주를 하는 우리들에게 경주자로서의 조건과 바라보아야 할 대상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본 론:

1. 벗어버리고 경주하자(1).1) 본문설명:
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아무리 잘 달리는 선수라도 몸에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달릴 수는 없습니다. 얼마 가지 못해서 곧 지치고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며칠전 수요일에 홈 생활을 같이하는 동역자들과 오랜만에 운동을 하기로 하고 학교 뒤 동네 족구장에서 운동을 했다. 운동도 조금씩 꾸준히 해야 하는데 갑자기 많은 양의 운동으로 수요예배를 드리기조차 힘들 정도로 머리와 다리까지 아프고 상처 난 발에 피멍까지 들어있었다. 이틀 뒤에 근육이 풀어지기도 전 동료전도사님 집들이에 갔다가 또 작은공과 볼링으로 몸을 혹사시키고 거의 자정이 다되어서야 피곤한 육체로 집에 들어왔다.
신앙의 경주에서도 역시 무거운 것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무거운 것이 있으면 달리지 못하고 지쳐 쓰러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무거운 짐이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죄”라는 것입니다. 죄를 가지고 뛰면 결국 뛰지도 못하고 지쳐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얽매인다는 원어의 뜻은 『다리에 엉겨 붙어서 넘어지다』라는 의미입니다. 죄는 등에 무거움 짐이 되기 도하고 다리에 엉겨 붙어 넘어지게 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죄를 벗어버리고 떼어 내지 않으면 넘어
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 중에서도 오늘 하나님 앞에서 단단히 결심한다고 해서 다시 죄를 범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죄를 범하는 횟수와 정도의 차이는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안에서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사는 한 완전히 죄에서 떠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죄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할 때마다 우리에게 엉겨 붙는 것이 있습니다. 죄책감이라는 것입니다. 그 죄책감의 무거운 짐을 잘못 처리하면 그것 때문에 낙심되고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유는 자신이 효도하지 못하고 늘 속을 썩였기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려 아무 것도 자신 있게 하지 못하고 결국은 사회의 낙오자가 된 경우를 정신과 의사들이 보고하는 예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죄책감이 있는 것은 건강한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도 아무렇지 않다면 더 큰 일이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처리를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가 공을 가지고 놀다가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화초를 부러뜨렸다고 합시다. 그 아이가 그 화분 앞에 앉아 며칠이고 자신을 미워하고 슬퍼하며 한없이 앉아 있다면 아버지 보기에 어떻겠습니까. 그 아이가 슬퍼한다고 그 화초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습니까. 며칠 울면 그 화초가 다시 붙어진다면 울어야겠지요.
아버지가 바라는 것은 그 아이의 진실한 고백입니다. 아버지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그 아이이지 화초가 아닙니다.
2).성경적 연결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마11;28에 말씀하셨습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은 우리의 죄짐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어떤 무거운 죄의 짐이든지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범한 불순종의 죄, 영원한 멸망에 이를 정도로 죄 값이 크고 무거운 짐까지 맡으시고 십자가에서 해결하셨습니다. 우리가 범하는 죄들은 그것에 비하며 아무 것도 아닌 것들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맡기지 않고 나 스스로 고민한다면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불신하는 것이 됩니다.
요일1:9에 약속하셨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죄를 자백하면 우리의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사해 주신다고 말입니다.
3). 적 용
오늘 여러분 마음 가운데는 어떤 무거운 짐이 있습니까. 발목을 감는 어떤 얽매이는 죄책감들이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긴 문제이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 문제이든 아니면 나 스스로의 어떤 문제이든 모두 주님께 맡기십시오. 벗어버리십시오. 해방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지 어떤 『의로운 일』이 아닙니다. 넘어졌다면 오늘 이 시간 그 짐을 주님께 맡기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복음송)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2. 인내하며 경주하자.(1b)1) 본문설명:
1절 하반 절에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운동 경기 종목 중에 특히 마라톤이야말로 인내가 필요한 경주입니다. 육체의 한계에 도전하는 종목입니다. 힘든 고비들이 수 없이 찾아옵니다. 그 고비들을 인내하지 못하면 낙오되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의 경주에도 역시 어려움들이 찾아옵니다. 그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천국을 타작마당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곡식이 있는데 언뜻 보아서는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할 수 없습니다. 빈 쭉정이가 알곡 같고 알곡이 쭉정이 같습니다. 손으로 일일이 가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가리기 위하여 농부는 키를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바람 부는 곳을 등에 지고 키를 위 아래로 흔듭니다. 그러면 알곡은 무겁기 때문에 날아가지 않고 자꾸 안으로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나 쭉정이는 어떻습니까. 그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바람에 날려 키 밖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그 다음에 농부는 그 쭉정이를 버리거나 불에 태워 버립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만해도 1천만이 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알곡이 아닙니다. 분명히 쭉정이 신자가 있습니다. 겉만 신앙인이고 믿음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구별할 수 없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쭉정이 신자가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그것은 시련과 고난과 역경의 바람이 불어 올 때입니다. 쭉정이 신자는 그 바람에 이기지 못하고 날아가 버립니다. 쾌락의 바람을 따라 세상으로 가 버립니다.
2). 성경적 연결
그러나 알곡 신자는 어려움이 올수록 점점 더 하나님께로 다가옵니다. (단3:17-18)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믿음의 진가가 나타난 때가 언제 였습니까. 시련의 바람이 불 때입니다. 포로로 잡혀서 신상에 절하지 않는다면 죽어야 하는 풍전등화의 현실 앞에서 그들은 믿음은 드디어 빛을 발하게 된 것입니다. (욥 6:2-6 / 42:2-6) 욥이 위대한 신앙의 모범이 된 것도 시련의 바람 때문입니다. 그 거센 바람이 불어 올 때 그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오히려 더 가까이 갔습니다. 내가 일곱 번 단련된 후에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외쳤습니다. (욥 23:10)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실제로 어떤 사람은 시련과 어려움의 바람이 불어오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꾸 교회를 멀리합니다. 믿음의 친구들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반면 그 어려움 때문에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합니다. 오히려 그 고난 때문에 정금같은 믿음으로 성숙해 갑니다.
3) 적 용.
여러분은 모두 알곡 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독일 같은 곳은 나면서부터 교회에 등록한 신자입니다. 종교세를 냅니다. 그러나 중세 때 지었던 그 크고 화려한 교회는 갈수록 텅 텅비어 간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미국, 호주 등 부유한 국가일수록 더 심하다는 것
입니다.
어려움이 없으니 믿음이 단단해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크느냐 적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알곡 신자가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려움이 있습니까. 어떤 바람이 불어옵니까. 인생의 풍랑과 믿음의 시련들이 있을 때마다 바람에 날리지 않고 참고 인내하여 하나님을 더욱 붙드는 알곡이 되어 믿음의 경주에서 다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양(복음송가:시 46:2 정금처럼 나아오리)

3. 예수님을 바라보고 경주하자.(2)1) 본문설명:
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믿음의 주(主)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경주자는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결승점을 바라보지 않고 뛰는 선수는 상을 탈수 없습니다. 아무리 빨리 뛰어도 결승점을 지점을 바라보고 뛰지 않는다면 엉뚱한 곳으로 가버리고 말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을 바라보고 경주하라고 권고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믿음의 주(主)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주요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우리들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엡2:8-9) 육체의 경주는 체력의 힘으로 하지만 신앙의 경주는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믿음이 약해서 물에 빠져 갈 때 예수님을 바라보며 손을 내민 것처럼 믿음이 약해 질 때마다 우리는 믿음의 주(主)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둘째, 온전케 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온전케 하시는 이인”이라고 했습니다. 온전케 해 주신다는 것은 믿음의 경주를 실패하지 않고 온전히 뛸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넘어질 때마다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심으로 전 코스를 마치게 인도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마라톤 하는 사람들이 중간에 힘을 얻기 위하여 물을 마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말씀의 생수입니다. 세상의 물은 먹고 나서 또 목마르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인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승리의 나팔소리를 들을 때까지 우리를 온전케 해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셋째,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 뒤에 있는 영광과 승리를 생각하며 십자가의 무서운 고통과 고난과 부끄러움을 참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의 경주에서 낙심할 때마다 우리보다 먼저 고난과 고통을 참으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위로와 용기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이 십자가에서 가장 혹독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초대 기독교를 핍박하던 로마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감옥과 사형장에서 톱으로 켜서 죽는 순간에도 사자의 밥이 되어 죽는 순간에도 그들은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며 돌아가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조금이나마 맛보며 죽을 수 있는 축복을 주신 것을 감사하며 순교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십자가의 은혜가 믿는 우리들에게는 능력이요 힘이 되는 것입니다.
2). 성경적 연결
예수님은 우리가 가는 경주의 최종 목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빌3:13-14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을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 우편에 상을 준비하고 계신 예수님입니다 스테반은 돌아 맞아 죽는 그 순간까지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환상 가운데 보면서 마지막 경주를 마쳤습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과 성공과 명예를 위하여 좇아가고 있습니까. 그것이 인생의 최종 목표 인양 살아가고 있습니다. 썩어질 땅의 것
만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가치와 목적을 세상과 물질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치 화살을 쏘는 사람이 과녁을 바라보듯 언제나 우리의 목표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눈을 땅에 두지 말고 주께서 앉아 계신 하늘 보좌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온전케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에서 승리하신 주께서 고난을 이기는 용기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푯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3). 적 용
얼마 전 시드니 올림픽경기가 막을 내려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커다란 경기가 벌어질 때마다. 경기장에 운집한 수많은 관중들을 봅니다. 그 많은 군중들의 환호 소리와 응원을 들으면서 선수들은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 관중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텅빈 운동장에 선수들만이 경기를 한다고 상상해 보십시다. 금메달을 따도 환영해 주는 청중들이 아무도 없다면 선수 자신은 물론 얼마나 싱거운 경기가 되겠습니까.
◎ 결 론:
오늘 본문을 기록한 히브리서 기자도 당시 벌어지던 경주장의 모습을 생각하며 오늘의 본문을 기록했습니다. 신앙생활을 경주하는 선수에 비유했습니다. 그것도 수많은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뛰는 선수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1절에도 보니 우리가 가는 신앙의 경주에도 관중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구
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흐린 날씨에 하늘을 한번 보십시오. 흐린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습니다. 올림픽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의 구름에 비하면 조그만 한 점에 불과합니다.
구름처럼 둘러싼 그 많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히11:4에서 소개하는 아벨부터 시작하여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주님의 제자들, 등 역사이래 지금까지 믿음을 지켰던 수많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계시고 주님은 그 우편에 계시며 그 주위로 그 많은 사람들이 구름같이 둘러서서 여러분의 경주를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주는 외롭고 고독한 경주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도 여러분 주위와 이웃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지 않습니까.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영적으로도 오늘 말씀과 같이 믿음의 허다한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경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경주를 어떻게 뛰어가고 있습니까. 무거운 짐에 혹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목표를 잃고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임에 고민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여러분의 무거운 짐들을 다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예수님은 진솔한 고백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누구나 자신과 힘든 싸움을 합니다. 인내하십시요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봅시다. 승리의 날은 멀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천사의 나팔2000학년도 2학기 기독신학대학원대학교
설 교 학 9911021 (2-1) 주
성 종 현 교수 사 재 화
소리와 선진들의 환호소리를 기억합시다. 오늘도 우리에게 새 힘과 용기를 주시는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섭시다. 우리의 능력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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