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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탐욕의 비극 (약 0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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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전에 우리나라는 세계를 놀라게 하는데 특별한 재능을 보인바 있습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지자 세계의 메스콤은 앞을 다투어 톱 뉴스로 보도하면서 우리를 부끄럽게 했었습니다. 한 때는 삼풍 백화점이 어이없이 가라앉자 또 다시 세계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거대한 사건이 터지지 아니하면 심심해서 견디지 못하는 나라처럼, 이 다음에는 무슨 사건이 터질 것인지 오히려 기다린다고 할만큼 궁금해하는 형편입니다.
요즈음에는 세계적으로 정평 있는 Newsweek지나 Time지와 같은 주간지들은 눈물 짖는 우리의 전직 대통령 사진을 표지로 실으면서 한국 정치의 부정과 부패를 지적합니다. 감옥의 철창 속에 있는 또 하나의 전직 대통령을 보여주면서

5. 18의 상처를 새롭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를 뒤흔들고, 우리의 민족을 창피하게 만드는 이 모든 사건들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좀더 진지하게 찾아보아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이 상상할 수 없는 부정과 부패는 이 민족에게 심한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이 상처는 숱한 생명을 죽음의 골짜기로 이끌어 갑니다.
인간 사회에서 죽음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그 하나의 길은 인간이 건강을 잃고 병이 들어 회복하지 못한 체 이 땅을 떠나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의 길은, 인간이 자신의 일터에서 정신적으로 패배감에 젖어서 좌절하고 거기서 다시 일어나지 못한체 폐인이 되어 시들 시들 죽어 가는 경우입니다. 세 번째의 길은, 인간의 마음속에 탐욕이 잉태되면 그것은 곧 죄라는 괴물로 무럭무럭 커 나게 되고, 결국 인간은 그 죄라는 괴물에 이끌리어 죽음의 골짜기로 가게 되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병이 들어 죽어 간 사람에게는 깊은 동정의 눈물을 흘리면서 고이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두 번째 정신적으로 폐인이 되어 죽어 가는 사람에게도 동정을 보내면서 위로를 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탐욕에 의하여 죄를 짓고, 이 사회에 피해를 준 후에 죽음으로 달리는 사람에게는 아무도 동정을 하지 않고 오히려 돌을 들어 그의 죽음을 재촉합니다.

본문 접근

오늘 우리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하여 둘려 주신 귀한 말씀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가 62년경 순교를 당하기 직전에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세계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한 믿음만을 가지고 살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행동화해야 한다는 실천적인 기독교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때는 스대반 순교 이후 밀어닥친 박해로 많은 유대인 성도들이 로마제국의 각지로 흩어져 있던 때입니다. 이 성도들은 예루살렘을 중심 하여 활동하던 사도들과 좀처럼 만날 길이 없기에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신앙생활에 변질을 가져오고 여러 가지의 어려운 문제들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박해 속에서 많은 성도들이 온전한 믿음의 행실로부터 이탈하는 일이 속출하였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하면서 생활 속에서는 그 믿음을 증명하는 실천적인 행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 가운데 오늘의 본문은 세상의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을 알기 쉽게 우리의 말로 다시 한 번 옮겨서 경청하십시다.

본문의 재경청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하노라. 시련을 이겨 낸 사람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니라. 그 면류관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니라. 유혹을 당할 때에 아무도 “하나님께서 나를 유혹한다”고 말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유혹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 스스로 아무도 유혹하지도 않으시니라.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니라.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죽음을 가져오느니라.
나의 사랑하는 성도들아. 속지 말라. 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은 하늘의 빛들을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니라. 하나님 아버지는 변함도 없으시고 우리를 외면하심으로써 그늘 속에 버려두시는 일도 없으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의 첫 열매가 된 것이니라

주제의 부상

인간이 자기 앞에 다가오는 유혹을 물리치기는 실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대로 놓아두면 그 미래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 유혹이 만일 인간의 탐심과 야합을 하면 여지없이 그 탐욕은 하나의 독소로 우리 안에 자리를 잡습니다. 인간의 씨앗이 어머니의 태속에서 10개월이 되면 생명체로 이 땅에 나오듯이 잉태된 욕심은 때가 되면 반듯이 죄라는 괴물을 해산합니다. 그리고 그 죄는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고 사뭇 커 갑니다. 인간 세계의 어떤 것보다도 활발하게 그리고 급속도로 장성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그 장성한 죄의 노예가 되어 해어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깊이 뿌리내리고 장성한 그 죄에 의하여 인간은 처절한 죽음의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I) 죽음의 종말을 가져오는 근원이 된 탐욕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주제의 정의)

오늘의 본문에서 지적한 욕심이란 인간이 정상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삶의 목표와 그 것을 실천하려는 의욕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신이 땀을 흘려 준비하고 좋은 학교를 지망하려는 의지는 욕심이 아닙니다. 즉, 자신의 땀과 눈물의 대가로 얻게 되는 결과는 전혀 욕심의 결과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무엇을 해 보고 싶어하고 갖고 싶어하는 기본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것을 채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선한 방향으로 갈 때는 의지의 실천으로 칭찬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악한 방향으로 가고 방치된 욕망으로 갔을 경우는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더욱이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났을 경우 윤리적으로 탐욕의 선상에 오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말씀 속에서 욕심이란 자기에게만 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죄를 낳는 근본 원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욕심은 곧 성장하여 자신의 정당한 노력의 대가보다는 타인의 소유를 자기 것으로 삼고자 하는 터무니없는 탐욕으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양심을 버리고 불의를 저지르게 됩니다.

2) 인간이 탐욕을 버려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제의 필요성)

인간이 탐욕을 버려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탐욕이 죄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한 인간을 죽음의 골짜기로 몰고 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정치와 사회가 너무나 어둡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분수를 넘는 욕심을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사하면서 수행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것까지 자기의 것으로 챙기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기에 오늘의 이 혼돈과 공포와 불안이 발생됩니다.
우리의 정치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을 보아도 이러한 문제는 뚜렷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정상적인 노력을 쌓고 그 대가로 열매를 맺으려 하지 아니합니다. 그들은 갖은 구실을 다 동원하여 자신의 욕심을 합리화하고 국민의 이해 감각을 오도합니다. 그리하여 그 탐욕의 주인은 죽음의 골짜기로 빠져들게 되고 나라는 안정을 잃게 됩니다.
개인도 마치 한가지입니다. 육체 속에 머물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를 향한 유혹이 다가 올 때 그것을 물리치지 못합니다. 그 유혹을 향한 욕구는 바로 탐심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탐심은 질서를 상실하게 됩니다. 양심을 짓밟은 죄를 불러옵니다. 그리고 그 죄는 드디어 죽음을 불러옵니다. 그러하기에 인간이 경계해야 할 항목 중에서 우선적인 것은 탐욕입니다.

3) 어떻게 해야 이 죽음에 이르는 길에서 우리가 해방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이 나라에 혼돈과 불안의 폭풍이 멈출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이 죽음의 길을 모면할 수 있는 방법을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주제의 실천)

먼저, 하나님은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욕심을 잉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말씀)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4-15)

(해석)

여기서 말씀하신 욕심이란 단어의 뜻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강한 욕망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피면 인간의 명예욕, 물욕, 정욕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이 욕망이 분수를 넘어 한 인간의 마음에서 살아 있는 생명체로 잉태되는 것을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이것을 경계하지 아니하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과 야합하고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의욕이란 것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의욕이라는 것은 욕심과는 달리 자신이 선택한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자신의 의지를 불태우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유의해햐 할 것은 이 의지가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지 아니하고 그대로 방치해 두면 탐욕으로 변하게 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욕심이 잉태되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됨으로 그 욕심이 우리 안에서 잉태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적용)

인간이 처음부터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처음은 선한 의지를 불태우면서 자신의 일을 시작하고 뜻을 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좀더 빨리 좀 더 많은 것을 성취해 보고자 하는 유혹이 찾아옵니다. 이것은 바로 욕심이라는 것과 금방 결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다음의 단계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환영받은 사람은 욕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일 경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면서 욕심을 부리는 사람들입니다. 그 욕심은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상대에게 심각한 피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 주기에 모두가 그를 증오합니다.

(예화)
요즈음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보는 코리아 게이트나 제 4 공화국과 같은 프로그램이 TV에서 방영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불행한 한 장군이 단순하게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만을 수행하지 않고 주위에서 치켜세우는 유혹에 빠지면서 드디어는 수많은 인명을 죽이고 상관들을 무참히 짓밟으며 나라의 질서를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청와대의 주인이 되어 보겠다고 미치광이가 되어 날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침내는 이 나라의 정권을 찬탈하는 참으로 어이없는 승리의 개가를 부릅니다. 그러나 그는 때가 지나매 심판의 손길을 피하지 못하고 자신이 믿고 세웠던 가장 가까운 후계자에 의하여 백담사의 계곡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군사 문화가 통치권을 벗어나자 이 불행한 장군을 감옥에 가두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비극은 언제나 탐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장군이 장군으로서 만족하고 소임을 다했더라면 역사는 욕심을 부리지 아니한 훌륭한 장군이라는 훈장을 그의 가슴에 달아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국민의 사랑을 오래도록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유혹과 탐심 때문에 그 는 국민의 존경은커녕 감옥 속에서 신음하는 전직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언제 어디서 어떤 유혹이 다가와 우리의 욕심의 속성을 자극할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언제나 경계해야 합니다. 도리에 어긋나지 않고 순조로운 이치대로 나를 지켜 나가야 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따르는 사람들은 이보다 한 단계 앞서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이익을 챙기는 삶보다는 남을 위하여 때로는 손해도 감수 할 수 있는 착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요한 일서 2장을 통하여 다음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자녀들아!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마음속에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느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재산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이니라.(요일 2:15-16)

둘째로, 하나님은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죄가 장성하면 우리의 인간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감을 밝히고 있습니다.

(말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5)

(해석)

하나님은 다시 거듭하여 욕심이라는 씨앗이 자리 잡앗을 때에 거기는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불러온다는 말씀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시간 들려주십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오늘의 본문에서 밝힌 죄란 일정한 경계선을 그어 놓고 살아야 할 사람이 그 선을 상실해 버리고 방향과 목적을 모르는 채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죄란 ‘표적을 상실한 것’ 이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 그 정의를 잘 내리고 있습니다. 죄란 인간이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것이나, 또는 순종함에 있어서도 부족한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누구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순종할 수 있습니까 그러하기에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자신들의 결핍을 느끼게 됩니다.
죄가 우리의 인간 심성에 찾아오는 길은 여러 가지입니다. 먼저는 아담으로부터 우리의 속성에 뿌려진 죄의 씨앗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늘 안고 다니면서 범하는 죄가 있습니다. 이 죄가 진리의 말씀에 부딪치면 자취를 감추고 진리의 말씀을 떠나면 늘 고개를 내 밀고 우리를 지배합니다.

(적용)

욕심에서 울어 나온 죄가 크기 시작하면 그 힘은 대단합니다. 아무도 억제하지 못합니다. 억제하기는커녕 그 죄의 노예로서 비참한 길을 걷게 됩니다. 이 죄가 뿌리를 내리면 좀처럼 이겨낼 길이 없습니다. 한 동안은 하나님이 주신 양심으로 이겨 보려고 노력하지만 금방 죄의 위력에 쓰러집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죄와 함께 춤을 추며 날뛰게 됩니다. 인간의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신앙의 뿌리마져 흔들립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아니한 다리를 건너 영원히 죄의 종이 되어 버립니다. 실로 무서운 것이 죄가 장성하는 것입니다.

(예화)

우리는 요즈음 나라 안팎에 폭풍을 몰고 온 노태우씨의 참담한 죄의 기록을 봅니다. 가난했던 면서기의 아들로 자라나다가 총칼로 잡은 권력의 대열에 들어서서 억지로 대통령이 된 다음에 그는 엄청난 죄악의 길을 걷고 있었음이 하나 둘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는 수천억원의 현금에 만족하지 않고 땅과 빌딩을 움켜쥐어야 했고 심지어는 금덩어리까지 금고에 거두어 넣어도 직성이 다 풀리지 아니했다는 보도입니다. 특별히 그의 안방 마님까지 재벌 회장들의 부인들마저 불러들여 돈을 챙기는 어이없는 부부 가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하면 그들은 완전히 죄의 노예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토록 춤을 추고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갈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야 눈물을 흘리고 후회를 한들 그들이 갈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비록 집권자가 자신의 문제와 얽힌 사연 때문에 그를 사면해 준다고 한들 그는 이미 죽은 몸입니다. 아니 생명을 잃은 것보다 더 비참한 몸이 되었습니다. 일국의 대통령까지 지낸 사람이 자살은 하지 못하고 평생 그가 지구를 떠날 때까지 그는 죽음보다 더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의 대가는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보여진 현장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만 땀을 흘리지 못한 한 통치자의 종말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군인으로서 군의 사명에만 전념하지 않고 물질에 욕심을 부린 한 군사의 종말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성을 쳐들어가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전리품에 눈이 어두워진 아간이라는 군인의 기록입니다. 결국 그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심한 상처를 입게 되었고, 마지막에는 아골 골짜기에 끌려가 그의 가족과 함께 처형당한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7:1,18)
맡은 소임에만 우리의 정신을 쏟아야 합니다. 인간의 욕심이 유혹과 결탁되면 반드시 죄가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죄는 끝없이 성장하게 됩니다. 멈추지를 아니합니다. 그리고 그 종착역은 반드시 죽음의 골짜기가 되기 마련입니다. 바로 이러한 진리는 오늘 이 나라의 전직 대통령들의 기록에서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셋째는, 사람의 생명과 그 가치성이 소유의 유무에 있지 아니함을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말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 하니라. (눅12:15)

(해석)

우리 주님은 인간들의 심성 속에 잠재하여 있는 기본적인 욕구가 한도를 넘으면 죄를 잉태하게 되고, 그 죄가 장성하면 죄를 낳게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 우리 주님이시었습니다. 그래서 천하하고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생명을 우리 안 자리 잡고 있는 모든 탐심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단호하게 물리칠 것을 명령하십니다.
오늘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자신들의 생명과 같이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권세와 명예와 재산을 위하여서는 생명을 맞바꾸면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일찍이 잠언서의 기자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들려 주십니다.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라.

(적용)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인간은 부에 도취되고 권력의 상좌에 오르면 배를 내밀고 하나님이 누구냐고 하면서 하나님의 품을 벗어납니다. 또 너무 가난하면 유혹에 이기지 못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모습을 찾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지장이 되지 않도록 부하지도 가난하지도 않는 상태에서의 만족의 비결을 배울 것을 요구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중심한 나의 부와 명예와 권세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을 중심한 부귀영화의 추구는 탐욕으로 변질되고 언제나 죄와 결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대가는 죽음을 불러 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적절한 예화가 있습니다.

(예화)

아프리카와 같은 지역에서 원숭이를 생포하는데는 욕심이 많은 짐승의 심리를 이용합니다. 원숭이의 손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야자수 열매나 항아리 안에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한 움큼 넣어 놓습니다. 원숭이는 그 냄새를 맡고 바로 그 안에 손을 간신히 집어넣고 한 주먹 가득히 붙잡습니다. 그리고는 손을 빼려고 합니다. 손을 펴고도 간신히 들어간 그 그릇의 입구에 주먹에 음식을 잔득 쥐고 손을 뺀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원숭이는 그 음식을 향한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끝내 실랭이를 합니다. 사람이 다가가도 끝내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주먹을 펴지 못하고 맙니다. 그리고는 그 욕심 때문에 사람의 손에 잡히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욕심이 발전하여 탐욕으로 얼룩진 인간도 마치 한가지입니다. 그러한 인간은 욕심이 생기면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욕심의 주먹을 쥐면 펼 줄을 모릅니다. 그때는 그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도 안 보이고 사람도 안보입니다. 그리고 슬픈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4) 결론

오늘 우리의 눈앞에는 권세와 물질에 탐욕을 부리면서 거대한 죄를 범하고 죽음의 골짜기를 해 매이고 있는 전직 두 대통령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을 통하여 우리 나라는 다시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모든 국민들은 심각한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오늘 우리들은 이 때에 있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였습니다.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욕심의 속성이 유혹과 야합이 되면 탐욕으로 잉태됨을 잘 보고 있습니다. 그 탐욕은 지체없이 죄를 낳게 되고 그 죄가 장성하여 죽음을 가져온다는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정신 분석 학자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자기만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탐욕은 언제 어디서나 만족에 이르지 못합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탕진시키는 바닥 없는 항아리입니다.
과욕을 부리지 맙시다. 오늘 주어진 나의 일터에서 성실히 땀을 흘립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부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오늘을 즐기면서 감사하는 삶의 지혜를 배웁시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남긴바 있습니다. “나는 가장 적은 욕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이 말대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살기 위하여서는 오늘의 말씀이 우리의 가슴에서 떠나지 아니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니라.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죽음을 가져오느니라.

2. 본 설교가 있기까지

영국의 철학자 버톤(Robert Burton)이 그의 책 침울의 분석(Anatomy of Melancholy)에서 . “야망, 오만한 욕심, 혹은 무서운 명예욕, 그리고 부러움과 자만과 탐욕이 뒤섞인 마음의 거대한 고민, 호화로운 광기, 이것을 사람들은 기쁨의 독이라고 일컫는다.” 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이 말은 현대인들이 내일을 생각하기 전에 오늘만을 즐기려는 생리를 그대로 반영한 말이다. 내일 나에게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오늘 나의 욕구와 명예와 부를 이룩하면 된다는 종말론적인 사고는 우리의 사회와 나라에 대단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오늘의 나의 사고와 행동이 내일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독소가 되더라도 거기에서 춤을 추면서 내일을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이 땅을 이름 없이 지켜 가는 시민들 사회에서보다는 나라의 통치자들에 의하여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성적 차원에서 스스로를 분석해 본다면 그 규모나 결과는 비록 적은 것일지라도 대동소이한 면이 적지 아니하다. 주어진 일터에서 성실한 땀을 흘리면서 내일을 바라보는 순리적인 삶의 철학보다는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이’를 추구하는 삶의 양태가 바로 우리 자신들의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남다른 의지력 또는 남이 부러워하는 생동감 넘치는 의욕은 아름다운 것이며 소중한 것이다. 한 인간의 발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어느 수준을 넘게 되면 바로 욕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순조로운 발전이 없을 때는 무리한 수를 두는 모험과 탐욕으로 변질된다. 그리고는 목적을 위하여서는 수단을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펴면서 서서히 죄를 생산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죄악의 노예가 되어 살다가 비참한 종말을 고한다.
건국이래 처음으로 경험한 연말의 정치 현실을 구경하고 함께 돌을 들다가 나의 심중에는 어떠한 욕심도 잉태되어 있지 아니한지를 살펴보았다. 그 대답은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이상과 의욕과 꿈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욕심의 씨앗들이 적지 아니함을 보면서 필자는 또다시 손에 든 돌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망을 낳기 전에 정리해야 할 심중의 허구로 가득한 것들을 정리해야 한다는 절박한 위기감을 갖게 된다.

본 설교가 필요했던 사연

전직 대통령의 파렴치한 부정 축제는 온 국민에게 너무나 큰 허탈감과 분노를 안겨 주었다. 너무나 큰 배신감과 박탈감에 빠진 국민의 심상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요즈음에 보여주는 정치 드라마는 그 동안 상세하게 알지 못했던 5공화국의 실권자들을 국민에게 고발하였다. 온 국민은 두 손에 분노와 증오의 돌을 들어 던지고 있었다. 필자도 예외자는 아니었다. 어느 일간지에 탐욕은 죄와 죽음을 낳는다는 글을 기고하면서 오늘의 본문 말씀으로 그 불쌍한 생명들의 종말을 예견하였다. 그러면서 공인(公人)은 공익(公益)을 위한 욕심만을 부려야 하지 개인을 위한 욕심을 부르면 반듯이 죄를 짖게 되고 그 결과는 죽음의 골짜기로 갈 수밖에 없다는 논지를 편바 있었다.
그 다음날 평소에 가까이 지낸 서울의 어느 대형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특별한 주문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신문에 실린 그 글의 내용을 가지고 오는 주일의

2.
3.4.부의 예배를 인도해 줄 수 있겠느냐의 부탁이었다. 자신이 섬기고 있는 많은 교인들이 그 글을 읽었기 때문에 그 메시지는 어느 때보다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필자는 우선 대답을 하기 전에 자신이 섬기는 양들이 먹어야 할 양식에 대하여 이토록 민감하고 섬세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그 목사에게 치하의 인사를 하였다.
지금까지 전혀 접해 보지 못했던 부탁을 받고 일주일이라는 제한된 시간에 한편의 설교를 완성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걸머지게 되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을 향한 절박한 기도가 시작되었다. 그러한 기도가 계속 될 때마다 수천의 교인들이 그들이 설교단을 주시하면서 말씀을 고대하고 있는 모습이 계속적으로 눈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본문과 주제의 선정

오늘의 설교는 주제를 먼저 결정하였다. 그 이유는 말씀이 있어져야 할 정황(Context)이 너무나 뚜렷하게 회중들의 삶의 장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전직 두 대통령의 부끄러운 기록과 그들을 체포하고 구금한 사건은 건국이래 처음 경험하는 일이다. 그러하기에 설교자는 이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이 사건에서 무엇에 관하여 설교를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여기서 이 설교자는 사건의 현상보다는 그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을 시도하였다. 즉,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에 초점을 두었다. 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유별난 심성이 무엇이었었는지를 분석하였다. 그 대답은 지극히 간단하였다. 그것은 나라의 국방만을 책임져야 할 두 장군의 가슴에 욕심이 잉태되어 눈과 정신이 탈선했기 때문이라는 간단한 진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 욕심은 바로 탐욕으로 이어져서 수많은 인명을 죽이고 상관을 무참하게 짓밟으면서 청와대를 향하는 미치광이가 되었다는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탐욕은 정권의 찬탈에 끝나지 아니하고 물욕에 눈을 떠 수천억원의 현금과 땅과 건물을 움켜쥐고 자리를 물러나는 대도(大盜)의 죄를 범하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본 설교의 주제는 탐심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탐심에 관하여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경청하기 위하여 말씀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 말씀은 먼저 기독교의 제도권 밖에서 살고 있으면서 탈선하기 쉬운 그리스도인들에게 야고보를 통하여 주신 말씀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탐심을 물리치라”는 누가복음 15절 말씀과 사도 요한을 통하여 들려주신 “육신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재산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세상의 것”이라는 요일 2:16절을 감명 깊게 받게 되었다. 그리고 욕심을 버리고 살아야 할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물질관으로서 잠언서 30:8절을 통하여 주신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는 말씀이 주어졌다.

석의와 주해의 과정

본 설교의 주제와 본문이 너무나 뚜렷하고 주어진 본문의 뜻이 우리 한글 성경만으로도 충분하였다. 아직도 종강이 되지 않은 강의실을 지키는 것이 우선적인 임무인 이 설교자에게는 시간을 내서 석의를 한다는 것이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그래서 그대로 다음의 단계로 넘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나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터득하는 과정이 없이 그대로 원고를 쓴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임을 다시 확인해야 했다. 여기서 자칫 이 설교자의 분석과 시각이 본문의 바른 의미를 곡해시키게 된다고 스스로 선지 생도들에게 가르친 사실을 상기하였다. 그리고 순간적이나마 이 설교자의 태만한 자세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고 석의 작업을 펼치었다.
여기서 먼저 다룬 석의 작업은 야고보서의 말씀이 기록되어진 동기와 그 시대의 환경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욕심, 죄. 사망에 대한 원어의 의미를 섬세하게 찾았다. 그리고 그 보조적인 자료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비롯한 개신교의 신조에서 죄에 대한 해석들을 읽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평소에 생각했던 욕심 죄 사망의 의미보다 훨씬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이 석의 과정의 소중함을 다시 실감하였다.

본 설교가 추구한 목적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인 이 땅에서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언제 어디서나 존경을 받아 마땅할 존재들이다. 비록 그들이 현직에서 물러난 존재들일지언정 원만한 실수는 나라와 가정의 얼굴을 생각하여 모두가 덮어 주는 것이 우리의 미덕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에 우리는 참으로 기이한 언어를 쉽게 듣는다. 그것은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직 대통령들을 가리켜 감히 대도(大盜)와 수괴(首魁)라고 지칭한다. 동방예의지국인 우리의 문화권에서는 건국 이래 찾아 볼 수 없는 기이한 사연들이다.
이러한 슬픈 사연이 다시 발생되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은 우리 국민 모두의 소망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나라를 망하게 하고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라는 교육을 누가 시킬 수 있을 것인가 어느 인간의 말이 이 사특한 사회에 길잡이가 될 것인가 참으로 암담한 시점이다. 인간의 언어와 교훈이 이 땅의 모든 것을 이상적으로 개혁해 나갈 수 있다면 하나님의 존재는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인간이 저지른 부정과 부패의 현장에는 목양설교나 또는 전도 설교와 같이 위로하고 진리를 선포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부패의 현장이 발생할 적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어 칼날처럼 예리한 메시지를 주시었다는 기록이다. 그러하기에 오늘의 이 참담한 부패로 얼룩진 세계에 본 설교는 예언적인 설교가 되어서, 우리 개인의 심성과 직결된 말씀을 풀어 주고 그 말씀 가운데서 우리의 죄성을 지적함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설교의 유형과 그 형태

필자는 지난 12월호에 설화체 설교를 소개하면서 앞으로 몇 회에 걸쳐 동일한 형태의 설교를 싣겠다는 약속을 한바 있다. 지난번에 발표한 설교 형태가 한국 강단에 좀처럼 사용되지 아니한 설화체 설교이기에 독자들의 관심이 대단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 호에 싣게 된 설교의 유형은 본문 설교이며 그 전개 형태는 분석 설교이다. 설화체 설교로 본 설교를 전개하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즉, 설화체 설교란 성경의 사건이나 인물을 주제로 하고 거기에 해당된 성구를 본문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설교는 삶의 장에서 발생된 사건을 설교의 주제로 하기 때문에 전혀 설화체로 엮을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의 사건을 앞에 두고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에 지난주에 행한 설교를 우선적으로 독자들 앞에 내놓고 공통된 관심을 나누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실질적으로 목회의 장에서 갑작스럽게 발생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설교자는 언제나 계획된 설교의 괘도를 수정하여 말씀의 현장화를 시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 할 수 있었다. .
그래서 본 설교는 그 기본 틀을 본문의 핵심 단어를 풀어 가는 본문 설교의 기본 유형을 따랐다. 그리고 그 전개 형태는 주제를 풀어 가면서 그 실천 방안을 말씀으로부터 찾는 분석 설교를 따랐다.

3. 본 설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

제한된 시간에 최선을 기울여 설교 준비의 모든 과정을 거쳐 원고를 작성하고 나아가 말씀을 운반하였으나 녹화 필름을 섬세하게 보면서 그 부족을 절감하였다. 물론 설교에 만족이 발생한 것은 설교의 하향 길을 의미한다는 설교 신학자들의 말을 가슴에 두고 있다. 그러나 설교의 내용과 전달이 기대했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함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설교자로서의 결핍을 다시 생각해 본다.
다행스럽게 본 설교가 시기에 맞은 본문의 선택이 정확하였다는 점과 오늘의 회중이 경험적으로 들어야 할 말씀과의 만남을 가져왔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부분들은 아쉬움 속에서 지적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은 설교의 자료를 좀더 풍부하게 준비하지 못한 점이다. 남미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의 군사독제자들이 남긴 오점과 그들을 처벌한 사례를 들어가면서 죄가 죽음을 불러온 실례들을 실감나게 제시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둘째로, 오늘과 같이 회중들의 감정이 심한 상처를 받고 있을 때는 비록 날카로운 예언적인 설교라고 하더라도 좀더 감상적인 어휘들을 동원할 수 있다면 훨씬더 깊은 감동을 줄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해 본다.
셋째로, 본 설교의 예화가 주로 전직 대통령들에게 국한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예언적인 설교라면 오늘의 집권자도 포함된 경고의 메시지가 있었어야 한다고 본다. 자신의 후반기 집권의 권위와 안전을 위한 욕심에 의하여 상대 정치인들을 상하게 하는 우를 범하지 아니해야 한다는 경고도 가능했는데 여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문제점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넷째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국민들이 이 나라의 정치권에 대한 불안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사연에 너무 관심을 두었다는 지적이다. 회중들이 직면한 매일의 삶과 연관을 짖는 사례들이 전혀 없다는데 본 설교는 마치 정치적인 쟁점만을 다루는 설교의 성격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을 감출 수 없다.
끝으로, 여기서 함께 나누고 싶은 지적 사항은 대 사회적인 예언의 설교는 그 설교에서 언급되어진 사회의 쟁점들이 너무 현실적이고 경험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 그늘에 가리어진다는 점이다. 회중들이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적나라한 오늘의 현장과의 만남만이 가슴에 안고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환원하면 하나님 말씀과 나와의 관계를 맺지 못하고 그 말씀과 그 사건의 주역들과의 만남만을 희망하면서 주일의 예배를 마치는 경우가 발생될 소지가 가득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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