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순교자와 피 (계 06:9-11)

첨부 1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원치 않는 불청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언제나 환영받는 귀빈, VIP가 있습니다. 사람사는 세상은 이렇듯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갑니다. 그러나 천국은 불신자 즉 불청객은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환영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이 다 들어가는 그 천국에서도 언제나 VIP로 환영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일까요 바로 많은 영혼을 주께로 돌아오게 한 전도자들과 주를 위해 생명바친 순교자들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3)”
스데반이 순교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위하여 순교하는 스데반을 앉아서 맞이할 수 없어서 일어서서 그를 환영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이 상과 면류관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충성한 분량만큼, 시간만큼 상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상을 바라보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순교자들은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드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남다른 대우를 받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순교자들은 천국에서 남다른 다섯가지 특권을 부여받게 됩니다. 오늘은 그 다섯 가지의 자격들을 살펴 보면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제단 밑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계시하신 광야의 성막은 하늘나라 성막을 모델로 한 것입니다. 성막은 모든 기구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지만 각각이 다 성도들의 신앙의 내용과 수준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9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계 6:9)”
성막에서 번제단은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는 곳입니다. 순교자는 주님을 위하여 피를 흘리고 생명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신학자 이레니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순교자들은 제단 아래서 편히 쉬면서 영광의 자리가 마련될 때까지 인내의 정신을 연마하고 있다. 부활 때까지 머물다 그들의 영육이 재결합할 때 순교자들은 영육을 갖추어 하나님의 제단으로 나올 것이다.”
성막 전체에서 피가 제일 많은 곳이 제단입니다. 순교자들은 피가 제일 많은 제단에 모여 하나님과 대화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피를 흘렸기에 대속의 피가 흐르는 제단 아래에 순교자들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입신한 상태에서 지옥을 보니 손으로 범죄한 사람은 손으로 범죄한 사람들끼리 모여 고통을 받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발로 범죄한 사람은 발로 범죄한 사람들과 더불어 모여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떡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한 사람들은 떡상 밑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빛된 생활을 한 성도들은 금촛대 앞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한 사람들은 분향단 앞에 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갈 자리는 과연 어디입니까

4.19 희생자 묘역에는

4.19 희생자만 묻히게 되어 있습니다. 광주에 가면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희생자 묘역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묻힐 수 없습니다. 80년

5.18 당시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희생된 사람들과 그후 독재 정권에 항거하다 희생당한 사람들이 묻혔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일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당당히 우리가 가서 영원토록 살 수 있는 처소를 확보해야 합니다. 천국의 성소에 여러분이 갈 자리를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2.순교자는 큰 소리칠 자격이 있습니다.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계 6:10)”
하나님 앞에 큰 소리 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세에 되어질 일을 계시하실 때 요한은 두려워 그 발 아래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계 1:17) 요한은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였습니다. 그도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두려워 죽은 자같이 떨었다고 했습니다. 아무런 잘못없이 자녀와 재산을 잃고 육신의 고통을 겪으며 하나님을 만나 이 고통의 원인을 물어 보리라 했던 욥도 하나님 앞에서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욥 40:4-5)”
아무도 주님께 떳떳히 큰소리 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는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마카비 시대에 최고로 많은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성도를 잡으면 무자비하게 처형하던 시대였습니다. 7명의 자녀와 그 어머니가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가마솥에 기름이 펄펄 끓고 있습니다. 로마 장교가 큰아들을 잡고 말합니다. “지금이라도 예수를 부인하면 너는 살 수 있다” 큰 아들은 어머니를 바라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주님을 바라보며 장렬하게 죽어라”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로마 장교는 병사는 시켜 큰 아들의 열 손가락을 도끼로 찍었습니다. 피가 철철 흘러 내렸습니다. “이제라도 예수를 부인하면 너는 살 수 있다” 다시 어머니를 바라 보았습니다.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순교하라”
잔인한 로마 병사는 이번에는 열 발가락을 잘랐습니다. 팔뚝을 자르고 다리를 잘랐습니다. 그리고 몸뚱이는 가마솥에 던져졌습니다. 일곱 자녀가 모두 그렇게 죽었습니다. 자신이 순교 당하기 전 어머니는 하늘을 우러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상에 한 개의 제단을 쌓았지만 나는 일곱개의 제단을 쌓았다고 하나님께 말씀해 주십시오”
모두가 아무말 못해도 순교자는 큰소리 칠 수 있습니다.

3.피값을 신원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계 6:10)”
“우리의 원통함을 풀어 주십시오. 언제 이 원통함을 풀어 주시겠습니까” 이 말은 언뜻 들으면 원수를 갚아달라는 한풀이 기도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이나 스데반, 그리고 사도들은 핍박자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복수를 외치고 있는 저들의 외침은 악의 화신인 적그리스도의 멸망을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자신들을 죽이는 원수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지 심판에서 면제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믿고 회개치 않으면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나 핍박자들에게 심판을 면제해 달라고 기도할 필요도 없고, 면제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역사가 터툴리안은 우주의 영원한 심판을 기대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너희는 구경거리를 좋아하나 인류 최대의 구경거리는 나를 핍박하던 사람들이 심판받는 장면일 것이다. 그렇게 많은 거만한 왕들과 멋있는 신들이 암흑의 바다 속에서 신음하고 주의 이름을 박해했던 그 많은 장관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불태웠던 것들보다 더 맹렬한 불속에서 녹아지고 현명한 철인들이 그들의 꾀임에 빠진 학자들과 더불어 뜨거운 불속에서 부끄러워 하고 저 유명한 시인들이 그리스도의 재판석에서 떨고 있고 많은 비극 배우들이 남의 고통보다 한층 더 자신들의 고통을 표현하고 있고, 많은 무리들이 불꽃 속에서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감격하고 웃고 감탄하랴!”
당당하게 웃고 즐기며 성도들을 순교시키던 무리들을 벌하고 자신들의 억울함을 신원해 달라고 기도할 자격을 그들은 갖게 됩니다.

4.흰두루마기를 입을 자격이 있습니다.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 6:11)”
흰 두루마기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뜻이 있습니다.
①생명문에 들어갔다는 표시입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②믿음으로 승리한 자들이 입는 옷입니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계 19:14)” 순교자인 루터 포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무거우나 단맛이 있습니다. 새에게 날개가 무거운 것이나 그것 때문에 날고 배에게 돛이 무거운 것이나 돛 때문에 배가 갑니다”
신자에게 십자가는 짐이 되지만 이 십자가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새에게서 날개를 자르면 날지 못합니다. 돛을 없애면 배가 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가 있기에 성도는 승리합니다.
③주님의 사랑을 받는 신부가 입는 옷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19:7-8)”

5.잠시 동안 쉼을 얻을 자격이 있습니다.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 6:11)”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립니다. 아직은 순교자가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지금까지 들어온 선교사의 38,000명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서 일한 기간을 보면 짧게는 한달부터 평생을 일한 사람까지 다양합니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첫발을 디딜 때 그들의 평균 연령은 27,3세였습니다. 그들의 순교의 피값으로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1000만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순교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순교자의 수가 차면 세상의 종말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순교자의 수가 얼마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수가 차면, 그 때가 이르면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위대한 순교의 대열에 여러분이 동참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순교는 죽음으로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삶으로 순교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산 순교가 죽는 순교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죽는 순교는 순간이면 됩니다. 그러나 산 순교는 평생이 걸립니다. 순교적으로 사는 일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전하다가 목이 잘리고 감옥에 가고 매맞는 것만이 순교가 아닙니다. 순간순간 그가 시키는 것이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순교하는 자세로 기도합시다. 순교하는 자세로 찬양합시다. 순교하는 자세로 말씀을 전합시다. 순교하는 자세로 복음을 전합시다.
주여, 순간 순간을 순교하는 자세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할렐루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