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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자와 나사로 비유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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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우리는 불의한 청지기가 “재물을 쓰는 지혜”에 대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들어서 재물을 지혜 있게 써야 함을 말씀하시니까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14) 했습니다.
이렇게 비웃는 바리새인들을 상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유명한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을 보면서 이 땅에서 재물로 영원한 친구를 사귀고 그 친구들을 위해 사용하는 지혜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한 부자와 나사로의 현실(19-21)

우리는 예수를 믿고 축복을 받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부자가 되어서 문제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 “한 부자가 있었는데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했습니다. 여기에 한 부자는 이름이 없고 “한 부자”라고 하고 있는데 한 부자라고만 이름이 된 것은 그 이름이 생명록에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farrar)
전설에 의하면 그 이름이 디베스(dives)였다고 하며 또 다른 전설은 “피네에스”(phinees)라고 합니다.
한 부자였던 디베스는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의복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이었습니다. 전자는 겉옷이고 후자는 속옷인데 이 자색 옷은 조개 피로 염색한 옷으로 아주 비싼 옷입니다. 당시 왕이나 귀족들이나 입었던 옷입니다. 고운 베옷은 애굽 산의 세마포(창41:42, 출26:1,36)인데 이 베옷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두 배나 더 비쌌다고 합니다. 그 좋은 옷을 해 입고 날마다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고 연락을 즐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물질로 날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만 사용했습니다. 육신적인 일에만 썼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어떤 여자들은 팔자가 좋아 고기를 뜯고 앉아 있고, 시집을 잘 가서 화투나 하는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도 삶이 고달파서 넋두리로 내 뱉은 말이겠습니다만, 제 속을 “잠시 후에 보라”고 했습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을 했습니다.
“나사로”라 이름한 거지는 헌데를 핥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잣집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21,22) 했습니다.
여기 나사로는 “하나님이 도우심”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엘르아살>에서 유래된 이름인데 베다니에 살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와 같은 이름입니다.(요11:1)
부자의 이름이 없이 “한 부자”라고 한데 비하여 여기 거지였던 “나사로”는 처음부터 그 이름이 밝혀진 것이 대조적입니다. 이 비유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재의 인물이었다는 주장이 고대 교부들 간에 널리 유포되었습니다.
이 거지 나사로는 헌데를 앓으며 부자의 대문에 누워 있었습니다.
지금도 중동 지방에는 거지들이 부자의 대문간에 누워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예수님의 시대 때는 포크나 나이프나 냅킨이 없었습니다. 음식은 손으로 먹는데 아주 부유한 집에서는 두껍게 썬 빵 덩어리에다 손을 닦았으며 그 후 그 빵은 내어 버렸습니다. 나사로는 바로 이러한 빵을 얻어먹기 위해 부자 디베스의 대문간에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거지 나사로는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간에 누워 부장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러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습니다. 나사로는 개와 같이 부자의 상에서 던져지는 빵 덩어리를 얻어먹게 되었으니 개처럼 되었고, 그것도 넉넉히 먹을 수 없으니 기력이 쇠하여 헌데를 핥는 개조차도 막아낼 수 힘이 없었습니다.

Ⅱ. 부자와 나사로의 사후(22-26)

그런데 이들이 어느 날 둘 다 죽었습니다. 죽은 이 후의 이들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거지였던 나사로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육신적으로 조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의 조상이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며(막12:26, 행7;32)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약2;23)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 있는 것으로 믿었습니다.(요5:56,58) 그래서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있는 아브라함 품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한 부자였던 디베스는 죽어서 장사되었습니다. 디베스에게는 “천사들에게 받들려”가 없고 “장사되매”라고 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죽었을 때 성대히 장례식은 치러졌고 땅에 잘 안장되었으나 나사로의 몸은 아무렇게나 내어 던지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영은 천사들에게 받들려 낙원에 들어갔고 부자는 화려한 장례식과 동시에 땅속에 잘 안장되면서 그의 영혼은 음부에 내던져지게 되었습니다.
음부는 헬라어로 게헨나인데 범죄한 자들이 들어갈 심판의 장소로 보면 되겠습니다. 여기는 심한 고통이 있고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곳이요,영원히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며 시원한 물 한 방울을 먹을 수 없는 곳입니다. 한 부자였던 디베스는 이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왜 이곳으로 갔을까요
그는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1) 나사로가 대문 간에 있을 때 연회 하는데 지장이 된다고 “나가라”고 내쫓지 않았습니다.
2) 또, 자기 식탁에서 나오는 음식 찌꺼기를 받아먹는 것을 저지하지 않았습니다.
3) 나사로를 더럽다고 발길로 걷어차지도 않았습니다.
4) 잔치를 하면서 귀한 손님이 들락거리니까 저기 한 쪽에 가라고 무시한 적도 없습니다.
5) 그는 고의적으로 나사로에게 한 번도 몹쓸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6) 그는 유대인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기 때문에 본문에 세 번이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24절, 27절, 30절에 불렀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 부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지옥에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 이 비유는 지난 불의한 청지기가 재물을 지혜 있게 쓴 것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비웃는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바르게 쓰지 못하고 자신의 사치와 향락에만 상용한 자, 먹고 마시고 입고하는 일에만 사용한 자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부자는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하면서 가난한 형제를 외면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주신 물질을 가지고 자기 일에만 사용을 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좋은 옷을 해 입고 육신적인 일에만 재물을 사용했으므로 물 한 방울 건너 받을 수 없는 음부로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헬라 신화에 탈타루스의 비극이란 것이 있습니다.
탈타루스는 제우스의 비밀을 폭로한 죄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는 지옥의 호수에 결박되어 바로 턱 밑에 맑은 물을 담은 그릇이 있고 머리 위에는 주렁주렁 탐스런 과실이 나무 가지에 달려 있습니다. 목마르고 배고픈 탈타루스가 물을 마시려고 물 그릇에 가까이 가면 물을 담은 그릇은 멀리 도망을 가고, 과실 가지도 입에 닿을 듯 말듯 하다 멀어져 갑니다. 그래서 영원히 기갈에 허덕이는 형벌입니다.

오늘 본문에 부자는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자기만을 위해 쓰다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은 이 물질을 어떻게 관리하고 써야 합니까
어떤 분은 옷 하나를 사는데 몇 십 만 원, 몇 백 만원씩 주고 사 입는 것은 보통으로 여기고 자기 자식이나 가정의 행사를 위해서는 보통 명 백, 몇 천 만원씩 쓰면서 자랑을 합니다. 어느 한 날 어느 분이 옷을 사 입고 몇 백 만원 짜리라고 자랑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별로 좋은 몸매도 아니면서 옷만 좋은 것을 입으면 무엇합니까 그게 그것이지....

예수님은 이 물질을 가지고 영원한 친구 예수님을 사귀는데 쓰고, 예수님의 친구,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라고 하셨습니다.
마태 7: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한 부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믿었기에 아버지여!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하며 오히려 거지 나사로보다 하나님을 더 잘 찾았습니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자였습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이렇게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부자는 음부에서 불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했습니다.
현세에서는 나사로가 부자의 상 끝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사모하였으나 내세에는 부자가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서 떨어지는 물을 사모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물을 달라고 애원하는 부자에게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했습니다.(25) 또, “이뿐만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유대교의 랍비들에 의하면 낙원과 음부(게헨나)간의 거리는 담 하나 혹은 한 뼘의 길이 도는 손가락 하나의 거리라고 합니다. 이런 이 한 뼘의 거리를 눈 앞에 두고 건너 올 수도 없고, 갈 수도 없고 그 좋은 낙원의 과실을 한 뼘 앞에 두고 먹지 못하는 이 관경입니다.

Ⅲ.부자의 간구(27-31)

부자는 그 고통 속에서 한 뼘 앞에 있는 거리에서 물 한 방울도 얻어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자 아직도 세상에 살아 있는 형제들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28절을 보십시오.
내게는 형제가 다섯 있는데 나사로를 그들에게 보내어 이 지옥의 고통을 증거 하여 이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당하는 고통을 전하면 분명히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떻게 대답을 하셨습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찌어다” 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는 하나님의 종들이요, 그들이 전한 말씀은 곧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이 부자는 또 다시 사정을 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떻게 대답을 합니까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31)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들의 증거와 성경 말씀을 듣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은 자가 살아와도 역시 믿지 않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다시 살아왔다 해도 그들은 미쳤다고 쫓아냈을 것입니다.
가장 확실한 믿음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증거한 성경, 이 신구약 66권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살아서 믿는 사람들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 후의 세계를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분명히 낙원과 음부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은 분명히 음부로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믿지 않는 분이나 믿지 않는 형제가 있다면 꼭 전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가지고 주와 복음을 위해서 쓰되 우선적으로 쓸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이상한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전화는 은행에서 걸려 온 전화였습니다. “당신 앞으로 어떤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1440만원을 예금해 놓았으니 이 돈을 찾아가 오늘 반듯이 다 쓰십시오”
조건은 없습니다. 그러나 유익하게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리둥절하게 하루를 보내다가 1440만원을 써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튼 날 아침에 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당신 앞으로 1440만원이 도 입금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예금된 돈은 쓰지 않았으므로 그 주인이 도로 찾아갔습니다. 그 분이 말하기를 오늘 찾아가서 그 돈을 찾아 쓰면 당신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고 전해 주었습니다.
두 번째 날은 조금 미심쩍어 하면서도 이 사람은 은행에 가서 그 돈을 찾아다 썼습니다. “에이 기분이다”하면서 기분 좋게 써 버렸습니다.
그 이튼 날 아침에 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또 찾아 썼습니다. 이런 일이 매일 같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매일 매일 쓰면서 기분은 좋았지만 이 사람의 마음 속에 자꾸만 불안이 생깁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것이 닥 멈추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불안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루 24시간을 주셨습니다. 24시간을 분으로 계산하면 14440분이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맘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그것을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24시간을 공평하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통장에 송금이 안됩니다. 통장에 하나님이 입금을 시키지 않는 날이 옵니다. 그 순간이 죽음의 순간입니다. 그 죽음의 순간을 넘어서고 나서 주인이신 하나님이 통장을 가져오라 해서 어디에 무엇을 하느라 사용했느냐고 보고하라고 하십니다. 어디에다 많이 사용합니까
오늘 여기 부자는 좋은 옷을 사 입고, 날마다 잔치를 베풀고, 놀고먹는데 그 돈을 다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음부에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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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 26. 주일 낮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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