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말세의 불경건을 경계하라 (딤후 03:1-5)

첨부 1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말세의 현상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말세의 현상에 휩쓸리지 말고 도리어 이런 일들에서 돌아설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늘의 본문을 중심으로 말세의 의미는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신앙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말세란 무엇을 말 합니까
오늘 본문은 “(딤후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라고 말씀하면서 ‘말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의 현상들을 보고 “말세”라고 대뇌이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 여자들이 배꼽을 내 놓고 다닌다고 해서 야단입니다.
오렌지 족이 야단 이더니 요즘은 야타족(야 타라), 나타족(나 타도 돼)등도 있다고 합니다.
이시대가 만들어낸 무너진 양심과 도덕성의 타락은 퇴폐와 향락을 추구하도록 방치하고 있읍니다.
정치적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선 후배와의 관계와 친구와의 관계가 때로는 원수처럼 되어 버리기도
하고 또한 가족 관계가 붕괴되고 가정이 파괴되는 일들이 많은 시대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말세야 말세”라고 말 하게 합니다.
여하튼 ‘말세’라는 말 속에는 많은 부도덕과 퇴폐, 타락이 넘실대는 시대라는 생각이 담겼음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둘째로 그러면 성경이 말씀하는 ‘말세(末世)’의 의미는 무엇 입니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말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初臨)에서 부터 재림(再臨)에 이르는 전 기간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관계된 시대가 말세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에 의하면 세상 마지막에 메시야가 올 것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메시야란 구원자란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메시야 (그리스도)란 사람들을 악에서 구원하고 죄에서 건져주는 구세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메시야가 오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이란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메시야가 오는 때가 마지막 시대요 말세지 말(末)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말세는 메시야와 관계된 시대입니다.
메시야가 와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원을 이루시는 시대입니다.
그러면 메시야,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성경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라고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구세주요 구원자란 말씀입니다.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라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서 부터 이 증거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증거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말의 원형은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이 바로 메시야, 그리스도다”라는 말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다”라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원래의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그 초창기 부터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증언했습니다.
말세에 오실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마지막 때에 오시기로 하신 바로 그 메시야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야의 오심은 곧바로 이 세상의 마지막에 이르렀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메시야는 “세상 끝날”에 온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메시야께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세” 즉 “세상 끝 날들”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말세”라고 하는 말은 사람들의 타락이나 퇴폐, 부도덕한 일들이 횡횡한다고 붙여진 이름만은 결코 아닙니다.
말세에 이런 현상이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말세는 우선적으로 예수님의 오심과 연결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부도덕이 난무하고 퇴폐와 부패가 많은 시대라도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었다면 말세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의 “말세”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성립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세를 말할 때 항상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말세입니다. 세상의 끝 날 중의 한 날입니다. 에수님의 재림을 코 앞에 둔 마지막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런 말세의식, 종말의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것 같은 착각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 입니다. 항상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믿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유혹하고 세상의 욕심이 우리를 짓 눌러도 결코 패배해선 않됩니다. 부패함과 타락, 불경건이 보편화 되어도 우리는 믿음의 정신을 잃어서는 않됩니다. 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 사도는 이 말세의 특징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그는 먼저 말세는 “고통하는 때”라고 말씀합니다.
“(딤후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세엔 고통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고통하는 때”란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때”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견디기 어렵고 살기 힘든 시대가 이 말세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심성속에서 이런 말세의 여러 현상들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각박함이 있습니다. 사람끼리도 서로 못믿어워 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이혼과 가정의 파괴가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적 부도덕은 하나님의 형벌인 에이즈를 불러들였습니다.

또한 자연 세계는 자연 세계대로 짐진 것같이 탄식합니다.
오존 층의 파괴가 인류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태양에서 나오는 해로운 빛(자외선)을 막아주는 오종 층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오존층의 복구는 대단히 많은 세월이 걸립니다. 아주 조금 파괴된 오존층이 복구되려면 최 소한 백년의 세월이 흘러야 한다고 합니다.

그 뿐입니까 바다와 강물, 식수의 오염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합니다.
요즈음 생수 개발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좋은 물을 마시고 깨끗한 물을 원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에 생수 개발이 열기를 더 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도리어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있기 까지 합니다.
지하 100미터의 물은 약 백년 전의 물이라고 합니다. 지하 암반 백미터까지 물이 스며들려면 백년은 걸여야 한답니다.
그런데 단 몇 분만에 그런 물을 오염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오염된 물은 100년이 넘어야 정화된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과연 누구에 의해 저질러 지고 있습니까
바로 사람들입니다. 죄악된 사람들, 죄와 타락으로 얼룩진 괴이한 인물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이 타락한 괴물들은 스스로의 생명을 스스로 단축시키며 온갖 오염물질을 내뿜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사는 환경은 살아가기에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괴롭고 힘겨운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이젠 동물이나 그외 여러 생물들도 환경의 파괴와 오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돌고래가 오염된 바다 때문에 떼 죽음을 하기도 합니다. 하천의 물고기가 떼 죽음을 합니다.
그리고 기상 이변은 농작물의 수확을 감소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세상은 고통스런 세상이 되어갑니다.
이렇게 살기 어렵고 괴로운 시대가 말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겠다”고 말씀합니다.

2..또한 말세는 인간의 가치관이 뒤바뀌는 시대입니다.그래서 더욱 고통스런 시대입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가치관의 전도(轉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뒤비뀌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땅히 먼저 사랑하고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할 일들이 뒷 전에 밀려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딤후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딤후3: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사랑의 대상이 뒤틀려 있습니다. 먼저 사랑하고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어야할 가치있는 일들이 뒤바뀌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합니다. 자기 자신만이 최고의 관심이며 자신의 욕망 충족에 일생을 겁니다.
이기적이며 자기가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 맘에 들면 선이요 자기 맘에 안들면 악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개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자기가 모든 가치의 기준입니다.
이웃의 불편은 아랑 곳 없습니다. 공동체의 가치는 귀찮을 뿐입니다.

얼마전 동아일보,94,8,11(목)(독자의 광장) 의 기사 내용 입니다..
어떤 50대 쯤 되는 아주머니가 청주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습니다. 차안에는 학생으로 보이는 아가씨둘이 해수욕장으로 착각했는지 노출이 심한 복장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껌까지 짝짝 소리내어 씹으면서 친구들과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무언의 주의를 줘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참다못한 이 아주머니가 ‘좀 조용히 하라’고 제지를 했습니다.
그러자 ‘반말하는 사람 밧맛 떨어진다’고 저희들 끼리 쫑알거리 더랍니다.
그래서‘나도 집에 너같은 자식을 키우고 있어 큰 소리는 할 수 없지만 조용히 하라면 조용히 하지 어디서 말대꾸냐’며 버릇 없는 놈들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쑥 들어가더랍니다.
그래서 서울까진 종요히 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부터 였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이 아가씨가 파출소에 가자는 겁니다.
그래서 기가 막히지만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뒤에 웬 중년 부인 한 분이 뒤 따라오고 있더랍니다.
자기를 따라오라던 이 아가씨는 터미널 근처 양재 파출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더니 자기에게 “반말을 하고 욕을 했다”고 이 아주머니를 고발하더랍니다.
그래서 아주머니는 자초지종을 다 말했습니다.
자초지종을 다들은 경찰관은 아가씨를 야단쳤습니다
“차안에서 조용히 하라면 조용히 할 것이지 그 일로 부모같은 분을 파출소에 고발할 수 있느냐”고 엄히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자기 뒤를 따라오던 그 중년부인은 혹시 이 아주머니가 억울한 봉변을 당할까 봐 증인이 되주려고 따라왔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시대의 자화상의 한 단면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세대입니다.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비록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심으로 가득찬 신 세대의 극히 일부의 모습이지만 이 세대는 점점 이런 식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자기 중심적인 인간들로 더욱 썩어 가고 있습니다.

또한 이 말세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물질을 더 사랑합니다.
사람보다 돈을 더 중시합니다. 그래서 경제력이 없는 사람들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오늘날 국가 경제력이 온 세계에 최고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정의와 도덕성 보다 경제가 돈이 더 가치있는 시대입니다.
작은 뇌물 준 사람은 구속되어 철장에 갖혀도, 큰 뇌물을 준 사람은 모든 편리를 다 봐 줍니다. 정부에서 보호까지 해 줍니다. 이런 썩은 세상이 이 시대입니다.

그러니 백성인들 오죽합니까
돈 없는 부모는 이미 그 부모로서의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돈 못버는 가장은 그 가장의 권위를 잃어갑니다. 돈있는 사람, 경제력이 있는 사람이 큰 소리를 칩니다.
심지어 기독교계나 교회 안에서도 돈있는 사람이 행세하는 일도 흔합니다. 이렇게 돈이 힘을 갖고 있기에 사람들이 돈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돈이 있으나 없으나 인간으로서의 고귀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돈이 있으나 없으나, 부모로서의 고유한 권위가 있습니다.
남편이 돈을 많이 벌든 적게 벌든 남편으로서의 권위는 고유한 권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돈이, 경제력이 권위의 척도가 되었습니다.
돈 없는 부모, 돈 없어 자식을 못 가르친 부모는 자식의 학대를 견뎌야 합니다. 용돈을 못 준 부모는 자식에게 구타 당합니다. 심지어 자식에게 맞아 원통하고 분해서 자살한 사람도 있습니다.
돈 못버는 남편은 부인과 자식에게 멸시를 받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아닌 돈과 물질이, 모든 가치와 권위의 척도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기본적 도덕질서 마저, 정의와 공편마저 물질 만능의 마수가 홍수처럼 쓸어가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사람 자체, 인간 자체를 사랑함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물질 만능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입니 다.
사람을 사람 자체로 사랑함을 버리고 물질을 사랑함으로써 세상은 고통스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괴롭고 살기 힘든 사막과 같은 세상이 된 것입니다.

3. 또한 이 말세는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는 시대입니다.
쾌락과 향락이 최고의 즐거움으로 사랑받습니다.
수많은 레져 시설과 놀이 시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술집은 더욱 화려해 지며 사람들은 더욱 자극적이며 흥분시키는 오락을 찾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과의 교제와 예배보다 자기의 즐거움이 우선입니다.
교회도 재미없으면 안나옵니다. 성경도 재미없어서 않 읽습니다. 성경대로 사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울 뿐 아무 도움도 안됩니다. 그래서 교회도 재미로운 놀이터가 되야 합니다. 그저 성경에서 좋은 얘기만 골라서 해 줘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모인 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교회로 “반역하는 교회”가 되어 갑니다.
진실로 “인자가 올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는 주님의 물음이 귀에 들려오는 듯합 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왜 말세엔 이런 일들이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인간의 불경건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 중심의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불경건은 사람들의 가치관을 뒤바꿔 놓았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무신론은 악을 생산하는 공장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들은 악을 물마시듯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53: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53:2)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시53:3)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불경건이 자리를 차지한 곳엔 악과 더러움만이 활게 칩니다. 불경건은 모든 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이 불경건 때문에 이웃을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합니다.
이 불경건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고 인명을 중시해야 할 사람들이 물질을 사랑합니다.
이 불경건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육체적이고 향락적 쾌락을 더 사랑합니다.
이렇게 불경건은 삶의 목적을 뒤바꿔 놓고 인생의 가치관을 전도시켰습니다. 세상을 썩게하고 악취가 나게 합니다. 이러한 모든 “가치의 반역”은 불경건이 원인입니다.

그러나 이 불경건이 더욱 심각한 것은 재앙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이 불경건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불경건을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불에 타버릴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롬1:18)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인간의 모든 불경건이 하나님의 진노를 샀고 재앙을 불러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불경건의 죄악을 힘써 피해야 합니다. 불경건의 유혹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세는 괴롭고 고통스런 시대입니다. 참된 가치가 조롱받는 시대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전도되고 악이 홍수처럼 뒤 덮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희락과 기쁨 보다는 염려와 근심, 괴로움이 더 많은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이기적이 되며 사랑이 식을 것입니다.
물질 숭배가 만연해 질것이며 인륜은 땅에 떨어져 갈 것입니다. 마귀는 자기 때가 얼마 안남은 줄 알고 수많은 사람들을 결사적으로 유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경건을 경계해야 합니다. 단지 예배당에 나오는 것으로 위로를 삼아선 않됩니다.
우리는 불경건의 세력을 이겨야 하며 스스로 막아내야 합니다.
홍수처럼 밀려오는 불신의 세력을 저지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말세의 불경건을 경계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의지하시는 우리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