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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판하지 말라 (롬 1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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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봉독한 14장에 있는 말씀은 특히 ‘양심 문제’에 관하여 성도가 취해야 할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는데, 이것은 마음 판에 새긴 율법이요, 하나님의 명령의 전달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양심에 따라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행23:1절에 보면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은 범사에 지침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양심이라고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딤전4:2절에 보면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했고 딛1:15절에는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그 마음도 양심도 더럽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장난 나침반과 같이 양심이 화인 맞아 제구실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한 하나님의 사람은 양심이 살아 있기 때문에 성경에 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양심에 따라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다시말 하면 성경에 금하거나 명하지 않은 어떤 의식적인 행사에 대해서는 양심에 맡겨 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디아포라’라고 합니다. 세상의 어떤 일은 의심할 여지없이 옳고, 어떤 일은 물어 볼 필요 없이 틀린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은 각자의 양심에 따라 다른 것도 있습니다. 이런 양심 문제들이 교회 안에서 종종 일어나므로 큰 어려움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아디아포라’문제는 ‘고기를 먹는 문제’ 또는 종교적으로 지키는 절기와 날의 문제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로 먹는 문제에 대하여 언급된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고기를 먹는 사람과 먹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은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는 각자의 양심에 맡겨 각자가 자유할 것이며 이를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에 준하여 우리 장로교 정치 원리 가운데 ‘양심의 자유’란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양심의 주재는 하나님뿐이시라 그가 양심의 자유를 주사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성경에 위반되거나 과분한 교훈과 명령을 받지 않게 하셨으니 이러므로 일반 인류는 종교에 관계되는 모든 사건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고 각기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은 즉 누구든지 이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양심에는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원만한 본래의 양심과 화인 맞은 양심이 있습니다. 문제는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여기서 양심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양심에 대해서가 아니라 중생한 심령의 선한 양심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성격 차이 때문에 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도 중에 성미가 지나치게 치밀하고 열렬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완만한 성미를 보고 ‘게으르다’고 비판하기 쉽고, 반면에 완만한 성미를 가진 사람은 치밀하고 열렬한 사람을 보고 ‘광신적’이라고 멸시해 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인 것에 그리 중요하지 아니한 문제들에 관해서는 삼대 원칙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첫째가 1절-12절 말씀과 같이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였고, 둘째는 13-23절 과 같이 ‘남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였고, 셋째는 15:1-13절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의 인내와 사랑을 본 받으라’는 세 가지입니다.
오늘은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절에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믿음이 약하다고 해서 비판하지 말며, 의심이 많다고 해서 멸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연약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복음 진리에 대한 지식이 빈약한 자이며, 덕에 대한 실행력이 약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신구약 진리 전체를 잘못 이해하고 구약 레위기 11장에 금한 음식을 신약 시대에도 먹지 말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기독 신자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다시말 하면 아직도 율법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이 약한 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그 구원의 진리의 뜻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며 그의 뜻을 따라 사는 실천력이 부족한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예수 믿고 성장하는 자에게 오는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가지고 문제를 삼아서도 안되며, ‘누구는 믿음이 약하다’고 비판해서도 안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이 약한 신자들까지도 받아 드리라고 했습니다. 다시말 하면 만족한 교인으로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2-3절에 보면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상식적으로 몸에 해로운 술과 담배와 마약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식물을 먹든지 안 먹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채소만 먹는 것이 경건의 유익이 있으며 더욱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먹고 안 먹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먹는 것 가지고 판단하거나 분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서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주시고 일군으로 받아 드리셨는데 네가 무엇인데 함부로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느냐는 것입니다.

채식주의가 이교도에서 들어왔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던 이런 문제로 서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먹는 문제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먹는 것 보시고 사람을 구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채소와 고기를 먹는 사람이든, 그 중에 하나를 먹지 않는 사람이든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같은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업이 여기는 것은 ‘교만’이요, 그렇지 않으면 무식으로 포용치 못하는 일입니다.

5-6절에 보면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문제 해답의 결론 부분입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그리고 날을 지키는 것이 구원 문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에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이런 문제 가지고 남을 판단하거나 분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 어떤 날이 특별히 더 신성한 날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이고, 모든 날이 다 같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먹고 안 먹는 것이나 그리고 날과 절기를 지키고 안 지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하나님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히12:14절에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롬14:19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화평입니다. 여러분, 화평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어떤 성도는 너무 똑똑한데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어떤 성도는 따지는 것을 습관처럼 하다 보니 화평을 깨뜨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롬14:19절에 무어라고 했습니까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좀 부족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화평케 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생의 목적을 근본적으로 파헤치고 있습니다.
롬14:7-8절에 보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 로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삶의 근본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이 어떤 목적을 놓고 그것을 달성하려고 발버둥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살다가 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삶의 목표를 궤도 수정하려 하지만, 사실 인간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그 길을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라고 한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각기 하나님이 정하신 그 길로 가고 있습니다. 혼자 가지 않고 함께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한 성도도 그 길을 가고 있고, 믿음이 연약한 성도도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서로 서로 이해하고, 서로 존경하며 그리고 서로 붙들어 주며 함께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한 가족이며 한 지체입니다. 지체가 서로 비판하고 싸우면 피차 망하는 것입니다.

롬14:9절에 보면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의인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막2:17절에 보면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10-12절에 보면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45:23절에서 예언한 대로 우리는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판단은 하나님께서 속한 것이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수들이 서로 심판하는 것 보았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장점을 보고 기뻐하되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 교회에 다니는 네 명의 친구가 야고보서 성경 공부를 하면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라’는 말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친구가 ‘나는 사실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아직 담배를 끊지 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자기에게 있는 복잡한 이성 관계를 고백했습니다.
세 번째 친구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어렸을 적부터의 악습 가운데 도벽의 습성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교회에 와서도 사실은 슬쩍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왜 너는 말하지 않느냐. 너만 통뼈냐’고 하니까, 자기는 말하기가 곤란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했는데 너만 안 하면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그럼 할 수 없이 얘기하겠다고 하면서 ‘나의 약점은 남들의 흉이나 결점이나 약점을 알게 되면 불고 다니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먼저 얘기한 세 사람이 큰일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네 번째 친구의 문제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타락한 인생 대부분이 지니고 있는 약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남의 약점을 드러내고 남을 판단하는데서 묘한 쾌감을 느낍니다. 그 문제는 타락한 인간성의 한 본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남을 판단하거나 불고 다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나, 그리고 우리 모두 사이에 화평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판단은 남을 해하고 이간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우리의 마음속에 복된 천국을 소유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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