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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의 감사와 찬송 (대상 2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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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은 가인과 아벨이 농사지은 첫열매와 가축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드림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창 4:3,4). 그후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 햇곡식을 하나님께 드린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때 그들은 초막을 짓고 일주일간 절기를 지켰습니다(신16:13). 현대에 와서는, 종교적 핍박을 피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추수를 하고 감사를 드리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감사절에 우리만 좋아해서는 않됩니다. 사랑의 손길로 우리 이웃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고난중에 있는 이웃에게 우리 것을 나누어 줄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합니다(10-13절).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라고 이야기 합니다(14문17절). 다윗은 온 회중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합니다(10절).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송축이란 극상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말합니다.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여호와께 속하였다고 하면서 큰 영광을 돌립니다(11절). 그러면서 자신과 백성을 낮춥니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14절)라고 겸손히 말합니다.

우리가 잘나서 우리가 인정이 많아서 드린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다시 드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드려도 머리를 들고 행세를 하려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다윗과 백성이 즐거워 합니다(17절). 자원해서 즐거이 드렸으므로 기뻐합니다.

다윗은 40년간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습니다. 이 기간에 이스라엘 이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다윗과 그의 백성은 자기들이 저축한 모든 물건을 드린 것입니다(16절). 이때 다윗은 정직한 마음으로 드렸다고 말합니다(17절). 은혜 받은대로 사심없이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튿날 여화와께 제사를 드립니다. 수송아지 수양 어린양 일천마리씩 번제로 드립니다. 풍성한 제물을 드리고 무리가 크게 기뻐하여 여호와 앞에서 먹으며 마셨습니다(21,22절).

다윗과 그의 백성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시는 억만가지 은혜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나를 살리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지옥 형벌을 받아야할 나를 자신의 친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감사절을 맞이해서, 다윗과 그의 백성의 감사와 기쁨과 만족이 우리 성도들의 가정과 일터위에 넘치기를 원합니다.

다윗이 이르는 감사 방법

대상16:7-15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아니하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은혜를 받으면서도 그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통하여 감사를 받으시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감사하여야 하는가 물론 사람들마다 감사의 방법이 다르지만 가장 하나님이 원하는 감사의 방법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은 다윗의 감사를 통하여 우리는 감사의 방법을 한번 생각하고자 한다. 본문7절에 "그날에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세워 위선 여호와께 감사하게 하여 이르기를 "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왕이신 다윗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방법을 제사장들에게 명하고 있는 말씀이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하여"다윗이 이르는 감사의 방법"이란 제목으로 잠시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 그 행사를 만민중에 알게 하여 감사하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를 감사하여야 하는데 감사한 이유를 분명히 밝혀서 감사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본문8절에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중에 알게 할찌어다"라고 하셨다. 여기에 그 행사를 만민중에 알게 하는것도 감사의 하나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첫째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아뢰어야 한다. 본문에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라고 하는 말은 "그 이름을 선포하며"라는 말로도 해석이 되는 말이다. 이는 감사의 대상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많은 감사의 대상이 있지만 그중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아뢰므로 내가 감사는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기도를 시작할 때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하고 있다. 이같이 우리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때도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하는것을 알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행사를 알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본문에 "그 행사를"이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기사와 이적과 축복과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마음속으로만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내 입술로 그 감사의 조건을 고백할 때 내 감사가 하나님 앞에 상달될 뿐만 아니라 나와 똑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줄 알지 못한 이들에게 감사할 수 있도록 깨닫게 하여 주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만민중에 알게 하여 감사하여야 하여 한다. 여기에 "알게 하여"란 광고하여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행하신 기적이 무엇이 있는가 한번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기적이 아닌가 우리가 진정으로 생각하여 보자 하나님의 지켜주심과 보호하심이 아니면 어떻게 이 하루 하루를 살아갈 수 있겠는가 또 우리는 매일 매일 만나는 어려운 일들을 정말 하나님의 행해 주시는 기사와 이적으로 살아온것이 아닌가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하나님의 축복이요 어려운 일은 어려운 일대로 하나님의 도움을 덧입고 살게 하지 않는가 실패하여도 넘어저도 그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지 아니한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가 우리 입술로 고백하여야 하는 것이다.
셋째 우리는 어떻게 이하나님의 행사를 알게 할 수 있는가 본문9절에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 모든 기사를 말할찌어다"라고 하였다. 본문에"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행하시는 기사와 이적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노래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행하신 기사와 이적이 무엇인가 신4:33 이하에 보면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 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왁게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여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기사와 이적은 말로 할수없음을 말하고 있다.이들의 노래와 찬양을 통하여 온세상 만민이 하나님을 여호와인 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만 하나님이 기적으로 구원하셨는가 아니다 오늘 이자리에 나와 앉아있는 우리도 하나님의 특별한 기사와 이적으로 인도하여 오늘 여기까지 나와 앉아있게 하시지 아니하였는가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래와 찬양으로 여호와께 드린 것처럼 오늘우리도 시와 찬미로서 하나님께 찬양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이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찬양할 것이다. 또 하나님이 행하신 기사를 이적을 노래로 불러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스펠송을 많이 불러야 한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그 노래를 듣고 동감하게 하여야 하며 그들도 함께 주를 찬양하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둘째 즐거운 마음으로 여호와를 감사하여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감사할 때 그 마음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벌써 한해가 지났나 또 감사절이 왔나 하면서 무엇을 가지고 감사하느냐 하면서 염려하고 근심하며 괴로운 감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즐것운 마음으로 감사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즐거운 마음을 가지면 우리는 즐겁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첫째 여호와의 성호를 자랑하여야 한다. 본문10절에"여호와의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라고 하였다. 본문에 "자랑하라"고 하셨는데 이는히브리어 원어로 "히트할렐루"라고 하는데" 깨끗하다" 또는 "드러나게 하라"라는 뜻의 재귀형으로 "모든 더러움에서 구별하라"또는 "하나님과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는 적극적 신앙에 대한 요청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된 자는 그분의 존귀와 권능과 주권을 시인하고 홀로 기뻐하는 데서 머무르지 아니 하고 적극적으로 그분의 성호를 자랑함으로써 성도들간에 큰 기쁨을 나눌뿐 아니라 불신자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랑이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즐거움을 가져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이들을 가만히 보면 좋은 일을 귀한 일 다른 사람에게 소망하는 일들을 자랑하게 된다.부끄러운 일이나 챙피한 일은 자랑하지 아니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부끄럽고 챙피한 일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일인 것이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갈길을 비추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자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광야에서 굶주릴 때에 하늘문을 여시고 만나를 내려 먹여 주셨으며 고기가 먹고 싶을 때 하나님은 동풍을 불게하셔서 매추라기를 몰아너어 이스라엘 백성들로 먹게 한 일이 아닌가 이런 놀라운 기적을 자랑하지 아니할수있는가 이 일을 행하신 이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이다. 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우리의 일들을 개입하시기를 원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우리가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과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받을 때 우리는 이것이 창피한 일이 아니라 복된일이요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즐거움을 누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본문에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뜻하고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 때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 그로 인해 답답해 한다. 실패를 만나게 된다. 그로 인해 좌절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전도를 해보면 어떤이들은 "지금 이일이 너무 힘들어 이 일이 해결되면 교회에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인것이다.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께 찾아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요청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요청을 외면하시지 아니하시고 도와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문제는 해결되고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본문11절에"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찌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시며 능력의 근원이 되시기를 간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얼굴을 항상 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늘 함께 동행하시기를 간구하는것을 말한다.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살기로 작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들어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 가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언제나 기쁘고 즐겁게 살게 되고 이를 즐겁게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억하여야 한다.

우리가 감사하는것이 무조건적인 감사가 아니라 첫째 우리가 체험하였던 하나님의 놀라운 것들을 기억하면서 감사하여야 하는것이다.본문12절에"그종 이스라엘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 행하신 기사와 그 이적과 그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그 행하신 기사와 이적과 그입의 판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그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역사적인 사건이요 그때 그때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의미하고 있다. 이 세가지는 그들이 직접 몸소 체험한 역사
적인 사건인 것이다. 넘실거리는 홍해를 육지같이 걸어서 건넌 일이며 물이 없어 기갈할 때 반석을 처서 물을 내게 한 것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한 사건이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함께하심이요 역사하심임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이같이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막연한 신앙이 아니라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살면서 삶의 현장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한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일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앞에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일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때 거기서 하나님이 도우시지 아니하셨더면 지금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 하나님이 거기서 어떻게 나를 도우셨는가를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체험한 자들만이 아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인 것이다. 우리는 그때 그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잊어버리지 말자 그 일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신 하나님을 우리도 신앙생활 속에서 체험하여야 한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인 것이다. 하루하루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하면서 살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것을 체험하고 있다.그러나 그때가 지나면 잊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사람은 쉽게 잊어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신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와 축복은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둘째.기억하여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분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본문14절에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땅에 있도다"라고 했다. 여기에 "그의 판단이 온땅에 있도다"라는 말씀은 온 세상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세상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신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다스림에 아멘으로 순종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다스리심을 감사하여야 한다. 그분의 다스림을 받을 때 행복이요 기쁨이요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홀로 주권적이며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 다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근심도 하고 염려도 하고 걱정도 하고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우리는 그져 감사할 뿐인 것이다. 지나놓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우리는 영원히 기억하여야 한다. 본문15절에 "너희는 그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할찌어다"라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약속의 말씀을 가르키고 있다. 그 약속의 내용은 본문 이하에 18절에 "이르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라는 말씀이다. 이는 곧 가나안땅에 대한 약속인 것이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한다. 우리가 주를 믿고 영접하기만하면 영생을 주시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영원토록 잊지 아니하고 기억하면서 이 일을 놓고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하여야 한다. 이것도 하나님앞에 감사하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다윗이 이르는 감사를 한번 드릴 수 있는 귀한 성도가 되시기를 원한다.

여호와의 궤를 매라

역대상 15:10-15

1. 수고의 짐을 지지 않으려는 사람들

세계는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움직이고 발전한다고 교과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타인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여 왔다고 선생님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가 등장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세계는 일하는 자와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사는 사람으로 나뉘어져서 갈등과 투쟁의 싸움터가 되었습니다.
보다 솔직하게 오늘의 현상을 표현한다면, 일하지 않고도 일하는 사람보다 호의호식하는 현상이 심화되면서 사람들은 가급적이면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산업이 발달하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앞으로 쉽게 개선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어려운 일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어려운 일, 힘든 일, 더러운 일을 기피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운 산업체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수고의 짐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니, 수고의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여기는 분위기마저 조성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수고의 짐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2. 수고의 짐이 없으면 위로도 없다.

놀고 먹으려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사회의 분위기가 온통 유흥적이고, 놀자판 일색입니다. 회사에서도 왠 회식들이 그렇게도 많은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사회적 흐름이 교회에도 스며들어서 교회에서도 어려운 일을 맡으려는 사람들이 점차 감소하고 있습니다. 대신 쉽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간단한 예로, 교회의 청소나 관리를 성도들이 나누어서 하지 않고, `사찰'이라는 사람을 별도로 두어서 그 사람에게 전담시키는 행위를 들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교회라고 할지라도 성도들이 나누어지면 어렵지 않은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교회들이 그렇게 변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유희성 프로그램들은 교회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증가 일로에 있습니다. 수고의 짐을 지지 않으려는 사회적 추세의 반영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할 일이 많은 교회에는 성도들의 수효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역사는 일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움직이고 결국은 그들의 승리로 끝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상만을 가지고 사실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의 우리의 이해 태도는 현상보다는 본질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하고,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무런 짐을 지지 않으려는 사람은 자신의 신앙태도를 심각하게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3D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요즈음에 내가 그런 사람은 아니가를 검증해 보아야 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무작정 위로와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짐도 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바리새인들이나 짐을 지지 않으려고 했던 당시의 지도층에게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이라는 욕설을 퍼부으셨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수고의 짐이 없으면 위로도 없음을 절실하게 기억하여야 합니다.

3. 수고의 짐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수고의 짐을 기피하는 이유는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책임이 없는 삶처럼 건조한 것이 또 있을까요 아무런 책임도 없이 이 세상을 살아 간다면 그것은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책임감에 의해서 활동력을 갖게 됩니다. 책임감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수고의 짐이 있어야 활동력을 갖게 되고 움직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수고의 짐은 우리에게 부담이 아니라 살아갈 수 있는 힘의 근원이며, 활동력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일도 없이 살아가는 노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지는 특징은 모두가 눈에 촛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삶에 지쳐서 그런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당장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짐도 없기 때문에 활동력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의욕도 없고 꿈도 없어진 것입니다.
아주머니들이 왜 모여서 수다를 떨까요 그들이 당장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남의 험담이나 늘어놓고,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며, 불평과 불만을 쌓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왜 분열하고 싸우는 것일까요 교회를 위해서 지금 수고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빈 컵에는 먼지만이 쌓이는 법입니다.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서 컵의 사용처는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할 일이 없는 교회는 먼지가 쌓이게 되고 엉뚱한 것이 담기게 됩니다.
수고의 짐이 없는 사람은 위로와 안식도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곳에는 오직 불평과 불만만이 있을 뿐이다. 수고의 짐을 집시다. 되도록이면 무거운 짐을 지도록 합시다. 그것은 못나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람들이기에 져야만 하는 짐인 것입니다.

본 문:23:1-32
구별된사람들 1) 레위 자손의 임무(대상23:2-6)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에게 부여된 독특한 사명과 책임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달란트라든가 은사는 모두가 이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자기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져야 하며, 이 분량에 충실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성도가 지체의 원리를 망각하게 되면 교회의 질서와 조화가 깨어짐은 물론 제구실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본문은 레위 자손의 임무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1. 계수에 포함된 사람들. 주의 일은 아무나 원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계수에 든 사람들, 주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이라야 할 수 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우리 성도들은 자신들의 직분을 귀히 여기고 소홀히 함히 없도록 해야 하겠다. 우리가 이일에 부르심을 받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로 된 것이다.

2. 각자의 임무가 분담됨. 레위 자손들에게는 각자의 임무가 분담되었다. 그들은 아무 일이든 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자신들의 몫으로 분담된 그 일을 해야만 했다.교회 안에서의 성도들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충실한 성도란 지체들로서의 구실을 다하는 성도를 가리킨다. 분량 밖의 자랑을 하는 사람들은 그 몸을 약화시키며, 교회를 교회답지 못하게 하는 대적자의 위치에 서는 것이다.

3. 충성해야 칭찬이 따름. 일을 맡은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이다. 충성해야 인정을 받게 되고,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칭찬과 상급이 따른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맡앗든지 충성하도록 힘쓰라, 일의 분량이 문제가 아니라 충성하는 여부가 문제이다. 많은 것을 맡았어도 불신실한 사람은 적은 것을 맡고 충실한 사람보다 훨씬 못하다
2) 구별된 사람들(대상23:12-20)
사람이라고 모두가 같을 수는 없으며, 일이라고 모두가 같은 일일 수도없다.
착하고 바르게 살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자 못한 사람들도 부지기수로 많이 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이 있는가하면 반대로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는 일들도 잇는 법이다. 본문은 주께서 구별하신 사람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1. 하나님께서 선택하심. 아므람의 아들들은 우리에게 미우 친숙한 사람들이며,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역을 위해 선택하신 일꾼들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꾼들을 친히 선택하여 쓰신다.
아무도 스스로 원하거나 다른 어떤 사람들의 추천에 의해 주의 일꾼이 되지 않았으며,이와같은 사실은 오눌날에도 변함이 없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무슨 직분을 받았든지 주께서 부르셧다는 철저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심. 주께서는 당신의 일에 쓰시기 위해 택하신 사람들을 친히 성결케 하사 직무를 감당할수 있도록 배려 하셨다. 우리가 어디에서 부르심을 받았든지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직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자격과 권위를 부여해 주신다. 때문에 과거의 부끄러운 전력에 연연하지 말고부르심에 합당히 행하도록 힘써야 하겠다.

3. 하나님께서 봉사의 직무를 맡기심. 부르심을 받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주께서 맡기신 봉사의 직무가 있게 마련이다.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제사직을 맡기셨둣이 우리에게도 봉사의 직무를 맡기셨다. 우리가 이에 충실할 때 칭찬과 상급을 받게된다.비록 그 일이 내가 원치 않는 것일지라도 주께서 맡기셨음을 알고 최선을 다하자.
대상 26:1-32
제 목:성물의 관리직

1. 성전의 관리를 맡은 사람들 (1-11)1) 반차를 쫓아서-질서와 짜임새잇는 섬김
2) 밤낮으로 지킴-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인 자신과 자신의 삶을 마귀와 세상 오염으로 부터 잘 지키도록 힘써야 하겠다. 방심하여 귀한 것을 도적 맞게 되면 세속에 물들기 쉽다.
3) 성도는 교회를 지키는 진리의 파수꾼이다.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혼탁할 때 일수록 문지기가 중요하다. 교회의 세속화와 본래적 기능의 상실은 파수군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이다.
4) 그리스도를 지다리는 문지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서 주인을 기다리는 문지기와 같다. (눅 12:35-40)
깨어서 지키는 사람이 주님께서 오실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된다.

2. 각처에서 자기 직무에 충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안에서 지체로서 자기 역할에 충실하도록 힘서야 한다.
모든 지체들이 받은 은사대로 열심히 자기의 일에 충실할때에 교회는 성장하고 교회의 구실을 다할 수 있게 된다. 언제든지 문제는 분량밖의 자랑을 할려는 사람들로 인해서 야기된다.

신앙과 생활의 불일치로 말미암아 그 본래적 능력을 상실하고 잇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신아의 영향력이 파급되어야 한다.

역대상 27:1-34
제 목:왕을 돕는 자들

1. 군대의 조직 (1-15)
이십 팔만 팔천이라는 군대가 있엇다.-
군대는 열두반으로 잘 조직되었다.-조직된 교회의 질서는 일을 효과적으로 해낸다.
매번 번갈아가며 근무하였다.-교회의 봉사도 돌아가며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군사 된 우리들은 항상 좋은 군사가 되도록 힘쓰고 군사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평안하다고 방심하면 안된다-게을리 하면 안된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2. 재산의 관리 (25-31)
소유에 대한 복음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안다.
많이 가진 사람보다 잘 관리 하는 사람이 지헤잇는 사람이요 잘 사는 사람이다.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관리에 실패하면 비유가운떼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을 수밖에
없다. 1) 유사들을 세웠다.-능력을 인정 받은 사람들 이었따.
주님은 우리에게 맡기실 때 우리의 능력을 알고 맡기신 것이다.
잘 관리하여야 한다.
2) 그리스도인은 소유의 개념이 아니다 관리자의 개면을 가져야 하고
성도의 삶은 소유하는 삶이 아니라 나누는 삶이 되어야 한다.

3. 왕을 돕는 자들 (31-34)
영웅은 한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영웅이 되기 까지의 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좋은 조력자를 만나야만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바로서서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잇다.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이든지 좋은 조력자를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요 축복이다.

에수는 우리의 길이요 지혜요 우리의 친구된신다.
우리의 영원하신 돕는자는 오직 주님 에수 뿐이시다.

역대상 28:1-21
제 목:여호와를 향한 열심

1. 여호와를 향한 열심 (1-8)
누구에게 있어서나 열심히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문제는 그 열심히 누구 혹은 무엇을 위한 열심인가 하는데 있다. 좋은 일에 열심을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좋지 못한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도 있다. 우리도 열심을 내되 좋은일 칭찬 받을 일에 그리 하도록 하여야 한다. 본문은 여호와를 위한 다윗의 열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항상 자기를 왕으로 삼으시고 환란가운데서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무엇에든지 그분이 기뻐하는 일을 하려고 힘썼다.
성전 건축을 위하여 필요한 재료들을 준비하고 자기 생전에 이 역사를 이루기를 원했던 것도 바로 여기에 그 까닭이 있다.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였던 사람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던 힘썼던 사람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냈던 사람이 다윗이었다.
우리가 본 받아야 할 훌륭한 신앙이다. 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열심을 낼수 잇는 법이다.
우리의 마음이 그분을 향하여 다윗처럼 뜨겁지 못하다면 신앙에 문제가 잇는 것이다.

2. 철저하고 빈틈없이 (9-19)
사람은 아무나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성실하게 모든일에 임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성경에서 맡은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 성실함 이라고고 증거해준다. (고전 4:2)다윗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모든일에 대하여 성실했던 보기드문 사람이었다. 우리에게도 이와같은 삶의 자세가 요구된다. 능력이나 수완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는 것이 이 성실이며 우리는 우리의 직책에 대한 평가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이 성실성을 인정 받도록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에서 A 플러스 학점은 성실성이다. 지명도나 업적이 이것을 앞서지 못한다.

3. 강하고 담대하라 (20-21)
강하고 용기있게 사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도 훨씬더 가치있는 일을 할수있고 위대한 발자취를 남길수 잇다.
충분히 여력을 가지고 잇을 지라도 용기가 없으면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법이다.
이 세상이라는 격전장에서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용기가 필요하며 이것이 있어야만 세상과 타협하거나 야합하지 않고 주의 뜻을 쫓아 행하게 된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였던 것은 그에게 위임된 성전 건축의 역사가 크고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담대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쫓아서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권면이기도 하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믿음의 성도들이 우리와 함께 함으로 우리는 담대히 할수 있다.

본 문:29:1-30
제 목:성전건축을 예비함
1) 성전건축을 예비함(대상299)
다윗왕은 온 회중을 향하여 솔로몬에게 맡겨진 예루살렙 성전 건축의 대업에 협조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이 전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1).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로서 인생의 일중에 가장 보람차고 거룩한 일이라
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큰 역사(1). 이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권력과 재물로 되는 일이
아니며 재능과 기술로 되는 일도 아니다. 그러므로 수가랴는 말하기를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고 했다.
너무나 거룩한 일이기 때문에 거룩한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2. 솔선수법한 다윗왕(3). 다윗은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렸
노니"라고 고백한다. 다윗은 힘을 다하여 성전 건축예비한다. 먼저 백성들에게 솔선수범을
보이기 위하여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쳤다.
이 봉현의 의미는 소유보다 믿음이 중요하며, 현세보다 내세가 중요하고,
인간보다 하나님이 더 앞서야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3. 성심으로 여호와께 드림(9). "곧 저희가 성심으로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며"(9).
봉헌은 액수의 많음 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억지로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그를 근심하게 하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동방의 의인 욥이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자도 여화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이다"(욥1:21)라고 한 고백은 참된 봉헌정신이다.
2) 족장들의 자진 헌물(대상29:6-9)
다윗왕의 소원은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으나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시고 그의 아들
솔롬몬왕에게 위힘하여 건축하게 하셨으므로 그는 건축 자재와 제반 헌물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서전에 준비하였다.1) 성전건축을 특별히 택한 자로 하게 하셨다. 28:4-6에서 '택하여'란 말이 다섯 번 나온다.
성전건축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를 택하시고 거기서 다시 다윗을 택하시고
다윗의 아들중에서 솔로몬을 택하셨다. 이렇듯이 그리스도를 이땅 위에 보전 건축을
위하여 특별히 솔로몬을 택하셨다.
2) 헌물에 대한 시법(6). 다윗은 먼저 본인이 시범을 보였을뿐더러 지도자급 모든 모든
족장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과 천부장 과 백부장, 왕의 시무 감독들이 억지가
아닌 자원하여 헌물을 즐거이 드렸다.
3) 백성들은 즐거이 드리고 기뻐했다(9)다윗은 헌물을 드리고 또 백성들이 다 즐거이
드리니 기쁨이 충만하였다. 이러한 기쁨과 즐거움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헌물을 바칠 때 나오는 것이다.
다윗의 권고에 따라서 온 백성들도 기쁨으로 자진 헌납하여 막대한 헌물을 바쳤다.
동시에 이 헌물로 인하여 온 백성이 함께 즐거워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하나님의 뜻인
동시에 하나님의 감동감화하신 역사앰에 틀림이 없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써 감동감화를 받아 헌물을 기꺼이 바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 문:대상 8:1-40
제 목:위대한 신앙의 계승

1 위대한 신앙의 계승 (1-28)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 이시기 때문에 신앙의 게승자를 세우사 역사가 바뀔 때마다 위대한 신앙의 게승자를 통해 일하심을 알수 있다. 1) 에훗 (6)
베냐민 지파의 사사로서 이스라엘의 두반째 사사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모압왕 에글론의 억압에서 구해낸 왼손잡이 사사였다. (삿 3:15)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지도력을 발휘하였고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사상이 강한 믿음의 소유자 엿다. 나라가 혼란하고 약할때에 강력한 지도자가 요청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강하고 신앙이 철저한 지도력있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 양성되고 배출되어야 한다.
2) 후심 (11)
이는 여자엿으나 그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였고 소외되고 약한 여인으로써 여호와 신앙을
계속 게승하고 택하신 백성을 반성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하나님은 약하고 소외된 사람을 보호 하시고 (살전 5:14, 고전 1:27) 축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창 21:18) 하나님은 오늘도 교회를 통하여 한늘나라의 자녀들이 번성하시기를 바라시고 소외
되고 억눌린 사람들의 편에서 보호 하시고 위로하심을 알고 용기를 얻어야 한다.
3) 여호람 (27)
여호람의 아들들은 다 족장들이 되어 이스라엘 소수민족을 이끌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표권을 주시고 민족을 이끌게 하사 풍전등화와 같은 이스라엘 신앙의
유산과 국가의 존립을 위임 하셨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시기에 맞는 인물을 세우사 지도자로 세우시고 그로 하여
금 하나님의 뜻을 펴시며 위대하신 뜻을 구체화 하심을 우리는 믿고 위대한 신앙의 계승자가
되기위한 그릇을 준비해야 한다.

2. 성공과 실패 (29-40)-선택받았으나 실패한 사울-
이스라엘의 혼란기에 사울은 하나님께로부터 택하심을 받고 왕이 되었다. 그러나
사울은 사사시대때 사사가 내리던 지파 소집령을 발동하고 (삼상10:17)
제사장들의 소관인 제사를 직접 집행하고 (삼상 13:9)
에언자들과 같은 행동을 하였다. (삼상 10:10-12:19)
결국 사울은 백성들의 신임을 상실하고 ,제사장들을 학살하고 자기의 임의대로 행함으로 사무엘과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결국은 파멸을 가져오게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과 게획은 변함이 없으나 인간의 악행과 교만으로 파멸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고 사명을 받는것도 중요하나 보다 중요한 것은 사명을 겸손히 그리고 성실히 순종하고 따르는 일이다.
제 목:다윗의 감사
말 씀:대상16:7-15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아니하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은혜를 받으면서도 그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통하여 감사를 받으시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감사하여야 하는가 물론 사람들마다 감사의 방법이 다르지만 가장 하나님이 원하는 감사의 방법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은 다윗의 감사를 통하여 우리는 감사의 방법을 한번 생각하고자 한다. 본문7절에 "그날에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세워 위선 여호와께 감사하게 하여 이르기를 "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왕이신 다윗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방법을 제사장들에게 명하고 있는 말씀이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하여"다윗이 이르는 감사의 방법"이란 제목으로 잠시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 그 행사를 만민중에 알게 하여 감사하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를 감사하여야 하는데 감사한 이유를 분명히 밝혀서 감사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본문8절에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중에 알게 할찌어다"라고 하셨다. 여기에 그 행사를 만민중에 알게 하는것도 감사의 하나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첫째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아뢰어야 한다. 본문에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라고 하는 말은 "그 이름을 선포하며"라는 말로도 해석이 되는 말이다. 이는 감사의 대상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많은 감사의 대상이 있지만 그중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아뢰므로 내가 감사는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기도를 시작할 때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하고 있다. 이같이 우리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때도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하는것을 알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행사를 알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본문에 "그 행사를"이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기사와 이적과 축복과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마음속으로만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내 입술로 그 감사의 조건을 고백할 때 내 감사가 하나님 앞에 상달될 뿐만 아니라 나와 똑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줄 알지 못한 이들에게 감사할 수 있도록 깨닫게 하여 주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만민중에 알게 하여 감사하여야 하여 한다. 여기에 "알게 하여"란 광고하여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행하신 기적이 무엇이 있는가 한번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기적이 아닌가 우리가 진정으로 생각하여 보자 하나님의 지켜주심과 보호하심이 아니면 어떻게 이 하루 하루를 살아갈 수 있겠는가 또 우리는 매일 매일 만나는 어려운 일들을 정말 하나님의 행해 주시는 기사와 이적으로 살아온것이 아닌가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하나님의 축복이요 어려운 일은 어려운 일대로 하나님의 도움을 덧입고 살게 하지 않는가 실패하여도 넘어저도 그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지 아니한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가 우리 입술로 고백하여야 하는 것이다.
셋째 우리는 어떻게 이하나님의 행사를 알게 할 수 있는가 본문9절에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 모든 기사를 말할찌어다"라고 하였다. 본문에"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행하시는 기사와 이적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노래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행하신 기사와 이적이 무엇인가 신4:33 이하에 보면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 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왁게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여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기사와 이적은 말로 할수없음을 말하고 있다.이들의 노래와 찬양을 통하여 온세상 만민이 하나님을 여호와인 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만 하나님이 기적으로 구원하셨는가 아니다 오늘 이자리에 나와 앉아있는 우리도 하나님의 특별한 기사와 이적으로 인도하여 오늘 여기까지 나와 앉아있게 하시지 아니하였는가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래와 찬양으로 여호와께 드린 것처럼 오늘우리도 시와 찬미로서 하나님께 찬양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이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찬양할 것이다. 또 하나님이 행하신 기사를 이적을 노래로 불러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스펠송을 많이 불러야 한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그 노래를 듣고 동감하게 하여야 하며 그들도 함께 주를 찬양하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둘째 즐거운 마음으로 여호와를 감사하여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감사할 때 그 마음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벌써 한해가 지났나 또 감사절이 왔나 하면서 무엇을 가지고 감사하느냐 하면서 염려하고 근심하며 괴로운 감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즐것운 마음으로 감사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즐거운 마음을 가지면 우리는 즐겁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첫째 여호와의 성호를 자랑하여야 한다. 본문10절에"여호와의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라고 하였다. 본문에 "자랑하라"고 하셨는데 이는히브리어 원어로 "히트할렐루"라고 하는데" 깨끗하다" 또는 "드러나게 하라"라는 뜻의 재귀형으로 "모든 더러움에서 구별하라"또는 "하나님과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는 적극적 신앙에 대한 요청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된 자는 그분의 존귀와 권능과 주권을 시인하고 홀로 기뻐하는 데서 머무르지 아니 하고 적극적으로 그분의 성호를 자랑함으로써 성도들간에 큰 기쁨을 나눌뿐 아니라 불신자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랑이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즐거움을 가져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이들을 가만히 보면 좋은 일을 귀한 일 다른 사람에게 소망하는 일들을 자랑하게 된다.부끄러운 일이나 챙피한 일은 자랑하지 아니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부끄럽고 챙피한 일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일인 것이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갈길을 비추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자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광야에서 굶주릴 때에 하늘문을 여시고 만나를 내려 먹여 주셨으며 고기가 먹고 싶을 때 하나님은 동풍을 불게하셔서 매추라기를 몰아너어 이스라엘 백성들로 먹게 한 일이 아닌가 이런 놀라운 기적을 자랑하지 아니할수있는가 이 일을 행하신 이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이다. 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우리의 일들을 개입하시기를 원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우리가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과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받을 때 우리는 이것이 창피한 일이 아니라 복된일이요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즐거움을 누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본문에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뜻하고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 때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 그로 인해 답답해 한다. 실패를 만나게 된다. 그로 인해 좌절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전도를 해보면 어떤이들은 "지금 이일이 너무 힘들어 이 일이 해결되면 교회에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인것이다.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께 찾아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요청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요청을 외면하시지 아니하시고 도와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문제는 해결되고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본문11절에"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찌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시며 능력의 근원이 되시기를 간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얼굴을 항상 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늘 함께 동행하시기를 간구하는것을 말한다.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살기로 작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들어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 가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언제나 기쁘고 즐겁게 살게 되고 이를 즐겁게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억하여야 한다.

우리가 감사하는것이 무조건적인 감사가 아니라 첫째 우리가 체험하였던 하나님의 놀라운 것들을 기억하면서 감사하여야 하는것이다.본문12절에"그종 이스라엘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 행하신 기사와 그 이적과 그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그 행하신 기사와 이적과 그입의 판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그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역사적인 사건이요 그때 그때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의미하고 있다. 이 세가지는 그들이 직접 몸소 체험한 역사
적인 사건인 것이다. 넘실거리는 홍해를 육지같이 걸어서 건넌 일이며 물이 없어 기갈할 때 반석을 처서 물을 내게 한 것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한 사건이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함께하심이요 역사하심임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이같이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막연한 신앙이 아니라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살면서 삶의 현장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한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일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앞에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일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때 거기서 하나님이 도우시지 아니하셨더면 지금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 하나님이 거기서 어떻게 나를 도우셨는가를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체험한 자들만이 아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인 것이다. 우리는 그때 그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잊어버리지 말자 그 일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신 하나님을 우리도 신앙생활 속에서 체험하여야 한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인 것이다. 하루하루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하면서 살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것을 체험하고 있다.그러나 그때가 지나면 잊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사람은 쉽게 잊어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신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와 축복은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둘째.기억하여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분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본문14절에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땅에 있도다"라고 했다. 여기에 "그의 판단이 온땅에 있도다"라는 말씀은 온 세상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세상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신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다스림에 아멘으로 순종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다스리심을 감사하여야 한다. 그분의 다스림을 받을 때 행복이요 기쁨이요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홀로 주권적이며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 다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근심도 하고 염려도 하고 걱정도 하고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우리는 그져 감사할 뿐인 것이다. 지나놓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우리는 영원히 기억하여야 한다. 본문15절에 "너희는 그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할찌어다"라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약속의 말씀을 가르키고 있다. 그 약속의 내용은 본문 이하에 18절에 "이르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라는 말씀이다. 이는 곧 가나안땅에 대한 약속인 것이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한다. 우리가 주를 믿고 영접하기만하면 영생을 주시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영원토록 잊지 아니하고 기억하면서 이 일을 놓고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하여야 한다. 이것도 하나님앞에 감사하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다윗이 이르는 감사를 한번 드릴 수 있는 귀한 성도가 되시기를 원한다.

다윗의 감사와 찬송
본 문:대상 29:10-17

추수감사절은 가인과 아벨이 농사지은 첫열매와 가축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드림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창 4:3,4). 그후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 햇곡식을 하나님께 드린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때 그들은 초막을 짓고 일주일간 절기를 지켰습니다(신16:13). 현대에 와서는, 종교적 핍박을 피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추수를 하고 감사를 드리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감사절에 우리만 좋아해서는 않됩니다. 사랑의 손길로 우리 이웃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고난중에 있는 이웃에게 우리 것을 나누어 줄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합니다(10-13절).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라고 이야기 합니다(14문17절). 다윗은 온 회중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합니다(10절).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송축이란 극상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말합니다.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여호와께 속하였다고 하면서 큰 영광을 돌립니다(11절). 그러면서 자신과 백성을 낮춥니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14절)라고 겸손히 말합니다.

우리가 잘나서 우리가 인정이 많아서 드린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다시 드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드려도 머리를 들고 행세를 하려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다윗과 백성이 즐거워 합니다(17절). 자원해서 즐거이 드렸으므로 기뻐합니다.

다윗은 40년간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습니다. 이 기간에 이스라엘 이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다윗과 그의 백성은 자기들이 저축한 모든 물건을 드린 것입니다(16절). 이때 다윗은 정직한 마음으로 드렸다고 말합니다(17절). 은혜 받은대로 사심없이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튿날 여화와께 제사를 드립니다. 수송아지 수양 어린양 일천마리씩 번제로 드립니다. 풍성한 제물을 드리고 무리가 크게 기뻐하여 여호와 앞에서 먹으며 마셨습니다(21,22절).

다윗과 그의 백성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시는 억만가지 은혜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나를 살리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지옥 형벌을 받아야할 나를 자신의 친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감사절을 맞이해서, 다윗과 그의 백성의 감사와 기쁨과 만족이 우리 성도들의 가정과 일터위에 넘치기를 원합니다.

찬송에 익숙한자
본 문:대상 25:1-7

하나님의 자녀는 찬송에 익숙해야 합니다. 언제나 그리고 무슨 일에나 찬송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첫째로 모든 일이 잘되어 의기양양할 때(득의의 날) 찬송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해야할 이유는 첫째 그것이 정직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것이 지혜로운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들은 득의의 날에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기보다 인간만세를 부르기에 약삭빠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는 배신행위요, 자신에게는 어리석은 처사인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한량없는 은혜를 입고 살아온 인간으로서 또 앞으로도 은혜를 입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너는 일에 성공했던 득의의 날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정직과 지혜를 잊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득의의 날에 찬송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도우심이 없이도 그러한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실의의 날에도 우리는 찬송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그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믿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진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실의란 무엇입니까 실의란 자기 좌절에서 오는 어두운 감정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엄격한 의미에서 실의란 있을 수 없으며,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불평이나 불만거리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상일은 내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완전히 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옥중에서도 찬송하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감옥에 갇힌 것은 빌립보 지역을 전도하는 일에 종지부가 아니라 오히려 시발점이 되었던 것을 기억해야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선의에 빠지려 할 때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줄로 믿고 그때 찬송하기를 잊지 맙시다.(롬8:28)

세째로 죽음의 날에도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은 가장 비통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 죽음이 다르게 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은 천국에의 이민이며 피곤한 세상일에서 휴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기게 하나님의 자녀들은 시체를 앞에 두고서도 기쁜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여유를 갖게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남의 죽음 앞에서 그렇게 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찬송하기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다음 찬송하면서 감람산으로 나가셨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의 날에도 찬송을 잊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처럼 해야 한다는 교훈이 바로 여기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불평, 불만에 익숙해지면 좋은 일에나 그렇지 못한 일에 얼마나 불만을 토하게 됩니까 그러나 찬송에 익숙하다고 하면 득의의 날에나 선의의 날에나 죽음의 날에도 찬송이 흘러 넘칩니다. 땅위의 생활에서 찬송에 익숙해진 자라야 천국의 생활에도 낯설지 않게 될 것이요, 성도는 모름지기 찬송에 익숙해질 것입니다.
오늘날 누가 즐거이 드리겠느냐
본 문:대상 29:1-9

행복론이란 책에 보면 행복한 사람은 항상 감사하는 사람이요, 불행한 사람은 불만을 품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또한 어거스틴은 믿음, 소망, 사랑에 한가지를 더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감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을 뵈올때 먼저 "감사합나다"라고 고백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감사는 인격의 척도요, 신앙의 척도입니다. 고상하고 믿음이 큰 사람만이 감사를 할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감사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감사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11월 감사의 달을 맞이해서 만가지 은혜에 대해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건 안보이는 것이건, 기억에 남는 것이건, 남지않는 것이건 모든것에 대해 감사하시기를 원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실제로 부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더 많이 감사할 것들을 주십니다. 감사는 감사를 낳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다윗왕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양을 치던 목동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이제는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을 지으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2절). 그는 자기의 사유의 금, 은으로 드렸습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다가 드린것이 아니라 자기 소유의 금, 은을 드렸습니다(3절). 금 삼천 달란트(약595억원), 은 칠천 달란트(약 140억원)를 즐거이 드렸습니다. (4절)백성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좋은 본을 보인 것입니다. 다윗의 이런 모습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사역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하늘의 길을 열어 놓으신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도 자발적으로 헌신과 감사의 본을 이웃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오늘날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5절) 이말은 자신의 재산을 드린후 백성을 향하여 하는 말입니다. 누가 있는 힘을 다해 즐거운 마음으로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모든 지도자들이 기쁘게 드렸습니다(6절). 백성들도 "성심"으로 즐거이 드렸습니다(9절). 강제로가 아니라 성심성의껏 드렸습니다. 다윗왕은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였습니다(9절).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 이웃을 휘해, 성심성의껏 즐거이 드려야 하겠습니다.

지난번 바자회를 통해서 이웃돕기 기금이 마련되었을때 모두들 무척 기뻐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것보다 복이 있는 것입니다(행20:35). 금번 감사절을 맞이하여, 다윗과 그의 백성이 하나님께 즐거이 드리고 기뻐하였듯이 우리도 여호와께 감사함으로 드리고,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온전한 교회

대상28:5-10, 엡4:11-16

1980년대의 한국 교회는 어떠한 교회였습니까 한 마디로 80년대의 한국 교회의 특징을 말한다면 그것은 성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성장을 보인 10년이었습니다. 물론 이 성장이란 것은 양적으로 대형 교회가 많이 형성되고, 숫자적으로 많은 수의 교회가 는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한국 교회가 그토록 성장하게 된 요인은 우선 외형적인 요인으로서는 한국 경제 성장이라고도 합니다. 한국의 경제 성장은 한국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가져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장 위주의 한국 경제가 지금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처럼, 성장 위주의 한국 교회에도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경제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난 '70년대와 '80년대에 걸친 20년간은 줄 곧 오직 경제 성장에만 줄달음질을 쳤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경제 정의라든지, 분배 문제, 혹은 복지 문제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가치관을 오직 경제 성장에만 집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성장 위주의 경제의 헛점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이것은 시대 풍조에 따라서 교회 성장 위주의 목회를 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 성장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꿩 잡는 것이 매다"라는 사고 방식으로, 그리고 "어떤 길로 가든지 간에 서울에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정상을 향해서 달음질을 쳤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한국 교회가 성장 위주의 목회로 된 또 다른 요인은 미국 교회의 영향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죤 맥아더 목사님은 일부 미국 교회의 성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미국 교회는 교회에 사람을 모이는데 몰두해 왔습니다. 교회의 중요한 관심은 교인 수에 있었습니다. 목회에 있어서의 성공은 거리에 쓰러져 버림받고 있는 사람들보다는 교회의 건물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느냐 그 숫자의 많고 적음에서 결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교회에 많이 모여들게 하기 위해서 온갖 종류의 경쟁을 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 모양의
시상을 하고, 많은 전략을 세웠습니다. 누가 가장 많은 사람을 모여들게 하는가 하는 교회 들간에 경쟁들조차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교회는 여흥(재미있는 놀이)에 치중해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고 있는 일이 재미있는 것이라면, 사람들이 모여 옵니다. 모든 사람들이 교회가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흥미 있는 것을 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교회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내놓고 헌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은 잠시 그들을 즐겁게 하고, 아무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간증에만 귀를 기우리고 흥미 있어 합니다. 그리고 그 간증 자에게 몇 푼의 달러를 지불할 뿐입니다." John Macarthur 목사님의 이같은 말씀은 교회의 외적 성장, 숫자 놀음에 치중되어 있는 교회를 무섭게 비판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목청을 높여 하는 말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군중들을 교회에 모여들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의 목표는 성도들을 즐겁게 하고, 그들을 응석받이로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되돌아가야만 합니다"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MacArthur 의 비판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오해해서도 안됩니다. 사람들을 교회에 인도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들을 말씀으로 온전하게 키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말씀으로 든든하게 양육시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생활, 즉 말씀을 생활화하는 교인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금년도 우리 교회 표어는 말씀으로 온전하게 세워지는 교회입니다.
이 말씀은 지난해에 이어서 금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입니다. 이 표어는 내년 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말씀으로 온전하게 세워지는 교회" 이 표어에는 "교회 갱신"의 의지를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같은 교회 갱신의 의지는 종교개혁에까지 소급합니다. 마틴 루터 선생님과 죤 칼빈 선생님의 개혁정신은 말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오로지 말씀(solo Scripture)! 말씀을 새롭게 밝힘으로서 그 당시 부패한 교회를 새롭게 갱신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어떻게 달라져야 합니까
분명히 한국 교회는 새로워져야 하는데, 어떻게 새로워져야 하는가
그 동안 한국 교회의 성장이 잎이 무성한 교회였다고 감히 말한다면, 이젠 열매가 열려야 하고, 또한 그 열매가 영글어야 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을 저는 성숙한 교회! 혹은 [온전한 교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열매가 열리고, 그 열매가 영그는 성숙한 교회, 온전한 교회로 달라져야 합니다.
교회를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온전하게 되려면 우선 성도들이 온전하게 되어야 합니다.
엡 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란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의 목표는 그의 백성이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5:48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본적 표준은 온전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진실로 원하시는 것은 당신의 백성이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전함]이란 무엇입니까 결점이 없고 완전한 것을 말합니다. 성서 원어(헬라어 카타르티조)의 뜻은 "충분히 준비되고 자라나고, 완전하고, 충분히 성숙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문 상태 알찬 상태를 말합니다.
이 온전함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엡4: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 한데까지 이르리니"
그리하여 어린아이처럼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서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를 아는 성숙한 상태에 이를 때, 비로소 우리는 어떠한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고, 사람들의 궤술, 다른 이단 사상의 풍조에 요동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일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요한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증언했습니다."안다는 것"은 경험하여 보고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안다는 것은 그와 만나고, 그와 사귐을 통해서 교제하므로 그를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분을 만나고 그분과 같이 사귀고 교제를 나누면서 알게 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의 아들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속에 하나님이 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우리가 진실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고, 그와 사귐을 통해서 그와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그의 아들을 참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영생이고=구원이고=죽었던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왜 자라지 못합니까 왜 온전히 자라지 못하는가 그것은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생명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아버지를 아는 참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과의 사귐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게 하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온전하게 자라게 하는 양식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함이니라"고 합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교회 속에 말씀의 봉사자들을 세워 주셨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하며...."
ⓐ 사도: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
ⓑ 선지자: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선포하는 자(사도적 말씀)
ⓒ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이들 모두 말씀을 선포하고,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말씀으로 돌보고, 양들을 치고 인도하는 말씀의 봉사자들입니다. 교회의 성도들을 온전히 세우는 일에 말씀으로 봉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과제가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 우리 교회가 진실로 [말씀으로 온전하게 세워지는 교회] 가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말씀으로 온전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 일을 위해 한해 앞으로 90년대를 살아가면서 힘쓸 수 있기를 진실로 원합니다. 말씀으로 우리 각자가 새로워지고, 우리 가정이 새로워지고, 따라서 우리 교회가 새로워져서 [온전한 교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 일
을 위하여 기어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과의 사귐입니다. 말씀 경험하고 말씀 읽고 명상하고 말씀 연구하고 말씀을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가정 성경 통신-매일 최소한 성경 한 장을 읽는 일, 식구들과 함께-"가정 예배"를 통해 말씀과 사귐을... (가정 예배 지침서를 참고한다), 구역 식구들과 함께-"구역 예배"를 통해 말씀과 사귐을, 교회에 나와서 성경 공부하는 일-여러 가지 종류의 성경공부반을 개설하려고 합니다. 이미 시작한 학습 반에-원입 교인들을 참여해서, 학습 교인들은 세례 반에서, 세례 교인들은 청치기반에서, 주제별, 착별, 인물별, 기타 소집단 성경 공부 반을 개설하려고 합니다.
여하한 일이 있어도 이 일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있어야 하고, 정성을 들어야 합니다.
교인 중에는 신앙 생활에 기쁨도 없고, 열심도 없고, 도무지 신앙 생활에 진전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몇 가지 질문을 합니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여합니까
설교 말씀을 정성을 다해 경청합니까
매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습니까
그 말씀을 따라 실천하며 살려고 노력합니까
매일 기도 생활을 합니까
대부분의 경우 모든 질문에 "아닙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신앙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기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열심을 낼 수가 없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기쁨으로 단을 거둘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루에 가장 귀중한 시간을 "말씀과의 사귐"을 위해 할애하십시다. 사람들과 말하고, 사귐을 갖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내 놓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궤를 매라
본 문:역대상 15:10-15

1. 수고의 짐을 지지 않으려는 사람들

세계는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움직이고 발전한다고 교과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타인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여 왔다고 선생님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가 등장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세계는 일하는 자와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사는 사람으로 나뉘어져서 갈등과 투쟁의 싸움터가 되었습니다.
보다 솔직하게 오늘의 현상을 표현한다면, 일하지 않고도 일하는 사람보다 호의호식하는 현상이 심화되면서 사람들은 가급적이면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산업이 발달하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앞으로 쉽게 개선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어려운 일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어려운 일, 힘든 일, 더러운 일을 기피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운 산업체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수고의 짐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니, 수고의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여기는 분위기마저 조성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수고의 짐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2. 수고의 짐이 없으면 위로도 없다.

놀고 먹으려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사회의 분위기가 온통 유흥적이고, 놀자판 일색입니다. 회사에서도 왠 회식들이 그렇게도 많은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사회적 흐름이 교회에도 스며들어서 교회에서도 어려운 일을 맡으려는 사람들이 점차 감소하고 있습니다. 대신 쉽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간단한 예로, 교회의 청소나 관리를 성도들이 나누어서 하지 않고, `사찰'이라는 사람을 별도로 두어서 그 사람에게 전담시키는 행위를 들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교회라고 할지라도 성도들이 나누어지면 어렵지 않은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교회들이 그렇게 변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유희성 프로그램들은 교회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증가 일로에 있습니다. 수고의 짐을 지지 않으려는 사회적 추세의 반영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할 일이 많은 교회에는 성도들의 수효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역사는 일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움직이고 결국은 그들의 승리로 끝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상만을 가지고 사실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의 우리의 이해 태도는 현상보다는 본질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하고,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무런 짐을 지지 않으려는 사람은 자신의 신앙태도를 심각하게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3D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요즈음에 내가 그런 사람은 아니가를 검증해 보아야 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무작정 위로와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짐도 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바리새인들이나 짐을 지지 않으려고 했던 당시의 지도층에게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이라는 욕설을 퍼부으셨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수고의 짐이 없으면 위로도 없음을 절실하게 기억하여야 합니다.

3. 수고의 짐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수고의 짐을 기피하는 이유는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책임이 없는 삶처럼 건조한 것이 또 있을까요 아무런 책임도 없이 이 세상을 살아 간다면 그것은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책임감에 의해서 활동력을 갖게 됩니다. 책임감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수고의 짐이 있어야 활동력을 갖게 되고 움직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수고의 짐은 우리에게 부담이 아니라 살아갈 수 있는 힘의 근원이며, 활동력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일도 없이 살아가는 노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지는 특징은 모두가 눈에 촛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삶에 지쳐서 그런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당장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짐도 없기 때문에 활동력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의욕도 없고 꿈도 없어진 것입니다.
아주머니들이 왜 모여서 수다를 떨까요 그들이 당장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남의 험담이나 늘어놓고,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며, 불평과 불만을 쌓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왜 분열하고 싸우는 것일까요 교회를 위해서 지금 수고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빈 컵에는 먼지만이 쌓이는 법입니다.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서 컵의 사용처는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할 일이 없는 교회는 먼지가 쌓이게 되고 엉뚱한 것이 담기게 됩니다.
수고의 짐이 없는 사람은 위로와 안식도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곳에는 오직 불평과 불만만이 있을 뿐이다. 수고의 짐을 집시다. 되도록이면 무거운 짐을 지도록 합시다. 그것은 못나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람들이기에 져야만 하는 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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