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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금신상과 타오르는 용광로 (단 03:)

첨부 1


본 장에는 각종 고관들의 직책과 다양한 악기들이 지루하게 나열되어 있습니다. 방백, 수령, 도백, 재판관, 재무관, 모사, 법률사, 각 도 모든 관원, 그리고 나팔, 피리, 수금, 삼현금, 양금, 생황 등이 거듭해서 언급된 까닭은 그런 이방의 우상숭배 의식이 지닌 장황스럽고 요란한 측면을 비웃기 위한 의도적인 서술입니다.
앞 장들에서는 소수의 남은자들이 적대적인 환경에서 하나님을 위해 담대히 살아가는 모습이 묘사되었습니다. 유다는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징벌을 받게 되었지만 소수의 남은자들은 하나님께 마음을 바쳤습니다. 이 남은 무리들은 타협의 유혹을 받았지만 과감히 부리치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을 때 기적적인 능력으로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본문에는 또 하나의 놀라운 구원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 진실된 마음을 바치는 소수의 무리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게 된다는 것을 본문은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줍니다. 본 장의 말씀은 이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는 신자들에게 커다란 격려와 중요한 교훈들을 줍니다.
본 장에는 한 가지 의아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니엘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 까닭을 모릅니다. 다니엘이 당시에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본문 상으로는 알려진 내용이 없습니다. 물론 많은 추측들이 제시되었지만 모두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이번에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무대의 주인공들로 등장합니다. 지금까지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수차 언급은 되었지만 이들은 뒷켠에 서 있고 다니엘이 늘 주역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니엘이 아닌 그의 세 친구들의 참 모습을 보게 됩니다.
3장은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자를 대담하게 무시해 버린 사건을 극명하게 묘사해 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을 자기들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경건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실증해 주는 모델입니다. 3장은 또한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을 변호하기 위해 직접 개입하신 사실도 지적해 줍니다.
본 장에서 우리의 시선이 집중되어야 할 부분은 기적적인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적을 믿는 데 어려움이 없을 줄 압니다. 일단 하나님이 전능하시며 자기 아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것을 믿으면 기적은 우리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본 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가슴이 뛰게하고 하나님께 저절로 경배의 고개를 숙이도록 합니다. 그렇지만 이 기적이 우리 시선의 초점을 모으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본 장의 중심측은 세 명의 젊을 신자들이 유혹을 받고도 이를 용기있게 거절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비록 자신들의 목이 무참히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세속인들의 길을 택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사전에는 ‘타협’이라는 어휘가 없었습니다. 그릇된 것은 그릇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리 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죄를 용납하지도 않고 죄와 대화를 하지도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방 나라에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살 수 있었던 빛나는 신앙의 모범들이었습니다. 적대적인 환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진실할 수있으려면 누구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지나간 길을 통과 해야 합니다.
본 장은 하나의 옛 수수께끼를 상기케 합니다. “무적의 힘이 부동의 상대를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여기서는 부동의 상대가 셋이나 됩니다! 그럼 먼저 무적의 힘을 생각해 보고 나서 부동의 상대를살펴 보겠습니다. 그 다음 이 둘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일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무적의 힘

말할 나위없이 무적의 힘은 느부갓네살 왕입니다. 1절에서 7절까지만 보아도 이 사실은 자명해집니다. 본문은 하나의 형상을 세우는 기사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정확하게 언제 이 형상이 건립되었는지 모릅니다. 본문에 저혀 언급되지 않은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을 ‘금머리’(2:38)라고 설명한 직후일는지도 모릅니다. 왕은 자신이 금머리에 해당한다는 말에 자부심을 느끼고 자신의 꿈에서 본 형상을 그대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바벨론과 시리아의 군주들은 스스로의 영예를 위해서 형상들을 세우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이 형상을 세우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이 형상을 세운 것은 별난 일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이 형상은 왕 자신의 모습이었을 것이 거의 확실하며, 자신 뿐만 아니라 자기 신들도 겸해서 경배하도록 세운 우상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우상을 주조하는 데 드는 비용은 막대했을 것입니다. 이 우상은 대좌(臺座) 위에 금으로 도금을 해서 올려놓았는데 높이가 27미터인 반면 너비는 불과

2.7미터에 불과하였습니다. 이 비율은 매우 불균형한 듯하지만 바벨론 조상(彫像)들의 특징입니다. 따라서 느부갓네살 왕이 무척 키가 크고 또한 매우 말랐던 체격의 소유자라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이 거대하고 흉측한 형상은 두라 평지에 세워졌습니다.
여기서 ‘평지’로 변역된 아람어는 산들 사이에 끼인 들판을 가리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형상은 산들로 둘러싸인 일종의 천연 공간에 설치된 셈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식을 올릴 때에 멀리서도 들을 수 있는 음향 효과가 있었을 것이고, 햇볕에 의해 금으로 도금한 형상의 머리 부분이 먼거리까지 반사되었을 것입니다.
2절과 3절에는 우상의 낙성 예식이 기록되어 있는데 바벨론 제국 전역에서 갖가지 직책을 가진 고관대작들이 모두 참석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당시에는 그런 대행사가 없었을 것입니다. 운집된 백성들의 수효는 헤아릴 수가 없고 화려한 의식들은 그 어떤 대관식보다도 더욱 휘황찬란했을 것입니다.
4절에는 한 전령관이 수많은 백성들 앞에서 ‘크게 외쳐’왕의 칙령을 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인종과 언어가 상이한 각 나라 백성들이 모인 바벨론 제국의 이 초대형 의식에서 느부갓네살 왕의 절대적인 명령은 누구에게나 적용되었습니다.
본 의식에는 5, 7, 10, 15절에서 열거된 악기들로 구성된 대규묘의 오케스트라가 동원되었습니다. ‘모든 악기’라는 어구는 페르시아 말인데 오케스트라에 페르시아의 악기가 동원되었음을 시사합니다. 피르시아는 바벨론의 이웃이었습니다. ‘나팔’과 ‘피리’는 셈족의 악기엔데 포로가 된 유대인들이 불었던 것 같습니다. ‘수금’, ‘삼현금’, ‘양금’은 그리이스의 악기입니다. 당시 바벨론은 그리이스와 100여 년 동안 통상을 해왔기 대문에 그리이스의 악기명을 그대로 사용한 듯 합니다. 전령관의 지시는 이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면 누구를 막론하고 느부갓네살 왕의 형상에 엎드려 절하라는 것이었습니다.
6절의 경고는 살벌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라 평지에 세운 우상이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신들의 명예를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우상에 경배하지 않는 것은 왕의 칙령을 어기는 불충이요, 반역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은 뜨거운 용광로에 던져지는 끔찍한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바벨론 제국에 사는 대부분의 신민들은 비록 정복을 당한 나라에 속한 백성들이었지만 왕의 형상 앞에 절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신들이 우리 신들보다 더 강한 것은 틀림없어, 그러니까 우리들이 패전을 하고 만 것이겠지, 그러니 별수없이 바벨론 신들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여주어야 해.’
포로 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에게까지도 그런 경배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상숭배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은 그들의 악행을 준엄하게 꾸짖었지만 냉대와 무시만 당할 뿐이었습니다. 우상숭배는 이제 유대인들의 핏속에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금 우상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일을 놓고 얌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여러 해 동안 행해 오던 일을 구태여 거부하고서 생명을 잃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왕의 칙령은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기에 당연히 준수될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남은자들은 거짓 신들을 경배하는 일은 결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십계명의 첫째 계명이 대단히 중요하였습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차대한 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찍이 우상들에게 바쳤던 음식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우상 자체를 보고 절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만백성이 왕의 명려에 굴복할지라도 이들만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순종해야 할 더 높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뭇사람들과 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비록 달아오른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는 한이 있을지라도 그릇된 것은 그릇된 것이었습니다. 온 백성이 다 머리를 굽힐지라도 그들만은 서 있어야 했습니다!
20세기의 독재 정권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속 정권의 부당한 요구에 굴복하도록 요구해 왔습니다. 지금까지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주님의 백성들이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가장 천한 일에만 종사하거나 혹은 자녀들을 빼앗기거나 고문을 받으며 신음 속에서 죽어갑니다. 그래도 그들은 오직 주님께만 드려야 할 충성을 강요하는 불의한 전제주의나 독재 정권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런 핍박을 받지 않고 삽니다. 그래도 사무엘 러더포드(Sammuel Rutherford 1600-61:스코틀랜드 언약파의 한 지도자이며 저술가였음. 역주)의 말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당신은 투쟁과 십자가가 없이 그리스도의 무리들 속에 끼여 가만히 하늘로 올라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세속인들은 그들의 죄에 끼어들도록 계속 유혹해 옵니다.
“누구나 다 하는 일이오. 왜 당신만 빼는거요 왜 남들과 다르게 놀려고 하오 그러지 말고 단 한 번만이라도 끼어서 같이 재미 좀 보십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세상의 압력과 유혹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특히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극도로 문란해지는 몰도덕적 사회 분위기와 돈과 재산 위주의 물질적 가치관에 휩쓸리기 쉽습니다. 미디어의 온갖 파렴치한 선전들과 전파 매체가 확산시키느 퇴폐 문화의 저속성은 날이 갈수록 심화됩니다. 경건한 생활 스타일은 현대 사회에서는 하나의 웃음거리가 되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노력들은 친구나 이웃이나 사회의 조롱감이 될 뿐입니다.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유 사회의 특징인 성의 개방과 세속적 사상들의 범람 속에서 엄청난 갈등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세속의 우상들을 섬기지 않는 자들에게 뜨거운 용광로를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이 용광로는 빈정거림과 무시와 따돌림의 화덕입니다. 깨끗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려는 자들을 보고 세상은 마음이 좁고 인생을 즐길 줄 모르는 답답한 종교인들이라고 멸시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압력 때문에 타협을 하면서 적당히 살아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편한 양다리 정책을 쓸 것이 아니라, 아예 포기하든지 아니면 떳떳이 반대하고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 양지택일의 길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봉착했었던 양단길이었습니다!
세 가지 부동의 상대들

다니엘의 친구들이 기로(岐路)에서 선택한 길이 어떤 쪽이었는지는 8-18절의 본문에 실려 있습니다.
이들은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확고한 입장을 한치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칙령은 세 개의 요지부동한 장애물을 만난 셈이었습니다!
그럼 8-12절까지 기록된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다. 수많은 백성들이 구름떼처럼 모여서 제막식이 진행되기를 기다립니다. 드디어 오케스트라가 합주되자 백성들은 구령에 다라 일제히 땅에 엎드립니다. 그런데 단 세 사람이 눈엣가시처럼 꼿꼿이 서 있습니다1
아마 여러분은 집회장같은 곳에서 다른 사람들은 다 앉았는데 한 사람만 우뚝 서 있는 것을 본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사람들의 눈에 금방 띄기 마련입니다. 제왕의 동상 제막식에서도 어명에 따라 모두들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제국 전체가 머리를 숙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만이 감히 왕명을 어기며 서 있었으니 얼마나 뚜렷이 드러났겠습니까!
다니엘서 1장에 비추어 볼 때, 이 세 사람들은 우상을 인정치 않는 자들로 널리 알려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우상숭배 거절이 이번에는 그들의 생명을 앗아갈 판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왕에게 그대로 보고되었습니다. 하기야 이 세 사람의 어명 불복에 대한 보고에는 감안해야 할 여러 가지 공로에 대한 긍정적인 보고도 있었겠지만 그런 공적에 관한 언급은 전무합니다. 보고 내용은 이 세 명의 고급 관원들이 바벨론의 대왕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것으로 일관하였습니다.
13-15절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은 노기가 등등하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당장 끌어오라고 명하였습니다.
“이 보고가 사실인가”라고 왕이 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세상이 그러하듯이, 왕은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남들과 다르게 살려고 하지 말고 마음을 바꾸라고 권유하였습니다.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는냐(15절).
우리 주위의 세상은 성도들에게 타협을 권유하여 설득시키려고 무척 노력합니다. 세상은 교인들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제거시키기 전에 먼저 자기들과 똑같이 되도록 압력을 넣거나 회유를 합니다. 세상은 거의 본능적으로 주님의 백성들이 타협에 응하기를 희구합니다. 이 세상은 남들이 다 고개를 숙이는 일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을 이상스럽게 여기고 못마땅해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과 가치관이 다른 자들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며 특히 보이지도 않는 신을 우선시하고 경배하며 사랑하는 일을 매우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설득하고 설득이 안되면 협박을 하여 조만간 형벌을 가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앞장에서보다 본 장에서 더욱 화를 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길래 나의 절대권을 감히 부정한단 말인가 내가 세운 신상 앞에서 절을 못하겠다면 다른 적절한 방법을 써서라도 그들의 뻣뻣한 목을 숙이게 해야 해. 용광로의 뜨거운 불 속에 들어가 보면 내 능력이 어떻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내가 그 건방진 작자들을 일단 극렬한 풀무 속에 내던지면 그들을 구해낼 신이 어디 있겠는가”
느부갓네살 왕은 얼마 전에 하나님의 능력과 최상권을 공적으로 인정했던 자였습니다(2:47)! 그러나 노기에 찬 그는 최근의 교훈들을 잊고 있었습니다. 몹시 화를 낸 상태에서는 건전한 판단이 불가능합니다. 격분한 사람은 이성보다도 협박에 호소합니다.
16절은 우리가 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부동의 상대들’이라고 불렀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 대한 고발 내용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변호나 사과를 하지 않겠습니다.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우리의 어명 불복을 시인합니다. 우리는 금상(金像)앞에서 엎드려 절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왕께서 저희들을 맹렬한 풀무 속에 던지시려면 그렇게 하십시오.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다른 뜻이 계셔서 그리 하시지 않더라도 우리는 왕이 명하시는 죄악된 짓을 결코 하지 않겠습니다.”(16-18).
이것은 곧 믿음의 발언입니다. 구조될 것이 확실하다면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일이 쉽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하나님이 그들을 구해내지 않으실지라도 우상 앞에 절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결단이야말로 경건한 믿음의 발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스펄전(C. H. Spurgeon)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당신의 의무는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하나님이 감당할 일입니다. ……비록 하늘이 무너져도 옳은 일을 행하고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당신과 나의 할 일입니다. ……당신은 결과에 신경을 쓰십니까 그것이 우리들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늘이 무너져 내려도 선한 사람은 자신의 주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진리에 충성합니다.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의로운 자기 되고 두려워 마십시오! 결과는 하나님의 일이지 당신의 일이 아닙니다.”
이 성경의 원칙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생애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무는 옳은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우리의 멸망을 초래한다면 하나님이 상관하실 일입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의무는 우리의 손에 걸려 있습니다. 우리의 할 일은 어떤 희생과 결과가 있더라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이 원칙에 따라 살았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한 바벨론 왕을 의식적으로 언짢게 해 드린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상의 최대 권력자와 영원하신 하나님 사이에서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에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선택을 한다고 할 때, 세상이 우리에게 행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기껏해야 우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조만간 죽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조금 더 산 후에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면 하느니 빨리 죽임을 당하더라도 평안한 마음으로 주님을 대하게 되는 편이 낫습니다. 우리는 무덤이 끝이 아님을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은 다음에 셈을 치러야 할 분을, 생명의 위협 때문에 언짢게 해 드릴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세속인들의 조롱이나 무시를 당하는 정도의 가벼운 위협이 두려워서 주님을 따르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을 우선시하는 경건한 논리를 따라 사는 신자들의 수는 적은 편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압력에 굴복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거스릴 때 받게 되는 당장의 결과들을 생각하고 타협합니다. 그러나 사드락(하나냐), 메삭(미사엘), 아벳느고(아사랴)는 이와는 정반대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결과를 하나님게 맡기고 옳은 일에 자신들을 던졌습니다. 이러한 결단만이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산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들이 세상의 압력에 넘어가면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힘차게 증거할 수 있는 힘을 잃고 맙니다.
세상의 무적의 힘이 세 사람의 부동의 상대들을 만났습니다. 세계 최고 세력이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응답은 “그럴 수 없습니다.”였습니다. 이 대답은 악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선택한 길을 포기할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사드락(하나냐), 메삭(미사엘), 아벳느고(아사랴)도 그들이 선택한 길을 되돌아설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19-30절의 말씀을 봅시다.
결과

타협을 거절한 세 명의 신자들은 불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불에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고 불 속에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어찌나 화가 났던지 안색이 변할 정도였습니다(19절)! 그는 노발대발하여 용광로의 온도를 평소보다 7배나 더 높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경건한 신자가 타협을 거절하면 악인의 분노는 하늘을 찌릅니다. 주님을 위해서 용광로 속으로 들어갈 용의가 있는 자들은 그 용광로의 불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뜨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20절의 말씀으로 보아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그의 명령에 저항할 것을 예상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시켜 그들을 결박하였습니다 21-23절에 의하면 용사들은 세 사람을 정장한 그대로 묶어서 용광로 상단으로 끌고 갔습니다.
용광로는 하나의 거대한 항아리처럼 생겼는데 하단에 문이 있어 그곳으로 불을 때었고 상단 부분은 열려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남은 자들이 끌려간 곳이 바로 이 윗부분이었습니다. 용광로는 극렬한 열기 때문에 느부갓네살 왕의 건장한 용사들을 태워 죽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드락(하나냐), 메삭(미사엘), 아벳느고(아사랴)가 그 용사들에 의해서 불 속으로 던져진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불 때는 구명으로 용광로 속을 들여다 보던 자들은 세 명의 남은 자들이 불꽃을 지나 용광로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남은 자들은 결박된 채 풀무 가운데 떨어진 상태였고 뜨거운 풀무불은 밖에 있었던 군인들까지 이미 태워 죽인 후였습니다. 그들이 용광로 속에서 살아날 가능성은 전무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끝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절대로 끝장이 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신실한 남은 자들이 자취를 감추는 것을 결코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수효는 적을지라도 아주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이 세상은 조직된 제도로서의 기독교 교회가 종식되는 것은 목격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때가 되면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도 없어서 못 찾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 교회 자체가 없어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비록 제도적인 교회는 사라질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이 세상에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알바니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서는 기독교 교회의 간판을 볼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가 이 나라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는 외적인 증거도 없습니다. 어떤 도서관에서도 경멸의 목적으로 쓰여진 경우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된 책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공동 묘지를 가 보아도 십자가의 모습을 보기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바니아에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자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정부의 조직적인 숙청에도 교인들을 전멸시키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남은 자들은 결코 제거되지 않습니다.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대신들은 틀림없이 용광로에서 몇마디 비명 소리가 들리고 시체들이 불꽃에 의해 산화되는 것을 볼 것이라고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느부갓네살 왕을 거역하는 자들은 전국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치려고 시도하는 모든 악인들처럼 느부갓네살 왕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의 대신들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게 하는 놀라운 일을 목격하였습니다!
“용광로에 몇 사람을 집어 넣었던가”
“세 사람 입니다”
“어떻게 넣었는가”
“묶어서 던져 넣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결박되지 않은 네 사람들이 불꽃 가운데로 걸어다니는 모습이 보이는가 더구나 네번쩨 사람은 초인적인 모양을 지녔으니 어찌된 일인가”
느부갓네살 왕은 네번째 인물을 종교적인 술어로 표현하여 ‘신들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25절). 그런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성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여러번 인간의 모습으로 구약 시대에 나타나셨습니다. 이 성육신 이전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흔히 ‘여호와의 사자’(천사) 혹은 ‘사자’라고 불렀습니다(창48:16). 그래서 본 장의 28절에도 ‘그 사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주 예수께서 몸소 사드락(하나냐), 메삭(미사엘), 아벳느고(아사랴)와 함께 불꽃 속에서 거닐으신 것입니다. 이사야의 입술을 통해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실증된 셈이었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43:2)
만약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타협을 했더라면 주님과 함께 용광로의 불꽃 속에서 걷는 특권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의 압력에 굴복했더라면 하나님과의 교제는 깨어지고 영원히 묶여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들의 결박은 밧줄이나 쇠줄이 아니고 철저한 실패감과 좌절감 그리고 아무 쓸모 없는 무용지물이 되었음을 느끼게 하는 무력감의 포승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예수님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 6세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삼위 제2위이신 주님과 동행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죄를 거절함으로써 구약시대에서 거의 예외적인,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체험하였습니다. 어느 누가 그런 일이 이 지상에서 가능하다고 믿었겠습니까 만약 그들이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시도했더라면 반드시 잃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들의 육체적인 생명이 부지(扶支)된다손 치더라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두절된 무의미한 삶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꺼이 자기 목숨을 잃을 수 있었기에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죄와 타협하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죄를 거절해서 잃을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불로부터 구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 속에 있으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불 속에서의 구원이 하나님의 구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세속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자녀들에게 백만 가지의 위로를 해 주십니다. 만약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우상 앞에서 절을 했더라면 세상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쳤을까요 아무 영향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느부갓네살 왕의 용광로 투시경을 들여다보던 이방인들은 경탄과 경이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명을 어긴 자들이 불꽃 속에서 전혀 해(害)를 입지 않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을 목격한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그 날에 회심한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용광로의 사건을 목도한 자들은 그때 받았던 하나님에 대한 인상이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경탄의 순간이 지난 후에 사람들은 사드락(하나냐), 메삭(미사엘), 아벳느고(아사랴)의 하나님을 화제의 촛점으로 삼았습니다1 모두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이구동성으로 감탄해 하였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 왕의 분부로 용광로에서 나왔는데 머리카락 하나 그슬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옷도 그대로 있었고 그들에게서 탄 내음 새도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크신 하나님이십니까! 그의 종들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습니다1 얼마나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까1 느부갓네살 왕은 아직 회심하지 않았지만 용광로의 사건은 그의 입이 닫히지 못하도록 하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공적으로 다시 한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국에서는 거듭나지 않은 비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을 인정했었습니다. 대부분의 백성들이 중생의 체험은 없었지만 국민 생활 전반에 걸쳐 하나님을 인정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정기적으로 주일날 교회 예배에 참석하였고 식기도를 하였으며 욕설이나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술주정이나 도박을 막았으며 가정 생활을 해치는 일이나 정직하지 못한 일체의 부정들을 거절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사람들이 모두 거듭나서가 아니라 그들의 양심에 하나님에 대한 인상을 짙게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국가의 도덕 수준은 하나님에 대한 백성들의 의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제 영국은 더 이상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영국의 도덕적 하락은 교회의 타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속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교회의 본분을 소홀히 하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나 영향이 국민들에게서 줄어듭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강론하지 못하고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기 시작하거나 메시지를 희석시키면 능력을 잃고 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언짢게 하는 일에 대해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서라도 “안된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악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인상을 새겨줄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의 어떤 측면들을 인정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28절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이 과연 누구이신 지를 인정한 고백이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종들이 있어, 하나님이 그들을 사자로 보내신 것과 하나님이 바벨론의 왕인 자신보다 더 능력이 크며, 세상의 어떤 세력가보다 더 강하시며,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시며,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神)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이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 속에는 지울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들이 새겨지게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반응은 그 다음 29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명령을 인정하거나 지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며 칼의 힘으로 믿음을 강요하는 부류의 인물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들은 그런 식의 강제성에 의해서는 믿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오직 믿음의 사람들만이 믿음을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식별력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아직 그런 단계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든지 사드락(하나냐), 메삭(미사엘), 아벳느고(아사랴)의 하나님을 나쁘게 말하는 자는 그 몸을 갈기갈기 찢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 것이라고 명하였습니다. 우리는 일건 어명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바벨론 왕에게 깊이 새겨졌다는 사실과, 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능력에 의해 극적으로 보호받았으며,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이방 제국에서 계속되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참되게 증거하는 일은 한마디 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의 백성들이 효과적인 증인이 되는 일을 망치게 하는 것도 한마디 말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예”(Yes)입니다. 불경건한 자들이 죄를 권할 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이에 동조하면 똑같은 세속인들이 됩니다. 그 결과 선을 행하거나 진리를 보존할 수 있는 능력이 교인들에게서 떠나버립니다.
한편 죄에 대한 유혹을 받을 때 “아니오”(No)로 맞서면 상황은 아주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뜨거운 용광로에 직면케 됩니다. 그때 당신은 느부갓네살 왕과 함께 용광로 밖에 있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와 함께 용광로 밖에 있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와 함께 용광로 속에 있어야 합니다. 중간 지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례가 없는 뜨거운 그 장소는 전례가 없는 구주와의 교제의 장소가 됩니다. 용광로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은 불신자들의 양심에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인상도 심어줄 수 있습니다.
인간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파멸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진 용광로는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은 그런 용광로를 사용하셔서 남은 자들을 보존하시고 동시에 남은 자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드높이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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