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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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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70명의 어린 양 같은 제자들을 이리와 같은 세상에 보내시는 예수님의 목자의 심정과 전도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어떤 율법사에게 영생의 도리를 가르쳐 주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일명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도 불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영생의 도리를 배우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으로 살아가는 신자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율법의 첫번째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25-27)

어느 날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율법사는 서기관을 가리킵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대개 바리새파에 속한 성서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베껴 사본을 만들고 그것을 해석하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던 당시 서기관들은 산헤드린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그들의 성서 해석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습니다. 이들은 “랍비(선생)”이라 불리웠으며, 이렇게 랍비로 불리우는 것을 최대의 명예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까다로운 규칙을 만들어 자기들은 지키지 않으며 백성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눅11:46) 그래서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책망을 하셨습니다.(마23:2)
그러나 반면에 영생에 문제로 밤에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요3:1)나 사도 바울의 스승이었던 가말리엘(행5:34) 같은 진실하고 좋은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나아 온 율법사는 예수님께 무슨 질문을 했습니까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을 얻는 문제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파스칼은 말하기를 “인간은 영생을 갈망하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과 짐승과의 다른 점입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영생을 갈망하게 된 이유는 본래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는데 범죄 하므로 영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은 모든 인류의 질문이요 이 질문은 성경이 가르쳐 주는 가장 중심 되는 주제입니다.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줄기차게 흐르는 주제가 바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율법사는 평생 동안 성경을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질문을 했습니까

1절을 보면 예수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랍비라 불리우는 자로서 예수님이 성경에 어느 정도로 정통하고 있는지를 시험, Test를 해 보고자 한 것입니다.
공동 번역 성경에는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했다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사는 은근히 자기의 성경 실력을 과시해 보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이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하면서 은밀히 자기의 내면의 문제를 해결 받고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요한복음 3장에 유대인의 관원이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밤에 은밀히 찾아와서 영생의 문제를 해결 받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본문에 율법사도 이 영생의 문제를 질문함으로서 은밀히 자기의 내면에 해결하지 못했던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서기관으로서 성경에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의 완벽한 지식과 이론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영생에 대한 확신도 영생을 얻은 자의 기쁨도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에는 분명히 율법을 다 행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다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품고 있으면서도 자신도 확신이 없는 영생 문제를 확신 있게 가르쳐야 할 때는 양심이 더욱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예수님께 묻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16절에는 오늘 본문과 똑같은 내용인데 “내가 무슨 선(善)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한 것을 봅니다. 이 율법사는 무엇을 하여야(to do), 무슨 선한 일을 해야 그 공덕으로 영생을 얻을게 아닌가, 즉 행함으로서 구원을 받으려는 율법적인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이런 이 질문을 받은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의 견해가 잘됐다, 잘못됐다고, 구원이란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시고 26절을 보십시오.
아무리 가르쳐도 설명해도 모르는 딸에게 어머니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도 시집가서 애 놓고 어미가 되어 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사에게 지금 아무리 설명하고 가르쳐도 예수님이 말씀한 의미를 깨닫을 수 없으므로 일단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하시며 성경 말씀에 해답이 있음을 증거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평생을 받쳐 연구해 온 성경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느냐고 반문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기다리기나 한 사람처럼 즉시 대답하였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다는 신명기 6:5절에 기록된 말씀을 생각하며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19;18절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사랑 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얼른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과연 서기관다운 명대답을 했습니다.
이 두 말씀은 십계명과 모든 율법의 근본 정신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의 대답을 볼 때, 그는 율법에 정통한 서기관이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대답을 잘 하는 율법사에게 일단은 “네 대답이 옳도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의 대답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정통한 이론을 옳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 이 사람의 근본 문제는 지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28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do this and you live)” 이 말씀을 볼 때, 이 서기관의 신앙 문제는 행함이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는 많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열심히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고 그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11:46)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신앙이 좋은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행함으로 라야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갈3:12) 그러나 이 율법사는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속에 영생에 대한 확신도 기쁨도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다 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습니까
또, 이기적인 인간이 어떻게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나는 내 배고프면 먹고, 내가 자고 싶으면 자고, 아프면 병원에 가고, 약하면 보약을 사 먹고 합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한 몸이라고 하는 아내에게도 자기 몸과 같이 못하는데 이웃을 어떻게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서는 도저히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적당하게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며 지키거나, 지킬 수 없으니 안 지켜도 되는 말씀처럼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합니다. 의롭고 선합니다.(롬7:12) 일점일획도 폐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계명의 말씀을 어겨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한 호리라도 죄가 있으면 결단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마5:26)

그러면 예수님은 왜 행할 수도 없는 율법을 행하면 살리라고 하십니까 이게 바로 시집을 가 봐야 어미 마음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설명해도, 가르쳐도 안되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고 율법을 지키려고 투쟁하다 보면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율법을 행할 수 없는, 율법대로 살 수 없는 죄인이다는 것과 어쩔 수 없이 죄인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몸부림을 쳐보십시오. 치면 칠수록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또,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면 할 수록 자신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긍휼 밖에는 달리 없음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며, 생명에 이르게 하는 진리인 줄 알았습니다.(롬8;10,12) 그래서 말씀을 행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구나고 통탄을 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절규를 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됨을 깨닫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사 바울 자신의 죄를 아들에게 정하시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신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사이도 서기관과 같이 해박한 성경 지식만을 가지면 자기의 신앙이 좋은 것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은 행함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영생의 진리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행하고자 투쟁하면 자신이 얼마나 비참함 죄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또 다른 사람의 연약함도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며 하나님의 긍휼 하심이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함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과 은혜를 덧입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Ⅱ.율법사의 두번째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비유)(29-37)

예수님께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영생하리라”고 가르쳐 주시니 율법사는 율법을 다 지키기 싫고, 지키지 않았음이 드러났으므로 두번째 화제로 돌렸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 오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면 누구를 사랑해야 하며, 누가 나의 진정한 이웃이 되느냐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대체로 말씀에 순종심이 없는 자가 말이 많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이웃에 대한 정의를 내려 주셨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내버려두고 도망을 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35km 약 90리 정도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해발 762m이고 여리고는 해발-250m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은 급경사의 길이요, 또 굴곡이 심하고 길 양가에는 산간 골짜기가 많아 강도의 몰출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5세기에 제롬(Jerome)은 그 길이 “붉은 길 혹은 피의 길”로 불리워지고 있다고 전해 줍니다. 예수님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최근까지도 이 길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적어도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했을 때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통하는 노상에서 빈번히 있는 사건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비유 가운데 강도를 만난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강도들은 그가 가진 물건을 다 빼앗고 옷을 벗겼습니다. 후한이 무서워서 인지 마구 때렸습니다. 죽도록 때렸습니다. 요사이처럼 얼굴을 알았기 때문에 부득불 죽일 수 밖에 없는 것같이 죽도록 때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이 사람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 길로 누가 내려가고 있었습니까

31절을 보십시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그의 직무를 마치고 가지 집으로 내려가고 있어는 지도 모릅니다. 여리고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그 제사장은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된 채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는 제사장입니다. 제사장들은 이스라엘의 귀족들입니다. 또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는 이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았을 때, 틀림없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19;18)”는 말씀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가 왜 피하여 지나갔겠습니까 그는 아마도 그 사람이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려니와”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사장들은 자기 직무를 수행 할 수 없고 정결 예식을 행해야 하고, 희생을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또, 그 제사장 심중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시체에 접촉하면 부정하다는 말씀이 내적으로 싸우다가 이 영전에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편이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갑니다.
또, 31절에 보면 제사장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32절에 레위인도 “이와 같이” 한 것을 보면 레위인도 내려갔습니다.
이들이 신령상으로 신앙이 내려가고 있으니까, 믿음이 없으니까 그냥 지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무슨 일보다 중요한데,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도 못 본 체하는 그는 정죄 받아야 마땅합니다.

제사장이 피하여 지나간 다음 또 누가 왔습니까
32절을 보십시오. 한 레위인이 지나갔습니다. 그는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았습니다.(Came to the place and saw him) 아마 그는 제사장보다 더 가까이 그 사람이 누워 있는 그 장소에까지 와서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대게 레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예배를 섬기는 일을 합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때, 땅을 기업으로 받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 백성을 섬기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바치는 십일조로 생활하도록 명령했습니다.(민18:21-24) 그러므로 이들은 백성들을 섬겨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물며 강도를 만나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은 만사를 제쳐놓고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도 말씀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오히려 복도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이 사람은 말씀을 알기는 알되 행함이 없는 서기관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하시면서 질문한 서기관(율법사) 너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레위인이 지나간 후에 또 누가 왔습니까

33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마리아인이 여행을 하던 중 거기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바벨론 포로 시절 남은 백성과 이곳에 이주해 온 이방 백성과 혼인을 하므로 피를 더럽혔다고 해서 멸시하고 개취급을 했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이방 문화를 받아 드리고 거기 물들었다고 멸시를 하고 상종치도 않았습니다.(요4:9) 그래서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에도 올라가지 못하여 그리심 산에 별도로 성전을 짖고 거기서 예배했습니다.(요4:4-9) 그러나 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나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33-35절을 보십시오.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 메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튼날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을 위해 물질도 쓰고, 시간도 드리고 수고로움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설명하신 후에 율법사에게 무슨 질문을 하셨습니까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를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예수님은 그에게 스스로 판단하도록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에게 어떤 투쟁 방향을 주셨습니까 “가서 너도 이와 같이하라”고 하십니다. 이론적으로 이웃이 누구냐 따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처럼 실천하라고 방향을 잡아 주셨습니다.

율법사는 예수님께 누가 나의 이웃이냐고 물었습니다만, 예수님은 누가 이 강도를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도 여러분에게 이와 같이 강도를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의 개념이 어떠합니까
이웃이란
같은 혈통을 타고난 사람이 아닙니다.
같은 민족이 아닙니다.
같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이웃이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이웃입니다. 이분들이 내 이웃입니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날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은 모두 나의 이웃입니다. 이 나의 이웃된 이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 같이 자비를 베푸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하라”는 말씀을 붙잡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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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0. 16.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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