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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함받은 사람들 (눅 14: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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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은 안식일날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열린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중에 하나가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고 감탄을 하였읍니다.
이 말뒤에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교훈이 바로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 설명>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사전에 오실 손님들을 다 초청하고, 잔치 당일에 또 종들을 보내어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 되었나이다.”하고 다시 초청을 했더니, 놀랍게도 초청자들이 다같이 사양을 하였읍니다.
그래서 먼저 초청 받은 사람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고, 그런 반면에 전혀 예상 못했던 엉뚱한 사람들이 찬치에 참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여기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멧세지는 종들이 먼저 청함받은 자들에게 가서 전한 말씀인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준비된 커다란 잔치와 같다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롬14:17에 보면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라”
이땅의 의는 불순하고, 이땅의 평강은 완전치 못하고, 이땅의 희락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참된 의와 완전한 평강, 만족한 희락이 주된 것이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하나님의 나라”,또는 “천국”을 생각 할때 무엇을 연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잠이 모자라는 사람은 실컨 잠잘수 있는 곳으로 연상하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않고 마음놓고 푹 잘수있는 나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나한 사람은 풍부하게 먹을 것이 있는 나라로 연상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걱정근심 고민으로 가득찬 사람은 모든 고민이 해결된 영원한 평화의 나라로 연상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실지로 제3세계의 신학자들은 그들의 당면한 문제를 하나님 나라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조지 픽슬레이 (G.Pixley) 라는 신학자가 쓴 ‘하나님 나라’라는 책에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이였지 신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였다.”
그리고 그외의 남미인들은 “우리들의 하나님은 흑인이지 백인이 아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피부색갈을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흑인들의 애환 ,흑인들의 고뇌, 흑인들의 착취, 흑인들의 슬픔, 흑인들의 고통 , 즉 흑인들의 심성을 헤아리고 이해 하지못하는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 그 하나님은 우리들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흑인들의 애환과 고뇌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하나님만이 자신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하나님은 흑인이지 백인이 아니다.”( Our God is Black, not white)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작가 이청준의 소설중에 ‘당신들의 천국’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소록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책입니다.
소록도에 새로운 원장이 들어서면, 모두 ‘당신들을 위해서 이소록도를 천국으로 건설하겠다’고 다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명목하에 손가락도 없고 발가락도 없는 문둥이들을 동원해서 괭이질을 시키고, 흙을 실어 나르고 땅을 메우고, 나무를 심고, 잔디를 심기우고, 중노동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사실 나병환자들이 나무 한그루를 심는데 얼마나 땀과 피를 솟았겠습니까
그래서 “당신들의 천국은 우리들의 천국이 아닙니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현재도 소록도를 방문한 사람들의 한결같은 말은 “소록도에 가보니 경치좋고 아름답고 마치 천국과 같다”고 합니다.
그럴때, 그들의 대답은 “그렇게 천국 같으면 당신이 여기에 와서 한번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들의 천국은 우리들의 천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우리들의 하나님은 문둥이다”고 이야기 할것입니다.
“우리들의 하나님은 나병환자이다” 라고 외칠지도 모르 겠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다 ”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먹고 마시는 일은 이 세상에서의 일입니다.
그런 반면 “오직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이다”는 것입니다.
불의가 아니라 의요, 투쟁이 아니라 평강이요, 슬픔이 아니라 희락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어떠하든지 간에,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수 있는가’에 더 관심을 두고 있읍니다.
오늘 본문의 잔치를 배푼 주인은 주님이시고 ,잔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잔치가 예정되어 있었고, 손님들에게는 사전에 초청장이 발송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잔치 당일이 되어 다시 초청을 했을때, 미리 청함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사양을 했습니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가로되” 했는데, “일치하여” 하는 말은 “곧장 ” 이라는 뜻입니다.
변명을 연구 할 필요도 없이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첫번째 사람은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보아야 하겠다”고 하면서 사양을 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입니다.
이사람은 남의 잔치에 참석하는것 보다도 내 밭에 나가보는 것이 더 중하고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논이나, 밭과 같은 부동산을 산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수십번을 생각하고 몇번을 별러야 살수 있는 것입니다.
막상 밭을 샀으니 얼마나 기뻤겠읍니까
또 그 밭에 무엇을 심어 어떻게 가꿀 것인가하는 ,이런 저런 생각으로 부득이 밭에 가보아야 했을 것입니다.
내일을 제처두고 한가로이 남의 잔치상에 앉아서 먹고 마실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두번째 청함 받은 사람은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데 나를 용서 하라” 하면서 거절하였습니다.
이 사람역시 농사 짓는 사람이었는데, 농부에게 있어서 밭을 갈고 파종하는 일은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누구나 새로이 소를 다섯쌍이나 사게 되면, 소의 상태도 살펴 보아야 하고 병은 들지 않았는 지, 여물은 잘 먹는 지, 힘은 센지 등등을 살펴보고, 멍에를 씌워서 밭을 갈아 본다든지 하는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 사람은 제 할일을 바로 알고 실천하는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번쩨 청함받은 사람은 “나는 장가 들었으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면서 거절했습니다.
신명기 24:5에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던 그를 군대에 내어 보내지 말것이요 그는 1년동안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혼한자는 1년간 병역이나 다른 직무를 지우지 못하도록 했고, 신부를 혼자두고 다니지 못하도록 율법에서도 명시를 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의 핑게는 가장 타당성이 있는 이야기 였습니다.
여기서 볼때, 세 사람의 핑계는 모두 정당하고 누가 보아도 맞는 이야기 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종이 돌아와서 이 모든 일을 주인에게 알리자, 주인은 심히 노하여서 종들에게,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리고 오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어떻게 보면 주인의 좁은 소견이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종들이 거리와 골목에서 데리고 온 자들이 모자라게 되자 길과 산울가로 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사랑과 즐거움은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닌데, 주인은 잔치상의 줄거움을 강제로 세우려는 듯해서 딱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잔치가 예사 잔치가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마지막 때의 잔치요, 세상끝날의 잔치이기 때문에, 사실상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잔치에 참여하고 못함에 따라 심판과 구원이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이 잔치에 동참하지 못하면 영벌과 심판을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두번 있는 기회도 아닙니다.
여기에서 보면 사실상 청함 받은 자들의 변명과 거절은 단순한 약속 위반의 정도가 아니라, 중대한 인격모독이였던 것입니다.
당시 풍습으로는 일단 청함을 받고 승락한 사람이 두번째 초대를 거절한다는 것은 선전포고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청함받은 자들의 핑계는 한갖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밭을 사는 사람이 사전에 몇마지기가 되는 지, 위치는 어딘지, 토양은 어떠한지, 그리고 사서 무엇을 심을 것인지, 사전에 다 계획을 하고 밭을 샀을 것인데, 미리 초대받은 잔치에는 오라고 하니 못가겠다고 거절한 것입니다.
두번째 사람도 역시 세상의 염려나 생활의 욕심이 앞서서 잔치에 참석하는 것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세번째 사람의 경우는 가장 무례한 경우에 해당됩니다.
청함을 받고 응하기까지는 불과 며칠 상관 인데, 그런 반면, 혼인 이라는 것이 그렇게 급작 스러럽게 하루 이틀만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진데, 이사람은 처음 청함은 받았을때 부터 헛된 승낙을 하고 주인의 잔치를 무시했던것입니다.
처음 청함 받은 자들은 한마디로 무성의 하고 무례한 자들 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는 인간의 반역으로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큰 잔치에 비유하신 것은 복음의 값없는 은혜를 말하는 것이고, 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는 받기만 하면 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초청한 자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소 다섯 겨리를 팔아서 그 돈을 가지고 오라, 밭을 팔아서 재물을 가지고 와야한다, 장가든 연후에 부부동반해서 와야한다는 등등의 전제를 달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오소서”하는 이야기 뿐이였습니다.
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소서” 또는 “오라” 하는 단어가 성경에 무려 1900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마11:28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했고, 계22:17에 “성령과 신부가 말하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돈없는 자도 오라 할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또 이사야 1:18에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아들의 이름을 ‘스알야습’이라고 지었는데, 그뜻은 “남은 자는 돌아오라”는 뜻으로 그렇게 지은 것이였습니다.
특히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로 불리는데, 그것은 “돌아오라 하나님께 가증한 악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라” 고 눈물로 호소하였기 때문입니다.
“오소서” “오라” “돌아오라” 는 이러한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심정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집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언제까지나 돌아가지 않고 지낼 수 는 없습니다.
인도의 라마 크리슈나가 아주 적절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정신없이 놀고 있지만,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오면 아이들은 장난감을 내던지고 어머니에게로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너도 이와같다. 오 ! 인간이여, 이물질의 세상에서 철없이 놀고있는 인간이여, 너는 지금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부귀 명예 따위의 장난감에 팔려 아주 제미있어 하고 있다. 그러나 일단 저 영원한 어머니인 신을 자각하게 되면 이 모든 장난감을 내 던져버리고 영원한 어머니에게로 달려갈 것이다.”
참 좋은 이야기라 생각이 됩니다.
“이 물질의 세상에서 철없이 놀고있는 인간”, “아무런 두러움 없이 부귀,명예따위의 장남감을 제미있게 갖고 놀고있다”는 말은 우리의 실상을 잘 말해주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오라고 하시면 다 내던지고 가야 할 것들입니다.
언제까지나 돌아가지않고 지낼수는 없고 반드시 돌아가야 합니다.

로마신화에 여명의 여신 오로라(Aurora)의 로맨스가 있습니다.
오로라는 불멸의 신의 몸으로서 , 젊고 아름다운 인간 청년 디투루스(Tithorus)와의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오로라는 그녀의 아버지인 제우스 신에게 결혼 선물로 티투루스도 자기처럼 죽지않는 불멸의 몸으로 만들어 주기를 구했습니다.
제우스는 사랑하는 딸의 소청을 들어 주었고 그들은 결혼해서 행복한 생활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오로라는 남편이 죽지않기를 구했으나, 늙지않기를 구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큰 실수었습니다.
그래서 그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오로라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웠으나 티투루스는 늙고 힘이 없어 거동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늙고 병든 남편의 모습을 본 오로라는 그를 죽지않게 구한 것을 후회한다는 이야기 였습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로마의 네로 황제 때에 궁중시인 Gaius Petronius의 소설 ‘사튀리콘’에 한 무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탈리아 쿠마에 지방에 한 무녀가 젊었을 때 아폴로 신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예언의 힘을 얻었고, 한 가지 소원을 들어 주어서 죽지않고 오래오래 살수있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영원한 젊음을 요구하기를 자잊어버렸습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그녀의 몸은 늙어서 점차 오그라 들었습니다.
마침내는 아주 작아져서 작은 항아리 속에 넣어져서 전국의 이곳 저곳에서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동네 아이들이 놀려되어서, ”무녀야 무녀야,넌 무얼 원하니”하고 조롱을 했습니다.
그럴때 무녀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죽고싶다.”
이동네에 가서도 “무녀야 무녀야 넌 뭘 원하니” 할때에 “나는 죽고 싶다” 저 동네에 가서도 “나는 죽고 싶다”고 외쳤습니다.

生者必滅'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입니다.
우리 육체가 70년, 강건하면 80년의 생명밖에 지탱하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의 힘도 그 이상을 지탱하지 못한다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현세는 우리가 영원히 살곳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해 줍니다.
반드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그것이 문제 입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나이다” 초청하시는 하나님께로 가야합니다.
오늘 성서에서 먼저 청함받은 자들이 주인의 초청에 거절하고 난후에 주인이 다시 부른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한번도 잔치에 초대 받지 못한 자들이였습니다.
병신은 아무도 결혼해 주지 않는 자들입니다.
소경은 밭을 보려 나갈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저는 자들은 밭갈이를 할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 가난한 사람들, 병신들, 소경들, 저는 자들은 모두 결점이 있고 부족함이 있는 자들입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교만이라고는 모르는 자들입니다.
복음의 조건없는 은혜, 조건없는 청함에 감사히 받을수 밖에 없는 자들이였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됩니다.
요14:2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곳이 많도다.”
얼마든지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이유와 변명이 많으면 일을 시킬수 가 없습니다.
이핑계 저 핑계를 둘러 대는 자에게는 일을 시킬 수 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대에 이유와 변명이 많으면, 부를 수 가 없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먹을 시간은 있고, 잠잘 시간은 다있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영혼을 위한 시간은 내어야 합니다.
어떤 농부가 빌리그래함 목사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만일 소가 주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소를 건져 내겠습니까, 아니면 그냥두고 교회에 가시겠습니까”
빌리그래함 목사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그거야 물론 소를 건져내야죠, 그러나 소가 주일 마다 구덩에 빠진다면 그 소를 팔아 치우겠습니다.”
주일날만 되면 이핑계, 저핑계가 생기는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있는 말씀인줄 압니다.
우리는 모든 핑계와 변명과 얽메인 일들에서 벗어나서 돌아와야 합니다.
다른 곳이아니라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나이다.”하는 주님의 초청에 우리 모두는 청함받은 사람들입니다.
파스칼은 “왜 이렇게도 이세상에는 종교적인 가짜가 많은가 그 이유는 진짜가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것이 없을때 아무도 모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이는 말하기를 “그리스도, 하늘과 땅사이에 메달려 가시관을 쓰시고 옆구리에 피와 물을 쏟으시기 까지 나를 사랑하신, 이 초청이야 말로 진실이다.” 고 했습니다.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가 아니라,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나이다.”하는 , 오라는 초청에 우리 모두는 청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번 부흥성회도 이렇게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나이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감사함으로 나아와서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시는 온 성도가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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