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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화를 강같이 (사 6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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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북녘 하늘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 찾아 갈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남모르는 외로운 감정을 달래면서 고향 땅의 하늘만을 수없이 쳐다보고 한숨을 짓고 있습니다. 통일에의 그날을 남달리 기다리고 있습니다. 통일된 조국에서 평화의 찬가를 부르면서 살아갈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평화! 인간이 이토록 희구한 평화! 평화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인류의 온 소망이 되는 것인지 우리의 관심을 기울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종교, 정치, 경제, 교육, 모두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은 인류의 평화라는 데 귀결되고 있습니다.

본문접근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바로 평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평화의 전성기는 다윗왕을 계승한 솔로몬왕 때였습니다. 온 국민이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을 건축하는 데 심혈을 기울일 때 고단했으나 그들에게는 평화로운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죽자 그 나라는 북과 남으로 갈라지는 민족의 비운을 겪게 됩니다. 주전 930년 경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 종교를 섬겼던 북왕국은 약 200년 후인 주전 722년에 앗시리아에 완전히 멸망되고 맙니다. 그리고 남왕국은 남과 북이 갈린 지 344년이 지난 586년경에 바벨론에 함락되어 포로로 잡혀가 살다가 약 50년 후 538년부터 귀환을 하게 됩니다.
이사야(740-681)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예언활동을 하면서 두 왕국의 멸망이 임박함을 보며 예언을 합니다. 특히 이 민족의 구원과 진정한 평화는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이룩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뚜렷하게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머물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예언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구원이 이룩되는 날 그들이 희구하는 평화가 임하게 된다는 사실을 오늘의 말씀에서 들려주십니다.

본문의 재 경청

바로 오늘의 말씀에서 그 뜻은 더욱 분명합니다.(사66:12)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가 강물처럼 넘치게 하며, 뭇 나라의 부귀영화가 시냇물처럼 넘쳐서 흘러오게 하겠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젖을 빨며 그 팔에 안기고 그 무릎 위에서 귀여움을 받을 것이다. 어머니가 그 자식을 위로하듯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니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너희가 이것을 보고 마음이 기쁠 것이며 너희의 뼈들이 무성한 풀처럼 튼튼할 것이다."

주제의 부상

아름다운 평화의 동산을 그려주는 말씀입니다. 강물처럼 넘치는 평화, 어머니의 젖을 빨며 그 팔에 안기고 그 무릎 위에서 귀여움을 받는 평화, 어머니의 위로를 받듯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며 살 수 있는 평화! 이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 동산의 평화입니까. 이 평화를 찾아 모든 인류는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평화!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이 평화의 근사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곳에 우리 모두가 발길을 옮기고 있습니다.

주제의 정의

도대체 평화란 무엇입니까 우리말 사전에서는 평화의 의미를 평온하고 화목하고 화합하고 따뜻한 평안이 계속되는 것이라고 정의해 놓았습니다. 마음의 기쁨이 지속되는 것을 평화라고 말해 놓았습니다.이스라엘 민족은 전쟁의 연속이었던 자신들의 상처 깊은 역사를 생각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샬롬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인사를 합니다. 평화가 당신과 함께라는 뜻입니다.(Peace Be With You). 그들의 소원은 전쟁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안에서 화합하고 따뜻한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만나는 사람마다 샬롬이란 인사를 하게 됩니다.
우리의 민족도 인사 내용을 들어보면 언제나 의식주에 염려가 없고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삶의 추구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께서 가르친 인사는 어른들을 만나 때마다 식사시간이 될 무렵이면 진지 잡수셨습니까라고 인사를 하고, 아침이 되면 밤새 안녕하셨습니까라고 인사를 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얼마나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식량을 수탈당하고 먹을 것이 없었으면 진지 잡수셨느냐고 물어보아야 했고, 얼마나 많이 평안한 밤으로 숙면을 취하는 것이 어려웠으면 밤새 안녕히 주무셨느냐고 물어야 했는지. 우리 민족도 이스라엘처럼 평화에의 추구와 동경이 깊었던 민족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샬롬을 부르짖는 이스라엘 민족과 안녕을 수없이 반복하는 이 평화라는 것은 도대체 언제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지 그 대답이 필요합니다. 일찍이 유명한 네델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평화는 전쟁의 부재가 아니라, 덕성이며 마음의 한 상태며, 박애의 경향이며, 신념이며, 정의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말처럼 확실히 평화란 전쟁과 같은 외적인 조건에서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롬 8:6)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내 육신의 외적인 요소보다는 내 영혼의 세계를 그 주인 앞에서 더욱 맑고 아름답게 전개하는 곳에 진정한 평화의 세계가 이룩된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이 평화의 소유자이며 주관자인지를 아는 사람이 적은 듯합니다. 평화는 나와 내 가족이 이룩할 수 있는 단순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합니다. 나의 지식, 나의 경제력, 나의 높은 위치가 이 평화를 충분히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조작에 불과합니다.
만약 인간이 이 평화를 마음대로 창조하고 소유할 수 있었다면 왜 지금껏 이 세계는 전쟁과 눈물이 계속되어야 합니까. 이 평화를 인간의 손으로 창조할 수 있으며 인간이 소유권을 행사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평화의 주관자, 소유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는 곧 우리가 이 아침도 섬기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5장 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 보십시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일찍이 일본의 신학자였던 우찌무라 간조는 이 말씀의 뜻을 더욱 현실감 있게 풀어 주었습니다. 평화는 군인의 무력에서 오지 않는다. 또 외교관의 수완에 의해 오는 것도 아니다. 평화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그 사랑을 사람의 심령에 부어 주심으로써 오는 것이다라고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이 땅의 빛, 어두움, 평화, 환난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이룩되고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손을 벗어난 어떠한 평화도 순간적이며 형식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주제의 필요성

이 평화가 필요한 우리의 현장을 생각하십시다. 10여 년 전에 TV방송에서 정규방송까지 중단하면서 이산가족 찾기를 하면서 이 민족의 눈에서 눈물을 많이 흐르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설교준비를 하다가 내 민족이 전쟁의 상처를 놓고 저렇게 목을 안고 우는데 나는 TV의 화면을 통하여 국민의 시련을 논하고 그들의 평화를 얘기하는 것이 너무 무책임하다고 생각되어 바로 차를 몰고 여의도 KBS광장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과연 세계의 역사에서 볼 수 없는 희귀한 인간의 울부짖음이 눈앞에서 전개되었습니다. 땅바닥에 이름과 사연을 적어놓고 비닐과 테이프로 발라놓고 있는가 하면, 마네킹을 세워놓고 찾는 가족의 인상과 헤어진 사연들을 적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큰 건물의 앞뒤를 완전히 도배해 놓은 그 사연들이 너무 애처로웠습니다.
특별히 그들의 신분이 넉넉하여 오늘의 즐거움을 맛보는 중상층에 미치지 못한 시민들이었다는데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개인의 평화, 가정의 평화, 사회의 평화를 갈망하는 그들의 간절한 소망은 과연 이룩될 것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민족만이 갖는 비참한 절규를 보면서 착잡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습니다.
평화의 날처럼 즐기는 명절마다 우리는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도시 생활 또는 살벌한 직장생활에서 모처럼 정다운 부모형제가 고향에 모여 평화의 시간을 가져 보겠다고 10시간, 20시간을 소비하여 갔다가 집안의 화평보다는 증오와 싸움과 분열의 아픔만을 안고 오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긴장을 풀고 따뜻한 위로를 기대했던 귀향길이 허전함과 후회로 얼룩진 경우가 적지 아니합니다. 누구나 붙들고 당신은 진정한 평화의 동산 속에 거닐면서 오늘을 살아가느냐고 물을 때 아무도 100% 그러하다고 대답할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부족하지만 살아가고, 또 평화로운 나의 삶을 창조 중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주제의 실현을 위한 방법

어떻게 하면 강같이 흐르는 평화를, 시내같이 넘치는 기쁨을 이룩할 수 있습니까어떻게 하면 그 세계에 머물 수 있습니까 다른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노력해도 진정한 평화는 이룩되지 못하고 모두가 한시적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말씀한 방법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따르는 길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1) 평화의 주관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임을 말씀하십니다.

(말씀)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가 강물처럼 넘치게 하며, 뭇 나라의 부귀영화가 시냇물처럼 넘쳐서 흘러오게 하겠다.(12)

(해석)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심을 다시 한번 밝히십니다. 하나님이 평화를 강물처럼 넘치게 하는 능력의 소유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 만이 뭇나라와 가정과 개인의 부귀영화를 주관하심을 다시한번 우리에게 들려두십니다. 인간의 어떤 제도나 장치도 완벽할 수 없으나 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의 실체는 완벽하십니다. 하나님이 넘치도록 하시는 평화만이 영원합니다.

(적용)
많은 사람이 인간관계 속에서 평화를 찾아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인간의 약속은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올 때만이 효과를 발생하고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유익을 주지 못하면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린 것이 인간관계입니다. 상대가 이용가치가 있을 때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라도 사랑과 평화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용가치가 없어질 때 서서히 외면하고 돌아서 버립니다. 때로 필요없다고 판단되면 무참히도 짓밟아 버리는 비정한 세계입니다.
이러한 인간세계에서 어찌 우리가 평화의 주관자를 인간으로 믿을 수 있습니까. 인간이 주관하고 인간이 창조한 평화는 모두가 순간적입니다. 한시적입니다. 아름답게 쌓았지만 허무하게 무너지는 모래성과 같은 것들입니다.

인류문화를 발전시킨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고 거부가 되었던 스위스의 Alfred Nobel도 평화의 도구이기를 바랐던 자신의 발명품이 전쟁 살생용으로 악용될 때 그는 수없이 죽어간 생명들 앞에 씻을 수 없는 죄책을 느끼면서 자기의 전 재산을 바쳐 노벨상을 만들고 인류의 평화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막대한 상금을 주도록 했습니다. 1901년부터 지금까지 1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수없는 사람들이 평화의 공로자로 상을 받았으나, 인류는 나날이 짙어만 가는 비평화의 공포 속을 거닐어야 합니다. 평화를 심기 위하여 만든다는 가공할 무기들은 오히려 수많은 생명을 주이는 아픔과 슬픔을 안겨주고 있는 현실입니다. 평화를 강물처럼 이 땅에 넘치게 할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외에 누가 있습니까. 두 동강이가 난 이 강토에 통일을 가져와 평화를 이룩하겠다는 정치가들의 노력이 어디 한치라도 그 뜻을 이룩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더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남과 북의 장벽이 더 두꺼워만 가는 현실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인간이 조작한 평화는 파멸되고 또 다른 아픔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합시다. 하나님만이 평화의 주관자입니다. 오직 그분의 손에 영원한 평화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평화의 창조주요 소유주인 하나님에게 내 가정의 평화를, 내 교회의 평화를, 내 민족의 평화를 구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일입니다.
"보라! 내가 예류살렘에 평화가 강물처럼 넘치게 하며, 뭇 나라의 부귀영화가 시냇물처럼 넘쳐서 흘러오게 하겠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하나님과의 언약을 충실히 이행하는 자들에 평화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
하나님은 언약을 성실히 이행하는 그의 자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신다" (겔 37:26)

(해석)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의 사이에 세우신 언약은 파멸의 언약이 아닙니다. 구원과 평화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평화가 가득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불안한 삶과 비극이 계속됩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맺어진 일차적인 언약이 무엇입니까. 신명기 4:13 에서 분명히 제시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 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적용)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이 피조물들은 아무 의미없이 덤으로 이 땅에 던져진 존재들이 아닙니다. 먼저, 창조주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섬겨야 한다는 조건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십계명의 가장 크고 우선 가는 언약의 조건입니다. 이 조건을 성실히 이행하지 못한 타락한 무리들은 하나님의 평화를 맛볼 수 없었습니다. 언약의 불이행은 모두 죽음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평화를 맛보지 못하고 죽어 가는 생명이 너무 많아지고 그들이 영원히 죽어 가는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인자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시고 십자가의 제물이 되게 하시었습니다.(사 53:5).
이 구속의 사건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은 허물어지고 하나님의 평화를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구체적인 표현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들어보십시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평화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었느니라(엡 2:14).
이 위대한 구속의 십자가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없이 고마운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에 성립되어진 계약을 충실히 이행할 때만이 진정한 평화는 이룩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인류 역사 속에 하나님을 섬기는 무리들이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했을 때는 평화로웠고, 그렇지 못했을 때 이 역사는 언제나 불안과 긴장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그리했고 그 외 수많은 민족이 그러했습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을 때 삶은 언제나 평화롭고 즐겁기만 합니다. 그러나 검은 구름이 끼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이 발생하고 그것이 굳혀질 때 우리는 늘 불안과 절망과 초조함속에서 쫓기는 인생이 되는 것을 충분히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언약, 그 약속을 어김없이 살아간 사람들은 언제나 평화의 동산을 거닐고 있으며 오늘도 걷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이 평화를 누리기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해석)
인간의 마음을 누가 주장하느냐에 따라 한 인생의 행과 불행은 좌우됩니다. 정직하지 못한 심령이 내 마음을 주장할 때 그 갈등과 불안은 사뭇 커집니다. 또 자신의 지나친 욕심이 내 마음을 주장할 때 그 노예로서 시달립니다. 물질의 욕심이 마음을 주장할 때 물질의 노예가 되어 평화를 잃어버리고 허덕입니다. 나의 명예욕이 내 마음을 주장할 때 나는 그것에 얽매여 사는 노예가 되어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나의 육신의 정욕이 나를 주장할 때 나는 음지만을 찾아 어둡고 캄캄한 세계의 노예로서 평화의 빛을 보지 못합니다.
그럼 누가 내 마음을 주장하도록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분명히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이 평화를 누리기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적용)
그렇습니다. 내 마음의 주인이 물질이 될 수 없습니다. 내 명예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내 육신적인 정욕이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권력의 보좌에서 높은 호령을 쳤던 사람에게만은 평화가 있을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무력으로 정권을 잡았던 청와대 주역들의 머리맡에는 언제나 권총이 숨겨져 있었고 청와대의 뒤뜰에는 언제나 비상 이륙을 할 수 있는 헬리콥터가 준비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는 그들의 마음이 평화롭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나를 차원 낮은 육신적 삶에서 해방시켜, 그리스도의 평화 앞에 자신을 맡기는 일입니다. 내 마음을 그리스도께서 주장하도록 활짝 열어 놓아야 합니다. 그때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 내라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이 귀한 복된 말씀도 귀에 들릴 것입니다. 어느 때까지 여러분은 이 아름다운 주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그토록 지루한 불안과 긴장의 항해를 계속하시렵니까. 여기 하나님의 말씀이 또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마음속에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쾌락과 눈의 쾌락을 쫓는 것이나 재산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나온 것입니다."(요일 2:15-16)

그렇습니다. 이 차원 낮은 세계만을 쳐다보는 마음과 눈과 귀와 발길은 언제나 평안이 없고 불안과 초조와 절망의 바다를 건너게 됩니다. 여러분의 모든 것, 내 육신, 내 지식, 내 경제력, 내 높은 위치 모두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손길이 주관하도록 겸허히 열어 놓고 사는 것이 참된 평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길입니다.

주제를 실천한 결과

이런 삶을 살 때만이 찾아오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주소를 정확히 찾아보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저 멀리 우리 죽음의 이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고, 하나님의 섭리대로 살아가는 자녀들의 세계가 곧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함과 동시에 곧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이 이 지상에서 계속되는 동안도 하나님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이 이 지상에서 계속되는 동안도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바로 "우리의 심령 속에서"(눅 20:21) 이미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하나님 나라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은 아무리 밤이 깊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하나님을 쳐다보면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세상이 나를 위로해 주지 못해도 피난처 되신 주님의 품에서 편히 쉴 수 있습니다. 고달픈 세상길을 가는 동안도 나를 끊임없이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젖어 감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물이 없습니다. 긴장이 없습니다. 애가 타고 가슴 조이는 불안이 없습니다. 이 눈치 저 눈치를 살펴가면서 살아가는 답답함이 없습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절망이나 좌절이 없습니다. 값없이 죽어 가는 슬픈 종말이 없습니다. 오직 아름답고 영원한 평화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강같이 흐르는 평화를 노래하면서 즐거운 마음속에 손에 손목을 붙잡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곁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평화스럽게 놀면서 노래할 뿐입니다.

결론

강물처럼 넘치는 평화, 어머니의 젖을 빨며 그 팔에 안기고 그 무릎 위에서 귀여움을 받는 평화, 어머니의 위로를 받듯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며 살 수 있는 평화! 이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 동산의 평화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하나님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기쁨과 평화를 믿음 안에서 여러분에게 충만케 하십니다(롬 15장)

2. 본 설교가 있기까지

설교를 위한 명상의 노트

기독교의 복음은 한국에서 자생되었거나 긴 역사를 통하여 이 땅에 정착된 것이 아니다. 아무리 한국 땅에 예배당이 화려하게 자리를 잡고 헤아릴 수 없는 십자가가 이 나라의 하늘을 수놓는다고 하더라도 결코 이 문화를 근본적으로 지배하는 종교가 되기까지는 그 길이 아직도 멀다. 기독교가 한민족을 찾기 수천년 혹은 수백년 전에 이 민족은 무교와 불교와 유교의 지배를 받아 왔고 이미 이 땅의 문화의 구심점을 형성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 종교들과의 만남을 가져왔을 때 우리의 민족은 강대국의 침략과 지식의 빈곤과 허다한 질병에 시달렸다. 그러하기에 종교가 이 민족 앞에 나타날 때마다 진정한 평화를 희망하고 간구하는 종교심을 나타내면서 이러한 종교들과 접촉을 하였다. 이러한 평화는 자신과 가정과 국가의 평화가 주제가 되었고 더 나아가 이것을 자신들의 최고의 복으로 여기면서 종교에서 그것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기독교가 이땅 우리 민족과 접촉을 할 때도 평화의 희망과 기원은 여전하였다. 여기서 기독교는 한때 재래 종교와 같이 타 종교의 평화의 개념과 실천을 모방하는 형태를 가져와 기독교의 고유한 진리를 희석시키는 모순을 범한 바 있다. 그러나 성경의 바른 해석과 건전한 신학의 정립은 이땅의 성도들을 바른 신앙으로 이끌어 가야 하는 책임을 느끼게 하였고 이 일을 위한 설교의 사명 또한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다.
평화를 소유하고 움직이는 주인을 찾는 일은 이땅에서 선거가 펼쳐질 때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이땅의 집권자가 이 평화를 창조하고 지속할 수 있는 존재라는 그릇된 기대가 국민들의 가슴에 가득하다. 그러나 요즈음 이러한 기대는 사정없이 무너지고 있다. 연속적으로 발생되는 대형사고에 국민들은 이제 불안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계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부끄러운 사고들은 하늘과 바다와 땅위와 땅 밑에서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집권자는 최선을 다 기울여 보려고 몸부림치지만 하나님의 도움이 미약하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오늘의 강단은 평화의 주인을 찾아 그 주인과의 만남을 가져오도록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된다.

본 설교가 있기까지의 사연

지난해 어느 교회 강단을 일년 동안 지켜야 한다. 민족의 명절로 가장 크게 설레이는 추석이 가까운 주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지켜온 이 명절에는 고향을 찾는 발길들이 거리를 누빈다. 우리 민족이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부모형제가 한자리에서 평화의 대화를 나누는 데서 그 일차적인 의미를 찾는다. 그러나 지나해 중추절에 관한 보도를 보면서 발견되어진 것은 고향과 부모는 찾는 사람들이 그 어려운 길을 달려 한자리에 모였으나 거기에는 원하는 평화와 기쁨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때로는 불평과 다툼과 원성을 남긴 채 찾아온 발길들이 이외로 많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늘의 성도들에게 평화란 인위적인 것보다는 진정한 평화의 주인을 인식하고 그를 따르는 데서 발생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알려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또한 회중 가운데 실향민이 많은 실정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향과 부모형제를 북녘에 두고 있는 회중들에게 역시 평화의 근원이신 분에게 모든 시각을 모으도록 함이 이 절기에 있어져야 할 설교의 당연한 내용이라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이 명절에 고향을 찾는 사람이나 고향을 찾을 수 없는 사람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메시지는 역시 평화의 주인공과의 만남이라는 확신을 갖기에 이르렀다.

본문과 주제의 선정

중추절이라는 특수한 명절과 함께 평화의 주관자로 주제가 확정되었다. 컴퓨터로 사용할 수 있는 성경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검색한 결과 평화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성구가 23곳, 평안은 194곳, 그리고 평강은 100곳이었다. 참으로 많은 부분에 평화에 대한 말씀이 가득하였다.
빠른 속도로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성구들을 빠짐없이 읽으면서 그 중 어느 말씀을 주실는지 마음을 열고 기도하였다. 결국 이스라엘의 멸망이 임박한 사실을 알리면서 이스라엘의 희구해야 할 평화의 내용이 시원스럽게 보이는 이사야 66장 12절의 말씀이 마음에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인간으로서 추구하고 싶고 경험하고 싶은 평화의 장면이었다. 이 말씀을 읽는 동안 바로 이 말씀의 내용이 회중들의 가슴에 담겨지고 경험되어 질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한 실존들이 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갖기에 이르렀다.

석의와 주해의 작업

이스라엘 백성들의 통용된 인사는 샬롬이다. 평화가 당신과 함께라는 뜻이다. 말씀의 석의작업에서, 언제나 그들은 전쟁과 도전의 역사에서 인간적인 삶의 평화를 마음껏 누리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다시 읽게 되었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언제나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고 그 평화의 성취를 위하여 수많은 전쟁을 감수하게 되었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이 평화는 오직 메시아의 오심에서만 가능하다는 신앙을 갖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평화를 경험하지 못하였으면서도 그 평화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오늘을 지탱하여 왔다.
본문에 나타난 평화는 하나의 신학으로서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그 본질과 내용이 활발하게 연구되어진 신학적인 주제이다.
설교자가 유의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안과 평화의 개념이 동일하면서도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분류되어 있다는 것이다. 평안은 마음이 잔잔하여 걱정이 없고 원만하고 안정된 상태를 말하는데 여기에는 "샬롬"과 "에이레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이었고 문안인사의 전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평화는 평안과 거의 유사한 개념이었으나 전쟁과 분쟁이 없고 화합하고 고용한 상태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전쟁이 없는 단순한 상태보다는 자유 속에 모든 것이 충족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켜 평화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상의 평안이나 평화를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로 이해하였고, 메시아를 통한 구원의 사상과 연결하였다는 것이다. 신약에 이르러서는 이 평화의 궁극적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되며 그가 주시는 구원의 손길이 평화의 기초라는 것이다.(롬 5:1)

본 설교가 추구하는 목적

마음의 갈등과 현실의 모순 속에서 신음하는 현대인들의 마음에 평화를 심는 목양설교에 초점을 두었다. 가고 싶은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가보지 못하는 마음의 상처를 오늘의 설교에서 달래주어야 한다.
당연성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찾아 갈 부모를 잃고 그 부모형제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상처를 다시 건드리지 않고 고요한 마음으로 안정시킬 수 있는 설교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목양의 의미를 가득 실어야 한다고 보았다.

설교의 유형과 형태

기본 유형은 본문설교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그 전개는 분석설교의 형태를 취하였다. 여기서 단순한 분석 설교의 형태를 취하지 아니하고 모든 설교가 갖추어야 할 형태를 기본적으로 앞부분에서 다루었다. 설교의 도입을 위하여 서론적인 접근을 시도하였고 이어서 본문의 내용에 접하기 전에 본문의 정황을 이해시키는 본문접근에 관심을 두었다. 회중들이 설교의 기본출반인 본문, 즉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과 그 배경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하기에 이 말씀이 있기까지의 배경을 찾는 데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그 본문을 좀더 쉽게 이해하도록 하는 새로운 번역을 시도하여 말씀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특별히 주제의 정의를 내리기 위하여 분석설교의 전형적인 부정의 반복 끝에 보여주는 정의를 시도하는 것보다 좀더 다른 형태를 시도하였다. 그러한 결과 다른 설교보다 주제의 풀이를 위한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주제의 실현을 위한 방법의 제시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어지도록 하였고 설교자 자신의 분석은 감추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본 설교의 자료수집 과정

일반적으로 모을 수 있는 평화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66권 성경에서 언급되어진 평화에 대한 성구를 검색하여 읽는 가운데 발견되어진 말씀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설교자의 마음에 와 닿았다. 그러하기에 현장에서 얻어진 자료보다 성경에서 언급된 말씀을 설교의 기본 자료로 하였다. 그래서 어느 설교보다 성경말씀이 많이 등장된 설교가 되었다. 물론 회중들의 지루함과 흥미 등을 고려하면 당연히 좋은 예화나 기타의 자료가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설교를 언제나 회중의 흥미에 초점으로 맞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하기보다 회중의 취향을 중심한 결과를 가져오기 쉬운 오류를 범하게 된다.
본 설교에서 활용된 자료는 다음 몇 가지였다. 먼저는 평화를 찾던 단테의 모습이 너무 인상적인 것이었기에 그것을 설교자료집에 철하여 둔바 있다. 오늘의 설교를 위하여 서론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것이었기에 지체 없이 사용하였다.
둘째는 10여년 전에 TV방송에 의하여 진행되던 이산가족 찾기의 현장이었다. 설교자가 직접보고 느꼈던, 가족과의 만남을 눈물로 희구하던 현장을 보여주면서 평화를 향한 몸부림으로 그 자료를 활용하였다.
셋째는 2천8백만의 인구가 이동하는, 추석절의 기대에 찬 발길과 가족의 불화만을 경험하고 돌아오는 분열의 아픔을 언급하면서 설교의 자료로 사용하였다.
넷째는 노벨 평화상이 제정되었던 유래와 지난 권력자들의 불안한 삶의 장면들을 짧은 자료로 설교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설교자의 진정한 고민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순수하고 정결하게 회중들에게 운반하여야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본 설교는 평화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여주는 데 성실한 면이 보인다. 그러나 이 설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은 부분들에서 발견되어진다.

3. 본 설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먼저, 문장체로 계속 이어지는 본 설교의 어감, 표현, 전개가 회중들과 얼마나 성공적으로 호흡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를 일으킬 수 있다. 몰론 설교란 진지해야 하고 저급한 속어로 지속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회중의 언어를 완전히 벗어난 설교의 언어란 의사소통의 문제를 유발시킬 수 있다. 둘째로 분석설교의 주안점은 역시 주제의 실천방안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본 설교에서는 주제의 정의에 너무 많은 시간과 부분을 할애함으로써 주제의 실천방법은 상대적으로 시간의 제한을 받고 있다.
셋째로 설교의 자료가 성경일변도로 구성됨으로써 현실적 감각의 결여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이 짙다고 본다. 전달의 특별한 능력이 없는 경우 이러한 설교는 회중들의 귀와 눈을 지속적으로 붙드는 데 대단히 어려움을 느낄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본 설교는 어떤 형태로든지 현실적인 예화나 자료를 좀더 활용했어야 할 것이다.
넷째로 설교자는 어떤 경우도 설교의 내용 가운데 등장되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본 설교에서는 이산가족 찾기의 자료를 사용하는 가운데 설교자가 보이고 있다. 이러한 경우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표현이 훨씬 더 좋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어느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러한 사연을 보면서 많은 국민들이 눈물을 함께 흘렀습니다.
끝으로 본 설교의 목적이 목양적 설교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좀더 푸짐한 위로에는 인색하고 아직도 말씀으로 가르치려는 목사의 관습적인 인상이 뚜렷하다. 그래서 본 설교는 순수한 목양설교보다는 교훈적인 설교가 함께 가미된 혼합된 설교의 목적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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