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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함에 있어 자기를 낮추는 문제 (눅 1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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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호에서 자신에 대한 철저한 절망만이 거듭남에의 묘약이라는 얘기를 했었다. 기독교는 이렇게 자신에 대하여 실망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자신이 안식일을 지키고 구제를 베풀고 기도를 하고 선한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영원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절망에 이른 사람들만이 기독교인이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자신의 어떠함으로 자랑하지 않는다.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주의 어떠하심(고전1:32)을 자랑할 뿐이다.

이런 사람들이 영원의 잔치, 하늘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도 그냥 친구따라 강남가듯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의미와 이유를 모른채 와서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그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그들의 의도와 계획대로 잔치판을 짜나간다는 점이다. 물론 이들은 자신에 대하여 절망했기 때문에 온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신뢰하고, 하면 된다 는 신념에 투철한 사람들이다.

적극적 사고방식은 이네들의 전매특허이고 성령충만을 받는답시고 마인드 콘트롤류의 방법들이 동원된다. 이루기는 자기들이 이루어 놓고 그래도 말로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루어 주셨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되니까. 그러므로 이들이 사는 동네엘 잠깐 들어가 보면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 일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 일 자랑이란 것이 한겹만 뒤집어 보면 자기가 이룬 자기자랑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당연히 얼마나 자기를 신뢰하는가가 이네들의 서열기준이다. 자기신뢰 지수가 곧 하나님 신뢰지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 무엇인가를 이루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자기 아래로 보게 되어 무시하고 주장하게 된다. 이들에게 있어 성경말씀은 오직 자기들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보조재료일 뿐, 그것으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지는 않는다.

사도 바울이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한다(딤후3:1-2)고 아무리 외치더라도 그건 쇠귀에 경읽기 밖에 되지 않는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을 겨우 이기심을 버리라는 정도의 뜻으로 이해한다. 돈을 사랑한다는 말도 돈 벌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괜찮은 것인 줄 안다. 그러나 이것이 착각이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을 현대식 용어로 풀어 설명하면 그것이 곧 적극적 사고방식이요, 하면 된다는 자기 암시와 신념이다. 돈을 사랑한다는 경계도 돈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말이다.

그래서 이들이 사는 세계에는 끊임없이 서열이 매겨지고 낮은데 사는 사람은 높은 곳으로 올라 가려고 애를 쓰고, 높은데 사는 사람은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런 행태는 예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누가복음 본문을 보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혼주로부터 청함을 받았다는 것은 참으로 기분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한가지 유념해야 할 사실은 자신이 그 잔치의 주인공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그 잔치를 축하하고 빛내는데 그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 잔치자리에 왜 오게 되었는지를 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주연인지 조연인지를 모르고 나서야 할 자리인지 침묵해야 할 자리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이러면 꼴불견이 되기 십상이다.

연기자는 연기로 평가받는 것이지 극중의 배역에 따라 평가 받지 않는다.

기독교인도 역시 그들의 삶으로 평가받는 것이지 목사냐 장로냐에 따라 자리가 나뉘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대의 고금이나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그의 삶 보다는 직책을, 내용 보다는 껍데기를 선호해 왔다.

혼인 잔치에는 의당 신랑 신부가 주연이어야 한다. 그들이 가장 높아야 하고 그들을 위한 모임이고 자리여야 한다. 그러나 이 자리에 객이 상좌를 택하고 나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사회적 신분으로야 그가 충분히 상좌에 오를 수 있겠지만 혼인 잔치 자리에서는 그럴 수 없는 법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집회들이 흔히 이러한 혼인 잔치에 비유되고, 신자들은 이 잔치에 불신자를 초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한다. 이 경우 혼주는 누구인가 신랑은 누구이고 신부는 누가 되는가 하나님이 혼주인가 아니면 그 집회를 주관하는 대회장 목사님이 혼주인가 그러면 먼저 믿고 있는 신자들은 그 잔치에 하객으로 청함을 받은 사람들인가 아니면 그들이 곧 신랑이나 신부인가 그리고 그 자리에 이끌려 나온 불신자들은 또 무슨 역할인가 이 비유는 물론 이런 구도로만 생각할 그림은 아니다. 그러나 혼인 잔치의 비유를, 신랑된 그리스도와 신부된 우리의 하나됨이라는 문제로 설정해 본다면, 이 그림도 그렇게 빗나간 구도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어찌 되었든 이상과 같은 그림이라면 혼주는 당연히 하나님일 것이고 신랑은 그리스도, 신부는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러면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들 즉 목사나 장로나 신자들은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이들이 곧 그 혼인잔치에 하객으로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혼주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신랑일 수도 없으며 신부이기에도 어색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다 스스로 그리스도와 이미 연합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렇다면 남은 역할은 단 하나, 하객으로 초청된 사람일 뿐이다.

그러고 보면 이 그림은 어쩌면 그렇게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지. 사실 오늘날 교회엔 하나님 자리에는 목사님이, 그리스도의 자리에는 장로님이, 그리고 성령의 자리엔 신자들이 들어가 사는지 이미 오래되었다.

신랑되신 그리스도의 혼인 잔치 자리에 하객으로 온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를 가로채 가는 이 웃지 못할 희극이여! 도대체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얼마나 높아져야 그 자리에 만족하고 그들의 욕심을 털어낼 수 있을 것인지. 참으로 암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러 교단이 연합하여 모이는 집회에서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설교를 맡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기도, 성경봉독, 헌금기도, 축도 등을 나누어 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것이 물론 함께 사역하는 지체의 입장에서, 서로를 생각한 결과 나온 것이라면 아름다울 수도 있는 문제겠지만, 대부분은 교단의 세력에 따라 나누어 맡는,다시말하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자리가 결정되는 일이 가이사가 다스리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문제인 것이다.

신자들도 자기 교회 목사님이 그런 자리에 이름깨나 끼어 있어야 어깨를 펴고 사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다 보니까 교회에서 장로가 되기 위하여는 투표를 해야 하고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왜 장로라는 높은() 자리에 가기 위하여 투표라는 절차가 필요한가 예수님이 열두 사도를 뽑을 때 신자들을 모아 놓고 투표하여 선출했던가 바울이사도가 된 것이 인간들의 손에 의하여 제비 뽑혀 되었는가 이런 면에서 가룟 유다의 자리를 열한사도가 제비뽑아 맛디아로 결정한 것은 여러각도에서 다시 평가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도대체 교회라는 곳에서 자리 다툼이 벌어진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는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하여 절망한 다음에 온 사람들이 아니라는 반증이요, 둘째는 따라서 소위 교회라는 그곳이 교회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스스로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아직도 가치있고 따라서 어느 정도의 자리는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세상에서는 의미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교회에 나가 말석에 앉을 수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헛것이다. 신앙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식이 선행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경쟁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만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를 높은 자리 영광의 자리에 앉히고자 함이 아니다.

이런 양태는 목사나 장로들 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신자들의 의식 깊숙이에 자리잡고 있다. 인간 세상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도 박사나 고위층이 하나님을 믿고 자기 교회에 나오게 되면 그것으로 자기네 교회의 지위가 올라가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고는 아주 자랑스레 이렇게 말한다.

우리 교회에는 박사들도 많고 정부의 고위층도 상당수나 된다. 이렇게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데 만일 하나님이 없다면 이들이 모두 바보란 말인가 그래서 교회에서 하나님은 밀려나고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주지 않으면 오히려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서 제발 좀 나와 주십사고 비는 시대가 된 것이다. 당연히 목사들은 신자들의 비위나 맞추고 아첨을 일삼기 마련이다. 사도 바울이 이같이 될 것을 얼마나 정확히 꿰뚫었던가.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롬16:18) 그러나 바울 자신은 어떠했던가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살전2:5)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이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사람들이 기뻐하는 메시지를 증거하고 있으니까 신자들은 높아질대로 높아져서 자랑스레 하는 말.

내가 죽으면 이렇게 많은 하나님의 일을 누가 하겠는가. 내가 죽는 것은 하나님이 손해보는 일인데 하나님이 그렇게 손해보실 양반인가.

농담같은 얘기지만 믿음 좋은 신자들에게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얘기이다.

그리고 언중유골이라고 이것이 그들의 진심이요, 그만큼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높아져 있다는 반증이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낮추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셨다. 그러나 우리의 본질적인 속성은 끊임없이 높아지고자 한다.

비록 성경 말씀을 믿어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도, 그 마음 속에 높아지기 위한 마음에 스스로를 낮춘다면 이것은 오히려 더 악하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를 높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성경을 들이대며 좀 겸손하라고 삿대질 한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이 글 자체,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을 향한 요구의 말일 수 없다. 오직 자신을 향한 발언이며, 자신의 삶을 점검하는 기준이어야 한다. 마치 오늘날 천주교가 전개하고 있는 내 탓이요 운동이 상대방을 향한 네 탓이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수 있듯이, 우리는 스스로에게 철저하고 스스로에게 합리적이어야 한다. 내 탓이요 같은 것은 운동으로 할 일이 아니다. 이것이 운동이 되면 그 말이 의미하는 내용과는 정반대의 흐름으로 치달을 수 있다.

기독교가 국교화되고 대중에게 합리적인 세상의 원리가 되면서 부터 기독교의 의미는 사라지고 그 껍질만 남게된 것과 같다. 성경은 오직 나에게만, 세상에 단하나 뿐인 나에게만 얘기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를 낮출 수 있는가에 있다. 그것은 오직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체면을 생각하여 할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자기를 낮추는 것이 될지 모르지만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다. 성경에서 자기를 낮추는 기준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어린아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18:5) 자기를 낮추는 유일한 길은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어른이 된 우리가 어떻게 어린아이의 삶을 살 수 있으며, 또 그 어린아이의 삶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실제로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관찰해 보면 이들은 자신을 낮추지 않는다. 겸손을 아는 어른들이나 자기를 낮추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지, 어린아이들은 자기를 낮춘다는 말의 의미도 모르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어찌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라고 하셨는가 어린아이는 지혜에 있어서나 윤리 도덕적인 선악의 문제에 있어서나 모두 미숙한 상태이다.

그러나 바울의 말대로 우리는 지혜에 있어 어린아이가 되면 안된다.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어린아이의 의미는 선악의 영역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린아이처럼 낮출 수 있는 길도, 선악을 모르고 자기 좋은 대로만,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만 살아가는 어린아이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안델센의 동화 벌거숭이 임금님에 나오는 한 어린아이야 말로 자기를 낮추는 삶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신하와 어른들이, 그리고 심지어 왕 자신까지도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관계나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서 표현을 삼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 어린아이가 벌거숭이 임금님이라고 외친다. 벌거숭이 임금님!! 그러면 이 동화에서 자기를 낮춘 사람은 누구이고 자기를 높인 사람은 누구인가 겸손한 사람은 누구이고 교만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 어린아이는 겸손도, 자기를 낮추는 것도,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고, 왕이나 신하나 어른들은, 사람이 겸손해야 한다는 윤리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 어린아이는 교만했고, 어른들은 겸손했다. 어린아이는 인간세상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원리를 제대로 모르는, 무식하거나 아니면 저혼자 잘난 사람일 것이다.

어른들이나 신하들이라고 왕이 벌거벗었다는 객관적 사실을 보지 못해서 벌거숭이 임금님이라고 외치지 않았겠는가 그들도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란 자기가 아는 사실이라고 함부로 떠들 수는 없는 곳이다. 알고도 모르는 체, 모르면서도 아는 체 해야만 겸손한 사람이며 대우받는 사람이 된다. 신하들이 함구한 것은, 한걸음 더 나아가 임금님의 옷이 부드러우니 어쩌니 칭찬한 것은, 임금 앞에 잘보이고자 하는 계산도 물론 있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임금의 입장을 생각하는 배려에서였다.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할 줄 알아야 겸손한,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이런 배려를 알지 못한다. 옷을 입었으면 입은 것이고 벗었으면 벗은 것이지, 그 대상과 자기와의 관계 때문에 객관적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사람이 어린아이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어린아이의 벌거숭이 임금님이라는 외침은 그 사회조직 구성원들에게 충격이 될 것이고, 그 충격은 다시 어린아이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게 된다.

야 이녀석아 그걸 누가 모르냐 누가 너만 못해서 임금님이 벗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 줄 아냐 잘났어 정말, 그러니까 애지. 부모가 누군지 가정교육이 잘 돼 있어야 한다구.

결과적으로 어린아이는, 벌거벗은 사람을 벌거벗었다고 말했다는 한가지 사실 때문에 교만한 사람, 자기만 잘난 사람이 되고 만다. 이것이 자기를 낮추는 삶의 요체이다. 실상을 실상으로 볼 수 있는 눈과 자기가 본대로 가감없이 외칠 수 있는 입. 이것이 있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

예수의 공생애는 이러한 낮아짐으로 일관해 있다. 니고데모라는 당대의 거물 바리새인에게도 너는 죽어있다. 너는 거듭나야 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회의 지식층인 서기관들을 향하여 독사의 새끼라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퍼붓고 화 있을진저라고 저주했다는 사실. 우리는 예수의 이러한 면을 먼저 알아야 한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잘못 믿고 있기로서니 독사의 새끼나 화 있을진저 같은 극언을 퍼부을 수 있는 문제인가 신앙생활이라는 포장 속에 감추어진 사탄의 역사를 볼 수 있어야만, 아름다운 인간 인격적인 인간을 향하여 너희는 마귀의 자식(요8:44)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교만한() 지적을 하는 것이, 그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이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쌓아온 바벨탑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바벨탑에 기여한 나의 몫을 깨달아야 한다. 나로서는 하나님을 믿을 수도 섬길 수도 없는 존재라는 것도 보아야 한다. 우리는 마치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을 멀리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인 줄 알고 있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나의 의를 신앙이라고 고집할 때, 그것 자체가 바벨탑이요, 하나님의 자리에 대한 도전이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창11:4) 그러나 인간들은 자기들이 대와 성을 만들어 놓고도, 하는 말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도록 도와주셨다고 떠벌인다. 오늘날 과연 기독교라는 커다란 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는가 아니면 인간들의 이름이 드러나고 있는가 기독교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가운데서 모욕을 당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성과 대를 쌓는 일을 중지하고 오히려 그동안 쌓아온 우리의 삶을 허물어야 한다. 우리의 이름, 인간의 이름이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하늘에 닿아 있는 모든 삶의 찌꺼기들을 털어내야 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태어날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린아이는 일하지 않고 섬기지 않는다. 이 삶을 철저히 살아내지 못하면 즉 철저히 낮아지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그야말로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일 뿐이다.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게 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눅14:10) 영광이라는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내려앉자. 나를 버리면 나를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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