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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업을 나누게 하소서 (눅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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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링컨 대통령이 아침 산책을 나갔다가 때마침 두 아이들이 지나는 것을 보고 불러 세웠습니다. 아주 귀엽게 생긴 두 아이들은 형제간이었습니다. 링컨은 가지고 있던 호두 세개를 동생에게 주면서 사이 좋게 나누어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는 세개의 호두를 거지고 서로 싸우기 시작을 했습니다. 대통령은 아이들에게 호두를 준 것을 후회를 했습니다. 무척 사이 좋게 지나던 아이들이 그만 호두 때문에 싸움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장관 한 분이 다가와 묻기를 "각하 이 아이들이 왜 이렇게 싸웁니까" 대통령이 말하기를 " 이 아이들은 세계 문제를 가지고 싸움을 하고 있다오. 세계 문제 말이오" 그렇습니다. 오늘의 국제 문제는 모두 이권의 문제입니다. 서로 많이 가지자는 문제지 서로 나누어 사이 좋게 살자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 이권의 문제는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국제간의 문제의 핵심입니다. 싸움의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날 인간의 문제는 그것이 국제간의 문제든 개인의 문제든 사실 이 어린아이들의 문제와 같이 조금 더 가지자는 문제며, 더 많이 먹자는 문제고, 더 많은 것을 분배받자는 문제입니다.
어떤 논문에 보니까 G. N. P가 1,500불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적 빈곤의 문제가 심각하지만 1,500불이 넘으면 상대적 빈곤이 문제가 된다고 합니다. 그 논문은 1,500불이 넘으면 사람들은 잘 산다는 것이 별 것이 아니구나 라고 생각을 해서 가치관이 바뀌게 되고 분배의 문제로 생기는 많은 문제들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논문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우리는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과연 1,500불이 넘으면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는 생활에 욕심을 가지지 않을는지 두고 볼 일입니다.

절대적 빈곤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이 안되면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짐승 비슷하게 되여 버립니다. 그러나 상대적 빈곤은 이 절대적 빈곤보다 더 심각합니다. 상대적 빈곤은 사람은 여우처럼 간교하게 만들고, 사자처럼 사납게 만들기도 합니다. 절대적 빈곤은 육신의 배고픔이요, 헐벗음의 고통입니다. 그러나 상대적 빈곤은 마음의 고통이며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그래서 상대적 빈곤에는 고민이 따르고 시기 질투 미움이 따릅니다. 절대적 빈곤에서는 몸이 죽고 상대적 빈곤에서는 우리들의 마음이 시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를 쓰고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살기 위해 애를 씁니다. 지게질을 해도 리아까를 끌어도 우리 아이들은 공부를 시켜 농촌에서 살지 않고 도회지에서 살자는 욕심이 농촌을 텅 비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애를 써서 상대적 빈곤에서 벗어났다 싶으면 다음에 오는 또 다른 빈곤이 있는데 그것을 사람들은 문화적 빈곤, 정신적 빈곤이라고 합니다. 이 빈곤은 더 심각한 문제를 가져오는데 엄청난 도덕적 타락과, 도덕적 빈곤이 몰아 닫칩니다. 알코올과 마약이 사람들의 심성을 파괴하고 복마전을 능가하는 온갖 퇴폐와 타락이 만연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 형편의 입구에 서 있다는 것을 모두 알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정신을 차리고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 해결점을 찾지 못한다면 하루에도 수 십건씩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밤거리를 다닐 수 없는 추악하고 거대한 미국과 같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아니 미국은 좋은 편이니까 우리와 비슷한 나라 멕시코와 같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가면 종교적 문제가 생깁니다. 소위 복지 국가라고 말하는 나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배당은 크게 지어 놓았는데 교인들은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텅텅 비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장래도 이런 식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잘살아 보세'하고 경제적 문제가 해결이 되면 이제는 상대적 빈곤 문제가 생기고, 인권의 문제, 문화적 문제, 도덕적 빈곤의 문제, 그리고 영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최근 미국 대통령의 부인인 훨라리 여사는 미국의 정신적 문제에 대해 언급을 한 일이 있습니다. 특히 10대 청소년들의 정신적 문제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면서 미국의 정치가 군사와 경제 문제만을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를 더 문제 삼고 운영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 말에 대해 각개의 여론은 여러 가지 였습니다만 가장 지배적인 이론은 정치는 정치를 하고 국민의 정신 문제는 미국의 교회가 담당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미국의 교회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힘겨워 하고 있는 허수아비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힘이 없는 교회는 결국 미국의 정신을 이끌어 갈 수 없는 교회요, 그래서 미국은 정신적으로 병든 상황을 치료할 수 없는 상황에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형제가 분배의 문제를 가지고 싸우고 있습니다. 제비 있는 것은 동생이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누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을 했습니다. 분배 문제에 대한 책임이 내게 있는 줄 알고 "선생님 재산 분배를 해야겠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는지요"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형에게 문제가 있으니 형에게 명령을 해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예나 오늘이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똑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복잡한 문제를 놓고 내가 어떻게 해야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라고 생각을 하지 않고 "저 사람을 감동시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있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에게 좀 조용히 있어 주면 나중에 잘 해 주겠다고 말하고, 없는 사람들은 있는 사람들이 종 욕심을 버리고 고루 고루 나누어 가지게 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변화되어야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 어려운 문제를 더 어렵게 끌고 가는 것입니다.

동생이 이런 식으로 자기들의 문제를 가지고 오자 예수님은 그 문제에 개입하시기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근본적이고 깊은 문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본문의 내용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유대인들은 형제가 유산을 나누는 경우, 형은 2/3를 가지고 동생은 1/3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형제에게 왜 재산 분배 문제가 생기게 되었을까요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합니다. 첫째,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재산을 분배할 겨를도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경우입니다. 분명히 재산에 대한 유언을 하고 떠났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갑자기 죽어 버려서 유언을 못했다. 그런데 형이 그 재산을 움켜쥐고 동생에게 한푼도 주지 않았다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째, 형이 형 노릇을 제대로 못해서 동생이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형이 동생보다 더 재산을 많이 상속받는 것은 형이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기 때문인데 형이 형 노릇을 못하고 동생이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으니 부모님을 모시고 산 동생이 두 배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형제가 다 부모님을 모시지 않았다는 경우입니다. 동생이 말하기를 형이나 내가 부모님을 모시지 않았으니 누가 재산을 더 많이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의 재산을 반씩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이 형제의 재산 다툼을 어떻게 해야 옳게 해결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관례를 따르자니 예매하고, 법을 따르자니 분명하지를 않고, 현실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합리적일지 판단하기가 매우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이 형제와 장 반대되는 형제도 있습니다.
시온산, 예루살렘 성전의 터전에 얽힌 전설입니다. 농사를 짓는 형제가 있었는데 형은 혼자 살고 동생은 딸린 식구가 많았습니다. 어느 해 추수를 해서 보릿단을 가득 쌓아 두었습니다. 동생은 혼자 사는 형이 측은해서 밤중에 몰래 자기네 보릿단을 형의 논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형은 동생 네가 식구가 많다고 생각을 해서 역시 밤에 자기 논의 보릿단을 동생 네 보릿단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다음 날도 두 형제는 그렇게 일을 하다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 형제는 서로
고마워하면서 얼싸안고 울었습니다. 그 후 그 형제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진 그곳을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신령한 장소로 정해 성전을 건축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형제의 문제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의 문제에 개입하시지는 않았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탐심을 버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공정한 판결이라 해도 사람들의 마음에 탐심이 있으면 공정한 판결로 받아 들어 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탐심이 있는 한 어떤 판단도 사람들에게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공평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익을 보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받아들이는 경우에도 손해를 보았지만 어쩔 수 없이 수긍한다고 생각을 하고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온전한 수긍이 아닌 것입니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탐심을 가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탐심이 없어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원만한 문제의 해결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옛 날 제나라에 금을 팔려 다니는 장사꾼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어느 시장 바닥에 금을 널어놓고 장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청년이 넋 빠지게 금 덩어리를 보고 있더니 다짜고짜로 금을 한 덩어리 집어들고 도망을 치기 시작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시장 바닥에서 그런 짓을 했으니 그 청년은 즉시 잡혔습니다. 관가에 끌러 간 청년은 심문 관에게 말하기를 "금을 본 순간 내 눈에는 사람도 보이지 않고 금만 보였습니다." 하였습니다.

탐심이 있는 한 의도, 나라도, 겨레도, 심지어 하나님도 눈에 보이지를 않습니다. 지난 일에 대한 반성도, 진리도, 앞날의 희망도, 심지어 가족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인격도, 이성도, 교양도, 인정도, 사정도 없이 되여 버립니다. 공평과 평등이 있을 수 없고 사랑과 동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탐심, 그것만이 나를 지배하고 있을 뿐입니다.

욕심 많은 낚시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은 이상하게 푸른 고기 한 마리를 낚았습니다. 그 고기는 말을 하는 고기였습니다. 그 고기는 낚시꾼에게 애원을 했습니다. '당신의 세 가지 소원을 들어 줄 테니 나를 놓아주십시오' 낚시꾼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다섯 가지 소원을 들어주면 놓아주겠다.' 고기는 안됩니다. 세 가지밖에 들어 들일 수 없습니다. '그럼 네 가지를 들어 다고' 고기는 숨을 흰떡 거리면서 '안됩니다. 세 가지밖에 들어 들일 수 없습니다.' '그럼 세 가지 반만' 고기는 죽어 가는 목소리로 '세 가지밖에는 안됩니다.' '그럼 좋다. 세 가지만 들어 다오' 그러나 이미 고기는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의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탐심을 물리치는 데서 시작이 됩니다. 우리 문제의 중요한 변수는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얼마나 공평한가 다른 사람이 얼마나 정직한가 라는데 있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이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할 일의 부분을 물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 행복도 주님의 말씀에서 대답을 찾습니다. "사람의 행복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 영생도, 영광도, 명예도 이 말씀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록팰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소유가 넉넉한데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클리프렌드에서 처음 직장 생활을 할 때 주급 3불을 받아 가지고도 하도 귀하게 여겨서 화장실에 가서 그 돈을 세어 보곤 했는데 그 때 그 순간의 행복을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의 많은 재산도 다 내어놓겠다."

결혼한지 일년밖에 안된 어떤 부부가 이혼을 하겠다고 판사를 찾아 왔습니다. 사연을 들어본즉 신부가 신랑에게 준 로렉스 시계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 신랑이 신부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우리도 속아서 산 것이라고 해도 막 무가네 였습니다. 신성한 결혼을 가짜 시계로 더럽혔다고 우겨댑니다. 그리고 일년 동안을 싸웠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혼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판사는 “이혼을 하시오. 로렉스 시계 없어도 얼마든지 행복한 부부가 많은데 시계 때문에 서로의 사랑을 의심하고 부부의 행복이 시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하고는 살 필요가 없소. 신랑 당신은 평생 로렉스 시계하고 사시오“

옳은 말씀입니다. 사람의 행복이 무엇을 가지는데 더욱이 많이 가지는데 있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는 모두 40개입니다. 그 증에 돈과 관계 있는 것이 모두 16가지나 됩니다. 하워드 헨드릭이라는 사람은 예수님이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말씀보다 돈에 대한 말씀을 더 하셨다고도 말했습니다.

여러분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더욱이 늘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므로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려 하고 자기의 주장을 강조하여 자기를 내 세우려 하는 것처럼 잘못된 처신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쫓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이 말씀의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명심을 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은 소유의 넉넉한데 있는 것이 아니오, 나의 행복은 소유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부터 참 인간의 출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하늘을 날 그같은 기분 속에 살아도 이 사실에 대한 실감나는 실제적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사실 인생의, 행복의 문턱에 와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럼으로 가졌다고 교만할 것이 없는 것이고 없다고 좌절할 것도 없습니다. 인생의 행복은 소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고 사랑하는데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어떤 부자에 대한 말씀을 이렇게 하셨습니다.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눅 12:16]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눅 12:17]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눅 12:18]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눅 12:19]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 12:20]"

이 어리석은 부자는 인생에 대한 첫 출발부터 잘못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 것"인양 착각을 하면 곤란합니다. 나는 그것을 잠시 살아 있을 동안 맡아 있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내 것"이라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남의 것도 내 것으로 착각을 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부자는 재산을 보존하는 방법도 모릅니다. 진실로 그것이 내 것이 되도록 쓰는 방법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재산을 보존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마 6:19]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누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3]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4]". 욥은 말하기를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 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욥 22:22]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욥 22:23]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욥 22:24]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욥 22:25]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것이라[욥 22:26]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욥 22:27]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욥 22:28]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욥 22:29]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을 인하여 그런 자가 건지심을 입으리라[욥 22:30]". 그리고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쓰는 것, 그것이 바로 내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의 생명까지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전혀 몰랐습니다. 창고만 크게 지으면 모든 것이 다 자기의 것이 되는 줄 착각을 한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그것도 죄악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다소 많은 물질을 마끼신 것은 그것으로 선한 일을 하라 하신 것이지 그것으로 교만하고 자랑하고 향락의 노예가 되여 하랑 방탕하여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본문에는 나의 것이라는 말이 세번이 나오고 헬라 말 성경에는 네 번이 나옵니다. 이 나의 것이라는 이기적인 사고 방식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어리석게 만듭니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흔히 말하듯 이 일을 왜 합니까 사람들은 먹고살자고 이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에게 제일 우선되는 일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영혼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요 우리의 인격을 결정하는 것이요 양심의 문제요 영생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이 모든 일들이 원만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욕심을 버리고 순수해 져야 참 인생을 아름답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말씀에 한 번 귀를 귀우리십시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고 하늘을 바라보고 영생을 생각하여 사는 사람이 올바르게 세상을 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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