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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달라진 모습을 위하여 (시 08:1-6 , 막 1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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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을 들릴 때마다 제일 많이 진열된 상품이 무엇이라고 여러분은 느끼셨습니까 우리 모두가 매일 매일 입어야 하는 옷을 제일 많이 진열해 놓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인도의 가도릭 수녀원에서 두벌의 옷으로 평생을 보낸 데레사 수녀나 한 벌의 법복을 꿰매어 입으면서 살다간 승려들을 유심히 보기도 합니다.
가난했던 옛 시절에 성장했던 사람들에게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 어떤 것이었느냐고 물은 다면 대체적으로 부모님이 추석과 설에 새 옷을 사 주시던 때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깨끗하게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모든 사람에게 보인다는 것이 그렇게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도 오래되면 낡아지고 낡아지면 새 것으로 바꾸어 보는 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더 나아가 인간이 낡아지고 부패해지고 탈선해 간다면 거기는 당연히 하나의 새로운 가치의 것을 추구하고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필요한 새 것을 가져와 오늘의 삶을 이어가겠다는 것이 우리 인간의 공통된 관심입니다.
오늘은 개신교에게 퍽 뜻 깊은 종교 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독일의 젊은 신학자요, 신부였던 마틴 루터가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가,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데 열중하지 않고 진리로 수많은 신자들을 먹이지 않고 인간 위주의 제도와 내용 없는 가르침에만 중심을 둘째 그는 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것입니다.
실례를 들어서 당시에 성경은 라틴어로만 되어서 신도들은 아무도 읽을 수 없고, 오직 성직자만 읽도록 되어서 신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고 은혜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초로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하는 피나는 대역사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다른 실례로서는 로마에 베드로 성당을 짓는 기금 모집을 하면서 돈을 주고 속건제란 표를 죽은 선조들의 죄까지 용서함 받고 이 표를 산 즉시 그들은 지옥에서 천당으로 옮겨진다는 허황한 선전 속에 거리낌 없이 우매한 신도들을 잘못 인도해 갈 때 마틴 루터는 구원이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몇 푼의 돈으로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이라고 대담하게 외치며 잘못을 바르게 지적하고 일어섰습니다. 이토록 바른 개혁의 횃불은 유럽 전역에 불길처럼 번졌고 오늘의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가 탄생했던 것입니다.
이토록 위대한 불길이 지금으로부터 약 478년 전에 일어났었습니다. 그래서 새 질서, 새로운 진리의 깨달음은 우리 개신교의 자랑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이 478년 전의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를 묻는 것보다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개혁에 관한 가르침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찾아 경청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본문접근과 경청

우리의 구원의 주님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예루살렘을 입성하시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 나라에서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의 축제에 들뜬 기분으로 예루살렘에 집결했습니다. 마는 예수님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찾으신 내용과 그 심정은 보통사람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제 십자가의 모진 수난을 당하셔야 할 날이 불과 며칠 남지 않은 시점에서 안식 후 첫날 일요일에 입성을 하시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월요일에 맨 먼저 성전으로 발길을 옮기십니다. 지금의 고난 주간 둘째 날에 해당됩니다.
성전을 찾으신 우리 주님은 큰 실망을 금하지 못하십니다. 성전 안에 들어 갈 때 사람들은 모두 희생의 예물로서 비둘기나 돈을 들고 가야 하는데 그들이 먼 길에서부터 들고 들어온 것은 모두 부정한 것이라 하여 성전 안에서 다시 구입을 하던지 바꾸어야 한다는 속임수로 비싼 값을 부르면서 이익을 챙기는 탈선의 장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우리의 주님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르게 되어 행동으로 그 잘못을 고치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다시 한번 이 말씀을 쉬운 현대어로 옮겨서 경청해 보십시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뒤에 예수님은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성전 뜰에서 이익을 남기려고 물건을 사고팔고 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즉시 그들을 쫓아 내시 며 돈 바꾸는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또 물건들을 나르느라고 성전 뜰을 질러 다니는 것도 금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성서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 집을 돈을 갈취하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
하고 심한 질책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없애 버리자고 모의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군중이 예수의 가르치심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예수를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저녁때가 되자 예수와 제자들은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주제부상

오늘의 이 말씀에서 우리 주님은 어지럽혀지고 부패한 성전을 어떻게 바르게 하셨는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개혁이 필요한 현장에 서신 우리 주님의 태도가 어떠하셨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개혁의 정신을 우리가 어떻게 본을 받아야 할지도 말씀하고 보여주신 말씀입니다.

1.우리 주님이 보여주신 개혁의 의미는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주제의 정의)

개혁이란 싫은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취하는 인간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혁이란 어느 정권이 들어서서 눈에 가시가 된 사람들을 쫓아 버리고 자신의 사람들로 모두를 채우는 무서운 권력의 칼이 아닙니다.
진정한 개혁이란 무질서를 질서로 바꾸고,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여 참된 인간으로 되돌아오며, 오늘의 너무나 구태의연한 상태를 벗어나서 좀더 나은 발전을 향하여 용기 있는 발길을 옮기는 것은 모두 개혁이란 개념에 속한 말이 되겠습니다. 더욱더 하나님 앞에 언제나 제자리걸음만 계속하고 있는 나의 신앙에 뜨거운 채찍을 가하고 대담한 결단과 함께 전진해 나가는 것은 더욱 훌륭한 개혁의 출발이 되겠 습니다.
개혁이란 어휘는 혁명이란 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혁명이란 기존 질서를 송두리째 부정해 버리고 새로운 터전과, 구조 속에 별개의 세계를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죽음이 아니면 영웅이라는 양자 중의 하나를 향한 하나의 최후 수단입니다. 그러나 개혁은 현존한 질서 속에서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발걸음이며, 쉬지 않고 우리 인간 사회에 있어야 할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2. 개혁이 필요한 현장이 바로 오늘입니다.(주제의 필요성)

사회가 몹시 혼란한 오늘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어느 것 하나 정상적인 것이 없는 시대처럼 여겨지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눈가림으로 정치도 계속되고 경제도 계속되고 윤리도 계속되는 현실입니다. 이웃 나라에서는 찾아 볼 없는 기현상이 발생된 우리의 현실입니다. 모두가 불안한 마음에서 언제 어디서 무슨 사건이 터질지 모르는 혼돈의 사회가 되어있는 현실입니다.
우리의 사회가 달라져야 한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한 개혁이 요구되어지는 현실입니다. 정치적인 개혁이 아니라 이 땅의 영원한 안녕과 평화와 질서를 위한 개혁이 필요함을 누구나 다 느끼고 있는 현실입니다.

3. 이러한 현실에서 진정한 개혁의 성취는 어떠한 길을 밟아야 하는 것입니까 (주제의 실천방안)

첫째로, 우리 주님은 용기와 결단과 희생과 인내의 결실로서 개혁을 보여 주시었습니다.

(말씀)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15-16)

(해석)

우리 주님이 스스로 말씀하신 데로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개혁의 현장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수천 년 동안 상습화되어 버린 제도를 버리고 새 질서를 찾는다는 것은 말이 쉽지 실로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주님, 그토록 인자하셨던 분이 개혁의 손길을 펴실 때 그 환경이 그리 쉽지를 아니했습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가슴 아픈 갖은 시련을 다 당하시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성전에서 사역하고 있던 제사장들과 성전 뜰의 장사꾼들이 야합이 되어 있던 무질서한 행위를 바로잡는데 외로운 용기와 결단의 손길을 펴시어야 했습니다. 누구도 감당하기 어려운 희생이 뒤 따르는 용단이었고 외로운 길이 엇습니다.

(적용)

진정한 개혁의 지속이라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적은 것이라도 개혁을 가져오기 까지는 실로 큰 용기와 용단이 필요하고 때로는 희생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위한 개혁을 단행합니다. 식사 시간은 언제, 가정 기도회는 언제, 애들이 잠자리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부모님이 기도함, 등등을 결정합니다.
이 적은 새 출발이 얼마나 부담이 되고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많이 체험한 줄 압니다. 지금 잔뜩 재미를 가지고 보고 있는 T. V 프로그램을 꺼버리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한참 재미있게 읽던 신문을 탁 놓고 함께 앉아야 합니다. 피곤하고 졸음이 오고 귀찮아도 애들의 침대 곁에 앉아 기도해 주는 약속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와 오락이 나의 가정과 개인과 신앙생활에 거리낌이 된다면 단호히 끊을 수 있는 용단을 곧 개혁의 발걸음입니다.
우리 역사 속에 신라의 김 유신 장군의 전기 중에서 하나의 훌륭한 결단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가 기생집을 매일 매일 자기의 일과처럼 출퇴근을 했습니다. 거기서 생의 만족을 느끼면서 아까운 젊음을 헛되이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그것이 자기의 갈 길이 아님을 알고 대개혁의 결단을 내리고 자기의 방향을 새로이 잡고 그 출입을 단절했습니다. 어느 날 무심히 말을 타고 그 말이 가는 데로 그대로 가면서 깊은 사색을 합니다. 그때 말이 문득 어느 집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말이 선 곳은 곧 자기가 돌아보지도 않기로 한 그 기생집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칼을 들어 자기의 그토록 사랑한 말의 목을 쳐 버리고 총총 발길을 집으로 돌렸다는 일화는 정말 훌륭한 개혁의 본입니다. 그 희생과 인내와 용기 있는 결단은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둘째로, 우리 주님은 진정한 개혁은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것이 더욱 시급함을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이여 너희가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과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 23:27-28)

오늘의 본문에서는 우리 주님이 외적인 개혁의 장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는 이러한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늘 외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오랜 전통과 관습에 젖어서 구태의연하게 아무런 변화가 없이 살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은 자신들의 부패한 내적인 모습은 감추어 두고 모두가 겉치장만을 계속하였습니다. 그 때 우리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었습니다.

(적용)
우리 주님의 말씀은 너무나 옳으신 말씀입니다. 우리들 자신을 자세히 보면 우리의 겉과 속이 얼마나 차이가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상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잔인함이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부드럽지만 그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악한 생각이 너무나 많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희생과 봉사의 단어를 좋아하지만 실상은 받기에 급급하고 욕심이 얼마나 그득한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차라리 그 반대가 더 좋습니다. 나의 겉사람은 초라하게 보이더라도 마음만은 넉넉하고 부요해야 합니다. 차라리 외형은 어쩔 수 없이 냉정하게 보이더라도 그 마음에 정이 가득하고 사랑이 넘쳐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 우리의 겉과 속이 하나가 되어 누가 보아도 신뢰할 수 있고 우리의 언어는 인격의 표현이 되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확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고후 4:16)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화려한 의복은 자기의 외적인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좋은 도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동생활을 해야 하는 구조 속에서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 많은 관심을 둡니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건물과 고속도로와 산업시설이 발전되어, 대 개혁의 행진을 눈부시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교회는 거대한 건물과 함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뜻있는 어른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깊은 아픔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너와 내가 서로 믿고 사랑하고 도우는 풍토가 사라진지 오래며, 정직이나 신의가 좀처럼 발견되어지지 않는 사회가 됐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체 오늘을 살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진정한 개혁은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의 위탁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육체마저도 내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 한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내 육체, 내 마 음대로 먹고 즐기면서 무질서하게 살아가는 것을 성경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고전 6:9절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구태의연한, 죄악된 생활을 계속하는 몸으로는 성령의 전이 될 수 없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오직 내적으로 새롭게 단장된 즉 개혁된 육체로만이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습니다.

세째로 우리 주님은 개혁은 이론이 아니고 행동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말씀)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해석)

오늘 신약의 말씀은 마가복음 11장 15-18절을 유심히 보십시오. 예수님의 행동적인 개혁의 기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인자한 예수님의 상을 발견하고 또 사랑의 실천자로 이해합니다. 옳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어만의, 이론만의 사랑이 아니라 행동 즉 죽음의 실천으로 그 사랑을 보였습니다.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교의 그 부패한 종교 생활을 언어로만 지적하시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성전이 세속화되고, 상업화 되었을 때 그는 채찍을 들어 질서를 바로 잡았고 책상을 뒤엎으면서 가슴 아픈 개혁을 단행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 주님에게 수난을 더욱 가까이 재촉하게 되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자기내의 이권이 예수님의 개혁 때문에 손상을 볼 때 예수님을 죽이려는 결의를 더욱 다지게 되었습니다.
혹시 예배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예배하는 이 시간에도 너무나 속된 사연들이 무슨 사업계획들이 내 마음들을 점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위험한 일입니다. 이때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 예수께서 성전 안에서 하셨던 말씀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막11;15-16)

모든 인간들이 해야 할 일을 앞두고 말하기에는 너도 나도 바쁩니다. 거창한 개혁의 계획은 잘 세웁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많은 행동으로 옮겨지느냐 는데 따라 그 개혁의 성패는 판가름되는 것입니다. 특히 정적인 사회의 우리 한국인들은 동적인(움직이는) 서구 사회와는 아주 대조적입니다. 언어보다는 행동으로 개혁의 본을 보이신 우리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움직이는 인간이 되라고 격려하십니다.
일찍이 우리의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던 독립운동가 도산 안 창호 선생님이 1919년 상해에서 우리 민족정신의 갱신을 부르짖으면서 다음과 같은 행동적인 개혁을 촉구한바 있습니다.
거짓말을 잘하는 습관을 가진 그 입을 개조하여 참된 말만하도록 합시다.
글 보기 싫어하는 그 눈을 개조하여 책 보기를 즐겨하도록 합시다.
게으른 습관을 가진 사람은 그 사지를 개조하여 활발하고 부지런한 사지를 만듭시다.

넷째로, 주님은 자신의 개혁이 지속적으로 계속하셨음을 보여주십니다.

(말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해석)
우리 주님은 이 땅의 사역을 마무리 짖는(짓는) 마지막 사역으로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심각한 기도를 드리십니다. 그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다 이루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으로 연결됩니다. 우리 주님은 흑암과 혼동으로 뒤덮인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심기 위하여 그렇게도 쉼 없이 개혁의 행진을 말씀과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진행하시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개혁의 채찍은 하루아침 성전의 사건으로 끝나지 아니했습니다. 주님은 수많은 교육 속에서 말씀하시고 그 어려운 목회 현장 속에서도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하는 그 민족의 개혁을 계속했습니다. 결코 중단하시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놓기까지 개혁의 손길을 쉬지 않으셨습니다.

(적용)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바르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게 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모처럼 새운(세운) 개혁의 위대한 뜻이 지속되기에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경험하셨습니다.
우리의 인간들은 어제의 결심이 오늘 변합니다. 오늘의 결심이 내일이면 퇴색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잊고 싶은 사연들의 노예로 한 날을 보냅니다. 오늘의 결단이 내일 지속되지 못한 나약한 인간들의 삶이 바로 오늘 우리의 생활의 상태입니다. 어제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그 믿음이 오늘 죄의 유혹 앞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실로 곤고한 사람들입니다.
뜻한 바를 지속시키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들이기에 참된 개혁의 발길은 언제나 희미하게 우리 앞에 있어왔습니다.

(예화)
어느 유대인의 이야기:아주 흔들거리는 다리, 줄로 엮어서 만든 다리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반절쯤 갔을 때 거센 바람과 함께 흔들거려 도저히 오던 길로도 돌아갈 수 없고 계속 가자니 죽을 것만 같아서 "하나님, 나를 살려주세요. 나를 저기까지 무사히 건너게 해 주세요. 그러면 나의 재산 모두를 바쳐서 주님 사업을 섬기겠습니다. "그러자 바람이 잠잠해졌습니다. 갑작스럽게 잠잠해진 바람이 거의 다 건널 때까지 계속되고 얼마 안가면 다 된 것을 알게 되자 후회가 막심합니다. 그리고서는 "하나님! 아까한 말은 취소하고 1/10정도만 내 놓도록 합시다. 십일조만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의 그 다리를 다 건너갈 무렵 이 유대인 "아이고, 하나님 10분의 1도 적은 돈이 아닙니다. 그 약속은 외상으로 합시다."고 다시 옛 생각으로 환원합니다. 그 때 갑작스럽게 잠잠했던 바람이 불고 이 줄다리는 마구 흔들립니다. 어느 때보다 위험하게 됩니다. 이 유대인은 "하나님, 지금까지 변했던 마음은 사실이 아닙니다. 본래 약속대로입니다." 그 때 일기는 정상이 되고 다리는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드디어 다리를 다 건넌 이 친구는 "하나님, 농담도 못합니까" 하면서 모든 약속을 없던 것으로 돌렸다는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변화무쌍한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내 헝클어진, 무질서해진 삶의 길을 개혁하겠다고 결심을 하면서도 그 도움 속에 평안한 듯하면 다시 어제로 돌아가 버리는 삶의 길을 우리는 수 없이 경험합니다.
좀더 말씀과 기도 속에 내 신앙을 지속시키겠다던 결심이 늘 시들어 집니다. 내 아내에게 남편답게 행동하고 사랑해 보겠다던 결심이 작심삼일이 됩니다.
내 남편에게 어디의 어느 여성에 못지않게 사랑과 희생과 존경을 펴보겠다던 결심이 금방 흔적을 감추어 버립니다. 모두가 괴로운 사연들입니다. 개혁의 지속성이 이토록 어렵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인의 달라진 모습, 우리 자정의 변화된 삶, 우리 교회의 발전된 모습, 우리나라의 개혁의 의지 이 모두는 분명히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어제 시작하고 오늘 꼬리를 감추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4. 진정한 개혁이 이룩되는 날 우리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게 됩니다.(결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3:11)
인간됨과 신앙생활에서 진정한 개혁이 이룩된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린 아이의 모습을 버리고 성숙한 자녀로서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성숙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개혁의 길을 지속하였다는 말입니다. 어린 아이의 결심은 늘 변합니다.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의 결심은 분명히 지속성이 있습니다. 성숙한 개인, 성숙한 가정, 성숙한 그리스도인, 성숙한 교회, 성숙한 민족으로 산다는 것은 개혁의 위대한 결실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위대한 결단과 행진이 계속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도구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개혁의 의미를 깨닫고 내 스스로의 속에 내 가정속에, 내 교회와 사회 속에 그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일어서는 자에게는 밝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둡고 실의에 찬 사연들이 때로는 우리를 엄습해 옵니다. 나의 최선과 진심은 칭찬보다는 비난으로 정복당합니다. 그때마다 인간인 우리는 슬퍼질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 개혁의 선두에서 자기의 재산과, 시간과, 정력과, 모든 것을 바쳐 일하던 마틴 루터는 너무나도 강하게 엄습해 오는 반대 세력 앞에 거의 자기의 방향을 포기하면서 괴로운 심정으로 집에 왔습니다. 집 근처에 왔을 때 이상한 통곡 소리가 났습니다. 자세히 들어본 즉 자기 부인이 상복을 입고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묻습니다. "누가 죽었기에 그리 통곡을 하오"
부인 "하나님이 죽으셨습니다."
루터 "아니, 하나님이 죽으시다니. 당신 미쳤소'
부인 "그럼, 하나님이 죽으시지 않으셨다면 왜 당신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하고 그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거의 매일 실의에 빠져 헤맵니까"
이때 루터는 하나님께 겸손히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구약 말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좀더 올바른 세계를 추구하면서 개혁의 결단을 내리신 분들은 스스로의 의지만을 의지하시려 할 때 반듯이 실패가 옵니다. 우리는 오직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의 결단과 개혁의 추구가 이룩되어야 합니다.
여기 튼튼한 우리의 중심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고백이 있습니다.
(시8:1-6)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결론)

이제 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개혁의 역군들은 참으로 십자가의 군병들입니다. 그 군병들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기 때문입니다.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힘 있는 장수로 당할 자 없게 승리를 가져오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악한 세력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낼 것 없습니다. 진리가 승리 합니다. 재물과 친척과 명예와 심지어 생명을 다 빼앗긴다 해도 그리스도의 진리는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힘찬 개혁의 행진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새로운 삶의 추구는 참 개혁의 의미를 지닌 것이어야 합니다. 루터의 말대로 개혁은 한번 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 시대, 매 순간마다 필요한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될 때는 어느 장소, 어느 시기를 불문하고 개혁되어져야 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엡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좆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 본 설교가 있기까지

설교를 위한 명상의 노트

새로워지는 것에 대한 동경이 이 아침도 계속되고 있다. 인간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을 하고 거기에 따르는 후회를 계속한다. 그리고 새로워져야 한다는 결심을 한다. 그러나 그 순간은 몇 발자국 가지 못하여 또 다시 옛사람으로 회전되는 부끄러운 기록을 갖는다. 이러한 현상은 자기 자신과의 사이에서만 발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수 없이 발생되는 문제들이다. 이럴 때마다 자신의 나약함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여 자신에게 강한 의지를 달라고 애원의 기도를 한다. 그리고 나의 의지로서는 한계를 느낀다는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이 이끄시고 보호하시는 은총을 달라는 기도를 한다. 자다가 깰 때라라는 말씀 앞에서 몸부림 친 어거스틴의 모습을 연상해 본다. 은총의 신학을 몸으로 경험하고 그 경험을 신학화 한 그의 기록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시는 동안 처음부터 외쳤던 회개의 문제나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모두 낡고 부패한 것에 대한 개혁의 메시지였다. 새로운 주인으로 새로운 세계를 주창하셨던 그 분의 음성이 지금도 그침이 없이 들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나의 모습은 새로움을 향한 동경과 시도는 계속되지만 아직도 시원스러운 결실이 보이지를 아니한다. 여기서 또 한 번 말씀을 운반하는 메신저의 고민이 더해지고 있다.

본설교가 있기까지의 사연

2천명이라는 성도들이 모이는 어느 교회에서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록 일년이라는 기간동안 맡아있는 한시적인 말씀의 사역이었지만 그 준비와 책임은 실로 막중하였다. 그러하기에 교회가 맞이한 중요한 기념주일에 적절한 메시지를 찾아 그들에게 운반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개신교가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 거기에 맞는 말씀을 찾는다는 것 또한 1517년 이후 하나의 전통으로 되어있다.
설교자는 절기 설교에 대한 고민이 적지 아니하다. 특별히 한 교회에서 장기간 동안 목회를 계속하는 설교자는 특수한 의미를 가진 주일이 다가올 적마다 늘 새로운 설교를 해야 하는 부담이 적지 않은 고민이다.
이 설교자에게도 조그마한 염려가 따르고 있었다. 교인들이 이미 종교개혁주일마다 들어 온 숱하게 들어온 이 날의 설교일 터인데 좀더 신선하고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메시지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혁주일마다 언급되는 루터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메시지는 없을까 차라리 우리의 신학과 교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칼빈과 낙스와 같은 개혁자들의 소중한 개혁의 발자취를 신선한 사례로 활용할 수는 없을 까 등등의 많은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은 또 다시 실현되지 못하고 루터의 개혁의 현장에만 시선이 집중되는 모순을 범하게 되었다.
제한된 생각을 탈피하지 못한 고민을 안게 되었다. 그리고 한정된 지식과 자료의 궁핍을 느끼면서 설교자로서 또 한 번의 부끄러움을 안게 되었다. 설교자는 좀더 깊고 넓게 설교의 자료를 찾기 위하여 뛰어야 신선한 메시지를 찾게 되며 그것으로서 회중들의 가슴을 적시게 되는데 스스로 또 한 번의 실의에 젖어본다.

본문과 주제의 선정

설교의 주제를 선택함에 있어서 특정주일의 경우는 설교 주제의 선택이 한정적이다. 즉, 종교개혁주일과 같은 주일에는 개혁이라는 주제가 이미 주어져서 그 주제를 어떻게 구체화 할 것인가의 문제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하기에 본 설교의 주제도 개혁으로 한정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본문의 선정은 적지 않은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우선적으로 우리 주님의 말씀 모두가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메시지이기에 모두가 개혁의 시각으로 보면 모두가 본 주제에 해당된 말씀이었다. 이러한 고민은 또 다시 설교자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하였다. 주님 주신 이 많은 말씀 가운데서 어떤 말씀을 가지고 주님의 귀한 개혁의 뜻을 전하오리까의 절박한 간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우리 주님의 행동적인 개혁의 현장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도 유순하기만 하셨던 우리 주님의 모습이 돌변하여 채찍을 들어 부패의 현장에서 돈을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의자를 뒤 엎으시고 간악한 무리들을 쫓아내시면서 성전의 청결을 몸으로 보여주신 주님의 모습은 실로 눈으로 역력히 볼 수 있는 생생한 개혁의 현장이었다. 바로 그 현장을 오늘의 본문으로 결정하면서 마음에 큰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본문을 보여주신 성령님의 역사에 다시 한 번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설교 목적의 설정

본 설교의 주제는 그 목적 설정에 있어서 다양한 접근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선포적인 설교(Kerygmatic Preaching)와 치유적인 설교(Therapeutic Preaching)를 제외하고는 교훈적인 설교도 가능하고 비판적인 정신과 내용을 가지고 부패한 현실을 지적한 예언적인 설교(Social Prophetic Preaching)도 가능한 주제이다.
여기서 본 설교자는 현대의 교인들에게 자극적인 비판과 분석을 통한 메시지의 구성보다는 우리 주님이 실천하신 개혁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그 깊은 뜻을 전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판단은 본 설교가 순수하게 우리 주님이 행동으로 보여주신 개혁의 현장과 그 깊은 뜻을 오늘의 교인들에게 운반하여 주는데 만 그 일차적인 목표를 두게 하였다. 그러하기에 그 목적도 당연히 교훈적인 설교에 한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목적 아래서 개혁에 관한 구체적인 이해와 그 실천방안을 가르치는 형태의 설교로서 구성을 시도하게 되었다.

본문과의 대화

오늘의 본문은 그 배경에 대한 이해가 정확하여야 분노하신 주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먼저는, 성전 안에서라는 서술을 위하여 성전의 구조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 성전 안이란 이방인의 뜰이라고도 불렸던 곳으로 이방인들이 들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짐승의 매매 행위가 있게 된 동기와 현장의 모습이 심각한 부패의 현장이라는 사실 또한 충격적이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오는 이방인들이 들고 온 희생제물을 검열 이라는 과정을 설정하여 통과를 시키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것을 사도록 하는 이 혼탁한 상혼이 바로 제사장들과 결탁되었다는 사실은 성전을 지키는 주역들의 극단적인 부패의 척도를 실감하게 하는 것이었음에 깊은 관심을 두게 하였다.
이토록 부패한 현장을 우리 주님이 목격하시고 분노하시고 숙정하신 사실은 공관복음에서는 수난 주간을 앞두고 나타난 단 일회의 사건처럼 기록되었으나, 사실은 요한복음을 통하여 예수께서 초기 사역 때에도 동일한 일을 하셨다는 기록을 찾아보게 되었다.(요2:13-17)
여기서 주님의 개혁에 대한 깊은 관심만을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성자 하나님의 권위를 비롯하여 공의와 순결을 강조하신 주님의 모습과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을 지키시려는 그 열정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설교의 유형과 그 전개 형태

본 설교는 앞에서 언급한데로 교훈적인 설교이다. 흔히들 교훈적인 설교란 설교자 자신이 소유한 교리나 신학적인 견해를 가르치는데 주안점을 둔다. 그러나 본 설교에서는 본문 설교의 유형을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다. 교인들로 하여금 오늘의 본문의 현장에 머물게 하고 그 본문에서 우리주님의 예리한 개혁의 의지를 보여주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즉 교인들로 하여금 설교자와의 만남이 전혀 없게 하고 개혁을 집행하시는 주님과의 만남을 가져오도록 하는데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본 설교의 전개 형태는 분석설교를 따르고 있다. 더욱이 본 설교가 교훈적인 설교라는 설교의 목적 아래서 진행되었기에 본문의 정황분석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주제의 정의와 필요성을 오늘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개혁의 실천방안이 바로 주님이 보여주신 개혁의 현장에서 발견되어지고 운반되어지도록 하는 철저한 분석설교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설교마다 있어야할 복된 소식의 부분인 주제의 실천 결과도 종교개혁가의 승리의 현장에서 찾도록 하였다.

본 설교의 자료 수집의 문제

앞에서 언급한대로 본 설교를 위한 자료는 어느 설교보다도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흔히들 사용하는 개혁가들의 족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설교이기에 회중들이 반복하여 듣게 되는 자료가 중복된다는 점이 몹시 무거운 짐이었다. 여기에 대한 대안으로서 평범한 우리의 삶에서 발생되는 현장을 중심하여 설교의 자료를 확충하려 하였다. 우리의 생각과 습관이 구태의연하여 개혁이 필요한 삶의 장면들을 찾는데 설교자의 시각을 모았다. 예를 들면, 가정예배를 드려야할 시간에 방송국의 연속극 때문에 소중한 가정예배가 지연되고 중단되는 삶의 장면들이 바로 그러한 실례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살아간 유대인의 세계가 경제만을 추구하는 민족으로 탈선한 것을 익살스러운 이야기로 만든 예화의 사용 등은 오늘의 본문에서 돈을 즐겼던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을 연상하는 효과도 함께 시도해 보았다.

3. 본설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그리고 손상당함이 없이 운반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의하여 설교는 준비되어진다. 그러나 한 편의 설교가 완성된 다음, 그리고 그 설교가 외쳐진 다음에 찾아든 부끄러운 생각은 언제나 계속된다. 오늘의 본 설교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개혁에 관한 메시지가 터지는 날 개혁의 결단을 내리는 성도들이 발생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그러한 결단의 반응은 희미한 듯하다. 오늘의 설교도 또 하나의 설교로 끝나고 있다고 생각하면 실로 가슴이 아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자성의 시간을 가져본다. 그리고 다음의 몇 가지를 지적해 본다.
먼저, 본 메시지를 깨닫고 그것을 설교로 작성하여 회중들에게 운반하는 이 설교자 자신에게서 이 설교가 있은 후에 아무런 개혁의 삶이 보이지 아니한다는 것이 가장 무서운 비판의 표적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둘째, 본 설교 역시 흔히들 외치는 루터의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여 신선하고 창의적인 설교의 자료를 가져오지 못하였다는 지적을 스스로 하지 않을 수 없다. 회중이란 그 내용이 틀려도 어느 이름이나 예화의 부분들은 기억하고 있다가 그것들이 다시 사용될 때는 재탕이라는 혹독한 이름을 붙이고 외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여기에 대한 괴로움은 더욱 짙어만 간다.
셋째, 서론에서 언급된 백화점의 옷들과 단벌 신사의 지루한 인상에 대한 언급 등은 설교자로서의 사려가 깊지 못하였다고 본다. 그 내용이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사는 우리의 성도들에게 조금이라도 부담을 안겨주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적절하지 못한 설교의 서론이라고 반성해 본다.
넷째, 앞에서 언급한데로 장로교의 목사로서 자랑스러운 개혁가들의 기록들을 발굴하여 훌륭한 개혁의 모습을 보일 수 있었을 터인데 그러한 면의 노력이 결려된 것을 본다. 예를 들어 장로교의 종주국인 스콧트랜드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종교개혁의 불씨를 던졌던 현장이나 자신의 스승이 장렬한 죽음을 감수함을 보고서 개혁의 대열에 뛰어든 낙스의 기록들은 실로 신선한 설교의 자료로서 활용될 수 있을 것인데 그러한 면이 없다는 것은 설교자의 나태함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섯째, Good News로서의 마지막의 주제의 실천의 결과에서 보여준 사례는 너무나 흔한 것일 뿐만 하니라 오늘의 현장과 거리가 먼 특수한 세계를 보이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부분에서 오늘의 보다 더 적나라하고 현실감이 차고 넘치는 성공적인 사례들이 제시되어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성공하지 못하였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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