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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잃은 양 한마리 (눅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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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언급한 대로 이 비유의 대상은 두 부류이다. 그 하나는 모든 세리와 죄인 그룹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룹이다.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말씀을 들으러 나아왔고, 후자는 예수가 세리나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해 하며 원망하는 자세로 나아왔다. 본문의 3절이 말하는 「저희」는 당연히 이들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다.

대화는 항상 상대적이기 마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길지 않은 공생애 기간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어떤 경우에는 하늘의 복음을 상당히 부드러운 말투로 자세히 풀어 설명했는가 하면, 또 다른 많은 경우에는 상대방의 기분을 아주 언짢게 할만큼 불쾌한 언사로 일관하기도 했다. 그것은 예수의 인격이 이중적이어서가 아니라, 예수와 만나는 대상이, 때에 따라서 달랐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의 수가성 우물가 여인에게는 차근차근히 풀어 설명하던 예수가, 바리새인 니고데모를 만났을 때는 다짜고짜 거듭나라고만 일갈하던 것도 모두 이런 연유에서이다.

누가복음 본문의 경우는, 그 대상이 어느 한 부류가 아니라 두 부류 이상이 섞여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말씀의 내용도, 그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죄인이나 세리가 들으면 위로와 은혜의 복음이 되지만,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들으면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는 말씀이 본문이다.

우선 본문의 내용을 생각해 보자. 본문은 양 일백마리를 가지고 있는 목자가 그 중의 한마리를 잃었을 때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등장하는 목자의 행동은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많이 있다. 늘 지적하는 얘기지만 성경은 우리의 피상적인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항상 찾고 구하며, 문을 두드리는 자세를 요구하고, 좁고 협착한 길을 가는 구도자의 자세를 요구한다. 그러면 목자의 어떤 행동을 가리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라 하는가 첫째는 이 목자가 잃은 양 한마리 때문에 아흔 아홉마리는 들에 두고, 한마리를 찾기 위하여 헤매고 다닌다는 사실이다. 우리같으면 과연 이럴 것인가. 우리가 목자의 심정이 되어서 생각해 보자. 지금 들에는 아흔 아홉마리의 양이 있다. 그들 역시 맹수로부터 보호 받아야 하고,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되어야 한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목자인 셈이다. 그런데 일백마리 양을 골고루 돌보고 하나같이 아껴야 하는 목자로서,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기위하여 아흔 아홉마리는 들에 그대로 내버려두고, 그렇게 헤매고 다녀도 과연 괜찮은 문제인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아니 뭘 그렇게 골치 아프게만 생각하는가. 목자가 하나만 아니고 여럿이 있었겠지 하고 편하게 넘어갈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만일 그렇다면 나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기우일 공산이 크고 쓸데 없이 따지는 얘기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목자가 하나라는 명확한 증거도 없지만 둘 이상이 있었다는 근거도 없고, 또한 뒤이어 나오는 드라크마의 비유에서나 탕자의 비유에서도, 본문에서 목자 역할을 하는어떤 여자나 탕자의 아버지는 단 한분으로 묘사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본문의 목자도 여러명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원래 한명이 일백마리 양을 돌보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4절에서 양 일백마리를 소유한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단수로 언급된 점도, 양을 돌보는 목자가 여럿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자기 손을 벗어나면 따로 보살펴 줄 목자가 없는 상황에서 아흔 아홉마리 양을 들에 그냥 방치하고, 한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태도는 과연 합당한 것인가. 물론 아흔 아홉마리 양들이 있는 장소가 안전한 곳이라면 얘기가 또 달라지겠지만,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들」이란 단어는 양들이 홀로 있기에는 그리 안전한 장소가 못되는 곳이다. 본문에서 들로 번역된 단어의 원어는 에레모스(e[rhmo로서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한결같이 광야의 개념으로 쓰였다. 물론 외롭다느니, 한적한, 적막한, 황폐한 등의 개념으로 쓰인 곳도 있지만, 모두다 광야라는 기본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광야는 물이 없고 건조하며, 불뱀과 전갈이 있는 곳으로, 양들이 쉬고 풀을 뜯을 만한 장소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푸른 초장이 있는 곳으로 가는 도중에 이런 광야가 있었을 것이고, 목자는 이런 광야를 지나면서 무사하고 안전하게 양들을 보호하는 것이 그의 임무이다. 그런 목자가 한마리의 양이 없어졌다고, 아흔 아홉마리는 생사가 불투명한 광야 가운데 내버려 두고, 잃은 양 한마리를 찾아 나설 수 있는가. 과연 독자 여러분들이라면 그렇게 하겠는가 그리고 또 하나,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은, 그렇게 해서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았으면 다시 아흔 아홉마리 양이 있는 광야로 돌아가서 그들을 함께 데리고 집으로 오든지 다른 초장으로 가든지 할 일이지, 잃은 양 한마리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할 수 있는 문제인가. 만일 이런 식으로 목자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작에 목자장 앞으로 사표를 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목자는 아흔 아홉마리 양은 빈들에서 굶어죽는지 늑대에게 물려죽는지 상관하지 않고,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 즐기고 있다. 이럴 수 있는 문제인가 그러나 이런 내용들은 어찌보면 아주 지엽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예수의 그 다음 말씀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15:7) 문제는 이상의 비유가,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모습과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는 하늘의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예수의 비유는 잃은 양 한마리를 찾는 목자의 얘기였다. 그렇다면 잃은 양 한마리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두 말할 필요 없이 회개하는 죄인 하나이다. 빈들에 버려진 아흔 아홉마리의 양은 회개할 필요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상징하는 것이고. 우리는 이런 비유를 들을 때,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은 이미 예수를 믿어 하늘 나라에 고이 간직된 성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짐작하여, 잃은 양 한마리를 향해 전도의 열이나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의인 아흔 아홉이나, 이들을 상징하는 잃어버려지지 아니한 아흔 아홉마리 양은 하늘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고, 광야에서 목자도 없이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아흔 아홉이라는 「집단」을 형성하고 있기에, 스스로들 잃어버려진 줄도 모르고, 자기들끼리 안전하다, 평안하다고 행복해 하고 있다.

그러면 조금 전에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다고 말한 그 문제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이 비유의 전체적인 구도와 관계된 것으로, 양 한마리가 잃어버려졌다는 사실과 그 뒤에 예수의 설명 가운데 나오는,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이 상식적으로 서로 대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는 비유가 되려면, 죄인 하나가 회개한다는 의미는 양 한마리가 집을 나갔다가, 다른 양들의 권유를 받아서건 아니면 스스로의 삶에 대한 회의에 빠져서건, 제발로 걸어 들어왔다는 얘기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본문을 이해하는 것도 대충 이런 식이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불신자 한사람이 교회로 나오게 되면 흔히 잃은 양 한마리가 회개했다는 말을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게된 배경은 본문을 상식적으로 설교한 목회자들의 가르침에 있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본문에는 양이 회개했다는 말이 없다. 양은 다만 잃어버려졌을 뿐이다. 양 자신이 그 잃어버려진 상태에서 돌이키고자 하는 노력을 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설명에는 죄인 하나가 회개했다고 되어 있다. 도대체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 하고 양 한마리가 잃어버려진 것 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 말은 다음과 같이 대비된다.

잃은 양 한마리:회개한 죄인 하나 다시 세분하면 죄인 하나는 양 한마리에 대비되고 잃은은 회개한에 대비된다. 이렇게 보면 죄인 하나가 양 한마리에 대비되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별 무리가 없는데 잃은을 회개한에 대비시키는 비유는 문제가 된다. 이 비유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잃은 양 한마리를 찾는 것은 양의 소관이 아니다. 양은 다만 잃어버려졌을 뿐이고, 그것을 찾아 원래의 위치로 회복시키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목자이다. 잃은 양 한마리를 찾았다는 말은 죄인의 회개를 하나님이 받으시고 그의 죄를 사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죄인 하나가 회개했다는 말은 당연히 양 한마리가 잃어버려졌다는 말에 대응되어야 한다. 물론 하늘에서 기뻐하는 이유는 양 한마리가 잃어버려진 사실에 있지는 않다. 잃어버려진 다음에 목자에 의하여 찾아짐에 있다.

그러나 잃어버림이 없는 찾음이 있겠는가. 회개 없는 죄 사함이 없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잃어버려진 사건과 회개함의 사건은 어떻게 대응되는가 이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라는 말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 회개한다는 말은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돌이킨다는 뜻이다.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으로부터의 돌이킴이 회개이다. 그렇다면 양 한마리가 회개한 사건은 잃어버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잃어버려진 상태로의 돌이킴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잃어버려졌다가 찾은 상태로의 돌이킴을 의미하는가.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후자의 의미로 본문을 받아들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본문은 전자를 의미한다.

잃어버려지지 않은 상태 즉 백마리 속에서 살던 한마리 양이 그들의 집단으로부터 이탈하여 홀로 헤매게된 사건을 가리켜 죄인 하나가 회개했다고 비유하는 것이다.

이 죄인의 회개를 받고 안 받고는 오직 하나님의 영역이고 우리 인간들이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다. 잃어버려진 양 한마리를 찾고 안 찾고가 오직 목자의 문제였듯이. 양으로서야 자신이 목자에게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들 누구를 원망할 수 있으랴. 그러나 본문의 목자는 이 잃어버려진 양을 기어이 찾아냈고, 그 벗과 이웃들로 더불어 함께 즐거워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한마리 양이 집단으로부터 빠져나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가리켜 죄인 하나가 회개했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는다. 그 누구도 한 사람의 태어남과 죽음, 기쁨과 고통을 대신할 수 없다. 다만 옆에서 지켜볼 뿐이지, 인간은 누구나 자기 스스로의 삶을 혼자 살다 혼자 사라져 간다. 그러나 인간들은 인생을 사는 지혜로, 이렇게 혼자 사는 것의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끼리끼리 조직화하고 집단화한다.

조직이 되고 집단이 되면 조직의 원리와 집단의 윤리가 개인의 삶을 주장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고 해도 그것이 자기가 소속된 집단의 윤리를 거스르게 되면 주변의 지탄과 제재를 받게 된다. 따라서 원래 하늘로부터 받아온 개인은 사라지고 오직 조직이 원하는 개인만 남게되고 그 집단의 원리에 충실한 사람들만이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의 집단을 이끄는 사람들은 다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직을 이끌게 되고, 그러한 방향이 최고 최선의 길인양 조직원들을 가르쳐 집단의 윤리를 형성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개인의 본질은 사라지고 조직이 보는 나 혹은 주변 사람들의눈에 비쳐진 나가 본래의 나를 대신하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면 거의 예외 없이 일정기간은 순전히 「개인」으로만 살아간다.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 필요도 없고, 또 안다고 해도 그들을 염두에 두며 행동하지는 않는다. 이런 면에서 어린아이는 철저히 이기적이고 철저히 개인적이다. 자신이 불편하면 우는 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 이런 어린아이에게 다른 사람을 생각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아빠가 내일 출근해야 한다고, 밤중에 자지 않고 보채는 아이를 억지로 재울 수는 없는 법이다.

어린아이는 아빠의 내일 출근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러나 이런 어린아이도 세월이 지나면 서서히 「가족」이라는 집단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조금 더 자라면 학교라는 공동체, 교회라는 집단에 들어가 「사회성」을 배우고, 함께 더불어 사는 원리를 익힌다. 특히 농경문화의 전통에서 자란 사람들은 더욱더 집단의 원리에 충실하게 되고, 이런 집단으로부터의 이탈은 곧 그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의미하고 그것은 곧 사회적인 한 인간의 죽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당연히 무슨 일이든지 그것이 진리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고, 다만 그것이 우리 집단의 원리와 맞느냐 맞지 않느냐부터 생각하게 된다. 어떤 사실이 나에게 아무리 진리처럼 보인다고 해도 나라는 개인은 그것을 수용할 수도 없고 배척할 수도 없다. 우리 집단이 수용하지 않는 내용을 내가 수용하게 되면 그것은 곧 그 집단에서 이단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고, 그 반대의 경우 우리 조직 전체가 옳다고 수용하는 것을 내가 아니라고 배척하는 것도 동일한 결과를 초래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으로 태어나 조직의 구성원으로 생을 마감한다. 심지어는 죽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생각할까를 염려하며 눈을 편히 감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큼 조직과 집단은 개인을 말살하고 전체의 번영과 안정을 강조한다. 물론 각급학교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해라, 나라에 충성해라, 이웃을 위해 살아라는 따위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골라 표창하고 칭찬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들의 칭찬 앞에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어떻게든 그런 칭찬을 받고자 조직의 원리를 따라 열심히들 살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경우도 있겠고,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러는 경우도 있겠지만 조직의 원리나 집단의 윤리에 반하는 사람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러면 조직은 그들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가차 없이 「죄인」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들을 그 사회로부터 축출한다. 한번 이렇게 축출되고 나면 다시 그 조직으로의 복귀는 불가능하다. 아무리 개과천선한다고 해도 조직은 그를 믿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믿어준다고 말하더라도 그 속에는 항상 차별과 경계가 깔려 있기 마련이다.

누가복음 본문에 나오는 세리나 죄인은 모두 이런 사람들이다. 그들의 집단이 더이상 그들을 반겨주지 않는 사람들.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말로 외치기는 하지만, 세리나 창녀하고는 함께 식사도 해서는 안된다는 그들 집단의 윤리 때문에 더이상 집단의 일원으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사는가. 다시 「개인」으로 산다. 더이상 집단의 윤리에 매이지도 않고 조직의 진리 때문에 내가 진리로 생각하는 것을 버릴 필요가 없는 삶을 산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죄인」을 만나러 오셨다. 조직의 원리에 찌든 영혼은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을 받을 수 없다. 세상에서 충실하면 할수록 예수의 진리는 수용되지 않는다. 오직 세상적인 집단의 윤리를 떠난 사람, 그들의 원리에 매여 있지 않은 사람들만 외로운 영혼이 되어 예수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

물론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도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들도 죄인이고 그들 죄인의 집단에서 빠져나온 사람들도 죄인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점은 전자는 자신들도 죄인이면서 다른 죄인들을 차별하는 죄인이고, 후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영혼이다. 전자는 말로만 죄인이고 실제의 삶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고, 후자는 몸과 영혼이 모두 죄인인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죄인이다. 그래서 이들은 동병상린이라고, 같은 죄인을 만나면 안아주고 싶고 위로하고 싶은 영혼들이다.

그래서 조직으로부터의 이탈이 곧 「회개」가 된다. 조직 안에서 그 집단의 원리대로 사는 동안은 진정한 죄인일 수 없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면 죄인이 아닌 의인들과는 더이상 같이 살 수 없음을 안다. 이 깨달음이 자신을 그 집단으로부터 「돌이키게」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방황이 시작된다. 이 땅 위에는 자신의 거처가 없음을 알고, 지금까지 살던 집은 내 집이 아닌 줄 알아, 새로운 세계를 향한 정처 없는 나그네길을 떠나는 것, 이것이 돌이킴이며 이것이 회개이다. 이런 삶을 시작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죄인이다.

예수는 기필코 이런 영혼을 찾아내어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영혼 때문에 잔치를 베풀고 벗들과 더불어 즐거워한다.

물론 어렵고 외로운 길이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다. 우리가 잃어버려진 한마리 양이 되지 않는 한, 목자의 기쁨이 될 수도 없다. 아흔 아홉마리 양은 광야에 있으면서도 그곳이 자신들의 구원인양 즐거워한다. 거기서 같이 망할 수 없는 영혼들만 집단을 버리고 개인이 된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내 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가 나를 돕게 하소서.

잃은 양같이 내가 유리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시119:174-176) 시편 기자 정도면 충분히 안전하다, 평안하다 하며 살았을 법한데 그러나 이 시인은 시편 119편을 마치는 말로 자신이 잃은 양같이 유리한다고 노래했다. 오늘 이 땅의 기독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이 무슨 자랑인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유리방황하는 영혼들의 노래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노래는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

신앙 생활은 언제나 시작이고 언제나 마침이다. 그래서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죽는다. 개인이 자라 집단이 되고 집단에서 빠져나와 다시 개인이 된다. 그러면 인생이 끝나는가. 이렇게 목자에 의해 찾아진 죄인은 이제 신앙생활이 끝났는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다시 개인이 된 영혼은개인으로서의 삶을 또 살아간다. 그 다음엔 무엇이 오는가. 또 다시 조직이 온다. 그러나 이 조직은 조직이면서도 개인의 삶을 주장(主掌)하거나 말살하지 않는 조직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몸과 같은 유기체이다. 그 어느 개인도 이타(利他)한다고 말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서로를 위하고, 모두다 이기적으로 살지만 그 이기가 결과적으로는 전체를 위하는 그런 조직의 삶으로 나아간다. 이런 조직을 이름하여 성경은 「교회」라 한다.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우리는 그 몸의 지체인 상태.

그러므로 몸과 손은 따로따로가 아니고 하나이다. 이기가 곧 이타이고 이타가 곧 이기가 되는 모습이 이루어진다. 머리의 기쁨이 발의 기쁨이고, 손의 고통이 온 몸의 고통이 되는 꿈과 같은 세계가, 잃어버려진 한마리 양 앞에 전개될 세계이다.

물론 목자에 의해 찾아진 다음의 얘기이긴 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이러한 조직이나 체제의 수호자들이다.

이들의 눈에는 예수도 자기네 조직을 공고히 하고 그 체제를 잘 유지 발전시켜줄 인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예수가 어디 바리새인들의 체제 속에 수용될 어른이신가. 그러니 그들은 예수를 원망하게 되고 결국은 죽이게 된다.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자기네 체제 속에 수용되지 못하는 메시야를 받은 이천년 전의 유대 땅은 그 메시야를 죽이는 것으로 끝났는데, 과연 재림하시는 메시야는 오늘 이 땅의 체제 안에 수용되실까 수용되지 않더라도 오늘 이 땅의 기독교는 메시야를 죽이지 않고 그의 말씀 앞에 자신들의 원리와 윤리를 고쳐나갈까 회개할 필요가 없는 아흔 아홉마리 양들을 향해 예수가 무엇을 할 수 있으랴. 또 그들 양들에게 목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이리도 답답한 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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