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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음, 무덤 부활 (요 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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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구주 예수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부활 때문에 살맛이 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불확실합니다. 고정되어 있는 것,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 니다. 모든 것이 변화의 과정 속에 있습니다. 우리의 소유는 물론, 우리의 존재가 내일에는 어떻게 될지 불확실합니다. 내일에 있을 우리의 운명을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 죽음만은 확실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 다는 사실, 언젠가는 확실하게 죽는다는 사실, 누구도 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 이것 만큼은 누구의 힘으로도 변경할 수 없다는 이 사실 만큼은 너무나 확 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인류는 다 죽었습니다. 제왕도 죽었고 영웅 호걸도 죽었으 며 절세의 미녀들도 다 죽었습니다. 철학자 헤겔의 말대로 어쩌면 인간은 죽기 위해 태어났 고 죽기 위해 살고 있으며 죽음의 종착역으로 달려가고 있는 존재처럼만 보여집니다.

이 세상에 죽음같이 평등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법이 인간의 평등을 위해 존재한다 할지라도 사실상 이 세상에 진짜 평등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죽음만이 모든 인간을 평 등하게 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왕이라고 봐주지 않습니다. 5대 독자, 7대 독자라고 봐주는 법이 없습니다.

새색시라고 봐주지 않고 새신랑이라도 봐주는 일이 없으며 어린아이라고 그냥 넘어가지 않 습니다.

이 죽음은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만일에 사람이 그 죽음을 경험할 때 그는 더 이 상 이 세상에 생존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관계를 끊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 이웃으로부터 영원히 나를 단절시켜 버리고 이 세상에 더 이상 생존자가 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따라서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결부되게 되면 유쾌하였다가도 심각해지고 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인생이 자기의 죽음을 생각할 때 즐겁겠습니까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다스렸던 알렉산더 대제도 자기의 죽음을 생각하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하루는 원정 중에 있던 알렉산더 대제는 병사들을 모아놓고 씨름판을 벌렸습니다. 한 병사 가 씨름판의 장수들을 하나둘씩 다 넘어 뜨렸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그와 맞수가 되어 싸울 려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알렉산더 대제가 그 병사와 맞수가 되어 씨름을 하였습니다. 모든 시선이 대왕의 거 동으로 집중되었습니다. 모든 병사들은 숨을 죽이고 씨름을 지켜봤습니다.

하지만 이번마저도 대왕이 벌떡 모래판에 나가 떨어져 버렸습니다. 모두가 깜짝 놀라 대왕 을 지켜보았습니다. 대왕은 모래밭에 누운 채로 눈을 감고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대왕의 눈 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대왕을 넘어뜨린 병사는 초죽음, 죄 인의 모습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느 곳이든지 정복하러 가는 곳마다 패전을 알지 못했던 대왕, 전 세계를 다 제패하고 정 복했던 대 제국의 알렉산더 대제가 씨름에 졌다고 울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대왕은 한참만에 일어나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씨름에 져서 운 것이 아니라 나의 죽음을 생각하며 슬피 울었노라.

대왕은 모래판에 넘어지는 순간 자기의 죽음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는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후 그는 자기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의 절대권력만큼이나 비례해서 그에게 죽음은 서글픈 사건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지 얼마후 그는 마침내 죽음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이 죽음을 피해 보려 고 안간힘을 써보고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그는 저 죽음의 모래판에 인정 사정없이 내동댕이 쳐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 알렉산더 대제의 심정은 우리에게도 다 있습니다. 우리의 죽음을 생각하면 즐거워할 사 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이 죽는 것을 생각하면 기쁨이 충만 합니까 ex) 나의 죽음-싸늘한 시체를 냉동실에 보관한 후 입관, 발인 ⇒ 차디찬 땅속에 파묻거나 화장터에서 태워진다고 생각해 봅시다. 기분이 좋습니까 아무리 자식들이 울어주고 형제들 이 울어준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끝났는데요.

이런 걸 생각하면 인생이 너무나 허무합니다. 정말 인생은 안개와 같고 이슬 같으며 날아다 니는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생각하면 공연히 서글퍼지고 마음속으로 울 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죽음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 죽음이라는 불청객이 인류에게 찾아오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죄 때문이 었습니다. 죄는 죽음의 법칙을 인류에 도입시켰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죽음의 법칙아래 놓여 있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법칙아래 사는 인간에게는 누구나 죄라고 하는 독묻은 화살이 날아옵니다. 언젠가 이 독화살을 맞고 누구나 다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땅위의 모든 인생은 이 죽음의 무기인 죄의 화살 앞에 백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죽음이란 온 인류의 숙적이요 원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 는 죽음과 싸우는 역사였습니다. 인류는 이 죽음을 이겨보려고, 이 죽음이 법칙을 깨뜨려 보 려고 온갖 몸부림을 다 쳐보았습니다.

ex) 진시황제:불로초, 한무제:승로반의 이슬, 그러나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효험이 없었 습니다.

결국 인간은 죽음의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인류역사에 발달 된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무덤(분묘) 문화인 것입니다.

애굽의 피라밋을 가본 사람은 와-하고 입을 벌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5000년전 에 만든 쿠프왕의 피라밋은 높이가 160 m나 됩니다. 길이가 230m입니다.

돌 하나 하나가 평균

2.5톤이나 되며 큰 것은 19-21톤이나 되는 것도 있습니다. 이 돌을 어 떻게 깎고 어떻게 옮겨다가 무덤을 쌓았는지, 그리고 어떤 공법으로 쌓았는지 현대 건축학 도 감탄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무덤을 하나 만들기 위해 10만명의 노예가 20년에 걸쳐 만들었다 하니 얼마나 무덤에 신경을 썼다는 증거입니까 불로초를 구하려 했던 진시황제 역시 그것이 헛된 일인줄 알고 얼마나 무덤 만들기에 치중 을 했습니까 그의 평생 39년간이나 만들었던 무덤! 그 무덤이 중국 서안 근교에서 발견이 되어 저도 가 보았는데요, 정말 세계의 관광대상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도 경주의 천마총에 가보면 얼마나 무덤이 화려합니까 감포, 대본 앞 바다에 있 는 문무왕의 해중왕릉 역시 얼마나 무덤을 만드는데 신경을 썼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왜 이렇게 사람들은 무덤에 신경을 써왔습니까 거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무덤 속에 영원히 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곳을 사후에 생활공간으로 믿었기 때 문입니다. 그러니까 무덤에 애착+신경을 안 쓸 수가 없습니다.

이집트 같은 곳에선 왕이 등극하자마자 무덤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자기 재위기간에 수십년 동안 무덤을 만듭니다. 그리고 자기가 죽으면 모든 유품을 무덤 속에 넣어 줍니다. 또한 자 기를 모셨던 신하들도 무덤(피라미드)속으로 데려갑니다. 그곳에서 영원히 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ex) 황금관:115km의 순금.

그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묘자리를 보는데 신경을 쓰고 무덤을 잘 만듬.

그곳에서 영원히 산다고 생각을 하니까 명당자리를 잡느라 난리입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피라미드 안에는 시체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몇백년된 무덤을 파보면 뼛가루 하나도 안보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살긴 뭘 산단 말입니까 요즘도 돈 있는 사람들은 무덤을 화려하고 건사하게 꾸미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 해 보십시오. 우리 인간이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면 꾸밀수록 그것은 무엇을 자랑하게 됩니 까 그것은 우리 인생의 죽음을 자랑하는 것이 되고 죽음을 과시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 무리 피라미드의 무덤이 웅장하고 진시황제의 무덤이 화려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류의 원 수인 죽음의 웅장함과 화려함만을 자랑하는 결론밖에 안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은희씨의 무덤이란 시가 충분히 이런 것을 공감해 줍니다.

무덤! 그것은 못 견디게 우리에게 슬픈 곳이 아닌가 서른 해를 이냥 살다 흙으로 돌아가고 이른 해를 살다가도 흙으로 돌아가고, 백년 뒤 천년 뒤 혹은 만년 뒤에 사람들...

오고 오는 사람들도 흙으로 돌아가고. 이대로의 우리 육신, 못 견디게 가슴마다 타는 것을 지닌 채 초롱대던 두눈들을 억지로 감고, 아으 땅속으로 묻혀가긴 설운일이 아닌가 확실히 죽음은 만인의 원수였습니다. 그것은 고대인의 원수였고 현대인의 원수였습니다. 헬 라인의 원수이기도 했고 유대인의 원수이기도 했습니다. 남자의 원수였으며 여자의 원수였 습니다. 동양의 원수요 서양의 원수였습니다. 백발노인의 원수였으며 꽃피어난 동년의 원수 이기도 했습니다.

이 원수 앞에 모든 인생은 약자가 되고 비굴 자가 되고 절망자가 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제 홀로 휘어잡고 날뛰던 세기의 영웅들도 죽음 앞에서는 철저히 백기를 든 비굴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누구나 죄의 쏘는 화살, 죽음의 화살을 당해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죽음은 만인이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만인이 죽음을 독사처럼 사자처럼 겁을 냅니다. 너도 나도 그 공포 앞에 두려워떱니다. 왜, 무엇 때문입니까 죄가 우리를 죽음의 화살로 쏘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저주스런 죽음의 법칙을 깨뜨리시고 영원한 생명의 주 로 부활하셨습니다. 물론 나사렛 예수도 죽음의 독화살을 맞았습니다. 아니 가장 비참한 죽 음, 가장 저주스런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이 어찌나 비참하고 치욕적이었든지 그가 죽었을 때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다 낙망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란 분도 역시 죽음으로 그의 삶이 끝장나 버렸다고 낙망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안식후 첫날 새벽 마침내 그의 무덤문이 열리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죽음의 법칙을 깨 뜨리고 일어나셨습니다. 영원한 사망권세를 박살내시고 영원한 새생명의 주로 부활하셨습니 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천사들의 부활절 칸타타와 함께 주님은 마침내 무덤 문을 여시고 부활의 주로 나오신 것입 니다. 저 위대한 하늘의 노랫소리와 함께 예수님은 승리의 흰옷을 입고 영광의 부활주로 일 어나신 것입니다.

바로 이 영광의 주님께서는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기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도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과연 그 분은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이셨습니다.

바야흐로 이 지구촌의 역사를 180도로 뒤바꾸는 새로운 역사의 변혁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 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이 만연한 이 세상에 죽음의 법칙을 영원히 내몰아 버리시고 영원한 새생명의 법칙을 도입하셨기 때문입니다. ⇒ 예수 부활이 내 부활, 예수님의 승리가 나의 승리가 되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사망이 왕노릇 할 수 없게 되었습니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느 때에나 생명이 주인일 뿐이고 새생명의 법칙이 왕노릇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는 사람이 죽기 위해 살고 죽음으로 달려가는 존재가 아니라 부활을 위해 살 고 부활의 영생을 향하여 달려가는 인생으로 변화되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죽음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의 법칙아래 있지 않습니다. 이 제는 죽음이란 우리에게 영광스런 부활을 위해 존재하는 것뿐이고 그 영광을 맛보기 위한 수준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제 죽음은 더 이상 우리의 원수가 아닙니다. 절대로 우리의 원수일수가 없습니다. 이미 게 임은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러면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1) 우리의 부활을 확신하며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활을 확실하게 믿으면 아멘 합시다.

주님의 부활, 나의 부활을 생각하면 왜 그렇게 영생의 확신이 생기는지요. 왜 그렇게 부활의 소망으로 가득 차는지요 ⇒ 살맛이 나고 신바람이 생김. 무덤을 봐도 소망이 생기고 장의 차를 봐도 소망이 생깁니다.

우리의 소원은 부활...

부활의 소망이 가득할 때는 솔직히 말해서 빨리 죽고 싶음. 영생의 소망이 가득할 때는 빨 리 천국을 가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욕망과 소망으로 가득했습니다.(빌1:22-23) 오늘 우리도 이런 확신, 소망이 충만할 수 있길 바랍니다.

2) 죽음을 향해 호령하는 용기를 소유해야 합니다.

자기의 부활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이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죽음을 향하여 호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의 권세를 향하여 우리도 사도 바울처 럼 껄껄껄 웃으며 책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 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이것은 바울의 외침입니다. 실로 놀랍고 엄청난 용사의 개가가 아닙니까 그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호령할 수 있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바울처럼 죽음을 향하여 호령 하고 사망권세를 향해 호통을 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요 부활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3) 부활의 축복을 현세에서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의 축복은 천국에서만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킨 성령, 앞으로 우리를 부활시킨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 ⇒부활세계의 축복이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습니 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인도하시고 기뻐하시는 새법, 새 질서대로만 산다면 우리는 이 세 상에서도 부활세계의 축복을 맛보고 누리며 살 수 있음. ⇒ 말씀과 성령에 순종, 충성하는 삶을 살면 그렇게 행복하고 살맛나고 신바람이 날수가 없음. 성령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 면...

얼마나 신앙생활이 달콤한지 알 수가 없음. 그런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4)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치욕적으로 죽었을 때 모든 제자는 다 도망+뿔뿔이 흩어져 버림.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오순절 성령을 충만히 받았을 때 그들은 가슴이 뛰었음. 그래서 문을 박차고 나가 부활의 증인이 되었음.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다고, 너희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다고 거 리를 다니며 외쳤습니다. 그러다가 대제사장과 이스라엘 공회에 잡혔음 ⇒ 입다물도록 다짐 을 받자.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며 끝까지 전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ex)가락동 살 때:늘 거리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갑자기 왔습니다. 오이가 왔습니 다. 다마내기가 왔습니다. 창문에 모기 장 치세요. 흑백 TV삽니다. 헌 냉장고 삽니다. 우 산 고쳐 드립니다. 세탁, 세탁 전혀 부끄러움 없이, 아주 당당하고 떳떳하게 합니다.

왜 먹고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 이런 사람들에게 도전을 받고 부지런히 전도하러 다 녔습니다.

그런데 분당신도시에 와서는 도대체 이런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에 대한 도전을 많이 못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증인이 되어야 함. 천국과 지옥을 확실히 믿 는다면,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을 확실히 믿는다면 부지런히 부활의 복음을 전하며 살 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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