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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마 06: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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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님이 우리에게 물으시는 두번째 질문인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너희는 이 새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성도님들!
아침 일찍부터 준비하시고 교회에 오셨는데 오시면서 줄곧 생각한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도 관심이 주고 가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여러가지 많은 소리를 듣고 삽니다. 그 첫번째로 외부의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가을이 되니 귀뚜라미나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더 많이 들립니다. 도시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자동차의 소리, 사람소리, 공해의 소리 등 많은 소리를 듣고 삽니다. 이 소리들 중에 특히 우리의 신경을 거스리는 것은 사람소리 입니다. 사람소리에 우리는 지극히 민감합니다. 다른 사람이 대수롭지 않게 던지는 한마디 소리에 몇 며칠 잠을 자지 못하고 이리뒤척 저리뒤척 하는 것이 우리들 입니다.
두번째는 내면의 소리가 있습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 만큼 내부의 소리도 큽니다. 이 내면의 소리는 외부에서 들려온 소리에 내 마음속에 남아 메아리로 들려오는 소리이기도 하며 양심의 소리이기도 합니다. 이 소리를 들어보면 스스로를 위로하는 소리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을 꾸짖는 소리, 불평의 소리, 원망의 소리, 자신을 정죄하고 절망하는 소리, 환멸의 소리, 후회의 소리가 끝없이 내면에서 들려옵니다. 바쁜 일 가운데서도 이 소리만큼은 들립니다. 이 소리는 고요한 방에서도, 복잡한 거리의 보도위에서도 들립니다. 바쁜 일 가운데서도 이 소리만큼은 들립니다. 이 소리는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떠드는 학생들의
소리보다도 더 크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부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고 내면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왼종일 바쁘게 일하며 움직입니다. 어떤 사람은 술로, 춤으로, 취미생활을 통해 이 소리를 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안 들리면 안 들으려고 할수록 더 크게 들리는 것이 내면의 소리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나 성당의 성스러운 분위기속에 있으면 그런 소리를 안 듣게 되리라는 기대로 교회나 성당에 가보지만 그 곳에서도 들립니다. 기도하는 중에도, 찬송을 부를 때도, 말씀을 들을 때도 이 들리지 않는 내면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립니다.
현대인은 물론 자기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더크게 이 내면의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괴로와하고 고통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때때로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를 바라보고 내가 저 새라면 얼마나 좋을까. 저 새처럼 모든 것 다 잊어버리고 푸른 하늘을 한번 날아 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들에 핀 백합화를 보며 나도 저 예쁘게 핀 꽃과 같다면 얼마나 행복할까하고 생각합니다. 인생이 고달플 때 우리의 마음에 찾아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예수님을 잘믿는 사람이나 믿음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를 막론하고 외부의 소리를 듣고 괴로와 하며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고통하는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소리를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자신이 가련해 공중의 새와 들의꽃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소리를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은 제3의 소리입니다. 이 소리는 사람의 소리나 역사상 위대했던 위인의 소리가 아닙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도 많이 듣긴 들었지만 세상의 소리와 내면의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이 소리를 간직하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 소리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겠느냐. 공중의 새를 보라. 그러나 너희는 이것들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풀도 내가 이렇게 입히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하시는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하나님의 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것일까요
첫번째 이유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갖가지 염려와 근심이 너무 많이 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만큼 염려를 많이 하는 시대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일에 염려하며 삽니다. 무식한 사람은 무식 때문에 염려하고 유식한 사람은 너무 많이 알아서 염려하고 나이 많은 사람은 죽음을 앞에 두고 염려하고 젊은이는 갈팡질팡인 이 세상을 살아
갈 날이 너무 많아서 염려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믿지 못해서 염려하고 믿는 사람은 그 믿음 때문에 염려합니다. 영혼도 육신도 염려합니다. 결혼한 것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는 가정이 있고, 결혼 못해서 염려하기도 하며, 일어난 일 때문에 염려하고, 아직도 일어나지 않는 일 때문에 염려합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그 염려의 80-90%는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을 미리 가불해서 염려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입니다. 우리가 너무 많은 염려를 하니까 주님은 제3의 소리 즉 하나님의 소리를 들려 주시는 것입니다.
두번째 잉는 염려해 보아야 아무 쓸데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을 두 가지로 분류하면 하나는 우리들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며 또 하나는 우리의 힘으로 할수 있는 일을 가지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은 가슴을 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이유는 염려는 우리에게 너무나 해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경고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한국의 전염병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은 간염이라고 하는데 간염에 걸리지 않기 위하여 간염 예방주사를 세번씩 대부분 맞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간염보다 몇 천배 더 무서운 전염병이 염려라는 병입니다. 이 염려는 자신의 영혼과 육신의 건강을 헤치며 나아가서 다른
사람까지 헤칩니다.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참 거북합니다. 또한 이 염려는 주님께 실망을 안겨드립니다. 사람들은 전염병에 걸리지 않으려고 예방주사를 맞지만 더 무서운 전염병인 염려에 대해서는 그대로 방치해 두며 더많이 염려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왜 염려합니까하고 물으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어서 염려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염려하지 않을 조건과 상황이 되면 염려하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만 이런 사람은 평생 염려에서 해방 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은 인생에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러한 상황이 온다고 해도 우리 자신이 그 상황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하는 염려는 어쩔 수 없어서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염려를 하기 위해서 연습을 많이 했기 때문에 염려하는 것입니다. 염려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것이며 태어나서 우리가 배워서 체득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염려를 지니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은 태어날때 부터 잘 치는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연습을 많이 했기 때문에 잘칩니다. 마찬가지로 염려를 잘하는 사람, 염려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은 태어나서 계속 염려를 연습하고 전공했기 때문에 염려의 전문가가 된 것입니다. 더 큰 염려거리가 있지만 염려를 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크고 작은 일에 언제나 염려하는 사람은 염려를 습관적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키에르케고르라는 분의 산상수훈을 설명해 놓은 책에 [들의 백합화를 보라.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는 장(章)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써 놓았습니다.
한 송이의 백합화가 산골짝 시냇물 곁에 아름답게 피어 있습니다. 이 백합화는 다른 꽃들과도 사이좋게 지내며 솔로몬의 옷보다도 더한 아름다움을 스스로 느끼면서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가지고 잘 살았습니다. 어느날 새 한마리가 날아와서 백합화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매을 새는 날아와서 백합화와 얘기를 나누다가 어느덧 백합화와 새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 백합화는 새와 사귀게 되자 새를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와 대화하다가도 훌쩍 날아가 버리기도 하고 노래도 잘하고 말도 잘하며 자기가 가고 싶은 데로 자유로이 가는 새를 보게 된 것입니다. 백합화는 혼자서 왜 나도 저 새처럼 공중을 날아다니지 못하고 노래하지도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할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새가 와서는 백합화에게 백합화야, 너는 지금 네가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이 산너머에 가면 너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백합화가 수 없이 피어 있단다. 너의 아름다움은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이야기를 하고는 새는 훌쩍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날 밤에 백합화는 한잠도 자지 못하고 걱정하고 염려했습니다. 나는 왜 여기 홀로 피어 있을까 나는 왜 많은 백합화속에 함께 피어서 그들의 아름다움과 겨루며 살지 못할까하고 고통했습니다. 다음날 새가 와서는 백합화야, 내가 그 많은 백합화가 있는 곳으로 너를 이사 시켜줄까하고 묻자 백합화는 좋다고 끄덕끄덕했습니다. 그래서 새는 백합화의 뿌리를 쪼아내어 백
합화를 날갯죽지에 끼고는 높이 훨훨 날아서 백합화가 많이 피어 있는 곳으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날아가는 동안에 이 백합화는 그만 시들어버렸습니다.
솔로몬의 화려한 옷보다도 더 예쁘다고 생각하고 만족했던 백합화는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말하기를 이 백합화는 오늘의 인간이며 그 새는 인간의 남과 빅해 보려는 태도라고 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염려와 근심에서 해방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첫번째로 남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이 여러분의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나이며 나는 나로서의 인생이 있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내 양심이 하나님과 친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악한 자에게는 평안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약한 사람은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4:8에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이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라알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되고 정결하고 경건하고 사랑할만한 사람을 가지고 무슨 일에든지 칭찬할만한 마음과 양심을 가질 때 염려와 근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세번째로 중요한 처방이 있다면 기도입니다. 성경은 [네 염려를 주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염려를 어떻게 주께 맡깁니까 우리의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비결은 기도입니다. 빌립보서 4:6에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 왜 염려와 근심거리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염려를 기도로 바꾸는 사람입니다. 염려와 근심거리들을 기도의 제목으로 바꾸어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염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네번째 염려에서 해방되는 최선의 방법은 믿음입니다. 어머니 품안에 안긴 어린아이는 어디고 가야할지 무엇을 먹어야 할지 무엇을 입어야할지를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자비의 손에 잡혀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보호받고 있다고 믿는 믿음만이 우리의 염려를
물리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가난과 불행과 어려움에 처한 절망적인 자신만을 보며 탄식하지 말고 이런 사람에게 더 큰 사랑과 자비의 손길을 펴시는 하나님이 내곁에 계심을 믿는 그 믿음이 염려를 극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공중의 새를 보라 내가 먹여준다. 들의 백합들을 보라 내가 입혀준다. 너희는 이것들 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하시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절대적으로
신뢰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염려와 근심에서 해방되려면 염려할 것을 염려해야 하고 염려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은 염려해야 할 것은 염려하지 않고 염려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염려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염려는 사망을 가져오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염려는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한다고,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염려하게 되면 세상의 염려를 하지
않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알까하여 말씀을 상고하고 기도하며 복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주님을 위하여 봉사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우리의 삶을 바치면 세상의 염려와 근심에서 해방을 받게 됩니다.
비행역사에서 실지로 있었던, 비행기가 처음 발명이 되면서 겨우 대륙을 횡단할 그때의 짧은 한도막의 이야기로 이 시간 말씀을 끝내려고 합니다.
비행기가 이륙을 해서 한 두시간쯤 비행을 했는데 비행기의 기기들 속에서 뭔가 갉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비행사들이 들어보니 여러마리의 쥐들이 비행기의 정밀한 기계들을 갉아먹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되돌아갈 수도 없고 앞으로 비행해야 할 시간은 몇 시간 더 남았는데 그 사이에 쥐들이 정밀기계들을 갉아버리면 비행기는 위기에 처하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염려하고 당황하는 가운데 비행사 중의 한 사람이 대학에서 배운 지식이 떠올랐습니다.
쥐는 설치동물(갉아먹는 동물)인데 이 설치동물은 땅 속에나 땅 위에서는 잘살지만 2만피트 이상의 공중으로 올라가면 모두 죽어버린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우리는 염려하지 맙시다. 그리고 2만피트 이상으로 고공 비행을 계속합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차츰 고도를 높여가며 2만피트까지 올라가서 비행을 계속해 가는데 차츰 갉는 소리가 적어지더니 나중에는 그 소리가 뚝 그쳤습니다. 무사히 비행을 마치고 목적지에 도달해서 비행기의 복잡한 그 부분을 열어 보았더니 여러마리의 쥐가 죽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염려는 설치동물과 같습니다. 높이 올라가면 죽어버립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높이 치솟으며,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뜨거우면, 우리의 모든 염려 근심 걱정은 모두 죽어버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희미해지고 땅 밑에서 기어다닐 때는 영원한 하나님이 흐릿해지고 염려와 근심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그러면 죽음을 가져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치솟아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드릴까 염려하고 주를 위하여 근심할 때 설치동물과 같은 염려는 죽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주님이 우리에게 [너희가 염려함으로 네 키를 한 자나 더하겠느냐. 공중의 새를 보라. 너희가 이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 백합화를 보라. 얼마나 아름다우냐. 그런데 하물며 너희일까보냐]고 말씀하시는 이 질문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염려하라. 그리하면 세상의 염려를 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에 아멘이라고 응답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서 모든 근심과 걱정과 염려의 구름이 우리의 발밑에 있는 은혜와 믿음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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