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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지막 시대의 비전 (계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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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 지구상에는 전세계에 유토피아 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낙관론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인간의 이성(理性)에 대한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기술 문명이 눈부시도록 발달하면서, 이대로 조금만 더 가면 질병이나 전쟁이 전혀 없는 완벽한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생각이 유럽을 중심으로 해서 퍼져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하나님이 쓰시던 소수의 예언자들은 이 평화 의 시대는 오래가지 않는다. 인간의 부패성이 치유되지 않는 한 이상향은 이루어질 수 없다. 지금 큰 재앙이 우리의 눈앞에 다가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시대에 비관주의자로 정죄되었습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머지 않아 다시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을 낙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전쟁의 원인은 결국 사람입 니다. 인간의 악함과 이기심과 욕심이 치료되지 않는 한 역사는 결코 평안할 수 없다는 교훈을 이 두 차례에 걸친 세계 전쟁을 통해서 사람들은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비관주의라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비관 주의적 경고를 귀담아 듣고 다가오는 역경의 미래를 준비하는 슬기 를 가질 수만 있다면, 비관주의는 오히려 역사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볼 때 조선 시대에 이율곡이란 분이 그 시대의 비관주의자였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흥청망청 놀면서 평화를 구가하고 있을 때, 율곡 선생은 머지 않아 이 나라에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 왜구의 침략이 있을 것이다라 고 예언하면서 소위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율곡 선 생의 이런 이야기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다가 임진왜란이 터지지 않았습니까? 율곡 선 생의 충고를 잘 받아들였다면 그런 아픈 역사를 만들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경에 나타난 예언은 상당히 비관주의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앞으로 심판의 때가 온다, 진노의 시대가 온다, 마지막 환난의 시대가 온다는 메시지가 주 축을 이룹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인간에게 절망을 안겨 주기 위한 비관주의가 아닙니다. 성경학자들은 이것을 창조적 비관주의 혹은 적극적 비관주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다가올 심판의 시대를 내다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또 지혜롭게 준비하도록 할 수 있는 메시지이 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환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예수님 재림 직 전에 마지막 환난의 때가 있을 것을 성경은 예언합니다. 이것은 전무후무한 특별한 환난의 때입니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그 환난의 기간이 문자 그대로 7년이 될 것이라고도 하고 7년이 상징하는 어떤 일정한 기간일 것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이 큰 환난의 때를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 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10).

그런데 사실 이러한 대환난에 대해서는 구약성경에서부터 예언되었습 니다.

그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大君)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 이며 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 을 것이라(단 12:1).

 마태복음에서 이 특별한 환난의 때를 예언한 구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 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 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 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마 24:21,22).

여기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는 단어는 영적인 구속(救贖)이라 는 의미보다는 구출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악한 환난의 때를 단축시켜 주지 않으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 다. 그런데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성도들) 때문에 그 기간을 단 축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그런 환난의 때가 역사의 마지 막에 다가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3장 19,20절 에도 똑같은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은 여섯째 인봉과 일곱째 인봉 사이의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한 인봉이 남아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 지막 환난의 때입니다. 그 환난의 때 직전에 나오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7장의 비전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시대를 앞두고 하나 님께서 성도들에게 보여 주신 비전으로서, 일종의 약속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과(科)의 제목을 「마지막 시대의 비전 」이라고 정한 것도 이런 맥락 하에서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불 경건한 인류의 세속 역사에 대한 마지막 심판의 때를 앞에 두고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보여 주신 비전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비전 하나님께서 이 환난의 때에 성도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환난의 때가 오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휴거될 것이라고 믿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런 생각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관한 한 독단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 험한 일입니다. 저는 그런 해석이 미국의 실용주의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하면 고생하기 싫어서 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 한다면, 비록 그런 환난의 때가 온다고 할지라도 성도들은 두려워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7장 1-8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印)을 맞는 장면이 등 장합니다. 열두 지파에서 각각 일만 이천씩 모두 십사만 사천 명 이 인을 맞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이 이스라엘이 누구냐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릅니다. 성경 자체가 이들 십사만 사천 명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석상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 다.

 이 부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십사만 사천 명이 인을 맞으며, 환난의 시대에 구원받고 보호받고 복음을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 부분을 영적으로 해석하여서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인 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근거로 삼고 있 는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 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 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 2:28,29)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義)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갈 3:6,7).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 6:16).

마지막 구절 같은 경우는 문맥상 십자가를 통해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이스라엘로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나간 시대의 학자들은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를 다음과 같이 풀 었습니다. 구약의 열두 지파와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숫자를 곱하 면 144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천이라는 숫자 가 항상 많다는 의미를 가졌는데, 144에 천을 곱해서 144, 000이라는 숫자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수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여기에서는 마지막 환난의 시대를 앞두고 그 시대에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쓰임받게 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을 상징한다고 생각됩니다.

 저도 이 숫자가 영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을 의미할 가능 성이 없다는 데는 다음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 이 말씀을 기록할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열두 지파라 는 의미가 이미 없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갈 때 열 지파가 끌려갔는데, 그들이 포로 생활 하는 동안에 지파 나 계통의 의미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남아 있던 유다와 베냐민 지파도 A.D.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황제가 이스라엘 백성을 끌어감으로써 별 의미가 없게 되었고, 그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원히 디아스포라(흩어짐)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둘째, 여기에 나오는 열두 지파는 구약에 나오는 열두 지파와 그 서술 방법이 많이 다릅니다. 우선 7절에 보면 레위 지파가 나 오는데, 구약에서는 열두 지파를 계수할 때 레위 지파를 포함시키 지 않았습니다. 또 구약의 열두 지파에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들 어가는데, 여기에서는 에브라임이 빠지고 요셉이 들어갑니다. 그리 고 여기에서는 단 지파가 없어졌다는 것도 구약의 경우와 다릅니다 . 여기서 사라진 단 지파가 한국의 단군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 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국의 몰몬교도들이 그 없어진 단 지파 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단 지파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지파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들을 제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강조하지 않은 것을 연구하느라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듯합니다 . 마지막으로 서술 방법 면에서 다른 것은 구약의 열두 지파를 기록할 때는 르우벤 지파가 제일 먼저 나오는데 여기에는 유다 지 파가 먼저 나온다는 점입니다. 왜 장자인 르우벤이 아닌 유다 지 파를 강조했을까요? 유다 지파의 후손 중에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 입니다. 즉, 이것은 단순한 이스라엘의 혈통적 지파가 아니라 하 나님의 구원 역사를 중심으로 한 계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직전의 시대는 마지막 환난의 시대이고 마지막 심판 의 시대입니다. 심판이 있는 곳에는 항상 하나님의 구원이 있습니 다. 이 마지막 환난의 때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기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마지막 구원의 시기가 될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마지막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가장 소중하게 들어 쓰실 언약의 백 성들이 바로 십사만 사천입니다.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십사만 사천 명이 상징하는 특정한 무리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 지막 시대에 구원의 역사를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마에 인침을 받았습니다. 인을 치는 것 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소유의 개념과 보호 혹은 보증의 개념입니다. 인을 치는 것이 단순히 하나님의 소유 라는 의미의 구원을 상징하는 것만은 아닌 것이 7장 3절을 볼 때 드러납니다.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 치기까지….

하나님의 종들에게 인을 친다고 했으니까 이것을 구원의 의미로만 적용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침이 이 환난의 시대에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이 되었다면, 앞으로 우리 시대에 어떤 어려움이 올 것인가에 대해 별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함께하신 다면 그리고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신다면 무 슨 시대가 오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 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그 일만 하면 됩니다.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일수록, 고통이 올 때 그 고 통 속에서 어떻게 하면 편히 지낼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 니라 그 고통의 시대에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자신의 사명을 더 생각합니다.

 여기 마지막 환난의 시대에 하나님이 주시는 첫번째 비전이 있습니 다. 하나님이 특별히 사용하실 하나님의 특별한 종들, 마지막 역 사를 감당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쓰시기 위하여 보호를 연장하신 하 나님의 종들의 비전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신다는 비전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특별히 보호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7장 3절에 특별히 하나 님의 종들이라고 한 것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이것은 목사나 전 도사에게만 해당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 해서 하나님께서 쓰임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하나님 의 종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고 환난의 때에도 보존하실 것을 보장하시는 이유, 주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이유 , 주께서 우리를 불러가지 아니하시고 아직도 살려 두시는 이유, 그것은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앞 과(科)에서 요한계시록 6장의 구조는 마태복음 24장의 구조 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고 했습니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전쟁과 지진이 발생하고 그로 인한 죽음이 있고 순교자들이 등장하 면서 역사는 서서히 마지막 환난의 때를 향해서 전진해 갑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예수님 재림 직전의 상황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 라 예수님이 처음 오셨을 때부터 재림하실 때까지를 다룹니다. 예 수께서는 큰 환난의 때가 올 것을 예언하면서 동시에 역사가 환난 의 때를 향해서 가까이 갈수록 복음 증거의 역사가 땅 끝까지 이 를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요한계시록 7장의 십사만 사천은 바로 이 환난의 때를 위하여 준 비된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때에나 하나님의 종들을 준비하십니다. 아합의 시대와 같이 역사적으로 어두운 때에도 하 나님은 내가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내 종 칠천 명 을 숨겨 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서 9장에 보면, 에스 겔 시대도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이마에 표를 받은 사람들을 특별히 따로 준비했으니 그들을 제외 하고 심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남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역 사를 계승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나 이런 하나님의 종들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들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한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그들 은 모두 세상에 영합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세상은 계속 우리에게 세상 사람처럼 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과 같아지려고 애쓴다면 세상에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겠습 니까? 그리스도인들의 무기는 그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 입니다.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를 부러워하고 주목합니다.

저 사람은 내가 갖지 않은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 저 사람은 다르다. 왜 다를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매력입니다. 세상과 영합하기를 거절한 사람,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 생애를 던져 버린 사람,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의 마지막 때를 밝히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쓰심의 비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추수하신다는 비전 요한계시록 7장은 크게 두 문단으로 나누어집니다. 1-8절까지는 십사만 사천의 인 맞은 사람들의 비전이고, 9절부터는 큰 무리 에 대한 비전입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 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 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이 큰 무리가 누구입니까? 저는 이들이 하나님의 종들이 전한 복 음을 듣고 이 마지막 시대에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것이 추수의 비전입니다. 각 족속, 각 백성, 각 방언, 세계 방방 곡곡에서 마지막 시대에 복음의 소식을 듣고 그것을 통 해서 구원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큰 소리로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 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그들은 이미 하나님 앞에 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열납되어 흰 옷을 입고 있습 니다. 그들은 환난에서 나온 자들로서,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 받은 각 나 라, 각 족속의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섬기며 하나님의 위로와 상급을 받 고 있습니다.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니라(16,17절).

 왜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십사만 사천과 수많은 무리들을 보여 주셨습니까? 그 대답은 한 가지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본 자만 이 앞으로 이 땅에 다가올 환난을 이겨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어떤 폭풍우를 만나도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 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전하여 각 나라 각 족속 각 언어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와 하늘 나라의 영원한 주 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한 번만 보았다면 내 앞의 무슨 환난과 어려움인들 상관하겠습니까? 우리의 목적과 소원은 다가오 는 환난에서 어떻게 피할 것인가가 아니라 이 환난 속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입니다. 주님의 지상 명령을 수행하는 일입니 다. 지상 명령에 순종하여 마지막 복음을 전한 결과로 각 나라, 각 족속, 각 언어의 사람들이 어느 날 주님의 보좌를 옹위하고 구원의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의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는 하나 님의 영광스러운 비전! 이 비전을 보았다면 바람아 불어라. 푹 풍우야 오너라. 환난아 와라. 나는 주님의 복음만 전하련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 시대의 비전은, 하나님께서 복음 앞에 헌신하고 복음을 전 하기를 원하는 주의 종들을 보호하실 것이고 그들을 사용하실 것이 며 그들을 통해서 각 나라 족속 가운데 구원받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비전을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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