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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빌라도와 예수 (사 53:1-6, 눅 23:1-12)

첨부 1


지금은 고난주간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과 의미를 명상하며 그에동참하며 살아가는 계절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결정적 작용을 한 사람은 빌라도이다. 그가 원했던, 원치 않았던 역사적 책임은 그에게 있다. 그래서 오늘은 빌라도와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설교하고저 한다.

"네가 유태인의 왕이냐" (누가 23:2-3)
이것은 자신의 법정에 선 예수에게 물은 빌라도의 심문내용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고발장에 기록된 것을 가지고 사실확인을 하기위해 물은 것이다. 당시 유대인의 최고의회인 산헤드린은 예수를 다음과같은 내용의 죄목으로 빌라도 법정에 고발했다.
"우리는 이 사람이 백성들에게 소란을 일으키도록 선포하며, 카이사에게 세금을 못바치게 하고, 자칭 그리스도요 왕이라고 하기에 붙잡아 왔습니다"(누가 23:2-3)
산헤드린의 지도자들은 주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었다. 그런데그들은 예수를 민란을 일으키는 선동가로 고발했다. 카이사에게 세금을바치지 않도록 의식화운동을 한 죄인으로 고발했다. 이것은 반체제 운동가라는 뜻이다. 유대인으로서는 로마에 더 이상 착취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유익할텐데 도리어 예수를 반로마 독립운동가라고 유대인들이 고발한 것이다.

타락한 사회의 특징은 반대자들을 정치적 음모로 제거하는 것이다. 간첩과 내통했다든지, 용공좌익분자라든지, 이적행위자라든지, 하는 정치적누명을 씌워 제거하는 것이다.

타락한 사회의 또다른 특징은 사람들은 무사안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누가 어떤 음모에 의해 희생되든 제발 조용하게 살고 싶으니 그에 개의할것 없다는 심리이다.

타락한 사회의 세번째 특징은 자신의 입신출세를 위해서는 옥석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시세에 따라, 자신의 안전을 위해 요령껏 처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빌라도도 예수가 무죄함을 알면서도 카이사의 충신이되고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광주 학살의 주범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국은 분명히 광주사태가 민란이 아니라 민주화 과정에서 빚어진 비극이라규명했다. 그런데 수천, 수백명의 인명 살상의 주범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김현희의 KAL폭파에 의해 수백명 근로자와 공직자들이 몰살되었다.
그런데 김현희는 자수했다는 이유로 지금 이 땅의 명사가 되어 TV에 출연하고 있다.

2천년전의 유대 사회와 오늘의 한국 사회가 시대와 장소는 분명히 다르면서도 비슷한 양상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땅에서는 이와같은 정치적 음모가 자행되고 있지는 않는지 지난 40년간 이 땅에서는이와 같은 숫한 정치적 희생자들이 한을 품은 채 땅에 묻혀 있음을 부인할수 없다.

(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서로 반목하고 지냈지만 바로 그 날 다정한친구가 되었다"(누가 23:12)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의 죽음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예수가 갈릴리출신이라는 사실에 착안 그곳 통치권자인 헤롯에게 그 처리를 넘겼다. 경쟁관계에 있는 그들이었지만 예수의 죽음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의 존재와 권위를 존중하며 지냈다.

권력의 생리란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친구가 되고,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권력 앞에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원수도 없다. 필요에 따라 원수도 되고 친구도 된다. 이 땅에서 벌어지는 정당의이합집산도 이와 같은 권력의 생리에 따라 생멸하고 있다. 어제까지 반민주적 집단이라고 매도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작이 합당하여 새 시대의 주인으로 자처하는 것도 빌라도와 헤롯의 생태와 다를 바가 없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이와 같은 불의한 세력들의 음모와 결탁에 의해자행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잔악한 고문과 무자비한 학대의고통이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그들이 과연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처형했다면 그와 같은 잔인무도한 방법으로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응분의 예우를 갖추는 것이 우리네 상식이다.

"셈메셋 모음"은 그의 작품 "빌라도"에서 빌라도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의 꿈이 사라짐과 함께 총독의 자리에서마저 파직되었다고 한다. 무료히난시질로 세월을 보내던 어느날 난시줄에 끌려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기록하였다. 헤롯도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좀이 먹혀"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무죄한 줄 알면서 자신의 권익을 위해 불의한 무리들과 결탁한 빌라도와헤롯이 오늘 이 땅에도 수많이 활개치며 다니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것이다. 그들의 운명도 빌라도나 헤롯에 다를 바가 없음을 주지해야 한다.

(3)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인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요한 18:36-37)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빌라도의 심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었다. 예수는 진리의 나라를 건설하는 메시야였다. 그 진리 때문에 왔으며죽었다. 예수가 증언한 진리가 무엇인가

인간을 자유하게 하는 것은 진리이고 인간을 구속(구속)하는 것은비진리이다. 인간은 예속과 자유 사이에 존재한다. 예속의 길에 서면 비진리에 속하게 되고 자유의 길에 서면 진리에 속하게 된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시리라"(요한 8:31-)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로마 8:15)
벧자예브(N. Berdjaev)는 사람의 의식세계를 세 단계로 구분하였다.
노예의식, 주인의식 그리고 자유인의식의 세가지이다. 노예의식은 죽음의의식이다. 주인의식은 남의 위에 군림하는 지배의식이다. 자유인의식은

스스로의 의무와 권리를 지키고 이행하는 의식이다. 자유인의식만이 사람이지녀야 할 건전한 의식이다.

사람은 믿음으로 살면 살고 불신앙으로 살면 멸망하다는 것이 성서적 진리이다. 성서는 사람은 모두가 죄인으로 고발하고 있다. 죄인의 용서는 오직 믿음으로 성취된다. 이것은 사도들의 신앙이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 개혁자들의 신앙이기도 했다. 실상은 예수 자신도 단언한 진리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사람은 칼을 쓰면 망하고 사랑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는것이 진리이다.(요한1서 3:14) 사랑만이 믿음의 완성이다. 사랑만이 현실세계에서의 부활을 가능케 한다. 그래서 미움은 죽음이요 사랑은 부활(E.
Fromm)이라고 말한다.

도스토예브스키는 "지옥이란 사랑할 수 없는 것"(카라마죠프의 형제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다른 책에서 "사랑이란 사람이 자기자신을 보는거울"(악령)이라고도 말했다. 지옥에서 천국에의 탈출(출애굽)은 사랑으로가능하다. 사람은 그가 누구를 사랑하며, 어떻게 사랑하는가에 따라 그의인격이 측정된다.

지금은 예수의 고난을 명상하며 자신의 몸에 채우는 계절이다. 사람으로서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는 길은 형제를 사랑하는 길 밖에 없다. 그것만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우는 길이기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이 일에 실패하면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

빌라도는 이 진리를 몰랐다. 그가 아는 것은 자신의 통치권의 안정과더 큰 출세 뿐이었다. 그에게는 진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에게있어서는 진리가 목숨을 주고서라도 구현해야 할 지상과제였다. 빌라도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예수 편에 설 것인가 빌라도 편에 서는 사람들은믿음을 저버린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들이다. 예수 편에 서는 사람들은 진리의 사도들이다. 빌라도 편에 서는 사람들은 현실안주, 자기안전에 급급하고 예수 편에 서는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도 진리를 증거하며 산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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