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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외면당한 계명 (출 20:12, 엡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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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 속에서 많은 인간은 새로워지는 것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대단합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소중한 사연들에 대한 관심은 날로 희박해져가는 현실입니다. 특별히 그 가운데서도 핵가족으로 굳어가는 가족제도에서 우리 민족의 맥을 지켜온 효의 문화가 상실되어 간다는 것은 실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더욱이 이 효라는 것이 하나님이 십계명을 통하여 엄하게 주어진 아름다운 계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문제의 심각성은 더해 갑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효를 다하지 못한 자식들에게는 오늘의 어버이 주일은 몹시도 괴로운 주일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자식들에게는 몹시도 부모님이 보고 싶은 주일입니다.
한국 문화에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어버이를 향하여 드리는 효의 문화입니다. 그러기에 한국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은 누구나 효도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게 됩니다. 특별히 한국의 어버이는 세계 어느 땅의 어버이들보다 땀과 눈물이 가득한 사랑을 심기에 우리의 어버이를 생각하면 모두가 숙연해지는 순간을 갖게 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실수는 기회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날 낳으시고 기르신 어버이에 대한 효도는 주어진 기간이 있고 그 기간이 지나면 이 땅의 누구도 회복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송강 정철의 말대로 평생에 고쳐 못 할 일이 바로 효에 대한 후회요 현실입니다.

본문의 접근과 재경청

오늘 우리에게 구약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준엄한 계명으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열 개의 계명을 주시는 가운데 첫째 계명에서 넷째 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섬기는 법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식이 부모를 정성을 다하여 모셔야 한다는 계명을 주시었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은 자식된 자들은 부모를 공손히 섬기고 삼가 자식으로서의 예를 표하면서 부모를 섬길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서를 통하여 주신 주님의 말씀은 그 시대에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지도자들이 부모님을 섬기는데 너무나 형식적이었고, 그것도 하나님을 핑계삼아 자식의 도리를 회피한 현실을 보시면서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좀더 쉽게 현대의 언어로 옮겨 다시 한 번 경청해 보십시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왜 너희의 전통을 핑계삼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너희는 사람을 가르칠 때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해드릴 것을 ‘하나님께 바쳤다.’(고르반)고 말만 하면 부모님을 봉양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다. 이렇게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핑계삼아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있다.”

주제의 부상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실 때 인간을 위한 부분의 가장 첫째 되는 계명으로서 효의 실천을 강력하게 명령하셨고 우리 주님도 실천적 차원에서 효의 절대성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효에 대한 계명이 외면당하지 않도록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역시 하나님을 섬기고 부모를 섬기는 데 어떤 종교보다도 엄격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즉 기독교가 효를 강조한 것은 단순한 윤리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효도에 대한 각별한 강조를 하게 됩니다.

본론
1). 효의 깊은 뜻을 생각해보십시다. (주제의 정의)

효란 자식이 부모님께 철을 따라 좋은 음식과 의복을 자주 해 드리면서 종종 들리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효란 자식이 부모를 화려한 집에 모시고 살면서 삶의 조건에 불편없이 해드리거나, 자신이 출세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은 출세를 하고 몇 푼의 경비만 들면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요즈음 좋은 대학을 들어 가주는 것이 자식으로서 최대의 효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좋은 대학을 다니면서 또는 졸업 후에 부모에게 보여준 가슴 아픈 사연들을 볼 때마다 부모의 탄식은 계속됩니다. 그러기에 그것이 효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식이 높은 지식과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효입니까. 어버이를 잠시라도 모시지 못한 채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출세만을 추구하기 위해서 부모와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그러한 높은 자식이 되는 것이 효입니까. 아닙니다.
효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은 주 안에서 자식이 자신의 마음과 뜻을 모두어 부모를 공손히 섬기는 것이라고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이 땅에 오랫동안 뿌리내려온 효도는 날 낳으시고 기르시는 부모님의 은덕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최선을 기울여 부모를 섬기는 도리를 다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어도 그 은덕을 기리고 그 사랑을 늘 간직하면서 부모님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이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2). 이제, 하나님이 명령하신 효의 필요성이 가득한 현실을 봅시다(효의 필요성)

하나님의 아름다운 명령이었고 이 땅의 자랑이었던 효가 대단한 속도로 이 땅에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효의 사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부끄러운 사건들이 우리의 주변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장기간 병석에 누워계시는 아버지가 남의 취침을 방해하는 기침을 밤마다 계속한다고 그 아버지를 개천에다 버린 비정한 어느 자식의 사례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효도관광이란 이름으로 노모를 모시고 제주도에 도착한 후 여관에 자리를 잡고 어머님 즐기신 음식을 사오겠다고 나선 후 영영 돌아오지 않은 자식. 그리고 초라하게 경찰에 의하여 시립 양로원으로 들어가는 비참한 사건들이 너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비극이 우리의 땅 우리의 사회에서 발생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명령이 외면당하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입니다 효가 한민족이 사는 이 땅의 기강을 세우는 중요한 축으로 수천 년 존속해 왔는데 이 얼마나 가슴 아픈 현실입니까.
오늘의 자식들이란 무심한 존재들입니다. 어버이 살아생전에는 별관심이 없다가 그분들이 돌아간 후에야 목을 놓아 서러워하는 비정한 존재들입니다. 살아생전에는 따뜻한 언어, 따뜻한 음식, 그토록 좋아하신 것 하나 드리지 못한 채 살다가 드려도 받으실 수 없는 오늘에야 후회하는 지극히 못난 존재들입니다.
이상과 같은 비극이 우리 자신과 가정에서 발생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경청하고 따라야 하겠습니다.

3). 우리가 따라야 할 하나님이 명령하신 진정한 효도의 방법들이 여기 있습니다
(주제의 실천 방안)

먼저, 우리 주님은 하나님을 핑계삼아 부모를 섬겨야 할 본분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말씀) 여기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ㄱ)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ㄴ)아버지나 어머니를 비 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 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 다.(4-6)

(해석)
주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부모를 섬기는 일은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으로 지켜져야 할 것이며 이 땅의 자녀가 끝까지 지켜야 할 계명으로 준수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주님이 계시던 유대사회는 부모님을 섬기는 데 참으로 부끄러운 사연들이 많았습니다. 그 사회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부모형제가 방해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누를 끼치는 것을 제일 싫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관습을 당시의 불효자들은 매우 영리하게 사용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말씀대로 부모님이 원하시고 기대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드리고 싶지 않으면 ‘고르반-하나님에게 바칠 것’이란 말 한마디만 하면 부모님은 꼼짝없이 포기를 해야 했습니다. 당시의 불효자들은 자신들이 말한대로 하나님에게도 바치지 않고 원하시는 부모님에게도 드리지 않은 큰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핑계삼아 불효를 저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은 바로 이 문제를 심각히 꾸짖으셨습니다.

(적용)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죄를 범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 이러한 일은 효의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의 땅에서는 발생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우리 성도들의 세계에서 발생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심각한 비극입니다.
그러나 자녀된 우리들의 삶을 엄격히 살펴본다면 거의 유사한 과오를 범한 경우가 적지 아니합니다. 때때로 당연히 부모님을 찾아뵙고 사랑을 나누어야 할 자식된 도리를 지켜야 할 우리의 성도들이 때로는 교회의 일 때문이라는 구실을 가지고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린 경우가 있지 아니한지요. 특히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성가대, 반사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막상 주님의 몸된 교회에 봉사도 미쳐 다 못하면서 교회 때문에 효를 다 하지 못한다는 말을 하시지는 아니한지요.
오늘의 교인들이 행여 하나님의 일을 핑계삼아 부모를 섬기는 일에 등한히 한다면 바로 이것이 현대의 고르반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현장을 향하여 오늘도 우리주님은 하나님을 핑계삼아 불효의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부모를 즐겁게 해드릴 것을 잠언서를 통하여 명령하십니다.(잠언 23:25)

(말씀) 여기 하나님이 잠언서를 통하여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잠23:25-26)

(해석)
이 말씀은 부모에게 근심과 걱정과 염려를 드리지 말고 평안과 기쁨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자식의 마음이 어버이를 향하고 있을 때 어버이는 언제나 기쁨을 갖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자식을 향한 어버이의 심정과 어버이를 향한 자식의 마음이 만남을 이룩할 때 거기는 필연코 기쁨의 향연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자식으로서 부모님의 마음을 즐겁게만 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효도입니다. 부모가 자식으로 인하여 염려 대신 평안과 기쁨을 소유할 수 있다면 그 부모는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적용)
생각해 보면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린다는 것이 쉽지 아니합니다. 성장하면 할수록 이 문제의 실천은 어려워집니다. 어린시절에는 귀여운 행동으로 부모님의 얼굴에 웃음이 그치지 아니함을 볼 수 있었는데 성장하면 할수록 기쁨보다는 부모님의 애간장을 녹이는 사연이 발생합니다. 거기에 더하여 성장하면 부모님의 곁을 떠나서 독자적인 가정을 만들어 살아야 하는 사회의 구조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부모님은 자식 없는 사람들처럼 고독한 삶의 주인들로 머물게 됩니다.
어버이의 고독이란 자식을 보지 못한 시간이 길면 길수록 더욱 짙어만 갑니다. 말없이 자식의 나타남을 기다리시는 어버이는 때로는 고독의 깊은 시름에 젖어있습니다. 이 고독이 너무 심할 때 죽음까지 초래하는 무서운 병으로 변해갑니다. 오늘 우리의 어버이는 명절에나 한두 번 보는 자식을 그리워하시다가 다 늙어 가십니다. 특별히 주말에 교회의 봉사를 집중적으로 쏟아야 하는 목사를 비롯한 교회의 직분자들의 세계는 더욱이 부모를 고독하게 만드는 불효를 범합니다.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리고 기쁘게 해드리는 일을 외면해 버리는 가슴 아픈 삶의 주인들로 우리가 빠져 들어가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자랑하고 자식이 부모를 자랑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길가에 지나는 부모가 초라한 옷을 입고 지날 때의 일입니다. 정장을 하고 성경을 손에 낀 자식이 그 어머니를 외면할 때도 있습니다. 또는 옷을 보기 싫게 입었다고 책망하는 자식이 있습니다. 얼마나 모순된 현실입니까.
그 곱던 얼굴에 주름이 가득함은 자식들의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애를 쓰셨다는 표입니다. 그러하기에 자식이 어버이의 주름살을 펼 수 있는 기쁨을 드릴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소중한 효의 길입니다. 부모의 근심과 고뇌의 대부분은 자식들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자식이 드려야 할 효의 중요한 부분은 부모를 즐겁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효의 길은 부모에게 보답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말씀)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음의 말씀을 주시었습니다.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딤전 5:4).

(해석)
보답이라는 것은 자신이 받은 사랑이나 은혜나 물질의 도움을 때가 되어 돌려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보답이라는 것은 어린 사람에게서는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에게서는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감정은 자신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어느 때인가 찾아와 입은 은혜를 보답하겠다고 할 때 무척이나 기뻐합니다.
여기에 주신 이 말씀은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의 바탕으로서의 보답의 교육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보답의 인격교육은 학교의 교육을 비롯하여 가정 밖에서보다는, 먼저 부모님의 은공을 생각하고 그 은공을 보답하려는 자식의 도리를 지키는 데서 배우도록 합니다. 그 뜻은 보답의 의미와 보답의 필요성이 가장 절실한 곳은 바로 가정의 부모님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자식이 어떻게 부모님의 은덕을 모두 보답하리오 마는 그러나 날 낳으시고 기르시면서 흘리신 눈물과 땀을 생각하고, 그 사랑에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부모님 앞에 선다면 최소한의 효는 발생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지금이 보답의 기회입니다. 감사와 보답의 시기는 나에게 기준을 두어서는 아니됩니다. 서서히 떠나고 계시는 부모님에게 시간을 맞추어야 합니다. 좋은 음식, 좋은 의복 하나라도 손에 들고 어버이를 찾는 자식의 발길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발길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입니다. 효에 있어서 오늘이 없는 내일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보답의 시기도 내일이 아니고 오늘입니다.
현대를 달리는 사람들에게 효을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고 감사한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각자가 자신의 일터에서 너무나 바쁘게 달려야 하는 시대이기에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나의 형편이 나아지는 날 부모님의 은공을 보답하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발이 휘날리고 주름이 가득한 우리의 어버이는 우리의 형편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려 주시지를 아니합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늙기 시작한 어버이의 얼굴은 시들기 시작하고 우리를 떠나시기 위하여 쉼 없이 발길을 옮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녀들은 지금 바로 부모의 은공을 보답하는 삶을 재촉하십니다.

예화

어느 자식은 철이 들고 자식을 키워보면서 효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깨달으면서 어버이를 찾아 몸부림을 치지만 어버이 가신 지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바로 못다한 효임을 아는 그는 다음과 같은 눈물어린 글을 드리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가버린 아버님. 어머님을 생각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움은 어찜입니까 불효가 무엇인지를 나이 50이 넘어서야 깨달은 소치입니다. 이제야 받은 정과 사랑을 드리고 싶은데 아무리 찾아도 부모님은 계시지 아니합니다. 부모님의 무덤을 찾아도 말이 없으십니다. 요즈음은 꿈에도 찾아오시지 아니합니다. 나의 영원한 사랑의 부모님! 백발이 다 되어서라도 지금 내곁에 계신다면…. 지금은 이토록 구경할 것도 많고, 제가 운전도 할 수 있고, 형편도 여유가 있는데 하필이면 가난할 때 오셔서 가난하게 사시다가 가나하게 떠나신 부모님 생각이 나면 못다한 이 자식의 정성이 이 자식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한으로 떠오릅니다. 풀 수 없는 한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몹시도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부모님! 정말 단 한 번만이라도 이 자식의 곁에 와 주실 수 없나요.’
아무리 눈물어린 편지를 써보아도 받으실 주소가 없고 부모님이 이 땅에 계시지 아니한다면 어떤 효의 글도 돈도 무가치합니다. 역시 효에 불타는 자식의 마음과 행동은 어버이 계실 때만이 효력이 있습니다.

4). 우리의 언행심사(言行心事)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효가 실현된다면 그 결과는 아름답습니다( 주제 실천 결과).

하나님은 열 개의 계명 중에서 제 2계명과 제 5계명에 한하여 보상을 약속하시었습니다. 그것은 효를 다한 자식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이 땅에서의 삶이 풍요로울 것과 인간의 가장 큰 소망인 장수가 보장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효를 다한 자식의 마음은 언제나 평화로우며 신실하고 이 땅 위에서 바른 삶을 살게 됩니다. 주위의 존경을 받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한 기쁨이 떠나지를 아니합니다. 그리고 이 효의 길을 보고 자란 자식들은 장성하여 동일한 효의 정성을 부모에게 드리게 됩니다.

5). 결론

오월의 산천은 푸릅니다. 온 누리에 생기가 솟구쳐 납니다. 나를 푸르게 만드신 어버이를 생각하는 계절입니다. 우리의 생명 이제껏 키워주셔서 생기가 넘치도록 하신 어버이들을 생각하는 계절입니다. 우리의 문화에 자랑할 것이 있다면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온 효의 문화입니다.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어버이를 극진히 섬기는 특유한 문화입니다. 그런데 이 모두가 사라지는 비극이 창출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실수는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날 낳으시고 기르신 어버이에 대한 효도는 제한된 기간 안에만 유용합니다. 그 기간이 지나면 이 땅의 누구도 회복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진정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바로 효에 대한 후회입니다.
자식으로서 미래의 복받은 생을 추구하십니까 하나님의 효에 대한 명령을 준수하십시오. 자식으로부터 효가 있어지기를 기대하십니까 효를 실천하십시오. 효의 교육은 이론이 아니고 솔선수범입니다. 명심보감에서는 “내가 어버이에게 효도하면 자식은 또한 내게 효도하며, 자신이 효도하지 않으면 자식이 어찌 효도하랴”고 말합니다. 그리고 효를 받아야 할 우리의 어버이는 우리를 기다려 주시지 않은 채 인생의 종착역을 향하여 쉬임없이 걸으시다가 어느 날 우리의 곁을 떠나십니다.
효의 문화 속에서 살면서 남긴 송강 정철의 글이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한층 그 의미를 더해줍니다.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분 곧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하늘 같은 은덕을 어디다가 갚사오리/ 어버이 살아실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찌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여기 하나님의 말씀이 어버이주일을 맞이한 우리에게 다시 주어지고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2. 본 설교가 있기 까지

설교자의 고뇌와 함께

설교자에게 가장 큰 고민이 있다면 그것은 설교의 준비나 성공적인 전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설교의 내용과 자신의 삶에 언제나 따르는 괴리 현상이다. 즉 자신이 설교하는 내용대로 살지 못하는 아픔이 설교자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이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설교단에 설 때마다 떳떳한 자세보다는 언제나 겸허한 자세를 보이게 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자신이 성공적으로 실천하지 못한 내용을 회중들에게 전달하고 강요하는 것은 참으로 깊은 고민을 수반하는 사역임에 틀림이 없다.
두 번째로 비판과 분석의 도마 위에 올려놓은 본 설교는 필자의 어떤 설교보다도 깊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이 설교를 작성하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본 설교자가 겪었던 마음의 번민은 실로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었다. 그 이유는 효를 하나님의 계명으로 운반하는 메시지 앞에 설교자 자신이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효의 의미를 터득하고 그 효의 실천을 서둘러 보지만 이 효를 받으셔야 할 부모님이 이미 이 자식을 곁을 떠나버린지 오래이기 때문이었다. 남달리 부모님의 애를 태우고 심려를 안겨주었던 불효자의 신분으로 확인된 몸이 효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을 운반해야 하는 그 마음의 고뇌는 실로 큰 고통이었다. 주어진 메시지를 부담없이 운반할 수 있는 설교자가 너무도 부러워진 현실이었다.
언제쯤 설교라는 이름으로 운반되는 하나님의 성언(聖言)을 떳떳한 자세로 부끄러움 없이 옮길 수 있을는지 날이가면 갈수록 그 길이 가깝지 아니함을 느낀다. 설교자의 삶 속에서 보여지지 아니하는 내용이 자신의 설교에서 강조 되어진다면 이 얼마나 모순된 사연이며 듣는 회중들에게는 조롱거리가 될는지 참으로 깊은 성찰을 요하는 ‘설교자의 고뇌’이다. 이러한 고뇌는 일찍이 퓨리탄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리차드 박스터가 남겼던 ‘나의 심령이 싸늘해지면 나의 설교도 싸늘해지며 나의 심령이 혼돈되면 나의 설교도 혼돈됩니다’라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본 설교가 있기까지의 정황과 사연

이 땅의 가장 아름다운 전통으로 여겨온 효(孝)의 문제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는데 대한 아쉬움을 설교자는 평소에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특별히 서구 문화의 엄습과 함께 핵가족의 팽창은 한국의 모든 가정에 대단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영향은 바로 효의 문화가 사라지게 하는 무서운 파장을 한국의 가정에 일게 하고 있다. 특별히 최근에 우리의 사회에서 발생된 비정한 자식들의 행위가 날이가면 갈수록 더욱 심각한 경지를 달리는 것을 누구나 피부로 느끼고 있다.
이러한 때에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무엇에 대하여 설교를 할것인지에 대한 깊은 시름의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었다. 평소에 마음 아프게 생각하던 ‘한국적 효의 실종’을 이 주일에 조금이라도 회복하여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이 앞서고 있었다. 어버이 주일에 어버이로서의 의무보다는 어버이를 향한 인간의 기본윤리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더욱이 탈선한 자식이 돈 때문에 부모를 무참히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러한 기본윤리의 회복은 실로 시급한 것이라고 마음에 확신이 오게 되었다.

본문과 주제의 선정

자신의 설교를 주보나 교회의 게시판과 같은 곳을 통하여 무엇이라고 이름하여 관심을 끌게 할 것인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설교의 제목(Title)이다. 그러나 주제(Topic. Theme. Subject)는 하나님의 그 많은 말씀 가운데서 무엇에 관한 말씀을 운반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의 제목은 설교가 다 끝난 다음에 결정할 수 있으나 주제는 설교의 준비과정 첫 단계에서 확정되어야 한다.

본 설교의 주제 선정은 설교자가 평소에 느끼던 문제였고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요구되어진 것이기에 아무 어려움 없이 정하여졌다. 실질적으로 설교의 주제는 본문을 읽는 가운데서 발견되어질 수 있고 또는 삶의 현장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을 읽는 가운데 결정된 주제는 본문 설정에 어려움을 느끼지 아니하나 삶의 장에서 얻어진 설교의 주제는 거기에 해당된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데 설교자는 고민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설교자는 다시 무릎을 꿇고 성경의 어느 말씀에서 이 주제를 찾아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운반할 것인지 새로운 씨름을 해야 한다.
효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주신 십계명에서 그 근본 메시지를 찾아야 한다는 당위성이 주어졌다.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는 명령에 이어 부모를 섬기는 인간의 도리를 주시는 부분이었기에 그 진리의 명확성을 찾는 데 더 이상의 문제는 없었다. 그래서 가장 근본적인 본문은 구약에서 주신 십계명에서 발견하였다. 그리고 신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효에 관한 관심과 그 메시지를 마태복음 15장에서 찾게 되었다. 그리고 서신서에서 현장감을 느끼게 하는 효에 대한 말씀도 함께 본문으로 받게 되었다.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하여 구약과 서신서와 복음서에서 풍부하고 적절한 본문을 찾을수 있음은 실로 다행한 일이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을 운반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말씀의 뜻을 헤아리는 다음의 단계에 진입하였다.

석의와 주해와 적용의 작업

설교자가 아무리 적절한 말씀과 가슴에 와닿는 본문을 발견한 기쁨을 갖게 되었더라도 자칫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운반하게 되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은 언제나 갖게 된다. 하나님이 동쪽의 방향을 가리킨다는 뜻을 설교자가 잘못 해석하여 하나님이 서쪽의 방향을 가리킨다고 회중들에게 전한다고 가상해 보면 실로 아찔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하기에 설교자가 가장 땀을 흘리고 노력을 해야 할 부분은 본문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는지에 대한 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한 기자들로 하여금 한글을 사용하게 하시었더라면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은 말씀의 뜻을 어느 나라의 설교자들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한글성경은 번역된 성경이다. 번역을 거쳐 나온 과정에서 부정확한 의미의 표현과 전달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이 원래 의미하신 말씀의 뜻을 찾는 것은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원칙을 나의 스승으로부터 전수한 필자는 스승이 가르쳐 준 방법대로 원어 성경과 사전, 그리고 여러권의 각각 달리 번역된 영어와 우리말 성경을 펼쳐야 했다. 그리고 주어진 본문 말씀의 근본적인 뜻을 헤아리는데 다섯 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쏟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대인들의 효에 관한 전통과 문화적 환경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석의의 과정에서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 가운데 제 1 계명과 제 5 계명만이 보상을 약속하시었다는 사실에 새로운 관심을 쏟게 되었다. 그리고 부모에 관한 계명이 얼마나 소중하게 하나님이 관심을 모으시었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목적의 설정

설교의 목적은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현대의 회중들이 가장 환영하지 않는 설교가 교훈적인 설교(Didactic Preaching)이다. 그러나 한국인이 한국의 땅과 문화에 살면서 상실해서는 안될 이 효의 문제는 구체적으로 교훈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효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운반함에 있어서 구체적이고 효율적으로 효의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 오늘의 설교자의 사명이라는 확신이 주어질 때 이 설교의 목적은 더욱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교훈적인 설교가 회중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지 못하고 웃음과 위로를 심어주지 못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고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절한 시기와 필요한 현장에 해당된 하나님의 말씀은 기필코 운반되어 그들의 시각을 깨워주고 발길을 내딛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다시 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효의 문제만은 칭찬이나 위로를 목적으로 하는 설교가 될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할 때 교훈적인 설교의 설정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설교의 유형과 형태

본 설교는 주제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았다. 그리고 그 말씀을 주제의 분석에 따라 배열하는 형태를 취하였기에 그 전개 형태를 분석설교로 하였다. 분석설교란 주제설교를 현대인들의 지성적 감각에 맞도록 하는 설교의 새로운 형태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본 설교의 형태는 자칫 설교자의 견해와 지식을 나열하는 비성서적인 설교로 흐르기 쉬운 위험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본 분석설교는 그 형태가 주제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여 이해시켜 주고 그 효가 필요한 현장을 보여주는 일을 먼저 한다. 그리고 설교의 중심부분으로서 주제의 실천방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맨 마지막 부분에서 제시된 방법이 실천되는 날 경험하게 되는 좋은 소식을 정리한다.
이러한 분석설교의 형태를 그대로 도입하여 본 설교에서는 주제인 효의 정의를 부정적인 접근을 시도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른 정의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 오늘의 현실이 효가 없어서 파멸을 가져오는 부정적인 사례를 들어서 상실한 효의 세계를 회복해야 하겠다는 위기감을 주었다. 그리고 이 효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제시는 성경을 바탕으로 한 설교자의 견해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그대로 그 방법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설교자의 정체성을 단순한 성언의 운반자(聖言運搬者)로 고착시키려는 노력을 최대한 기울였다. 설교자가 자신의 지식과 분석을 설교화하는 현실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평소의 지론을 스스로 점검해 보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본 설교의 자료수집 과정

본 설교의 주제인 효에 관한 자료의 수집은 어려움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이땅의 문화가 효의 문화였고 최근 지상을 통하여 보도된 불효자들의 사례가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수집된 본 설교의 자료는 본문과 관계된 유대민족의 문화와 한국민족의 효의 문화를 먼저 찾게 되었다. 그 가운데 효의 문화를 말하는 송강 정철의 글은 아주 새롭게 가슴에 와 닿았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어떤 자료보다도 설교자 자신이 안고 있는 못다한 효의 한(恨)이 우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눈물을 흘려야 했던 우선적인 자료였다.
그 외에 물질만능의 시대 풍조에 효의 정성마저 침몰되는 현실과 핵 가정으로 변화된 한국의 가정 구조에서 부모님을 향한 애정이나 감사 또는 기쁨을 드리려는 자식들이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 또한 본 설교의 중요한 자료였다. 특별히 효도관광을 핑계삼아 노구가 된 어머니를 제주도에 버리고 온 자식에 관한 이야기는 슬픔을 느끼면서 활용한 설교의 자료였다. 뿐만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를 무참히 죽이는 사건 등은 가슴 아픈 사례로서 본 설교에 이용되었다.
특별히 세상에서 가장 으뜸가는 어머니 상으로 인용한 필자의 어머님의 이야기는 이 설교자의 가슴을 적시고 눈에서 눈물을 또다시 흘리게 하는 사례였다. 비록 설교자의 부상을 억제하기 위하여 나의 어머니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최대한 숨기었어도 이 위대한 어머니와 설교자와의 관계는 쉽게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본 설교자의 감정을 숨길 수 없었던 사례였다.

3. 본 설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한 편의 설교를 끝낸 다음에 설교자는 언제나 두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비록 회중들이 아멘의 함성을 지르거나 눈물을 흘리는 현상이 있었더라도 설교자는 스스로 반성의 시각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바로 ‘나는 진정 하나님의 성언(聖言)을 바르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운반하여 그 자녀들의 가슴에 심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이 설교자도 본 설교를 끝낸 다음에 새롭게 파고드는 이 질문에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었따. 그 이유는 다음 몇 가지의 사연들 때문이었다.
먼저는 설교자의 감정이 너무 많이 개입되고 감정조절이 잘 안되었다고 본다. 설교자가 어버이를 그리는 자식이기에 스스로 설교를 들으면서 가슴 아파하는 모습이 지나치게 보여지지는 아니했는지 염려가 되는 부분이다. 비록 설교자의 허물이 불효의 기록과 못 다한 효의 한을 품고 있는 회중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효과가 있었다 하더라도 설교자가 등장하는 모순이 수반되었다고 본다.
둘째로 너무 많은 자료의 도입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우고 세상의 현상만이 보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았는지 하는 문제였다. 설교는 언제나 한정된 시간 내에 진행되고 끝을 맺고 있다. 그러기에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흥미진진한 자료들에 의하여 회중을 매료시키다가 시간을 다 사용하고서 대충 본문의 말씀을 읽고 끝내는 모순을 보게 된다. 이러한 오류가 본 설교에서는 발생되지 아니했는지를 다시 한 번 반성해 본다.
셋째로 회중들이 효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격려, 권면의 어감과 표현보다는 불효만을 생각하게 하는 직선적인 책망과 함께 가책을 느끼게 하는 방향으로 본 설교가 이어져 가지는 아니했는지를 반성해 본다. 회중들에게 보다 포근한 감정을 안겨주면서 부드럽게 설득할 수 있는 설교가 되지 못하였다는 또 하나의 지적을 남긴다.
넷째로 본 설교가 가지고 있는 가장 눈에 띄는 문제는 본문 이외의 성구들을 동원하여 방법의 제시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문만 가지고 방법의 제시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설교자의 생각 때문에 효에 대한 성구들을 나열한 감을 보이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효의 모든 것을 조명하려는 욕심이 지나친 결과가 아닐는지 반성해 본다.
끝으로 마지막의 결과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한국의 문화에서 훌륭한 효자나 효부의 사례를 들지 못한 채 끝을 맺음이 너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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