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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샤론의 꽃 (아 0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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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고 온 대지에 꽃이 만발하고 있습니다. 봄이 오면 들에서, 꽃밭에서, 산에서, 그리고 시골집 화단에서, 정원에서, 집안 거실에 놓아둔 화분에서, 심지어 감옥 담장 밑에서까지 꽃은 피어납니다. 이 세상의 자연이 우리 인간의 삶에 어느 하나 의미를 주지 않는 것이 없지만 특히 꽃처럼 인간의 정서에 순수하고 아름다운 의미와 깊은 고요를 주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성서에서 꽃은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해도 종래는 시들고 쇠하여짐을 상기시키면서 인생의 영화도 그렇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런 교훈은 중요한 것입니다. 꽃이 시들 때처럼 추하게 보이는 것이 없고 우리가 화려하다고 생각하는 인생의 영화가 종래는 그렇게 시드는 것을 볼 때, 잠깐 피는 영화에 연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시드는 꽃에서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솔로몬의 영화도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으니 우리의 영화는 꽃보다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꽃이 시들기 전까지의 일생을 사는 것을 보면 우리 인간의 삶에 주는 기쁨이나 의미는 상당히 크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 꽃의 긍정적인 삶을 음미해보며, 그 속에 있는 신앙적 의미를 새겨 보려 합니다. 또한 자연은 신앙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통 생각하는데, 이를 통해 자연과 신앙이 깊은 관계가 있음을 깨닫고 더 나아가 온 자연과 더불어 인간이 하나님께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길을 배우려고 합니다.

먼저 꽃은 인간에게 아름답다는 마음과 사랑스런 마음을 인도해 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손에 창조된 인간이 깊은 잠 속에서 깨어나서 창조된 동산을 신기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면서 다닐 때 맨 처음 꽃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었겠습니까

제가 83년도에 스위스를 처음 여행했을 때 아마 Eaux-Vives 공원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파란 잔디 위에 아름답게 꽃이 피어있는 모습을 보고는 처음으로 "아름답다"는 형용사가 어떤 것인지 비로소 실감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에덴동산을 거닐던 아담과 하와도 꽃을 보고는 슬프다, 외롭다, 괴롭다는 감정을 경험하기 전에 먼저 아름답다는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때 이래로 인간은 꽃들을 대할 때마다 어떤 잠재된 어두운 감정을 표출하기 전에 먼저 아름답다는 감정을 나타내어 왔을 것입니다. 또 인간은 과연 사랑이란 것을 누구에게서 배웠겠는가 생각해 보면 아마 꽃에게서 배웠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꽃 한송이를 바치면서 사랑의 고백을 하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렇듯 꽃은 우리 인간의 정서에서 슬프고 괴로운 어두운 면 보다는 아름답고 밝고 그래서 선해지는 정서를 유발시킵니다.
우리는 꽃을 보고는 분노하지 않습니다.
꽃을 보고는 조급해 하지 않습니다.
꽃을 보고는 불안해 하지 않습니다.
꽃을 보고는 슬퍼 하지 않습니다.
꽃을 보는 순간 분노도, 조급함도, 불안함도, 슬픔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꽃은 평화와 여유, 밝음과 희망, 온유와 겸손으로 우리의 정서를 인도합니다. 꽃은 우리에게 사랑을 말할 뿐 미움을 말하지 않습니다. 꽃은 우리에게 밝음을 말할 뿐 어두움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꽃은 우리에게 평화를 말할 뿐 전쟁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필리핀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날 때 탱크를 몰고 오는 군인들에게 꽃을 주면서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한다."고 외치던 수녀들의 모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인간은 꽃 앞에서 적의를 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꽃을 대하고 있는 순간 모든 어두운 마음은 사라지고 자기도 의식하지 못했던 아름답고 밝은 마음이 피어오릅니다. 이것은 꽃이 인간의 정서, 아니 이 세상의 현상 속에서 일차적으로 주는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가 마음을 정돈하여 더 깊은 상념에서 꽃을 보고 있노라면 꽃은 우리에게 대화를 시작합니다. 꽃은 꽃만이 가진 지극히 부드럽고 고요한 음성으로 우리를 향해서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그래서 꽃은 단순히 아름답다는 경관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친구요 반려자로서 우리와 사귀기 시작합니다. 시인들과 화가들의 재주는 우리 평범한 사람들보다 이 꽃들의 대화를 더 빨리, 더 깊이 듣고 볼 줄 아는 것일 뿐 사실 꽃들은 누구나를 향해서 대화를 시작합니다. 어쩌면 꽃은 말없이 우리 인생보다 더 깊이 삶을 논(論)하고 이야기하는지도 모릅니다.

선인장 꽃은 사막과 모래바람 속에서 오랜 세월을 견디며 하얀 꽃을 피워냄으로써 인고(忍苦)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복사꽃과 능금꽃은 한 인간의 위대한 생명을 탄생시키고 희생해 가는 갸날픈 어머니의 몸매처럼 연약한 그 꽃을 피우고는 그를 통하여 탐스런 열매를 탄생시킴으로서 자신의 작은 봉사로 더 큰 역사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민들레는 자기는 납작하게 땅에 붙어 한발자욱도 옮기지 못하는 삶을 살지만, 자기의 몸 전체를 부수어 수많은 꽃씨로 온 공중을 날며 수백리 떨어진 대지위에서 또 새로운 삶을 접착시키는 즉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역사를 이어가는 삶을 보여줍니다. 나팔꽃은 아침이 동터올 때 활짝 피어서 아침이 온 것을 알리는 것처럼 희망과 새역사의 선포자적 삶을 알려줍니다. 수련은 흙이 아닌 물 속에서도 수려하게 핌으로써 어려운 환경을 오히려 더 아름다운 삶을 구현하는 자리로 삼고 규범화된 삶의 자리를 넘어서서도 의미있는 삶을 사는 모습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꽃을 보고 있노라면 꽃은 스승보다도, 또한 어떤 문학적 진리보다도 더 깊은 삶을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피조물가운데 꽃만큼 독특한 생애를 사는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먼저 꽃은 전 생애를 타인을 위해 삽니다.
꽃은 자기가 존재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꽃의 생은 전적으로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삶으로서 자신의 삶을 삽니다.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스스로를 위해서 가지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고 타인으로 하여금 그 아름다움을 즐기도록 자기봉사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삶을 삽니다.

"대학일기"란 시집을 출간한 한 대학생은 꽃論이란 이름으로 이런 시를 썼습니다.
꽃을 사랑하기 위하여
화병에 꺾어 꽂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님을
꽃은 금방 시들므로 보여준다.

헝겊쪼가리거나 플라스틱조각으로 만든 조화는
보아서 아름다우나 스스로 향기가 없고
화병에서 시들지 않으므로
우리가 꽃이라 불러도
누가 꽃이라 주장해도
그 스스로는 꽃이 아님을 보여준다.

해서, 향기로운 꽃이기 위하여
그 사람의 필요를 위하여
차라리 꺾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몸바침인가.

꽃은 그 몸속에 꿀을 지니고 사는데 이 달콤한 꿀은 자신이 먹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만든 이 꿀은 나비가 먹고 벌이 먹고 그 벌과 나비가 올 때까지 그 꿀을 지녔다가 나비와 벌이 오면 그 꿀을 아낌없이 줍니다.꽃의 향기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꽃은 그 향기를 피워 주위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게 합니다. 꽃은 자기의 삶을 연장시키기 위해 앙탈하거나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또한 자기의 삶을 연장시키기 위하여 남을 희생하거나 정복하지 않습니다. 벌과 나비가 꿀을 빨아 가는 동안 그 발에 조금 묻어진 꽃가루로 겸손하게 자기의 삶을 이어갑니다.

여기에는 심오한 삶의 진리가 있습니다.
남을 섬기고 겸손하게 사는 그 삶은 남을 정복하고 희생시키며 자기의 삶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것보다 훨씬 더 넓고 훨씬 더 아름답게 자신의 삶을 넓혀 갑니다. 꽃은 상당히 수동적인 삶을 사는 것같지만 꽃의 일생을 보면 굉장히 역동적이고 환희적인 삶을 삽니다.

꽃은 오로지 절정을 위해 삽니다. 꽃은 몽오리가 맺히고 봄이 오고 자기가 피어야 할 시기가 오면 그 어떤 것이 막아도 그 꽃의 피어남을 막을 수 없고 이로써 자기의 삶을 한껏 절정으로 피우면서 삽니다.

알프스 산에는 지금쯤 봄과 겨울이 함께 있는데 놀라운 것은 봄이 되면 꽃이 눈속을 헤치고 피어 올라옵니다. 꽃은 자기의 때를 정확히 살며 자기의 때를 살 때 아낌없이 삽니다. 주저하거나 움츠리거나 감추거나 타협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피어야 할 시기면 아무리 봄바람이 시새고 겨울바람이 거칠어도 자기가 피어야 할 그때는 어김없이 겁내지 않고 피어납니다. 조용한 혁명의 삶을 꽃은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꽃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가 어떤 삶의 경로를 걸어왔는지는 잊어버리고 현재의 아름다움으로만 그 꽃을 감상합니다. 그러나 꽃은 봄날 양지바른 담장밑에 피어나기 위하여 찬바람이 몰아치고 긴 어두움이 그림자를 드리운 겨울을 지나옵니다. 그 아름다움이 있기까지 수많은 고난과 수고의 삶을 거쳐오면서 오늘의 찬란한 삶을 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란 詩는 이런 꽃의 삶의 역사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조이던
머언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재는 돌아와 거울앞에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 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소쩍새의 구슬픈 소리, 먹구름 속의 천둥같은 환란,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한번 밖에 오지 않은 청춘을 바치고 늙어 버린 누님의 희생, 무서리 같은 고난과 역경을 통해 순례의 길을 걸은 뒤에 아름다운 한 송이의 꽃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핀 꽃은 또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아름다움과 달콤한 행복을 바치고 그의 삶의 가장 겸손한 방법으로 가장 넓게 넓혀가는 그래서 끊임없는 아름다움과 행복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살아가는 생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샤론의 꽃이라 부릅니다.

샤론의 꽃 예수 나의 마음에
거룩하고 아름답게 피소서.
내 생명이 참 사랑의 향기로
간 데 마다 풍겨나게 하소서.
예수, 나의 주여, 샤론의 꽃이여
나의 맘에 사랑으로 피소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꽃으로 사신 것을 음미합니다. 그 분을 보면 아름다움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 분을 보면 미움은 부끄럽게 모습을 감추고 사랑만이 떠오릅니다. 그 분 앞에서는 전쟁과 갈등은 그 정당한 이유를 잃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평화만 떠오릅니다. 그 분의 생애를 생각하면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온 몸으로 남을 위해서만 산 섬김의 삶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 분은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메어야 하는 절정의 삶을 살며 그 절정의 삶을 피하지고 않고 타협하지도 않는 혁명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그 분의 생애는 한번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 가장 겸손한 삶이었는데도 영원한 영광의 삶이 되며 이 영광의 삶도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닌 모든 자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그는 고통과 질고를 아는 삶이었고 온갖 어두움의 희생이 되었으나 부활로 그의 삶을 전혀 차원 다른 아름다움과 환희로 이어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시간에 꽃을 보면서 또 꽃처럼 사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묵상하십니다. 우리는 이 처럼 한 송이 꽃처럼 살 수 없을까요 세상에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고 섬김의 삶을 살며, 정복과 경쟁을 통하여 자기를 심는 것이 아닌 봉사와 희생으로 더 넓게 자기를 심는 삶, 그리고 이 땅에 온 삶이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절정의 삶, 그것은 남 위에 군림하고 남의 것을 빼앗아 누리는 절정의 삶이 아닌 누구나 접근하여 그 속에서 행복의 꿀을 따가고 주저없이 다가가서 그 향기에 취하고 싶은 그런 삶, 자신이 피어야 할 때는 봄바람이 시샘을 하더라도 어김없이 피어나며 그 피어남으로 오히려 추위와 어둠을 부드럽게 물러가게 하는 조용한 혁명의 삶, 쉽게 가져오는 행복이 아닌 고난과 역경, 수고와 인고로 가져오는 고귀한 아름다움, 끝내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다시 살아가는 영생의 삶.

오늘 우리 손에 이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들고서 꽃같은 삶, 사랑과 아름다움을 마음에서 일게하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며 그 절정의 삶을 가장 돋보이게 살며 지극히 겸손한 모습으로 그 향기와 생명을 퍼뜨려 가는 삶, 이 같은 삶을 사심으로 우리의 인생에 샤론의 꽃으로 피어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의 삶속에 담읍시다.아멘.

참회의 기도

하나님, 따뜻하고 화창한 봄 하늘과 앞다투어 활짝 핀
향기로운 꽃들 속에 묻혀 주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사랑 많으신 주여, 아름답고 순결한 샤론의 꽃이시여,
고백하건대 저희들은 너무도 추악하고 불결합니다.
맹목적이고 이기적이며 음란하고 거짓되었습니다.
저 청순한 꽃을 바라보기엔 너무도 타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주께 호소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사
가장 작은 꽃 한송이에서라도 배우길 원합니다.
땅 밑 어두움을 뚫고 나와 온갖 풍상을 견뎌내고
마침내 절정에 이르러 환한 웃음으로
사랑하는 님을 위해 살아가는 고결한 삶을
배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만 고백하고 싶은 제 개인의 참회를
침묵 속에 드리오니 주여 받아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본 문:아가 4: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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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는 `아름다운 노래', `사랑의 노래'라고 합니다. 한 쌍의 남녀의
사랑 고백이며, 연애 편지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 아가서는 출애굽 기
념일인 유월절에, 룻기는 오순절, 예레미야 애가는 아브(Ab)달 8일, 즉 예
루살렘 멸망 기념일에, 전도서는 장막절, 에스더는 부림절에 읽었습니다.
쉬르 하쉬림(song of songs, 노래 주의 노래)라고 하는 아가(Conticles)는
애매 하고 구설수가 많은 책입니다. 남녀의 애정이 성경의 편입 되었는데,
유대 랍비들은 구약 정경을 놓고 주후 90년 얌니아 회의때 열띤 논쟁을 합
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으로 해석했습니다. 아자주세(사랑)은 숭고한 사랑의 노래며, 뭇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춘향가는 세대가 변해도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고 전승되고 있
습니다. 내용은 양반집 자제인 이도령이 천한 기생의 딸 춘향을 사랑하고,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나 체통, 관습, 핍박에서 짓밟히지 않고 고결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서양의 고전으로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이야기 합니다. 세상이 변해도 뭇사람의 사랑을 받는 것은 사랑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원수지간의 청춘 남녀가 사랑을 했고, 그 사랑 때문에 두 사람이 죽어가지만 원수지간의 가문이 화해하는 해피엔드의 줄거리입니다. 금세기 최대의 베스트셀러인 에릭 시걸의 러브스토리는 현대판 아가서요, 현대인의 냉각된 가슴에 에델바이스 꽃같은 향기를 전해 줍니다.
왜 아가서를 결혼식장이나 봄의 축제일에 읽지 않고 유월절에 읽었을까요
이유는 이스라엘이 40년 광야 생활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을 상징합니다. 즉, 구약의 시가서(욥,시편, 잠, 전,아가)의 순서가 욥같은 고난의 인생이 시편의 신앙과 잠언의 지혜로 전도서의 허무한 세상을 살다가 아가서의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는 것이 이스라엘의 고난의 역사와 비슷하다 해서 유월절에 읽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전도서의 허무한 세상, 헛된 세상을 시편의 신앙과 잠언의 지혜로 살아갑니다. 이 과정에는 고난과 질병과 기아와 고독, 불안, 때론 전쟁과 죽음, 절망을 견디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만 믿는 성도들에게는 전도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가서 같이 아름다운 삶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소망이 넘치고 과연, 우리의 삶이 절망만이 아니라 살맛나는 기쁨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왜 살맛나는 기쁨입니까 9절에서 우리 주님은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라고 불러주십니다. 이 칭호는 언제까지나 친근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나남녀가 사랑에 빠지면 호칭이 바뀝니다. 남남으로 대할 때 직장동료로 대할 때 친구로 대할 때 호칭이 다릅니다. 연인이 될 때는 <선생님, 아저씨, OO씨에서 오빠, 자기로, 또 여보, 당신으로 더 나아가 호칭이 필요없이 눈만 봐도 알게 됩니다. 신랑이 신부를 바라볼 때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이렇게 고백하겠습니까 아름다움의 기준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저는 이제까지 결혼식장에서 웨딩드레스 입고 입장하는 신부들을 많이 보았는데 다 예쁘고 아름답더군요. 결혼 행렬에서 신랑에게 인도되는 신부는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신부에게 아름다움의 매력이 없으면 곤란합니다.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여왕인 클레오파트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인정받습니다. 머리크기가 몸 전체의 1/8이 되는
팔등신의 균형잡히 아름다움이었다고 합는 팔등신 미인이었습니다. 요즘
여성들도 아름다워지려고 아침부터 헬스, 수영, 에어로빅으로 몸매를 가꾸고 성형수술도 받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미인의 기준은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달랐습니다. 노동력이 필요할 때는 건강하고 일 잘하며 애 많이 낳는 강인한 여인을 환영하였습니다. 여유있는 시대에는 가늘고 긴 손가락 희고 고운 피부, 늘씬한 몸매의 여성이 아름답다고 인정 받았습니다. 잠언 31장에는 똑순이 같이 살람 잘하는 팔방미인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의 여인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움의 조건은 세월따라 가버립니다. 화무십일홍인 것입니다. 결혼할 때는 목숨이라도 내줄 것 같던 신랑이 결혼하면 딴 사람으로 변해 아주 비인격적이고 폭력적이며 무관심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요즘은 그 반대로 남편들이 아내에게 꽉 잡혀 산다고 하며 간 큰 남자 시리즈도 나옵니다. "아침에 밥달라고 식탁에 앉는 남자, 아내가 잔소리 하는데 말 끊는 남자, 아내 눈 똑바로 보고 말대꾸 하는 남자, 밥 상 앞에서 반찬 투정하는 남자들이 간 큰 남자라고 합니다. 아무리 사랑해서 결혼해도 부부정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신혼은 아니니가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성도들을 끝까지 신부로 대해 주십니다. "사랑하면
눈이 먼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흠잡을데가 없는 것입니다. 옷 입는 것, 말하는 것, 음식 솜씨...다 아름답고 다 맛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춘향가 중 사랑가의 한 대목에서는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 어화둥둥 내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에 빠지면 판단기준이 흐려집니다. 원래 우리는 죄인이고 허물많은 백성입니다. 아가서에서 신부로 나오는 술람미 여인 같이 볼 것도 없고 사랑받을 자격도 없는 자들입니다. 술람미는 이디오피아 지방으로 새까만 흑인들이 삽니다. 이름없는 산촌 처녀가 솔로몬같은 왕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왕의 사랑을 받은 몸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신부라고 했으니
합법적인 결혼으로 백년가약을 맺은 상태입니다. 예수님과 교회도 신랑과
신부 곤계입니다. 거기에는 늘 기쁨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결혼한 신
부는 친정을 떠나 새 집으로 가야 합니다. 호적도 달라지고 새 식구 되어
야 합니다. 친정아버지를 모시다가 새댁이 되면 남편 중심으로 생활 패턴
이 바뀝니다. 주님의 신부인 우리 성도들은 새 사람입니다. 세상 방식을
버리고 주님의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신랑되신 주님이 기뻐하실 매력이
있는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9-11절을 보면 성도들이 주님만 사모하여 보믄 눈빛이 주님의 마음을
끌리게 합니다. 사랑하는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결한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깨끗하지 못한 부분, 더러운 것이 있으면 그 아름다움이 빛을 잃게 됩니다. 주님 바라보는 정결한 눈이 세상 바라보고 진리가 아닌 것을 보게되면 순결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와 성실의 목걸이로 치장할 때 주님의 마음을 끌게 됩니다. 기도의 향기를 날릴 때에 주님의 마음을 사로 잡습니다. 또한 덕스럽고 은혜스러운 언어생활이 주님의 마음을 사로 잡습니다. 성도들의 입술은 격려와 위로, 축복의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거친 심령을 포근히 감싸주는 봄비같은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신부가 신랑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수 있습니다. 우리 경신의 식구들은 모두다 예수 신랑의 사랑을 받는 거룩한 신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 중에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생명과 힘
을 줍니다. 생명과 힘은 활동하고 움직이는 원동력을 제공합니다. 가정
문제를 들여다보면 남편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주부들은 우울증에 빠집니다. 사랑을 못 받으면 힘과 생기를 잃고 무기력증에 걸립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움직이기 싫습니다. 매사에 짜증이 납니다. 교인들도 무기력한 교인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올 때 발걸음이 즐겁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그 이유가 많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 속에 고여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있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지금 내게서 넘쳐나면 어떤 상황이든지 상관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세상의 잡다한 문제가 사라집니다.
이제 주님의 사랑을 받은 신부들은 더 깊은 사랑의 교제로 들어갑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유향산과 몰약산으로 가자고 합니다. 이 동산은 하나님과 인간이 교제하며 살던 평화의 동산, 에덴과 같은 곳입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을 사모하며 만나는 곳이 바로 이 샬롬의
동산입니다.
주경가 델리취는 몰약산과 유향봉에서는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게
분향하는 성전이 있다고 합니다. 몰약은 아라비아, 인도의 식물인 발삼의
껍질의 갈라진 틈에서 나온 향기로운 진액입니다. 이는 최고급 향품으로
방부제로 쓰입니다. 에스더와 여러 소녀들이 6개월간 몰약으로 몸을 가꾸고,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체에 바르기도 했습니다. 유향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옥합을 깨어 향유로 부은 것입니다. 이 몰약과 유향은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린 예물입니다. 이건 신부되는 우리 성도들이 신랑 예수님에게 드릴 예물이기도 합니다. 희생적 사랑, 변함없는 사랑, 향기로운 사랑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는 헌신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십자군 부부의 흉상이 서 있는데, 아내의 모
습이 너무 아름다운데 오른 팔이 없답니다.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용감한 기사가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다가 모슬렘 교도인 살라딘에게 잡혔습니다. 그 기사는 사랑하는 아내가 아기를 낳을텐데 아기 얼굴도 못보고 죽을 수 없으니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살라딘은 "네가 죽으면 네 아내는 딴 남자에게 시집 갈 것"이라며 비웃음을 보냈습니다. 그 기사는 아내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살라딘은 그것을 증명해 보이기를 강요하며, 만약 아내가 그를 살리기 위해 오른팔을 잘라 보낸다면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살라딘의 편지는 영국의 아내에게 전해지고 남편을 사랑한 아내는 오른팔을 잘라 보냈습니다. 살라딘은 그의 아내의 사랑에 감탄을 해서 약속대로 기사를 살려주었습니다. 지금도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오른팔 없이 서있는 미녀는 오른팔을 가진 미녀보다 더 많은 감동으로 방
문객의 식어진 가슴에 사랑의 불을 질러줍니다.
우리 주님은 오른팔이 아니라, 우리 위해 온 몸을 갈보리 십자가에 던져
우리를 피로 사셨으니 이보다 더 큰 희생의 사랑이 어디있습니까 몰약산은 주님이 갈보리에서 드린 희생제사의 언덕입니다.
12절, <잠근 동산>이라 했습니다. 주님과 나만의 동산, 사랑의 동산은 아
무나 무례하게 들어오는 험한 동산이 아닙니다. 정원이나 포도원은 울타리나 담장을 두르고 문에 빗장을 걸어 잠급니다. 합법적인 주인 외에는 접근이 금지 되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만 열려지고 봉헌되는 신부로서의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 농촌의 교회 동산이 세상 사람들에 의해 많이 훼손되고 더럽혀졌습니
다. 쓰레기를 버려 썩어 냄새가 나고 거기에서 술을 마시고 개를 잡아 불에 태우고 아주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동산에 울타리를 치고, 문을 잠궜습니다. 이것은 세상과의 분리가 아니라 거룩한 곳을 거룩하게 여기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의 경계입니다. 그러나, 우리 경신의 가족들에게는
열린 장소입니다. 주님과 만나는 대화의 장소요, 기도의 향기가 배어있는
동산입니다. 이 동산에서 주님과 교제합니다. 교제의 열마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13절이하에 아름다운 열매와 향기로운 향품으로 동산에 가득합니다. 거기
에는 석류가 있습니다. 봉선화의 일종인 고벨화, 존귀한 분에게 부어드리는 나도초, 자주색 꽃으로 10월에 피는 향기롭고 요리, 약재, 부인병에 효능이 좋은 민홍화, 생강 냄새가 나는 갈대 종류의 향기로운 창포, 나무껍질에서 기름내는 상록수인 계수, 알로에로 알려진 잎에서 향기로운 약재를 축출하여, 미용과 건강식품으로 쓰이는 침향... 이 모든 화초와 열매 맺는 동산이 교회입니다. 오늘 교회는 성령의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다. 그 동산에는 우물이 있고, 샘이 있어 갈수록 아름답고 복된 동산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수입니다. 목마를 때 콜라, 사이다, 아이스크림보다 생수한 잔이 더 좋습니다. 이 갈한 세상에서 목마르시거든 이 영생의 샘에 와서 생수를 마시기 원합니다. 에덴 동산처럼 축복의 강물이 흘러내리고 각종 보석과 향기로운 과수로 늘 싱그러운 것처럼 은혜받은 성도는 생명이 넘치는 동산과 같습니다.
이제 마지막 16절에서, 신부가 신랑을 이 동산으로 초대합니다. "북풍아
일어나라" 이제 사랑하는 님, 주님을 초청하시고 행복한 축제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있을 때 행복합니다. 주님 앞에 나오는 자는 풍족히 마시고, 배불리 먹으며 하나님의 복락의 강수로 크게 만족할 것입니다.
실패와 성공의 비결
아가서 3:1-4

오늘은 일 년을 마지막 보내는 날입니다.
일년을 돌이켜 보면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실패했다고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있고, 실패했다고 생각했는데 성공한 것처런 느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삼손 같은 사람은 나라를 구하기도 하고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이방 여자 때문에 인생을 망쳤습니다. 술람미라는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데 실패했다가 나중에는 성공했습니다. 술람미는 시골 처녀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과 사랑의 관계를 맺음으로 성공하게 됩니다.

본문 3:1에 보면 술람미는 침상에서 사랑하는 자를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침상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안일과 나태입니다. 안일과 나태가 우리의 생애를 실패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땀과 피와 눈물을 흘리는 노력이 있어야 할 1년이었는데 너무 안일하게 보내지나 않았는지,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너무나 게을렀던 것 같습니다.

본문 3:2에 보면 사랑하는 자를 길거리에서 찾았다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왕을 길거리에서 찾았다는 것, 우리 신앙생활도 만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길거리에서 찾는다는 것은 헛수고와 실패의 원인이 됩니다. 예수님이 12살 때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그런데 하룻길을 지난 후에 부모들이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을 깨닫고 거리에서 찾았으나 헛수고하였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성전에서 찾았습니다. 1년을 돌이켜 보면 성전 중심의 삶을 살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본문 3:3에 보면 성중에 순행하는 자들은 인간들입니다. 인간들과 의논한다는 것이 실패의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께 여쭈어가면서 살아왔어야 할 1년이었는데 역시 이 사람 붙들고 의논하고 저 사람 붙들고 의논한 것이 큰 잘못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의지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1년 간의 삶 속에서 실패의 원인을 찾아 내년에는 주님께 여쭈어가며 살아 성공하는 한 해로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술람미라는 여자의 성공 비결 3가지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여자는 실패의 원인을 모두 버렷습니다. 3:4에 "그들을 떠나자마자"란 것은 실패의 원인이 되었던 것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지난 날의 과오를 깨끗하게 떠나는 것, 잊어버리는 것, 벗어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세도 사람을 죽였던 과거를 잊어버리고 생각을 돌이켰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떠나야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을 떠났듯이 신앙생활에 방해되는 것들을 떠나야겠습니다. 끊어야 할 것들을 끊어야 하겠으며 버릴 것은 다 버리고 새해를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본문 3:4에 보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만나야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일생 동안 예수 믿는다고 했어도 실패뿐입니다.
헬렌 켈러가 1950년도에 일본 공장에 도착했을 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행복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냐고, 그녀는 대답하기를 "사랑하는 예수님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면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3:4에 보면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중심의 삶을 사는 자들은 성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집의 자녀들은 교회에 심겨지도룩만 하면 성공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유태인을 위대한 민족으로 만든 것이 있다면 성경과 회당과 탈무드라고 어떤 분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1년간 지나오면서 교회 생활은 게으르지 않았는지 반성해 보고 새해에는 성전 중심의 삶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 분에게 물어가며 살아서 성공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 화

`노만 빈센트 필'박사의 일화가 있습니다. 52세의 남자가 사업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졌을 때, 미국의 필 박사를 만나라는 친구의 권유로 사무실 문을 노크했습니다. 그는 앉자마자 "모든 것이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사라졌습니다. 희망도 없고 이제 재생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었고 완전히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필 박사는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 당신의 귀중한 재산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한 번 봅시다."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적는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한번 적어 봅시다-부인은 계신지요" "결혼 생활 30년에 한 번도 곁을 떠난 적이 없고 나를 위로하고 살아왔습니다." "자녀들은 몇이나 되지요" "예, 셋인데 착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친구가 있습니까" "예, 정말 좋은 친구가 몇 있습니다." "건강은 어떤가요" "건강은 좋아서 누워있던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미국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할 일 많은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우리 서로 대화 중에 찾아낸 재산 목록을 적어 봅시다. ① 훌륭한 부인이 있다. ②사랑스런 자녀 셋이 있다. ③의리 있는 친구가 있다. ④건강이 있다. ⑤미국에 할 일이 있다. ⑥신앙이 있다.

필 목사는 이 중년 신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잃어버린 사업과 여기에 기록된 재산 중 어느 것이 더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부끄러운 듯 빙그레 웃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상상할 수 없이 큰 보화가 현재 남아 있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그리고 몇년 후 대 성공자가 되어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현재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찾아 발견하는 자만이 무한한 가능성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작은 여우를 잡아라
본문 말씀:아가 2:15

▣설교 대지

가. 본문 해석
-여우:`땅을 파다'에서 유래. 포도원을 파 헤쳐 농장을 망치는 짐승. 여기서는 신자를 헤치는 죄악을 말하고 있다.
-사랑은 방해의 위협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랑하기 시작할 때 그것을 위협하는 사단의 활동도 함께 시작된다(눅22:31 ; 벧전5:8). 그러므로 우리가 근신하고 깨어 기도해야 할 것은 그러한 사단의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이다(마26:41).

나. 작은 여우를 잡아라

한 포도원이 있었는데 이 포도원의 주인은 솔로몬 임금님입니다. 솔로몬 임금님은 이 포도원에 일꾼을 보내어서 하루에 한 데나리온씩 약속을 하고서 아침부터 해가 지도록 일을 시켰습니다. 가을이 되자 아주 좋은 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려서 탐스럽게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에 생각지 않은 일이 생겼습니다. 이 포도원에 작은 여우 새끼 한 마리가 들어와서 포도원의 울타리를 조금씩 헐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에서 일하는 일군들은 작은 여우 한 마리이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냥 놔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여우가 처음에는 작은 구멍을 냈지만 갈수록 구멍이 자꾸자꾸 커졌습니다. 또 처음에는 새끼 여우였는데 날이 갈수록 그 몸집이 커지면서 사나워졌습니다.
구멍이 커지니까 이 구멍으로 도둑이 마음대로 드나 들었습니다. 그리고 여우는 다른 여우 친구들을 데리고 오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년내내 수고해서 탐스럽게 익은 포도를 주인 몰래 사정 없이 훔쳐갔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포도원 주인인 임금님은 일꾼들에게 엄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 새끼를 잡아라."

다. 여우를 알자

여우는 포도원에 몰래 숨어 들어와서 포도원을 파 헤쳐서 농장을 망쳐 버립니다. 봄을 지나 더운 여름동안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포도를 키우던 농부의 노력이 모두 쓸모없게 되어 버리고 맙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여우는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 마음속에 천국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아름다운 농장을 마련하셨습니다. 이 농장에서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를 거두는 농장입니다. 이 열매들은 갈라디아서 5장 22절 말씀에 나오고 있는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우리는 이 열매들을 거두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농부인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에 말씀의 씨를 뿌리십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면서 우리의 열매가 아름답게 영글어 갑니다. 어떤 친구들은 화평의 열매가 더 크게 열렸고, 어떤 친구는 기쁨의 열매가 크게 열렸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의 농장에 작은 여우가 몰래 숨어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작은 거짓말 한 번쯤은 다음에 안하면 되지 용돈이 필요한데 그래 엄마 지갑에서 500원만 ! 돈이 작으니까 엄마도 용서해 주실거야. 그리고 아무도 안봤는데......
이같은 아주 작은 죄를 저지르는 것은 포도원에 작은 여우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같은 아주 작은 죄는 여러분의 마음의 농장에 농장을 파헤치는 작은 여우가 들어온 신호입니다. 바로 경고음입니다. `앵애앵에.........'
아주 작다고 무시해 버리면 아주 큰일이 일어납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이 된다.'

▣예 화:

프랑스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346명이 죽고 많이 다치는 아주 큰 사고가 발
생했습니다. 사고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고의 원인은 어처구니 없게도 작은 나사 하나가 빠지는 바람에 화물칸의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서 일어난 사고였습니다. 작은 나사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한 큰 사고를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이 된다는 속담처럼, 죄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 얼마 후에는 크고 엄청난 죄가 되어버린 경우를 흔히 발견합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져 죄없는 사람들이 많이 죽고, 다쳤습니다. 이것도 이정도 금이 간 것 쯤은 괜찮겠지 하고 생각해서 일어난 사고 였습니다.

라. 우리 가운데 숨은 여우를 찾아내어 잡자

조그만한 여우가 점점 자라나면서 난폭해져 포도원을 마구 파헤치고, 다른 여우까지 불러들여 포도원을 망쳐 버립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오는 죄는 아주 작다고 생각하지만 그 죄가 우리의 마음에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다가, 어느정도 힘이 생기면 난폭해지고 다른 더 나쁜 죄까지 우리 친구들의 마음속에 불러 들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 친구들의 마음속에 아주 조그만한 죄를 심어 놓고 다닙니다. 바로 농부의 밭에 뿌려진 가라지들입니다.

눅22:31-"시몬아, 시몬아, 들어라!
사탄이 밀처럼 체질하려고 너희를 요구하였다."
벧전5:8-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우는 사자 같이,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이렇게 사탄은 방해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열매가 없게 합니다.

▣여우를 잡자

우리는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우리의 농장을 망치는 작은 여우를 잡아 내야 합니다. 무엇으로 이 여우를 잡을 수 있을까요
오직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여우를 잡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우 새끼같이 숨은 어떤 죄라도 다 찾아내서 없애 줍니다. 작은 여우새끼는 처음에는 작지만 그냥 두면 점점 자라나는 것처럼, 작은 죄라도 회개하여(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만) 없애지 않으면 점점 자라나서 큰 죄가 되어, 결국은 우리 친구들을 영원한 지옥불에 끌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어떤 작은 죄라도 우리의 마음에 결코 들여 놓아서는 안됩니다. 이정도는..... 절대 안됩니다. 어떠한 죄라도 절대로 안됩니다. 우리 친구들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의 농장에서 성령의 열매들을 많이 추수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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