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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 (눅 16: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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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마감하는 주님의 말씀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은 우리더러 재물을 가지고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지 말고 하나님의 일에도 좀 보태라는 얘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일에 보탤만한 재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때까지의 삶이 하나님을 섬긴 삶이 아니라 재물을 섬긴 삶이라는 반증일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의 재물이 필요해서가 아니며 우리의 도움이 필요해서도 아니다. 다만 없어지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것이 되지도 않을 재물같은 것에 인생을허비하고 있는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일주일에 엿새는 재물을 섬기느라 분주하다가 주일이 되면 하나님을 섬기러 교회로 간다. 이러니 과연 이들이 더 중히 여기는 것은 무엇이며 더 경히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섬김이란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다. 집의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은 그의 몸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지, 그의 생각이 양쪽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생각으로 하자면야 두 주인이면 어떻고 백 주인이면 어떤가. 그러나 주인을 섬기는 하인은 언제나 그 몸이 주인 앞에 있어야 하는 것이고, 따라서 두 주인을 섬긴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이건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개선할 수 있는 일도 아니며, 이쪽 저쪽 눈치보며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를 할 일도 아니다. 그냥 안 되는 일이며 이쪽이든 저쪽이든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소위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사람들이 과연 매일의 삶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즉 그의 하루하루가 재물 앞에서 얼쩡거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의 말씀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삶인가 하는 말이다.

이건 아직도 의의 문제에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며,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연합하므로 이전의 내가 죽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잃어버려진 한 마리 양이 바로 자기였으며, 아버지 품을 떠나 허랑방탕한 삶을 산 사람이 바로 자기였다는 깨달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정말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라는 찬송이 제격인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며, 이제부터는 정말 주님만 섬기며 주님만 바라보며 살겠다는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그 다음에 하는 일은 열에 아홉이 주의 일에 충성하고 봉사하러 나선다는 점이다. 그것도 세상에서의 자기 일을 여전히 가지고서 말이다. 아니면 자기가 받은 바 은혜를 세상에 증거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삶을 산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돌아온 탕자의 삶은 자기같은 죄인도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크고도 넓은 사랑을 온 세상에 전하는 일이 아니며, 또한 이전에 자기가 허랑방탕으로 날려버렸던 그 재물을 채워놓겠다는 뜻으로 육신적인 일에 성실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이런 삶은 아직도 인과응보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아버지 앞에서 구겨진 자신의 자존심을 다시한번 펴 보이겠다는 욕심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점이 어렵다. 신앙이란 선악적인 인간의 평면적인 개선이 아니다. 즉 보다 악한 인간을 상대적으로 보다 선한 인간으로 개조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교회는 교도소가 아니다. 흔히들 교회는 죄인이 모이는 곳이므로 이런 저런 지저분한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성경을 크게 오해한 것이다. 신앙은 선과 악을 동시에 초월하는 것이며 따라서 교회는 죄니 지저분함이니 하는 말의 개념조차 사라진 곳이다. 그렇다고 인간 세상의 불법같은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이전에는 죄로 보이던 일들이 이제는 하나의 거룩함으로 보이고, 이전에는 불법으로밖에 보이지 않던 일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긍휼로 보인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연합하여 죽고 부활했다는 신자들조차도 대부분은 신앙을 다시금 율법의 차원으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한국에서 유명하다는 목사들 거의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되지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인이 되었다면 그때부터는 정말 율법을 온전히 지키기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은 제아무리 항우 장사라도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연합하여 죽고 부활한 사람도 할 수 없는 일이고, 아니면 교회도 나오지 않고 예수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조차 없는 사람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원하심은 우리가 다시금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율법은 사람을 온전케 하지 못하며 또한 율법은 「세례 요한」까지라고 곳곳에서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율법을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금 율법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재물」의 세계를 벗어나지 아니하고 재물의 능력을 너무 무시하여, 자신이 비록 재물의 세계에 발을 딛고 살더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변함이 없으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아가서는 오히려 그 재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덤벼들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씨 뿌리는 비유에 나오는 세번째 밭, 즉 가시떨기에 뿌리운 자로서, 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이다.

물질적인 세계가 하나의 하드웨어라면 율법은 이 나타난 세계를 움직이는 일종의 운영 체계(OS)같은 소프트웨어이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컴퓨터라도 그것을 구동시켜 주는 운영 프로그램이 없다면 그것은 고철이나 다름없듯이, 이 나타난 세계 역시 너무나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인간이 그 속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나타난 세계의 질서를 유지할 운영 체계같은 것이 없다면 세상은 그저 아비규환의 지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율법은 바로 이런 운영 체계이다.

그러나 율법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을 위한 소프트웨어이지, 이 세상에서 살지만 이 세상을 그저 이방인과 나그네처럼 지내는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소프트웨어 없는 하드웨어도 무용지물이지만 하드웨어 없는 소프트웨어 역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율법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참으로 버린사람은 세상이라는 하드웨어 역시 버릴 수밖에 없는데, 이걸 제대로 못하기에 어제 쓰레기통에 처박았던 율법을 오늘 다시 꺼내다가 먼지를 닦고 광을 내는 것이다.

이 세상을 이방인이나 나그네처럼 사는 사람은 절대로 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 땅을 소유하고 이 땅의 일원이 될 일이 없는데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이 무엇에 소용되겠으며, 도무지 이 땅에서만 사는 사람들이 안타까워 견디지 못하는 사람인데 살인하지 말라는 말 또한 어디에 소용되겠는가.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 누구보다 더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삶이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살지 않고 마치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사람은 다시금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재물이 곧 자기 것이니까 탐내지 말라느니 도둑질하지 말라느니를 외우는 것이며, 그러니까 이 세상 재물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기 소유를 베푼 것을 가지고 구제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대로 재물이라는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제대로 이해하고 넘어온 사람이라면 이제 더이상 율법이라는 소프트웨어를 통하여 재물을 읽지 않는다. 율법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틀림없이 구제일 것도 그러나 은혜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남의 것을 남에게 돌리는 지극히 당연한 일일 뿐이다. 이처럼 드러난 사건은 동일하더라도 그 사건을 읽어내는 소프트웨어가 다르면 전혀 딴판의 얘기가 되는 것이다. 남의 것을 남에게 돌려준 것을 가지고 구제했다고 생색내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가 좀 모자라거나 아니면 좀 남거나 하는 사람일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도 율법의 차원에 머물러 구제하고 봉사하여 자신들의 의를 쌓기에 여념이 없는 것은 그들이 이 나타난 세계를 지나가는 것으로 보지 아니하고 따라서 자신들이 이 나타난 세계에서 영원히 살 것같은 착각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재물은 이럴 때 사람들의 주인이 된다. 사실 하나님의 창조의 원칙은 사람이 재물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었는데, 아담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다음부터는 재물이 오히려 사람의 주인으로 서게 되었다. 그러자 복의 개념도 재물의 세계로 전락하고 의의 개념도 나타난 세계에서의 일로 바뀌어버렸다. 물질적인 토대가 인간의 정신적인 세계까지지배한다는 맑스나 레닌의 유물사관도 사실은 인간이 재물을 주인으로 모신 다음부터의 진리이다. 생산 수단을 사유로 하느냐(자본주의) 아니면 공유로 하느냐(공산주의) 하는 싸움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생산의 대상 즉 무엇을 생산하느냐에 있다. 그 생산의 대상이 육신의 떡이며 옷이며 집인 이상 그 생산 수단을 누가 가지느냐 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며 또 누가 가지더래도 문제는 끊임이 없다.

흔히들 공산주의는 유물론이라고 비판하지만 정작 서방세계의 경제적인 틀인 자본주의를 유물론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는 드문 편인데, 사실은 공산주의보다 더 지독하고 더 교묘한 유물론이 자본주의이다. 공산주의에 대하여는 유물론이라고 타기의 목소리를 높이는 기독교가 자본주의의 유물성에 대해서는 어찌하여 함구하는지는 자명하다. 그것은 기독교 사상이 자본주의의 핵심이 되어 왔고 급기야는 기독교 자체가 자본주의화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이데올로기의 어떠함이나 그 사는 곳의 다양함, 혹은 그들의 종교가 무엇이냐에 상관없이 모두 유물론 일신교의 신자가 된 지 오래이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보다 편리한 물건을 보다 좋은 질과 보다 싼 값으로 공급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으며, 대다수 국가의 존재 의미도 이런 물질적인 유복함에 그 우선 순위가 놓여져 있다.

이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이미 그 총량이 한정되어 있는 물질을 지향하여 물질로 달려가다 보니 공멸을 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국제법이니 혹은 국가간의 협약이니 하는 율법들인데 그러나 이미 우리가 보아온 대로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국제법이라는 것은 그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들이 그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며, 국가간의 협약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서로가 죄인이라는 고발에 불과할 뿐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요사이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잔뜩 긴장시키는 뉴스 가운데 북한의 「핵확산 금지 조약」 탈퇴가 있는데, 사실 이 조약만큼 웃기는 조약도 없다. 나는 북한이 「핵확산 금지 조약」을 탈퇴한 것이 잘한 것이라거나 아니면 잘못한 것이라거나를 말하자는 게 아니다. 나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핵확산 금지 조약」이라는 율법이다. 율법은 항상 그 자체로 모순을 안고 있으며 따라서 그 누구도 그것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사실 북한이 「핵확산 금지 조약」에서 탈퇴했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북한 당국을 비난하기에 앞서, 그 조약이 조약으로서의 가치가 있느냐를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이다.

핵을 군사용 무기로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 그러지 못한 나라들을 향하여 우리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거나 보유하지 맙시다고 하고 있으니 이게 정말 말이나 되는 얘긴가. 천하가 다 아는 소 도둑놈이 바늘 하나 훔치려다 들킨 사람에게 도둑질하지 말라는율법을 들이대며 정죄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국가간의 관계라고 해서 거창하거나 어렵거나 할 것 없다. 얘기는 언제나 간단한 것이다. 정말 핵의 확산을 금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있는 쪽에서 먼저 하나 하나 폐기할 일이다. 그렇게 못할 양이면 안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핵무기를 만들든 말든 떠들 자격이 없다. 그러니 그런 입으로 외치는 정의에 무슨 힘이 있겠으며, 그런 손으로 이룬 세계 평화 역시 어찌 바벨탑이 안 될 것인가.

이래서 「핵확산 금지 조약」이라는 율법으로는 핵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말이다.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그들의 욕심 즉 그들의 핵무기를 버리지 않는 한 핵무기는 알게 모르게 늘어날 것이고, 그러는 와중에 인류는 죽어갈 것이다. 핵무기를 터뜨려서 죽는 일은 없을지라도 체르노빌같은 원전 사고나 얼마 전에 일어난 톰스크 지역의 원전 사고같은 사고로도 이 세상은 핵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동해는 벌써 러시아의 핵 무덤이 되고 있으며, 중국의 공업화로 말미암아 황사마저도 예전과 달리 훨씬 더 많은 양의 산성 물질을 이 땅에 뿌리고 있다는데, 이걸 대체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원인을 생각하지 않는 대증요법으로는 아무런 효과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인류는 공업화 산업화의 절정에 서 있다. 이제 인류는 이런 산업화가 가져다 주는 육신적인 안락함을 계속 추구할 것이냐 아니면 육신의 편함을 버리더라도 19세기 산업혁명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냐를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 19세기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인류는 이미 「카산드라 크로스」를 향하여 달리는 특급 열차에 몸을 실은 지 오래이다. 이 열차는 과연 멈출 수 있을 것인가.

인류가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는 한 멸망은 필연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기 보다는 인간들 스스로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물이 주인이 아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원자폭탄을 만들어 그들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며 그들의 소유를 뺏는다고 해도 별 요동이 없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원자폭탄으로 죽일 수 있는 목숨은 육신이라는 껍데기에 불과하며 그리고 그들이 탐내서 빼앗아 갈 만한 소유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나사로같은 사람에게서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빼앗을 수 있으랴. 사람들이 집안에 살상용 무기를 준비하여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강도를 대비하는 것은 그들이 빼앗길 만한 어떤 소유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나아가 이 세상에 미련이나 가치가 조금이라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씀대로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어느 쪽을 버리느냐만 있을 뿐이다. 거듭 이 말을 하는 것은 사람들이 몸으로는 분명히 재물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착각의 골도 여간 깊은 게 아니어서 도무지 그 미망에서 헤어날 기미가 보이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 역시 이런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는 물론이요 다른 사람의 눈으로도 재물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었지 재물이 아니었으며, 그러므로 그들이 재물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쓴 삶이 있었다면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 되고자 함이었지 결코 다른 뜻은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자. 재물이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이든 유대인의 회당이든 만들 수 있을 것이며, 돈이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을 이 세상 땅 끝까지 전파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것보다 먼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 「재물」이 어찌 주인의 행세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건 도대체 기본을 모르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에 대하여 비웃는 이유가 이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비웃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첫째는 예수의 비유가 지니는 수준의 유치함 때문이다. 예수라는 인물도 별 것 없구만. 고작 한다는 소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얘기 정도니. 그 정도 얘기야 우리들이 이미 소시적에 뗀 내용 아니던가. 지금 여기 우리 중에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며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말이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섬겨온 대상은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아니신가. 그런데 이런 우리를 옆에 놓고 자기 제자들에게 한다는 소리가 기껏 재물을 중히 여기지 말고 하나님을 중히 여기라니. 여기가 무슨 주일학교 유치반인 줄 아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리새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하는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는 해설도 바리새인들에게 변명의 기회를 준다면 하나같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펄쩍 뛰거나 아니면, 그저 참새가 대붕의 마음을 어찌 알랴고 웃어넘길 일이다.

그들은 그저 엿새동안 열심히 일하여 깨끗한 재산을 이루었을 뿐, 돈만 아는 수전노처럼 밤이나 낮이나 돈 돈 외우며 동동거린 사람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돈을 벌기 위하여, 돈을 상전으로 모시고, 돈 되는 일이라면 그야말로 물불을 마다않는 썩어빠진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같이 간도 없고 쓸개도 없는 인간들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을 염두에 둔 사람들이었으며, 따라서 돈을 벌어도 하나님께 영광이요 돈을 쓰더라도 주님을 위한 사업이라는 믿음이 투철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더러 돈을 좋아하는 자라니. 이건 아무래도 심한 표현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즉 성경이 말하는 돈을 좋아하는 자라는 표현은 바로 이상과 같은 생각과 삶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분명하게 말하거니와 돈 버는 일이 자신의 주업인 사람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모든 시간을 쏟고 있는 목사님같은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한 일에 시간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신자를 얻기 위한 일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경우도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매도한다면 이건 확실히 좀 지나친 판단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경우는 사람을 좋아하는 자라고 할 수 있으며, 좋아하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면에서 이들 둘은 대동소이하다.즉 전도라는 것이 목사님의 주업이 되면 오히려 하나님을 경히 여기는 일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엿새동안 힘써서 해야 할 우리의 일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모든 일을 그만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함이며 밤이나 낮이나 그 말씀을 묵상함이다. 오직 이것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은 그야말로 미친 놈이며 정신 나간 놈이다. 뿐만 아니라 남편으로서의 의무나 아내로서의 책임도 내팽개친 사람이며, 아들로서의 도리나 부모로서의 사랑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이다. 이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좋아하지 않으며 하나님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경을 이런 식으로 풀면 극단적이라고 매도하고, 위험하다고 경계한다.

그러나 나는 다만 그들 속에 하나님을 섬김이 없음을 안다. 그들이 좋아하고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부모나 자식이며, 아내나 남편이며, 또한 돈이나 권세지 결코 하나님이 아니다. 돈으로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자기들이 돈을 좋아한다는 증거며 또한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교회에서 자신의 지위가 확고해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문제는 사람들 앞에서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미움을 받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람들이 높이며 기리는 대상은 과연 무엇인가.

기독교이든 불교인이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든 적게 한 사람이든, 나이가 많은 사람이든 적은 사람이든,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사람들 가운데서 높임 받고 존경 받는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오늘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치의 실체는 정말 무엇이란 말인가.

이 가치의 실체를 하나님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교회에서조차 그 권위를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인데 말이다. 사람들 가운데서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며, 말씀이 아니라 돈이다.

오늘날 세상은 사람들의 숫자만 많이 얻으면 국회의원도 되고 대통령도 된다.

교회에서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권세와 권위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며, 민중의 목소리는 곧 하늘의 소리가되어 절대적인 진리로 사람들을 휘어잡는다. 혼자서는 아무런 말도 못할 사람도 무리가 되면 더이상 무기력하지 않다. 광풍노도와 같은 힘으로 앞에 보이는 모든 생명의 세계를 초토화시킨다. 한 집단의 지도자가 그 구성원의 목소리에 충실할 때 그 조직에서 자신의 인기는 올라갈지 모르지만, 그것으로 그 집단 전체가 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절대로 진리를 좋아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 육신의 안일과 자기 집단의 이익을 염두에 둘 뿐이다. 예수를 3년이나 좇아다닌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께 드렸던 충고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십자가를 지고 죽는다는 예수의 말씀을 가로막고 그리 마옵소서 했던 것 말이다. 사실 이 충고는 베드로 개인의 것이라기 보다는 열두 제자 전체의 의사라고 보아야 한다. 그 전후의 분위기로 볼 때 베드로의 이 충고는 베드로가 그 총대를 멨다는 것뿐이지 사실은 예수를 제외한 그 조직 구성원 전부가 베드로의 심정이었다. 3년씩이나 예수를 지척에서 따라다닌 제자들이 이럴 지경에야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으랴.

그러나 만일 예수가 베드로로대표되는 제자들의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독립된 유대 왕국의 임금으로 등극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람들 가운데서 높임을 받는 것은 항상 이런 것들이다.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그 힘을 바탕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 대한 지배력이 사람들 가운데서 높임을 받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힘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만 가장 두드러진 모습이 돈이며, 결국 사람들 가운데서 발언권을 쥐는 것도 돈이다. 그 모임이 국가든 교회든 가정이든 직장이든 간에 돈 가진자의 발언권이 강하며 돈 내는 자의 입김이 센 것은 그 모임의 구성원들이 모두 돈을 높이기 때문이며 돈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율법이라는 소프트웨어를 떠나는 문제가 우리의 의에 관한 것이라면(눅15장), 재물이라는 하드웨어를 떠나는 문제는 우리의 영화에 관한 것이다(눅16장). 전자는 우리 영의 구속(救贖)이요 후자는 우리 몸의 구속이다. 우리가 아무리 율법의 세계를 떠났다고 자부하더라도 또 그것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계속하여 이 세상이라는 재물의 세계를 버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떠나지 아니하면,버렸던 그 율법이 어느새 우리 곁으로 돌아와 우리를 주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이 세상을 떠나는 삶은 없으면서도 율법이라는 질서만 버리는 사람도 있는데, 물론 자기는 그것을 자유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경우가 대표적인 방종 즉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는 경우이다.

신앙이란 사람들 앞에서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니며,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 가운데서는 미움 받는 것이며(예수께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했을 때의 십자가는 바로 사람들 가운데서의 미움의 절정이다), 이 세상에서는 이방인과 나그네로서 오늘은 어디서 묵을까, 내일은 무엇을 먹을까를 모르고 사는 삶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는 언제나 그 눈과 귀가 열려 있어, 그 생명의 폭과 깊이가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삶이다. 이 아침에, 우리는 무얼 하러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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