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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지막 남긴 부탁 (눅 23-26-31)

첨부 1


오비디우스라는 로마의 시인은 "자기가 온 동네 얘기 거리가 되고 있음을 자신은 모른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자신의 모순과 허물과 실수를 인정하고 기억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잘난 맛에 산다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은 잘 보아도 나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일찍이 톨스토이는 "자녀는 고통일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비극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수년전만 하더라도 이 말에 대한 반대적인 입장을 거의 모두가 취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모두가 이 말을 인정을 해야 할 정도로 이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도덕률이 시들어지고 윤리가 실종되고 있는 이 시대의 변화는 부모로 하여금 우리의 자식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게 하고 있습니다.
키케로는 민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부모도 소중하고, 우리의 자식들, 이웃들, 친구들도 모두 소중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모든 애정은 하나의 조국에 묶여진다."
실로 인간사회에서 자신의 문제와 자식을 비롯한 가정의 문제, 그리고 조국의 문제는 가장 기본적인 관심의 대상입니다. 이 세 분야의 세계에 문제가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인류가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유토피아에 속할 것입니다.

본문접근

우리 주님이 인간들에게 주셨던 마지막 부탁도 바로 자신과 자녀와 국가에 국한된 문제를 언급하시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말은 언제 어데 서나 자유롭게 할 수 있고 그 내용 또한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주어진 시간과 장소와 상대에 따라서 그 말의 의미는 각각 달리 사용되어 집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보통 때와는 아주 다른 현장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골고다의 언덕길에서 남겨 주신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우리 예수님께서 이 지상의 생활에서 대중 앞에 최후로 남기신 말씀입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말씀은 어느 특정한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한 말씀이던가 독백적인 고통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가슴아픈 함성이었습니다. 부활 이후의 말씀들도 제자들만을 상대한 말씀이지 결코 대중을 향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봉독한 말씀은 십자가를 어깨에 매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시던 길에 뒤를 따르던 무리들에게 주신 최후의 말씀이었기에 그 의미와 교훈이 특별합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최후로 십자가 위에 매달리는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몹시나 무거운 십자가가 우리 주님의 어깨 위에 주어졌고 그것을 끌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땀흘리시며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무거운 십자가 때문에 쓰러지고 지친 때였습니다.
예수님의 총애를 받던 제자들은 저 멀리서 신변의 위협 때문에 감히 접근하지를 못했고, 갈릴리로부터 호산나를 부르며 예루살렘을 예수님과 함께 입성했던 많은 사람들은 허망하게 십자가의 제물이 되어 간 예수님을 쳐다 만 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에 거하는 여인들은 불행한 운명을 감수하는 예수님을 쳐다보고 인정 어린 눈물이 솟았고, 드디어는 가슴을 치고 소리 높여 애곡하면서 그 뒤를 따랐습니다.
무거운 십자가의 형틀을 재 빨리 끌고 가지 못한 예수님을 지켜보던 사형 집행 관들은 때 마침 구레네 지방에서 온 시몬이라는 흑인을 붙들어 대신 그 사형 틀을 옮기게 했습니다.
그러자 우리 예수님은 뒤에서 슬프게 자기를 위하여 울고 있는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뒤돌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오늘 우리의 언어로 좀더 쉽게 풀이하여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의 재경청

나를 위하여 울고 있는 예루살렘의 고마운 여인들이여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나를 위하여 울 필요가 없노라
이 죽음의 길이 너희 생각대로 실패의 길이 아니다.
이 길은 승리의 길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온 인류를 위한 장엄한 구속의 역사가 탄생되는 순간인데
울 이유가 없노라.
그러나
너 자신을 위하여 울지어다. 죄와, 모순이 많은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네 자녀를 위하여 울지어다.
훗날에 네 자식들의 운명 때문에 한없이 괴로워해야 할
어머니된 너희들이다.
그러기에 차라리 잉태해 보지도 않고 젓을 먹여 자식을 키우는 일이 없는
여인이, 오히려 행복할 찌어다.

그리고 네가 몸담아 있는 네 조국을 위하여 기도할 찌어다.
나도 눈물을 흘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부르짖었던 조국,
푸른 나무와 같은 죄없는 나에게도 이처럼 잔인한 로마의 세력이 임하는데
하물며 열매 없이 시드는 마른나무처럼 모순과 가증한 죄로 덮여 있는
조국 유대 땅에 얼마나 많은 시련이 오겠느냐
바로 이 조국을 위하여 기도고 눈물을 흘릴 찌어다.

주제와의 만남

이상과 같은 오늘의 말씀은 주님이 짊어지고 옮기시던 십자가의 형틀을 순간적으로 구레네 시몬에게 넘겨지자, 우리 주님은 뒤에서 슬피 우는 여인들을 향하여 진지하게 오늘의 말씀을 주시었습니다.
그 말씀 가운데서도 "나를 위하여 우리 말고 너 자신을 위하여 울라,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주님은 당시의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그들이 흘러야 할 눈물에 대하여 소중한 말씀을 해 주실 뿐만 아니라, 바로 오늘의 한국 교회 바로 이 땅의 예루살렘의 식구들인 이 교회의 성도 여러분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먼저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눈물은 어떤 것을 말하고 있습니까 (정의)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인들의 눈물은 남의 집 남편의 높은 위치를 보면서 상대적으로 낮은 내 남편의 위치를 보면서 울고 있는 그러한 여인의 눈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좋은 집을 가지고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자신의 경제 형편이 안타까워 흘리는 눈물이 아닙니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리지 못한 남편을 쳐다보면서 측은하고 무능함이 마음이 아파서 우는 여인의 눈물이 아닙니다.
수 십년 전에 지은 죄를 회개할 때 용서 받았는데도 새벽마다 교회에 와서 기도할 때마다 용서해 달라고 우는 그러한 습관적인 기도의 눈물을 의미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사실 눈물을 분석해 보면 99%의 수분과 1%의 염분으로 구성되어 눈의 활동을 원활히 해주는 분비액으로 사용되는 단순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눈물은 이러한 눈의 활동을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흘리라는 눈물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눈물은 자신의 수많은 실수와 죄 때문에 흘러야 할 눈물을 말합니다. 여기서의 눈물은 자신이 낳은 자식들의 탈선과 하나님을 떠난 생활을 보면서 괴로워하고 가슴 아파하는 어머니의 눈물을 말합니다. 여기서의 눈물은 사랑하는 조국의 현실과 미래를 바르게 보고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흘리는 눈물과 땀을 말합니다.

왜,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우리는 울어야 합니까

우리 주님은 오늘의 성도들이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려야 할 대상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쓰러지고 또 쓰러진 골고다의 예수님이 아니심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 자신을 보면 너무나 헝클어져 있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위하여 너무나 몸부림치는 현실입니다. 탈선과 낭비의 무대 위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춤을 추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식들이 보여주는 탈선은 위험한 수위를 넘은 경우가 종종 보입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예의범절이 없어졌습니다. 생각하는 삶의 내용이 신앙과 멀어지는 것을 봅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이나 미래 같은 것은 거의 생각하지 않은 체 나 하나의 안일에만 급급한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의식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어찌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염려하지 않고 있을 수 있습니까 어찌 눈물을 흘려 슬퍼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이 흘려야 할 눈물은 주님이 말씀하신 데로 세 가지의 경우입니다.

(본론)
먼저는, 우리 주님은 우리 자신을 위한 눈물을 요구하십니다.

(말씀)
너 자신을 위하여 울지어다.

(해석)
무엇 때문에 내가 나를 위하여 울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시 할 수 있습니다. 편안하게 교회 잘 다니고 자녀 잘 키우고 건강하게 사는데 무엇 때문에 내가 나를 위하여 울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신 주님이 주신 이 말씀은 매우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 숭배와 다툼과 시기와 분노와 이기심과 분열과 분파와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거리는 낭비의 생활로 우리의 육체만을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부끄러운 현실 속에 나 자신이 깊숙이 빠져 있음을 발견할 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네 자신을 위하여 울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직도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은 예배소 교회를 향하여 하셨던 말씀을 다시 들려주십니다.
"너희가 지난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개으리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지금 바로 오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나와의 아름다운 관계가 멀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과 같은 행위를 회복하라"(계 2:3-5)

(적용)
우리는 겸허하게 자신의 현재의 위치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한국의 크리스챤으로서의 개개인의 신앙과 삶의 형태를 볼 때 많은 변질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수난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진리를 받아 드리고 감격했던 신앙이 너무 많이 식어 있습니다. 그토록 뜨겁고 감격에 찬 신앙생활의 발길이 너무 식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육이오 동란을 통하여 갖은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던 그 절박한 기도도 전쟁이 없는 지금에는 없어졌습니다. 가난의 늪에서 손을 들어 의식주를 해결해 달라고 부르짖던 그 절박한 기도도 가난을 벗어난 지금에는 없습니다. 나의 건강이 온전하지 못하고 질병에 시달릴 때 하나님의 치유의 손길을 구하던 그 절박한 기도도 건강을 되찾은 지금에는 모두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뿐만은 아닙니다. 인정의 샘이 언제나 마르지 아니했던 우리의 심성이 너무 메마르고 살벌해 졌습니다. 나 하나의 이기심에 젖어서 이웃이나 교회나 국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나의 이익만을 챙기는 실로 부끄러운 인간성에 스스로 파묻혀 있게 됩니다.
어느 때 보다 지금의 현실은 육체의 욕망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 준엄한 명령을 경청하고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산만해지고 나태해지고 개을러지고 육체적인 조건과 만족만을 추구하는 생활에 깊숙이 빠져 간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러한 자신을 서글퍼 하고 잃어버린 자신의 위치를 괴롭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위한 눈물을 요구하십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 내용이 없는 아우성과 울음만을 터뜨리기 전에 주님의 말씀대로 내 자신을 향한 겸허한 진단과 반성, 그리고 애통하는 눈물을 흘려야 하겠습니다.
실로 우리의 한국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신 정치의 안정과 경제의 성장이라는 배를 타면서부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생각하기 전에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데 급급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길을 선택하기 전에 자신의 영화만을 추구하는 부끄러운 길을 걸었습니다. 이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아니할 수 있습니까

둘째로, 우리 주님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말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해석)
자식을 위하여 흘린 어버이의 눈물은 실로 소중합니다.. 자식의 장래를 생각하고 염려하고, 그 장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눈물어린 기도야말로 자식을 위한 보약 중에 보약이 됩니다. 그 자식들은 그 눈물을 보면서 몸가짐을 달리하고 옷깃을 여미면서 성장하게 되고 훗날 죄악의 파도 속에서도 그 눈물의 어버이가 찾던 하나님을 다시 찾고 그 품을 떠나지 아니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오히려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을 하시었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이 없을 때 자식을 가진 그 자체를 후회하게 될 날이 오고야 말리라는 말씀을 하시었습니다.
(적용)
깊은 세계를 볼 줄 모르고 얕은 물가만을 거니는 사람들은 늠름히 자라는 자식을 쳐다보면서 그 얼굴에 미소만을 짖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 보다 더 키가 크고 잘생긴 아들을, 어머니 보다 더 아름답고 키가 큰딸을 쳐다보는 어버이는 흐뭇한 마음으로 일관하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자식들의 학교의 성적만을 쳐다보면서 만면에 미소를 지을 것입니다.
그러나 깊은 세계를 쳐다보고 좀더 자녀들의 미래를 깊이 생각하는 어버이들은 그 자녀들이 임박한 현실을 보게 되고 그 현실의 파도에 휩싸여야 하는 자식들의 운명을 보면서 깊은 시름과 눈물을 흘리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실 오늘의 우리 자녀들은 대단히 위험한 바다를 항해하고 있습니다. 그 바다의 파도가 너무 심하여 풍랑이 일고 그들이 타고 있는 배가 심히 요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많은 자식들이 그 배 안에서 정신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육이오와 같은 전쟁 속에서도 지키고 있던 부모와 자식간의 윤리가 무너지는 소리가 도처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가슴을 치면서 눈물로 나날을 보내는 경우가 적지 아니합니다. 여기 이러한 현실을 잘 말해 주는 좋은 실례가 있습니다.

(예화)
어느 가정에서 생후 몇 개월이 안된 아들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자식을 낳지 못한 어머니는 이 아들을 자신이 낳은 아들로 알고 정성을 기울여 키웠습니다. 인물도 좋고 학교의 성적도 좋고 그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도 잘 했습니다. 그 부모님은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그 아들의 교육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서울의 소위 일류 대학에 그 아들은 입학이 되었습니다. 그 부모님은 그 자식의 교육을 위하여 자식이 다니는 대학 곁에 와서 하숙을 치르면서 생계를 유지하면서 교육비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졸업 후 좋은 직장을 찾게 되었고 결혼도 성대히 잘 했습니다. 어느날 그 어머니는 며느리와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가출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주변의 만류가 있고 해서 귀가한 어머니는 다시 한번 놀라게 됩니다. 그것은 그 자식 내외가 어디로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이삿짐 센터를 시켜 이사를 해버렸습니다.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쏟은 사랑과 정이 그 어머니의 곁을 떠날 때 그들은 한없는 탄식과 후회와 무상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주 드문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윤리적인 길이 요즈음의 세상에 너무 많이 편만해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강건너 불처럼 보이 실지 모르나 언제 우리의 자녀들에게서 발생될 지 아무도 보장을 못합니다. 이러한 험준한 풍랑이 이는 오늘의 삶의 장에서 어떻게 우리의 자녀를 보호 할 수 있습니까 어떠한 눈물을 흘려야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 천년 동안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나아가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쉐마'라고 일컫는 특수한 종교교육입니다. 우리의 사회가 어릴 때부터 자녀들을 각종 학원을 보내고 있는 대신 이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원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 때문입니다.
"이 말을 너희 자녀에게 가르치며, 너희가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쳐라"(신11:19-20)
하나님은 이 명령을 철저히 생활에서 실천하는 부모와 자식이 있는 가정에 복을 주시었고 그 자녀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후손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시대의 변화가 아무리 험하게 밀려와도 이스라엘의 젊은 세대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언제든지 그들의 생명을 준비하고 있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어버이가 손목을 붙잡고 눈물흘려 기도하는 가운데 잠을 든 자식의 후일과 그렇지 않은 자식의 훗날은 분명히 차이가 생깁니다.

셋째로, 우리 주님은 허물어질 조국의 운명을 염려하시었습니다.

(말씀)
주님이 남기신 말씀의 뜻을 풀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우리 앞에 주어졌습니다.

나도 눈물을 흘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부르짖었던 조국,
푸른 나무와 같은 죄없는 나에게도 이처럼 잔인한 로마의 세력이 임하는데
하물며 열매 없이 시드는 마른나무처럼 모순과 가증한 죄로 덮여 있는
조국 유대 땅에 얼마나 많은 시련이 오겠느냐
바로 이 조국을 위하여 기도고 눈물을 흘릴 찌어다.

(해석)
우리 주님이 보여주신 조국에 대한 애국심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조국이 로마에 정복을 당하고 수천 년을 지켜 온 하나님을 모시는 신앙이 시들어지고 민족은 조국을 잃고 세계로 흩어져 살아야 할 운명을 보신 주님의 마음은 너무나 괴롭고 착잡하시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 때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면서 눈물을 지으셨습니다.
'평화의 터전'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예루살렘은 마지막 비참한 종말을 가져옵니다. 그 종말의 현장 가운데 하나가 사해 근방에 있는 맛사다라는 산꼭대기에서 남긴 기록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티토 장군의 군데에 처절한 저항을 하다가 스스로의 목숨을 끊고 최후의 멸망을 가져왔습니다.
바로 이런 최후의 비극적 현장을 미리 보신 우리 주님은 예루살렘 성을 가까이 오셔서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러나 너는 지금 그 길을 보지 못하는 구나.
그날이 너에게 닥칠 것이니, 너의 원수들이 흙언덕을 쌓고, 너를 에워싸
고 사면으로 너를 공격하여서 너와 네 안에 있는 제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눅 19:42)

예루살렘은 주님의 예언대로 정확하게 파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시기에
그 십자가의 무거운 형틀을 메고 가시면서도 조국을 염려하여 말씀하시었습니다.
"푸른 나무와 같은 죄없는 나에게도 이처럼 잔인한 로마의 세력이 임하는데 하물며 열매 없이 시드는 마른나무처럼 모순과 가증한 죄로 덮혀있는 조국 유대 땅에 얼마나 많은 시련이 오겠느냐"

(적용)
오늘의 우리의 나라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모처럼이 문민에 의하여 세워진 정부가 그 동안의 뚜껑을 열고 보니 어느 한구석이라도 썩지 않은 곳이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교육 군사 사회의 어디에 곪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더욱이 괴로운 것은 우리의 나라와 민족이 이처럼 부패해지고 있었던 동안 한국의 교회도 이 탁류에 함께 춤을 추면서 살 아 왔다는 부끄러운 사연입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려는 생각보다 오히려 앞장서서 더 많은 사치와 낭비와 함께 살아오지는 아니했는지 깊은 반성을 요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이 국민의 4분의 1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그 동안 이 민족에 대하여 얼마나 외면을 했기에 이처럼 병든 나라가 되었는지 참으로 부끄러운 사연입니다. 예를 들어서 한국교회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 여성도들이 가정에서 쪼들린 가정 형편을 가지고 남편에게 짜증을 부리는 대신 정상적인 수입이 아닌 검은 돈이 보여질 때 남편의 손목을 붙들고 "우리가 헐벗어도 좋습니다. 우리가 가난해도 좋습니다. 더 절약하면 됩니다. 나도 집에서 쉬지 않고 가계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서라도 가정을 꾸려 나가겠습니다. 우리 정직하고 맑게 살면서 주님의 칭찬을 받으면서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라고 고결한 인격을 보인 우리 가정의 아내요 어머니들로서 우리의 예루살렘 딸들이 살아 주었다면 우리 민족이 이렇게 부패하지는 아니 했을 것입니다.
오늘의 노사 분규의 가정에서도 남편의 손목을 잡고 "정당한 임금을 주장하고 인간 대우를 받기 위하여 파업을 하십시오. 그러나 이제 우리의 경제가 조금 일어 설 기회가 모처럼이 왔는데 어느 정도 일어서도 국제 경쟁력이 잡힌 이후에 그러한 단체행동을 하심이 어떠냐고 충고할 수 있는 오늘의 예루살렘 딸들이 필요합니다."
일제의 그 잔인한 착취와 야수와 같은 칼날이 48년전 이 땅을 떠난 줄 알았는데 지금 한국 경제의 한 복판에 깊숙이 점령하여 우리를 시달리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한국은 외국에 땀과 눈물을 흘려 가면서 수출하여 번 돈을 모두 일본에 가져다 바치는 무역의 역조를 심각하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경제 침략을 일찍부터 받아 지금은 경제적으로 그들의 식민지화 되어가는 현실입니다.
그토록 조국을 찾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피를 흘렸던 우리의 교회입니다. 우리 주님의 부탁대로 오늘 우리는 조국의 현실과 미래를 보면서 우리 성도들이 눈물을 흘려야 하고 기도해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결론

인간은 늘 착각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나의 생각이 언제나 옳고 나의 하는 일이 정확하고 나는 흠이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내 자신의 모습을 깊은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너무나 모순된 자신들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 주님의 최후의 부탁을 다시 경청합시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오히려 모순과 갈등과 죄악으로 뒤범벅되어 있는 "네 자신을 위하여 울라"는 말씀입니다.
도시화되고 산업화 된 우리의 한국 땅에서 성장해 간 우리의 자녀들이 몹시나 탈선하기 쉬운 환경에서 몸부림칩니다. 부모가 알지 못하는 죄악의 함정에서 아직도 해어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아니합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그 현장을 일일이 다 따라 다닐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자녀를 위하여 눈물어린 사랑과 기도가 어느 때 보다 소중한 시점입니다.
우리의 조국, 문민정부의 출현과 함께 우리는 들뜬 상태로 개혁과 사정 작업을 지켜봅니다. 그러나 시원스런 결과는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신경제의 깃발을 내걸고 있는데 중소기업을 비롯하여 아우성 소리가 요란합니다. 무더운 여름을 피하여 피서객의 행렬이 고속도로를 메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 저곳에서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의 아우성이 쉬지를 아니합니다. 이러한 조국의 현실에 우리 어찌 눈물어린 기도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 땅을 총칼로 침략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수탈해 갔던 일본이 이제는 경제로 침략을 하여 우리를 옭아매고 있습니다. 영국의 시인 쿠우퍼(William Cowper)는 자기의 조국을 향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영국, 그대의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대를 사랑하노라. 나의 조국이여."
이제 우리도 조국을 위하여 기도한 후에 부르짖어 봅시다.
'아 나의 대한민국이여, 그대가 안고 있는 모든 추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마음을 모아 그대를 사랑하노라.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십자가의 형장을 향하여 가시면서 주시던 주님의 말씀이 너무도 생생한 오늘입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오히려 너 자신을 위하여 울라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리고 어두운 미래를 앞둔 조국을 위하여....
눈물이 있어야 할 곳에서 눈물이 없는 인간은 동물의 세계로 이미 전락했음을 표하는 것이다.

2. 본 설교가 있기까지

설교를 위한 명상의 노트

설교자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독서의 행위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안고 있는 사건(event)이다. 먼저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당연히 매일 공급받아야 할 영의 양식을 먹는 일이다. 자신 앞에 다가올 그날의 세파를 이기고 고고히 하나님의 종으로서 말씀대로 살수 있는 무장을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말씀을 읽은 중에 자신이 섬기고 있는 양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무슨 메시지를 주시는지 온 정신을 모아 경청하는 일이다.
설교에 전심을 기울인 설교자는 심지어는 꿈에서까지 설교를 종종 하면서 때로는 즐거워하고 때로는 실망을 한다. 꿈에서나마 가득히 모인 교인들이 경청을 하는 모습을 보면 그 한날 흐뭇해하고, 몇 명의 교인만 모여서 설교를 경청하지 않고 외면하는 장면을 보면 깊은 시름에 빠지는 것이 설교자의 모습이다.
설교를 자신의 생명으로 알고 하나님께 매어 달리면서 성경을 정독하는 설교자에게는 순간 순간 메시지가 불꽃처럼 튀기면서 여러 편의 설교들이 가슴에 심어진다. 이토록 눈에 보이고 가슴에 와 닿은 설교 때문에 설교자는 성경을 계속 읽어 나가지 못하고 설교 노트에 이 귀한 설교의 영상(靈想)을 담기에 여념이 없다. 이러한 현상이 설교에 미쳐 버린 사람이 흔히들 겪는 경험이다.
어릴 적부터 나의 가슴에 와 닿은 복음은 십자가 위에서 날 위하여 죽어 주신 예수님 이 가장 우선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주님의 수난에 관한 성경 말씀을 읽을 때는 보통 때보다 깊은 주의를 기울인다. 그리고 수난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는 유난히도 옷깃을 여미고 그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나의 습관이 되었다.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걸으셨던 주님이 대중을 향하여 마지막 부탁하신 오늘의 본문은 읽을 적마다 가슴에 깊이 파고드는 주님의 음성이었다. 이 음성이 나의 가슴속 깊이 과거보다 더 진지하게 파고드는 것은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이다.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30이 다 된 자식들을 키워 보고, 그리고 조국을 사람하는 철이 드는 요즈음에 이르러 이 말씀은 과거보다 훨씬 진한 실감을 더 해주고 있다.

본 설교가 있기까지의 사연

이 설교가 있게 된 사연은 지금으로부터 27년전인 1968년 신학교 시절에 발생하였다. 어느 날 실천신학을 담당하셨던 김규당 교수님이 경건회에서 설교를 하라는 말씀이 있으셨다. 교수님들과 재학생 앞에서 설교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실로 가슴이 떨리는 일이었다. 그 때부터 모든 것을 뒤로하고 평소에 가슴에 깊이 새겼던 오늘의 본문을 반복하여 읽으면서 주석 책을 펴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바 있었다. 그 때는 이 설교를 유언 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회중의 관심을 끌어 보려고 했는데 설교가 끝난 다음에 예수님의 말씀에 유언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가 의 이의도 제기된 일이 있었다.
1981년 전국여전도회 연합회에서 주 강사로 부름을 받아 여러 차례의 설교를 하게 되었다. 이 때의 첫 설교가 바로 오늘의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던 그 주 대상이 여성들이었다는 데서 그 적절성을 먼저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학교 시절의 기억과 감격을 더듬으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허락을 간구하였다.
그 기도 가운데서 한국교회의 지도급에 속한 여성들이 자신을 위한 눈물을 비롯하여 자신들이 낳아 기르는 자식과 민족을 위한 깊은 애정의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이 땅에 사는 예루살렘의 딸들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주어졌다. 그 결과 나의 생애에 설교를 위한 본문으로 일찍이 가슴에 자리잡았던 오늘의 말씀에 다시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주제의 선정

주제의 발상은 본문을 깊이 소화한 후에 우리의 삶의 장을 쳐다보면서 결정되었다. 국민소득의 향상과 함께 모든 가치관이 바뀌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나를 중심하여 나아가는 현실임을 쉬이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가정의 구조와 가치관의 변화는 자식들을 신앙으로 붙드는데 너무나 힘이 드는 현실이 되었다. 그들의 탈선이 날이 갈수록 무서운 괘도에 오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땅에 살면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나라사랑의 열정은 너무나 식어있다.
이러한 우리의 현장을 우리 주님이 골고다 언덕길에서 보시었다면 오늘의 본문의 말씀은 필연코 우리에게 주어졌으리라는 생각이 주어졌다. 그러하기에 그 말씀을 오늘의 현장에서 받으면서 주님의 말씀 그대로 그리스도인들의 눈물 이 주제로 확정되었다.

석의와 주해의 과정

오늘의 본문으로 주어진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장면부터 십자가를 지고 처절한 곤욕을 당하시면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길을 오르시다가 쓰러진 모습까지를 한편의 영화를 보듯이 이 설교자는 명상해 보았다. 그리고 그 땀으로 온몸이 젖으시고 이곳 저곳에 멍이 드신 주님이 구레네에서 온 시몬에게 십자가를 넘겨주고 뒤를 돌아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을 엄숙한 심정으로 경청하였다.
이 과정에서 설교자의 가슴에는 이미 오늘의 말씀이 깊히 파고들고 있었다. 그리고 두 가지의 사실이 두 가지의 사실이 우리의 개역성경 만으로는 시원스럽게 이해가 되지 아니하였다. 먼저는, 그 살벌한 분위기에서 가금을 치며 슬피 우는 여인들에 대한 정체가 확실하지 않았다. 특별히 49절에 기록된 갈릴리에서부터 따라다닌 여자들은 아닌 듯하였다. 여기에 어떤 주석에는 예루살렘에서는 지도급 인사들의 죽음 뒤에 따라가면서 직업적으로 울어 주는 무리들이 있었다는 기록도 볼 수 있었다. 그러하기에 주님은 고마운 마음의 표현보다는 먼저 네 자신을 위하여 울 것을 말씀하시고, 장차 예루살렘의 멸망 시에 그들 자식들의 처절한 죽음의 운명을 예언하시면서 그들을 위한 눈물을 부탁하시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로, 29절과 30절의 말씀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말씀임에 틀림이 없으나 푸른 나무와 마른나무 의 표현이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발생되었다. 많은 주석서 에서는 푸른 나무는 죄 없으신 주님을 가리키고 마른나무는 열매 없이 시들어 가면서 생명을 이미 상실해 가고 있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킨 말씀으로 석의가 되었다.
이러한 석의를 통한 대답은 바로 본문의 재경청에서 그대로 풀어서 옮김으로 회중들이 오늘의 본문을 가까이 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본 설교가 추구하는 목적

본 설교는 회중들을 위로하는 목양설교가 아니다.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외치는 선포설교도 아니다. 이 설교는 예수님이 본문의 말씀을 예언적인 차원에서 하신 말씀이기에 사회와 개인을 향한 예언적 설교(Social-Prophetic Preaching)로 작성하였다. 스스로의 모순을 외면하고 가면을 쓰고 사는 개인, 자식들의 미래를 위하여 신앙적 차원에서 염려하지 않는 부모, 나라의 미래를 볼 줄 모르는 백성들을 향한 주님의 관심을 오늘의 관심으로 받아 드릴 때 이 설교의 목적은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설교의 목적과 그 성격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자신과 가정을 점검하고 나라를 염려하는 민족의 일원으로서의 사명을 촉구하는 데 주안점을 두도록 하는 예언적인 설교가 되었다.

설교의 유형과 그 형태

본문에서 주어진 주님의 말씀이 거의 빠짐이 없이 운반되고 있는 설교이다. 그래서 그 유형은 본문 설교이다. 핵심적인 부분의 집중적인 석의와 주해와 적용이 바로 본문 설교의 형태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그리고 전개 형태는 분석설교를 택하였다. 설교가 언제나 갖추어야 할 서론. 본문접근. 본문의 재경청. 주제부상의 기본적인 틀에다가 주제의 정의와 필요성, 그리고 주제의 실천 내용을 그대로 가져왔다. 그러나 중요한 부분인 결과에 대한 부분이 빠져 있다.
이 설교의 형태 가운에 본문을 오늘의 현대어로 그 내용을 풀어서 새롭게 들려주는 부분은 그 효과성을 다시 입증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본설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한편의 설교를 위하여 아무리 많은 시간과 정성을 기울여도 그 설교를 끝맺고 난 다음에 발견되는 아쉬움은 언제나 계속된다. 만에 하나 자신의 설교에 대한 만족을 느끼게 된다면 그 설교자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사람이다. 아무리 아멘의 함성이 우렁차게 터져나와도 설교자는 반성의 시각으로 자신의 설교를 돌아보면 부끄러움이 더 많이 느낀다. 어쩌면 이것이 정상적인 길인 듯 하다. 이 설교자는 본 설교를 위하여 많은 시간 그리고 충실한 준비를 다 했다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다음의 모자라고 아쉬운 부분이 너무나 뚜렷이 보인다. 그러기에 설교자로서의 겸손히 따를 수밖에 없는가 보다.
먼저는, 모든 설교에서는 복된소식(Good News)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분석 설교에서는 주제에 대한 정의. 이유. 방법. 그리고 결과가 필수적으로 있어져야 한다. 결과는 제시된 방법을 실천했을 때 눈앞에 보여지는 복된 결과이다. 제시된 방법대로 살다가 아름다운 결과를 경험한 사례들을 보여 주어 자신들도 그러한 결과를 접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본 설교에서는 그러한 중요한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아니한 모순을 안고 있다.
둘째로, 본 설교에서는 단 하나의 예화만을 자료로 하고 있다. 현장에서 경험될 수 있는 표현들로서 그 적용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방법도 예화의 진렬보다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그러나 좀더 실감난 메시지로 접근 될 수 있는 예화를 사용하지 않음은 교과서적인 설교로 인상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셋째로, 외국인들의 말을 인용하는 경우가 몇 군데 보인다. 예를 들면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나 영국의 시인 쿠우퍼나 로마의 키케로의 경우이다. 외 우리는 서양의 석학들이 남긴 말들을 즐겨 인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스스로 제기해 본다. 우리의 역사 속에 남긴 귀한 인물들의 경구들이 많이 있을 것인데 우리의 설교 자료는 거의 외국인들의 것으로 일색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 제기가 있게 된다.
넷째로, 본 설교의 긍정적인 비판으로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설교자의 등장이 완전히 감추어지고 말씀의 주인이신 주님만이 등장하도록 하려는 노력이 보인다는 점이다.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옮겨져서 회중들에게 들려지도록 하려는 노력은 자랑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본다.
다섯째로, 한국의 설교가 안고 있는 문제로서 설교에 필요 없는 잡다한 수식이나 표현이 없이 진솔한 메시지의 전달을 위한 언어 선별과 내용의 전개가 도움이 되고 있다고 본다.
끝으로, 이 설교를 읽은 독자들이 유의할 점이 있다면 그토록 흔한 바랍니다. 축원합니다. 믿습니다. 생각합니다. 원합니다. 들의 설교자 위주의 종결어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환언하면 이러한 설교자를 주어로 하는 종결어를 사용하지 않을 때 오히려 주님이 쉽게 등장되고 주님의 말씀이 더욱 빛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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