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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담의가시나무비유 (삿 09: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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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라에서 죽음을 면한 요담은 그리심 산꼭대기로 올라가서세겜 사람을 향해 외쳤습니다. 이곳은 아비멜렉의 위협으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비교적 안전한 장소였습니다. 그가 여기서 외친 메시지는 예언적인 것이였습니다. 이메세지는 흔히 비유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하나의 우화입니다.
요담의 언설은 하나님의 나라를 다룬 것도 아니고 실제 생활에서 이끌어낸 이야기도 아닙니다. 본 우화는 나무들이 한 왕을 어떻게 뽑게 되었는지를 서술해 줍니다. 나무들은 중동에서 가장 중요한 3대 과수들인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그리고포도나무들에게 차례로 그들의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나무들은 제각기 매우 의심스러운 왕의 영예를 차지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과일 맺는 일을 포기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습니다. 그러자 나무들은 아무쓸모가 없는 가시나무에게 갔습니다. 가시나무는 기다리기라도 한듯이 선뜻 그들의 왕이 되어주겠다고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가시나무는 다음과 같은 경고를 주었습니다.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9:15)
이 우화의 적용은 자명한 것입니다. 백성들(나무들)은 기드온(과수)에게 그들의 왕이 되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이 거절하자 백성들은 아비멜렉(쓸모없는 가시나무)에게로 갔습니다. 그는 언른 왕관을 자기 머리에 얹었습니다. 또 때가되면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 세겜 사람들은 태우게 될 것이었습니다. 요담은 한 가닥 소망의 메시지를 부언하였는데 그것은 세겜에게서도 불이 나와서 아비멜렉을 태운다는 것입었습니다(9:20).
아비멜렉의 왕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3년 후에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의 권위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9:22-29).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인에게 행한 포악한 일을 갚되...’(9:24). 어느 날 가알이라는 한 군인이 세겜에 나타나서 백성들을 충동하고 아비멜렉에 대한 반란에 앞장섰습니다.
그 때에 성읍 장관으로서 아비멜렉의 충복이었던 스볼이 왕에게 반란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로써 세겜을 철저히 파괴시킨 일련의 연쇄 사건들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9:30-49). 아비멜렉은 스볼의 조언에 따라 야밤에 세겜으로 접근하였습니다. 그의 군사들은 동틀 때까지 숨어 있다가 성읍으로 진입하였습니다. 한편 스볼은 아비멜렉의 편이었지만 내색을 하기 않고 세겜 사람들의 반란에 호응하는 척하였습니다. 그는 가알과 함께 성문에 있다가 아비렐렉의 군사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가알에게 나가서 싸우라고 독려하였습니다(9:38). 가알은 아비멜렉을 맞아 싸웠지만 막아내지 못하고 성안으로 도주하였습니다. 아비멜렉도 일단 아루마로 퇴진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스볼은 계속 세겜 사람들의 편을 드는 척하며 가알의 패배를 구실삼아 그를 제거시켰습니다. 그 결과 세겜 사람들은 지도자를 잃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세겜 주민들은 밭으로 나가 농사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비렐렉은 기회를 잡아 이들을 진멸하고 세겜성을 탈취한 후 파괴시키고 소금을 뿌렸습니다. 이것은 세겜이 소금밭처럼 황폐케 되기를 바란다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9:45).
한편 세겜성의 유지들은 ‘엘브릿 신당의 보장(대피소)’(9:46) 혹은 ‘(벧)밀로’(9:20)라고 불리는 은신처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이 마지막 세겜인 천 명까지 모두 불태워 죽였습니다. 반면 두 개의 얼굴을 가졌던 스볼의 행방에 대해서는 본문에 더 이상 언급된 것이 없습니다.
아비멜렉은 다음의 전략으로 데베스라는 인근 성읍을 점령키로 하였습니다. 이 성은 세겜의 반란과 관련되었음이 분명합니다(9:50-57). 아비멜렉은 성 안으로 들어갔지만 성민들은 모든 요새로 대피한 후였습니다. 아비멜렉은 여기서도 성민들을 불태워 죽이려다가 오히려 자신의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여인이 맷돌을 그의 머리 위에 내리던져 그를 쓰러뜨린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한 여자의 손에 살해되었다는 치욕을 면하려고 자신의 무기 당번을 불러 자기를 찔러 죽이게 하였습니다. 사사기 9:56절은 다음과 같은 간결한 결언으로 끝납니다. ‘아비멜렉이 그 형제 칠십인을 죽여 자기 아비에게 행한 악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요담의 저주는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시나무’는 더 이상 ‘까다로운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였습니다!
악에는 값이 붙어 있습니다.
9장에는 구원의 특별한 구원의 주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몇가지 도덕적 교훈들을 받게 됩니다.
영국 복음주의의 한 목회자였던 챨스 시므온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무익한 인물들은 명예욕에 휩슬리고, 현명하고 착한 사람들은 명성을 회피한다.”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기드온은 악한 아비멜렉이 욕심을 내던 것을 사양하였습니다. 이것은 각 시대마다 해당되는 일반적인 진리입니다. 챨스 시므온은 더붙이기를 “크게 되려 하기 보다는 선하게 되려고 힘쓰라”는 권면을 하였습니다.
정치든 사업이든 교회일이든 무슨 일이든지 주께서 당시능ㄹ 불러 맡겨주시는 직무에 대해서는 기꺼이 응하여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아는 일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비추어 내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본문에 점철된 주제는 악에 가격표가 붙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이 응징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기드온의 일흔 명의 아들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백성들에게 징벌을 내리셨다고 해서 죽은 자식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참된 정의는 근본적으로 보복적입니다. 죄의 값은 지불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에 있게 될 대심판의 날에도 모든 죄의 값은 지불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모든 미수금이 완전히 징수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없이 인생을 제멋대로 사는 자들이 이 사실을 확신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편 기자는 자신이 관찰해 본 결과 많은 불경건한 사람들이 장수하면서 잘 살다가 편히 죽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시73:4,5)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사는 일이 정말 무슨 소용이 있는지에 대해서 회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볼때 신자들은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인 반면 경건치 못한 못된 죄인들은 성경 말씀의 지배나 제한을 받지 않고 마음껐 즐기는 자들이었습니다.(시73:3-14). 시편 기자는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그릇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가 실제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까지는 마음의 갈등을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실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게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시73:17-19) 그제서야 이 시편 기자는 주님게 대한 신뢰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본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성소’에서 악인들의 운명을 목격했다는 사실은 매우 큰 의의를 지닙니다. 장막(성소)에서 죄를 위한 속죄가 행해졌고 은혜의 언약을 나타내는 상징물들이 진열되었는데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존전에서 시행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실체는 은혜의 언약을 드러내는 상징들과 속죄의 필요성을 통해 분명히 표출되었습니다. 속죄는 곧 복음입니다. 구원의 방법을 알리는 복음의 골자는 간단합니다. 즉, 자기들의 죄값을 스스로 지불할 길이 전혀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구세주가 모든 값을 대신 치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이 제공하는 구언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보응이 기달리 뿐입니다. 이 보응은 영원한 심판으로서 현세의 안전과 쾌락들은 끝없는 어둠 속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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