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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국가를 치유하시는 그리스도 (렘 18:5-10, 롬 11:1-5)

첨부 1


건국 이후의 최대의 국난이라고 한다. 한국 전쟁보다 더 큰 국난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지금이 위기이며 치유 받아야 할 대상이다. 성경의 국가에 대한 사상은 국가에 대한 애국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본회퍼는 국가를 하나님의 위임과 연결된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대한 신적 위임이 국가이다. 그리스도인은 국가에 관심을 가지며 국가에 대한 봉사를 위해 받은 위임은 대리권을 가진다. 예수님도 바울도 국가에 대한 애정이 극진하였다. 국가가 치유 받고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하자.

1. 국가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와 질그릇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비유하고 있다. 토기장이의 손은 같은 질흙이지만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들어낸다. 진흙은 보잘 것 없지만 이것을 높은 열에 구우면 그릇이 되고, 아름다워지고, 빛이 난다. 진흙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불이 그릇이 되게 한다. 국가란 국민과 국토와 주권이 함께 있어야 되듯이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토기장이의 비유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서 우리 나라와 우리를 지으셨다.

2. 악에서 돌이키면 국가를 치유하신다.
8절은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라고 한다. 이 한 절은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시는 약하심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강한 자만이 돌이키고 양보하는 자는 강한 자이다. 우리가 돌이키면 하나님이 돌아서신다. 우리가 돌아서는 것은 '슈브'란 말로 회개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돌아서심은 '나함'이란 말로 용서를 의미한다. 국가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대한 순종여부에 달렸다. 국가의 병이란 근본적으로 치유 받아야 한다.

3. 그리스도가 국가를 이렇게 치유하신다.
그리스도는 국가의 도덕적 위기를 치유하신다. 우리 나라는 전통적 인간관계의 가치관을 상실하고 있다. 정치윤리나 봉사정신도 실종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국가의 경제적 위기를 치유하신다. 현재의 경제적 어려움을 그리스도는 고쳐 주기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그릇된 관행과 생활풍습을 고치시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분열된 국가를 하나되게 치유하신다. 주기도문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나라에 임하게 하면 치유된다. 우리 나라를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로 인정하면 이것이 곧 국가의 치유이다. 예수 믿고 우리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정하게 하는 것이 곧 국가 치유의 방법이다.

199

9.
8.1 설교방송 (설교요약)
냉수 같은 그리스도인
잠언 25:11-13, 마태복음 10:40-42

성경의 물은 은혜의 상징이며 동시에 심판의 상징이다. 비가 은혜의 상징인 동시에 심판의 상징이며 강도 은혜의 상징이며 동시에 심판의 상징이다. 오늘의 본문은 추수철의 눈의 냉기라는 뜻으로 찌는 더위에 레바논의 헬몬산에서 눈을 가져와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더운 여름에 추수하는 성지에서 추수하는 농부에게 눈으로 만든 시원한 냉수를 공급하는 것은 가장 상쾌한 일이다. 충성된 자의 어떤 면이 보낸 자에게 얼음 냉수 같을까

1. 시원하게 하는 사람
충성된 사자는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고 하였다. 얼음 냉수의 제일 상징은 시원하게 하는 것이다. 시원한 것이 무엇일까 시원한 것은 편안한 것을 의미하며,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을 의미하며, 막힘이 없는 것을 의미하며, 답답하지 않고 열린 마음의 자세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여름날에 시원한 냉수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힘이 없이 열린 자세를 가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덥고 열 받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2. 기쁘고 만족하게 하는 사람
잠언 25:25은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고 한다. 애 타는 사람에게 갈증을 해소하는 소식을 주는 일은 냉수 같은 일이다. 가장 큰 갈증은 듣고 싶은 소식이다. 다윗은 그의 아들 압살롬의 생사에 대하여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자식이 돌아올 것 같아 몇 해를 대문을 잠그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기다리는 부모에게 기쁜 소식은 목마를 때의 얼음 냉수 같은 일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한다. 가장 기쁜 소식은 복음일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가장 기쁜 편지의 배달부이다.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 배고파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복음으로 갈증을 해소하고 사랑으로 빈 마음을 채워줄 수 있다.

3. 동정을 베푸는 사람
마태복음 10:42에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한다. 동정심이란 같이 아파하고, 같이 고파하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웃고, 같이 우는 마음이다. 내가 목마르면 저 사람도 목마르겠지 하고 냉수를 대접하는 마음이다. 물이 귀한 사람들에게 냉수를 대접하는 것은 어떤 것보다 귀한 동정심이다. 냉수 한 그릇은 시원케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우리 조상들의 삶에는 냉수 한 그릇의 동정심이 있었다. 더울 때 냉수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충성된 그리스도의 편지 배달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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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3.2

1. 주일설교
셋째 하늘
시편 148:1-4, 고린도후서 12:1-4

비행기를 타고 조금만 높이 올라가면 적도나 북극이나 비슷하다. 하늘에서 바라보는 땅은 전부 아름답다. 조금만 더 높이 올라가면 세상의 갈등도, 이해관계도, 초월할 수 있다. 중국 장자의 책 서두에 붕(鵬)이 등장하는데 높이 올라가면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말하고 있고 소설 갈매기의 꿈에는 더 높이 올라가는 새가 더 멀리 본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더 높이 올라가서 인생을 보고 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고난을 피력한 바울은 12장에서 신비한 영적 체험을 말하고 있다. 바울의 환상을 통하여 셋째 하늘의 의미를 보자.

1. 영적 체험의 장소
바울의 셋째 하늘은 바울의 신비한 영적 체험의 자리이다. 바울의 신비한 영적 체험과 육적인 가시로 당하는 고통이 공존한다. 바울은 이런 신비한 체험을 자신의 자랑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14년전이란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고 자신을 3인칭화한다. 신비한 체험이 전적으로 주께로 말미암은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환상과 계시라고 하고 바울은 내가 갔다고 하지 않고...이끌려 갔다고 한다. 예수님은 변화하시려고 산에 가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시려고 가셔서 변화하신 것이다. 모든 영적 체험이 나의 주체나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되어야 한다.

2. 하나님의 계시는 장소
유대인의 관념은 하늘을 셋으로 나누는데 첫째는 보이는 하늘이고 둘째는 별이 달려 있는 하늘이며 셋째 하늘은 최고의 하늘 즉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고 한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하늘을 하나님의 처소라고 하고 하늘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쓰이기도 하였다. 바울의 셋째 하늘 경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방문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자
리를 성경은 보좌라고 하는데 왕의 자리를 의미한다. 신비한 영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자리에도 참여한다. 이런 경험은 바울 만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경험할 수 있다.

3. 구원받은 성도들이 가는 장소
낙원은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상징하기도 하였고 신약에서는 영원한 나라(눅 23:43) 혹은 승리자가 갈 자리(계 2:7)를 상징하였다. 바울은 낙원에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 사람에게 공개하지 않는 하나님의 비밀을 공개하셨다. 이런 하나님의 보좌에 가면 하나님의 비밀도 공개하신다. 바울이 경험했던 셋째 하늘은 누구나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갈 수 있고, 가야 하는 장소이다. 바울의 신비한 경험의 고백은 자신의 고통의 고백 뒤에 나온 고백이다. 우리도 세상의 고통 뒤에는 신비한 체험을 맛보게 하실 것이다. 이 신비한 경험을 맛보는 셋째 하늘의 백성이 되자.

이번 설교방송은 김형태원로목사의 특별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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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3.1

4. 주일설교요약
20세기 최후의 주자들
사사기 10:1-4, 고린도전서 9:24-27

첫째로 우리는 20세기 최후의 성숙한 신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엡 4:13-16에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신앙과 지식이 일치한 온전한 사람이며(13), 세속적 풍조와 유혹에 요동하지 않는 것이며(14), 사랑과 진리로 그리스도인에게까지 자라나는 것이다.(15-16) 우리는 그동안 사회와 교회의 이중문화권 속에서 위선적 미숙한 신앙생활 상태에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기적이며 주관적인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달려가는 성숙한 신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둘째로 우리는 20세기 최후에 일어날 환난에 대비해야 하겠다.
20세기는 전쟁의 100년이었다. 딤후 3:1-5의 경고를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평안보다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는 깨닫고 조심해야 하겠다. 히 12:1-10의 말씀 처럼 우리는 가족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피곤해서 낙심치 말고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고 인내해야 한다. 그리고 자녀를 사랑으로 책망하는 하나님의 징계를 원망치 말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의 번영과 연락에 취하지 말아야 하겠다.
셋째로 우리는 20세기 최후의 신앙의 주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는 지나온 날들을 감사하는 동시에 21세기 차세대에게 바톤을 잘 넘겨주도록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하겠다. 고전 9:25-27에 주자의 지침으로 자기를 이기고 절제하는 것, 달리는 방향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싸움의 대상은 불의한 세력이라는 것, 그리고 남에게 전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되지 않는 것이다. 교회성장에 성공하고 자기성장에 실패하는 경우이다. 빌 3:10-14에 우리의 달리는 목표는 부활이며, 아직 우리는 미완성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리고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다.

199

9.
3.7. 주일설교요약
열린 하늘
창세기 7:6-12, 마가복음 1:8-13

예수님의 공생애는 하늘을 여는 일로 시작하셨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 위에 임하시고 음성이 들려왔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늘을 여신 것은 선지자도 계시도 끊어진 것을 다시 이으시려고 하신 것이다. 마태와 누가는 하늘이 열리고라고 하였지만 마가는 하늘이 갈라지고라고 하였다. 갈라진 것은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지는 것을 묘사한 단어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 구속을 의미한다. 하늘이 열리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구원을 여신 것이며 인간에 대한 동정과 사랑을 여신 것이다.

1. 하나님을 듣고 보게 한다.
예수님의 세례는 죄를 씻는 일이 아니라 공생애 시작에 삼위 하나님이 회동하신 것이다. 하늘의 성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어 30년을 준비하게 한 아들 성자에게 공생애를 시작하도록 공생애의 신임장을 주는 장면이다. 세례시에 들려온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은 변화산에서도 들려온다. 하늘이 열리면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며 음성이 들려온다.
하늘이 열리면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님과 화평하며 하나가 될 것이다.

2. 사람을 향한 멸망과 비전을 보게 한다.
창세기 7:11에는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여신 하늘의 멸망의 문이다. 에스겔 1:1에는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하늘을 여시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의 계획을 이상으로 보게 하신다. 하나님은 하늘을 여시고 하나님의 멸망과 구원을 알게 하신다.
하나님은 모르게 하신 장래의 일을 하늘을 열고 보여주실 때가 있다 이것을 성경은 이상 중에라고 한다. 계시록 4:1에는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신다.

3. 고난 중에 하늘의 영광을 보게 한다.
사도행전 7:56에는 스데반이 순교할 때 말화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하였다. 스데반은 열린 하늘을 통하여 예수님과 그 영광을 모았다. 야곱은 열린 하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자가 왕래하는 것을 보았으며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고난 받는 사람에게 하늘을 열고 하늘의 찬란한 영광을 보게 하신다. 하늘이 열리면 예수님이 보이고 성령이 강림하시며 막힌 담이 헐린다. 눈을 들어 열린 하늘을 보며 고난을 이기는 은총을 받자.

199

9.
2.2

8. 주일설교요약
위로의 신앙
시편 119:49-56, 고후 1:1-7

위로라고 하는 말은 버리지 않고 항상 곁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버리지도 않으시고 떠나지도 않으신다. 이 하나님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리라고 하신다. 신약성경에서의 위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연관시킨 말이다. 헬라어에서의 위로는 불러서 곁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보혜사란 말도 같은 어원으로서 위로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린도후서는 위로의 서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고난을 당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위로의 서신을 보내고 있다.

1.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바울은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환난을 당한 성도들을 위로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울을 곁에 불러 바울 되게 하시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성도들을 위로하신다. 아브라함을 불러 곁에 두셨고 홀로 도망하던 야곱도 불러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하셨다. 위로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홀로 있는 것 같아도 어디에 가든지 주의 손이 인도하시며 모든 곳에 내가 가는 곳에 먼저 가 계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천사와 같은 사람을 만나 위로 받게 하시고 아무도 모르게 죄를 지으려해도 곁에서 권고하시고 돌이키게 하신다.

2. 그리스도를 통한 위로
5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한다. 본문에는 '위로'란 단어만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환난', '고난'도 세 번씩 나온다. 그리스도의 위로는 고난 때문이 다. 고난이 없으면 위로도 없다. 사람들이 약자 편이듯이 하나님도 약자 편이시다. 우리는 고난과 환난이 끊임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친 것같이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친다. 위로는 불러서 곁에 두는 것인데 예수님은 불러서 곁에 두어 하나님이 함께 하신 임마누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도록 위로를 받는다.

3. 우리도 위로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환난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게 하신다. 우리가 위로 받는 것도 다른 사람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성도 교제의 구체적 방법이며 최고의 방법이다. 하나님이 위로자이시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하시며 보혜사 성령께서 위로자이신 것같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위로자가 되어야 한다. 이사야 40:1에는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신다. 위로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위로를 받고 우리의 말을 듣고 위로를 받도록 우리는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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