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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새벽별 입니다. (계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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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성경에서 여러 번 자기를 계시(啓示)하셨습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친히 「나는-이다」(I am)라고 밝히신 마지막 말 씀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6절을 보겠습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使者)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 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마지막 자기 계시는 나는…광명한 새벽 별이라(I am…the bright and morning st ar)는 선언입니다. 새벽 별은 어둠을 추방하는 희망의 상징 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어둠은 두 가지 면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첫째/박해와 고난의 어둠 주께서는 요한과 박해받고 있는 초대 교회를 향해 자신을 계시하시 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광명한 새벽 별이라! 이 말씀은 어둠 속에 있었던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놀라운 희 망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둘째/역사의 어둠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이 세상과 역사 속의 종말론적인 상황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어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점점 깊어가는 죄악의 밤! 그 역사 속의 죄 악의 밤과 그 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크로즈 업(close- up)되어, 한 점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모습 들이 성경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부분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계시록은 역사의 어두운 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이 밤을 향해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2,000년대를 앞둔 이 마지막 고비를 외줄을 타듯 걸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상당한 화해의 분위기에 젖어 있고 , 역사에 서광이 비췰 듯 낙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계시에 의하면 역사 는 낙관적인 상태로만 펼쳐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평화와 화해에 대한 우리의 큰 기대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더욱 어두워질 것입니다 .

그러나 이 어두워져 가는 역사 속에서도 희망의 새벽 별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 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께서는 성경 최후의 계시를 닫으면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나는 광명한 새벽 별이라.

새벽 별이라는 표현은 성경 계시에 익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별로 낯설지 않는 말입니다. 이 표현은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메 시지에도 이미 등장하고 있습니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계 2:28).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에서도 가장 죄악이 많았던 도시가 이 두아디라라는 도시였습니다. 깊은 죄악에 빠진 어두운 도성 두아 디라! 2장 24절을 보십시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 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두아디라 도시는 사단의 깊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던 곳입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사회의 어둠, 문화의 어둠, 역사의 어둠에 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그 세대의 어둠을 이기며 살아가는 그리스 도인들을 향해 주께서 주셨던 약속 중의 하나가 이 말씀입니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그들에게 있어서 승리는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승리의 원천이십니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주님 자신을 허 락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되었던 요한계시록의 계시는 나 는 광명한 새벽 별이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그 마지막 장(章)을 닫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새벽 별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먼저 나오는 것은 다윗의 뿌리라는 말씀입니다. 메시야는 다윗 의 후손을 통해서 오실 것이라고 예언되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예 언된 그대로 다윗의 뿌리로 오셨습니다. 아마도 이 다윗의 뿌리 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더욱 강조한 표현으로 보여 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의 뿌리로 오셔서 구세주의 사역을 시작하셨을 뿐만 아니라, 광명한 새벽 별이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역사 최 후의 어두움과 그에 대한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을 계시하시면서 나는 광명한 새벽 별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제 재림 을 통해서 이루어질 희망의 새로운 날에 대한 예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이 땅에 첫번째 오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고 구원 받는 놀라운 희망의 새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이 희망은 완성될 것이고 우리는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저녁 별이 하루의 끝이라면, 새벽 별은 새 날의 시작일 것입니다. 이 희망의 계시, 희망의 메시지로 계시록은 닫혀집니다.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은 역사에 대한 무서운 심판을 증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절망의 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단순히 심판의 날만이 아닙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사모하고 소망하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희망의 새 날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광명한 새벽 별이 될 수 있습니까? 예 수님의 재림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희망입니까? 이것은 네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완성됨 예수님의 재림이 우리의 희망인 첫번째 이유는, 우리가 완전히 영 화롭게 되는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8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그런데 22장 13절에 또 예수님의 자기 계시가 나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그리고 14절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한 마디로 이 말씀은, 주님의 재림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화(聖 化)가 완성되는 날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 받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나의 열망이 있다면, 우리의 인격과 품성이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주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그렇게 완성될 수 있습니까?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이 우리가 완전히 성화되는 날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닮을 수 있는 이 성화 완성의 사건은 「영화」(榮化)라고도 합니다. 주님을 닮아감으로 써 거룩해지는 과정이 완성되는 그 순간이 바로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 14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마지막 복, 즉 주님을 온전히 닮게 되는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우리의 거룩함이 완성되 는 순간입니다. 거룩한 자가 되어 생명나무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고, 그뿐 아니라 문들을 통해서 영원한 성(城)인 우리들의 본 향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해는 마십시오. 거룩함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님을 믿어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누구 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하게 되어지는 성화(聖化)는 들어갈 수 있는 당당한 권세를 갖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복(福)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고자 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일곱 가지 복이 나옵니다. 처음의 복은 1장 3절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 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은 무서운 재앙의 메시지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이 담긴 책입니다. 계시록은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 마지막도 복으로 마무리됩니다.

첫번째 복은 1장 3절에, 두번째 복은 14장 13절에, 세번째 복은 16장 15절에, 네번째 복은 19장 9절에, 다섯번째 복은 20장 6절에, 여섯번째 복은 22장 7절에, 그리고 마지 막 일곱번째 복은 22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요한계시록에 복이 전반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요한계시록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숫자는 일곱입니다. 이는 하 나님의 완전한 복을 상징합니다. 22장 14절의 마지막 복은 그 리스도인들이 점점 주님을 닮아가는 것에 관한 상징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구원받는 순간에 죄사함을 받습니다 . 그것이 성화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진다는 것은 그리스도 인의 단순한 경건의 노력이나 도덕적인 결단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 니다. 우리의 노력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또 우리의 구원을 완 성할 수 있다면, 주님의 십자가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최선의 노력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어떤 도덕적인 결단도 우리를 구원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 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 21).

우리가 거듭날 때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씻는 것입니다. 그러므 로 구원의 사건은 우리에게 성화의 시작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전체 메시지 안에서는, 우리의 죄 사함의 사건과 그 이후에 거룩해져 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경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1장 5절을 보십시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 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 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습니다. 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경험이고 성화의 시작입니다.

그 다음에 19장 8절을 보십시오. 19장은 이제 심판의 날이 다 지나가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 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주님의 재림과 함께 우리는 온전히 새로운 옷을 입습니다. 이 새 로움의 시작은 구원받은 순간입니다. 주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 는 죄 사함을 받고 죄에서 해방된 삶을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우 리가 해방된 삶을 시작했지만, 아직 완성은 아닙니다. 주님의 의 (義)가 온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적으로 완성되는 것은 주님 이 다시 오실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의의 새 로운 옷을 입게 됩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소망을 가지고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두루마기 빠는 일을 계속해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두루마기를 빤다고 하는 것은 한 번 만 빤다는 말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빠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루마기를 (계속해서) 빠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계 22: 14).

성경에 너희가 옛 사람을 벗으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도 계속해서 벗으라는 말입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도 계속해서 입 으라는 말입니다. 성화의 과정은 단회적(單回的) 사건이 아닙니다 . 구원은 단 한 번에 이루어지지만, 우리가 거룩함을 이루어 나 가는 것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거룩 함을 닮아가는 것은,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말씀을 통해서 그분 과 계속 교제할 때 가능합니다. 때로는 실패하고 넘어지기도 하지 만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계속하여 빠는 것입니다. 이런 성화의 과정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완성됩니다. 그때 우리는 생명나무 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수 있는 당당한 권세를 얻습니다.

그러면 이 성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15절을 보 십시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 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이 성에는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천성에 들어갈 수가 없 습니다. 그러면 죄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습니까? 그리스 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해결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십자가로 죄 사함을 받은 후에는 계속적으로 거룩함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거룩함을 완성할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용납되지 아니하고 죄가 허용되지 아니하는 천성에 들어갈 수 있 는 당당한 자격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날을 기 다리는 것입니다. 그날에는 내가 온전히 변화되어 주님과 같이 될 것입니다. 이제 다시는 죄악과의 갈등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온전히 완성된 빛나는 세마포를 입고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그 리고 영원한 천성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요한계시록 의 마지막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날이 구원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급을 받게 됨 주님의 재림은 역사의 심판과 최후의 전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날이 우리의 희망인 것은 우리가 상급을 받는 날이기 때 문입니다. 간혹 상에 대해서 열정을 잃어버린 분들을 보게 되는데 , 아마 순수성을 잃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신이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또 자녀들을 보십시오. 상 받았을 때 그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아빠, 아빠! 나 상 받았어요. 미술 대회 에서 최고상을 탔어요! 하면서 자랑스런 마음으로 칭찬받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순수한 모습입니까? 하나님은 상급을 약속하시며 우리의 거룩한 삶을 격려하십니다. 요 한계시록 22장 1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수고했던 것에 대한 보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 가장 작은 수고라 할지라도, 누군가가 내 수고를 알아 주지 않아서 슬피 우는 외로움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주께서는 다 갚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서 수고의 땀을 흘린 사람들은 그 날을 기다리게 됩니다. 주님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당신 을 아십니다. 당신의 수고를 기억하십니다. 이름 모를 소자(小子 )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냉수 한 잔의 친절을 베푼 것까지 잊지 않고 그 보상을 약속하신 주님! 재림의 그 날은 그리스도인이 상급을 받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체상이 아닙니다. 개인 각자에게 주는 상입니다.

당신의 행위대로 주실 것입니다. 구원은 행위에 의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받습니다. 그러나 상급은 행위대로 받습니다. 그날에는 상급이 없어서 부끄러워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생각나십니까? 그날에 주님이 우리가 어떤 상급을 받을 만한가를 시험해 볼 것이라는 고린도전서 3장 말씀 말입니다. 3장 10절을 보십시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집을 짓는 것과도 같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건축의 터는 예수님이십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12절).

예수님을 기초로, 삶의 주님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다 구원을 받습 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같지 않습 니다. 구원을 받아놓고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 는가 하면, 충성스럽게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도 있습 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3장에서는 집짓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다 집을 짓습니다. 어떤 사람은 금으로 은으로 보석으로 짓고, 어떤 사람은 나무나 풀이 나 짚으로 짓습니다.

계속해서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13절) .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 그 결 과를 밝히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밝혀내십니까? 역 시 13절입니다.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功力)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우리 인생의 집에다 불을 질러 보십시오. 어느 집이 제일 먼저 타겠습니까? 나무, 풀, 짚 등을 재료로 하여 지은 집은 얼마나 잘 타겠습니까? 그러나 금, 은, 보석으로 지어진 집들은 그대 로 남을 것입니다.

계속 14절 이하를 보십시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14,15절).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는다고 했는데, 이 해(害)가 어떤 해 인지는 정확히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여간 해를 받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성경이 거기까지만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더 이상 이것에 대해서 상상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지나치 게 끌고 나가면 카톨릭의 「연옥(煉獄)의 교리」까지 비약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위험한 해석입니다. 솔직히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그 말이 구원을 못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의 공력이 아니라 오직 그리 스도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왜 그렇습니까? 지푸라기 같은 혹은 거지 같은 신앙 생활을 할지 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 공력은 다 불에 타도 그 터만은 남습니다. 그 터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원의 근거는 그리 스도이시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구원은 받는다는 이야기입니 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서 한 일이 없으면 부끄러울 것입니다. 해( 害)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수고한 공력이 불에 타지 않고 드러나는 사람들에게는 주께서 상을 약속하십니다. 주 님이 다시 오시는 날! 주님을 위해서 일했던 우리들에게 주의 상 급이 주어지는 그 순간이 꼭 오고야 맙니다. 충성스러운 그리스도 인들에게는 이 순간이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십니 다.

내가 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나를 위해서 했던 그 모 든 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드린 그 모든 수고를 내가 안다!

이 상급을 받는 날이 기다려지지 않습니까? 오히려 두려워진다면 그 사람은 타락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받을 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 이것은 참으로 큰일입니다.

주께서 상급을 주실 그날에 당신은 어떤 상을 받게 될 것 같습니 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된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상급은 면 류관입니다. 옛날 왕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최대 영광의 상징은 면 류관이었습니다. 주를 위해서 수고하고 충성한 성도들을 위해 예비 해 놓으신 면류관! 성경에는 다섯 가지의 면류관이 나오는데, 고린도전서 9장 25절 이하에 나오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과 데살로니가전서 2장 1 9절, 20절에 나오는 기쁨의 면류관과 요한계시록 2장 10 절에 나오는 생명의 면류관과 디모데후서 4장 8절에 나오는 의의 면류관, 그리고 베드로전서 5장 2절 이하에 나오는 영광의 면류관이 그것입니다. 예전에는 부흥 목사님들이 설교하면 서, 예수를 시원찮게 믿으면 나중에 개떡 모자를 쓰게 될 것 이라고 우스개 소리를 했습니다만, 성경에 개떡 모자는 없습니다.

하여간 이 다섯 가지 면류관에 대한 묘사들을 보면, 각기 다른 수고에 대한 상급의 약속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썩지 아니할 면류관은 절제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주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자기 의 삶을 잘 관리하며 철저히 절제의 생활을 했던 사람들의 몫인 것입니다.

기쁨의 면류관은 영혼을 구원했던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 너희가 전도했던 사람들이 너희에게 기쁨의 면류관, 자랑의 면류관이 아니겠느냐? 우리는 전도한 사람들을 천국에서 다 만납니다. 우리는 기쁨의 면 류관이라는 것을 직접 머리에 쓰게 될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도한 사람들이 그날의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저 사람이 제가 전도한 사람입니다.

상상만 해도 기쁘고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당신은 지금 그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까? 이 땅에서 어떤 영혼이 구원받고 주님 앞에 돌아오는 것을 보는 것도 기쁨이려니와, 그 영혼을 천국에서 만나 는 기쁨은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사실 지금은, 그 사람이 나에게 전도를 받아 구원받았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사건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도착하는 그날엔 전도받았던 그들이 형제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영원토록 절을 할지도 모릅니다. 이 기쁨의 면류관을 아십니까? 복음을 전하면 누구나 맛보게 됩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주님을 위해서 고난과 박해를 받았으나 거기에 굴 하지 않고 죽도록 충성하여 승리한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의의 면류관은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 었으므로(딤후 4:8).

우리는 믿음으로 단번에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그러나 의의 면류 관은 이 믿음을 끝까지 지킨 사람들을 위한 몫입니다.

영광의 면류관은 충성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 무리를 섬긴 사역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주님을 위해서 수고의 땀과 눈물을 흘리며 오늘의 삶을 살고 있다 면,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이 마지막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왜 기다립니까? 상급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날에 받을 것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사람은 그날이 기다려지겠습니까? 부끄럽 고 죄송하고 어쩔 줄 몰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족하지 만 부족한 모습 그대로 이 복음을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충성 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 상급의 날, 소망의 날을 위 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됨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은 하나님의 나라가 드디어 실현되는 순간입니다. 저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순간부터 하나님의 나라 가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고 믿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첫번째 메시 지가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주님은 왕으로 오셨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그 왕의 통치 능력을 경험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아직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왕국이 싸우고 있습니다. 이 싸움 은 주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그날에 비로소 끝날 것입니다. 그 때 사단의 왕국은 완전히 깨지고 부숴지고 멸망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메시야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온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정치가들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출마할 때 누구나 상투적으로 가 장 많이 들먹이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정의입니다.

정의 사회 구현 등은 빠지지 않는 공약입니다. 그리고 또 하 나는 평화입니다. 평화를 위해 머슴이 되어 기여하겠다는 것입니다. 정의와 평화!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대한 표현 중에서 제일 많이 나오 는 두 단어는 무엇입니까? 역시 정의와 평화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정의의 나라요, 평화의 나라입니다. 즉, 정의가 온전히 실현된 평화로운 나라입니다.

지금 왜 정치가들마다 정의와 평화를 그렇게 부르짖습니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미끼요 문제입니다. 내 가 정의 사회를 건설하겠소! 내가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인류 평화에 기여하겠소하고 목청껏 외쳐대지만 공수표입니다. 왜냐하 면 정의와 평화의 나라는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 문입니다.

우리는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정의와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사 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이것은 아직 완전한 정의와 평화를 맛보지 못한 인류의 숙원이요, 몸부림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 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찬란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계시 절정에서 약속된 이 메시지를 보십시오. 11장 15절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 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최후 심판의 나팔 소리가 울려퍼질 때 천사가 선언합니다. 드디어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온전히 지배하는 세상이 왔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20 장에서는 천년 왕국이 이루어지는 모습들이 예언됩니다. 또 22장 에서는 그 영원한 나라에서 살아갈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조명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그곳, 우리도 왕 노릇 하며 맘껏 누리는 다시는 밤이 없는 그 나라! 이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보면, 정의와 평 화라는 단어가 이 나라의 특성을 얼마나 잘 말해주고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9장 6절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 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평화의 왕자!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입니다.

계속되는 7절을 보십시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位)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이 평화의 임금이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보존하실 것이 라고 말씀합니다. 평화와 정의, 이 두 가지는 그분과 그 나라의 특성을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11장 4절 이하를 보면, 이새라는 사람의 가계(家系) 를 통해서 장차 오실 메시야가 이 땅에서 어떤 사역을 이룰 것인 가를 말씀합니다.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 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 리라(4,5절).

공의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얼마나 잘 상징하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계속되는 6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 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 에게 끌리며(6절).

당신 집의 꼬마들이 사자를 끌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그분의 통치 를 상징하는 가장 주요한 두 단어는 바로 공의(정의)와 평화 입니다.

이사야서 65장 17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17절).

그분이 창조하실 나라인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입니다. 19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거기 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 세 못 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리라(19,20절).

죽음이 없는 나라! 저주가 없는 나라입니다.

21절 이하를 보십시오.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 를 먹을 것이며 그들의 건축한 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21, 22절).

정의의 나라입니다. 내가 땀흘려 수고하여 농사를 지었는데, 남이 가로채서 먹는다면 그곳은 불의와 불공평이 가득한 곳입니다. 우 리가 세상살이를 하며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불공평 때문 일 것입니다. 역사도 증명하듯이 사람들은 이 불의에 울면서 정의 를 구합니다. 한 지도자가 일어나 정의를 부르짖을 때 우리는 그 에게 희망을 겁니다. 그가 평화를 약속할 때마다 우리는 이 평화 의 꿈에 젖습니다. 정의와 평화는 참으로 값진 것입니다. 그러므 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하나님 나라의 특성인 평화와 정의 의 사회를 위해서 노력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낙관하지는 마십시오.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이 땅에 완전한 정의와 평화의 나라가 결코 실현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 다. 그것은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의 나라를 통해서만 이루 어질 수 있습니다. 이 땅에 난무하는 불의와 불공평을 바라보면서 , 평화가 짓밟히는 것을 몸으로 느끼면서 우리는 사도 요한처럼 성경의 마지막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날에야 정의와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될 것이기 때 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에게 희망의 사건인 것 입니다.

우리가 천국 통치에 동참케 됨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함께 다스리게 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참으로 깨닫는다면, 국회의원이 되려고 지나치 게 발버둥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도 그리스도인 정 치 지도자가 많이 필요합니다. 역사는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제시 하고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일에 기여하는 그리스도인 정치가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주께서 다시 오셔서 주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그 때에, 우리도 주님과 함께 그 나라를 함께 통치하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5절을 보십시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여기에서 저희는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 속에 저와 당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7,28절을 보십시오. 27절은 28절의 배경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런 말입니다.

선생님, 제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른 줄 아십니까? 주일에 낚시도 못하고, 저녁 예배까지 참석해야 하 고, 전도하는 데 내 시간을 바치고, 봉사에 힘썼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세상이 새롭게 되는 그 때가 옵니다. 그때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한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은 아주 흥미로운 장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는 서로 고발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 유가 재미있습니다. 1절부터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1절).

성도들끼리 판단해서 시시비비를 가리면 되지, 그 문제를 믿지 않 는 사람들의 법정에까지 가지고 가서 서로 헐뜯어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뜻밖의 말씀을 합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2절).

장차 우리 주님이 최후의 심판관으로 오셔서 역사의 모든 것을 심 판하실 때, 주님을 수종들면서 우리도 함께 세상을 판단할 것입니 다. 우리는 이 역사와 이 세상과 온 인류를 심판할 자리에 당당 히 앉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끼리 사소한 문제들을 자 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불신자들의 법정에 호소해서야 되겠느냐는 책망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참여할 사람들입니다.

주와 함께 왕 노릇 하리라! 만왕의 왕이신 주님과 함께 우리도 왕 노릇 할 귀한 존재들입니다 .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살 펴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 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11절).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으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당장에 이루 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초림하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 시고 구원의 길을 여셨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지는 않으셨습 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으로서 지상을 통치하시고 하나님 나 라를 본격적으로 건설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 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비유가 므나의 비유입니다. 12절 이하 를 보십시오.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 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12,13절).

여기에서 돌아온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시 와서 나의 왕국을 이룰 때까지 너희는 내가 맡긴 것 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라.

므나 비유는 달란트 비유와 유사합니다.

드디어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왕이 돌아왔습니다. 16,17절을 보겠습니다.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 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 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이 상급이 재미있습니다. 한 도시의 시장이 아니라, 열 개 도시 의 시장 노릇을 한다는 말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 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18-21절).

우리가 이 비유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다시 오셔서 그 나라를 완성하실 때 주시는 상급 중에 하나가 무엇입니까? 그냥 면류관만 씌워주고 끝 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는 그 나라에 이루어질 놀라운 사실 에 관한 예시적이며 암시적인 사건입니다. 우리는 면류관을 받아 멋있게 쓰고 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다스리는 자 의 위치에 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천국에 가면 심심해서 어 떻게 할 것인가를 지금부터 걱정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심심한 나 라가 아닙니다. 천국에도 정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세상 에서와 같이 권모 술수가 판치는 불의한 정치는 없습니다. 왜냐하 면 그 나라는 정의와 평화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 나라에서 참으로 멋진 정치가가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까 ?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주님을 위해서 헌신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날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통치하는 이 놀라운 꿈, 주 님과 함께 시장도 하고 도지사도 하는 삶! 그렇다고 너무 세속적인 욕망으로 변질시키지는 마십시오. 우리가 아직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천국은 거룩한 정치가 있는 나라임 이 분명합니다. 공법(公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그 위대한 나라! 불의가 전혀 없는 나라! 탐욕이 조금도 없는 나라! 뇌물이 조금도 없는 정의로운 샬롬의 나라! 이 천국의 비 전에 눈을 뜬 사람마다 사도 요한처럼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희망의 사건입니까? 첫째는, 구원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상급을 받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 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징조가 보입니다. 그분의 재림 징조는 새로운 세상, 즉 영원한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발걸음 소리입니다 . 새벽 별이신 주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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