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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드림 (창 2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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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이야말로 어린양으로서의 속죄주의 사역인 구속의 도리를 가장 선명한 모형으로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1,아무런 이유나 설명도 없이 명령하신 하나님-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삭은 죽어야 했으며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여야 했는지 아무도 그 이유나 목적을 알 수 없었다 타인들이 생각할 때에 이일은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일은 구속사적 견지에서 살펴보면 명백하게 이해 가된다 1)아브라함에게 수천 마리의 양이나 가축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 하셨다면 얼마나 타당한 명령이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한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만이 유일무이한 방편이 될 것을 예표한것이다(요14:6)
2)잔인 무도한 인신 제사를 명한 것은 잔인 무도한 십자가상의 죽음을 예표한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죄때문에 가장 처참한 죽음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당할 것을 의미한다
3)죄없는 이삭을 죽이라고 한 것은 무죄하신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인 인간을 위해 죽을 것을 예표 한 것입니다
4)아무런 이유를 설명 하지 않고 명령 하신 것은 구속의 진리가 설명 할 수 없고 오직 믿음의 대상인 것을 예표한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했다(고전1:18)
5)아브라함이 아무런 이유를 묻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명령)이기 때문에 그대로 믿고 순종한 것처럼 구속의 진리는 오직 믿고 순종 하는것 뿐인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말씀)은 논란되어져서는 안되고 오직 복종 되어져야만 한다”(마리아나 요셉처럼)
2,이삭의 구출사건이 우리의 구원의 예표가된다1)구출시기:아브라함의 복종이 추호도 거짖이없고 완전하다는 것이 완전무결하고 확증되고 동시에 이삭의 구출작업이 간발의 차로 늦어지기 직전의 그 순간에 구출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너무 빠르지도 않고 믿는 그 순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예표한다 이보다 조금이라도 이르면 그의 진심을 판정하기 어렵고 이보다 조금만 늦으면 그의 진심을 완전히 설명은 되지만 이삭의 구출은 이미 때가 늦어 버리는 그 극초 긴 박의 순간 성을 절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죽음과 최후의 심판 때의 순간 성을 잘 예표하고 있다 우리의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에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요 그 순간을 넘기면 영원히 멸망 받을 것이다 이 원리는 최후의 심판 때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2)구출의 이유:족장 아브라함의 경건한 순종과 신앙이 완전히 설명되었기 때문에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구원해 주시는 구속의 도리의예표(롬10:17 롬10:10) 믿고 순종할 때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3)구출의 방법: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어린양을 대속 시키심으로서 구출하셨다(히9:22)어린양을 대신 제물로 번제를 드리게 함으로 예수님의 구속의 도리를 보여주고 있다
4)구출의 교훈
(1)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희생의 제물로 바치겠다는 결의의예표
(2)결박된 이삭은 구원 받기 전의 성도의예표로 죄악으로 죽음의길로가는 인간의 모습
(3)어린양은 죄없으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속죄제물이 되신다는 상징이다
(4)이삭의 구출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그리스도의 속죄 받은 성도들의 새생명을 상징한다
(5)우리가 그 구속의 진리를 잘 이해하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해하고 안하고 상관없이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구원해주신다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부터 열까지 부당한 일이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믿고 행한 것이다 구속의 진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사고로 온통 모순 투성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믿고 구원받는 것이다 알고 믿으면 되지만 이해하고 믿을려고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ASTRUCT와EICHOHORN은 본장(창22장) 1-10절은 소위 [엘로힘 문서]라고 하고 11-19절을 소위 [야웨 문서]라고 하였는데 이는 본 장을 구속사적 견지에서 보지 않고 단순히 역사적 입장에서 본 때문이다 “독자를 바치라고 하심은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의 칭호인 [엘로힘]을 쓰고 이삭을 죽이지 말라고 구출해주신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의 칭호인 [야웨]를 쓴 것은 공의와 사랑의 조화의 완성의 십자가상의 속죄의 모형이 본 장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오묘한 이치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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