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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자신을 돌아보자 (갈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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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젊고 유능하고 명성이 높은 산부인과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치료받는 많은 환자들에게 늘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6개월마다 정기검진을 받으십시오. 조기진단만이 부인병을 면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랑하는 아내가 몸이 좋지 않아서 진찰을 해보니 결과는 부인병이었습니다. 더우기 병이 깊은 나머지 수술을 받고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제는 그의 아내가 10년 동안 한번도 검진 받은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6개월마다 진찰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이런 일이 자기 집에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안았던 것입니다. 남의 병은 고치면서 자기의 병을 못고치고, 남의 잘못은 그렇게 잘알고 비판하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 있어서는 너무나 어리석고 한심스럽습니다. 남을 가르치기 전에 자기자신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인격자의 마땅한 길이 아니겠습니까
심리학자 칼 융은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간단하게 보이지만 그실 어려운 일이 있는데 바로 자기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도덕적 문제의 본질이며 생활의 척도이다.” 자신을 먼저 구제해야 하고, 자신을 먼저 용서해야 하고, 사랑도 자기사랑이 먼저입니다. 모든 문제 있는 사람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웃 사랑을 내 몸과 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씀 그대로입니다. 정말로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자라야 비로소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가르칠 줄 아는 자라야 남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 많은 가르침, 그 많은 잔소리가 겉도는 이유는 내가 나를 가르치는 일에 소홀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기자신을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자기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합니까 자기자신의 판단력이 어느 정도 믿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공자에게 안회라고 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 제자가 32살로 세상을 떠날 때에 공자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땅을 치며 울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사랑하는 제3자와 함께 있을 때의 일입니다. 먼 길을 여행하는데 양식을 구하지 못한 공자 일행은 근 일주일이나 굶었습니다. 안회는 사방에 다니면서 식량을 구해와 밥을 지었습니다. 그 냄새가 너무도 좋아서 공자는 안회가 밥을 짓는 곳에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안회가 솥뚜겅을 열더니 속으로 ‘아, 이럴 수가 있나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내가 인의예지를 그토록 가르쳤는데 제가 먼저 먹어’라며 마음이 몹시 상했습니다. 그래서 은글슬쩍 그런 내색을 비추었습니다. 이를 눈치챈 안회는 공자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솥뚜껑을 열고보니까 얻어온 쌀이라서 그런지 수수가 몇 알 섞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밥을 스승님께 드릴 수도 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해서 제가 그것을 골라 먹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공자는 얼마나 민망하고, 부끄럽고,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그 때에 그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사람의 눈은 믿을 수 있는 것이지만 때때로 믿어서는 안될 때가 있다. 또 마음을 의지하고 살지만 내 마음도 내가 믿지 못할 때가 있다. 아니, 믿어서는 결코 안될 때가 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내 의견은 옳고 남의 의견은 틀렸다는 것입니까 믿을 만한 눈도 믿을 것이 못될 때가 있습니다. 내 판단, 내 지식, 내마음도 더더욱 믿을 수 없을 때가 있기에 온유한 마음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회학자 미드는 I와 me를 구분해서 생각합니다. 그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I라고 하는 것은 충동적이고, 비조직적이고, 또 예측불허의 존재이다. me라고 하는 것은 일반화된 타자이고, 타인과의 고유된 존재이고, 조직화된 유형이다. 그런고로 모든 사람은 I에서 시작해서 me의 통제를 받게 된다. 자아는 I와 me의 혼합이다. 다시 말해서 자아는 내가 생각하는 나와 충동적인 나,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지는 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아가 확대될 때에 형성되는 것이 identity, 정체감이다.” 보십시오. ‘나’라고 하는 것에 대한 자기 의식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다른 사람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에게 있는 일이면 내게도 있고, 내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이렇게 보편화된 자기 존재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기는 다른 사람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든지 다른 점만 생각합니다. 특권의식, 차별의식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합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은 옷을 입었다면 반갑습니까 아니면 기분이 나쁩니까 한번 진단해보세요. 나와 똑같은 옷을 다른 사람이 입었다면 당장에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참 피곤한 사람입니다. 사실 그 사람, 별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다 같은대도 불구하고 왜 그렇듯 다르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피곤합니다. 그래서 고독합니다.
저는 제일 웃기는 곳이 다름아닌 병원과 묘지라고 생각합니다. 병원에 가면 똑같은 환자인데도 ‘나는 돈 있는 사람이다’ 나는 지위가 있는 사람이다‘해서 특별대우 해주기를 바랍니다. 소위 특진이 이것입니다. 그래 보았자 입원실만 다를 뿐, 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의사가 “우리가 치료할 수 없으니 이제는 끝났습니다”해도 “저, 얼마든지 돈을 낼 테니 고쳐주십시오”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돈가지고 되는 일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지요. 의사의 눈으로 볼 때에는 돈이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또 하나, 묘지에 가보면 참 가관입니다. 돈 있는 사람이랍시고 비석도 크고, 아무튼 무덤이 굉장합니다. 하지만 무덤이 작으나 크나 썩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안그렇습니까 결국은 남과 내가 같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 이렇게 힘이 들어요. 평생 ‘나는 다르다, 나는 천재다, 나는 머리가 좋다, 나는 돈이 있다, 나는 능력이 있다’고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그것이 아니구나’를 알고 그 다음에 죽습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좀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저도 사람답게 살고, 많은 사람에게 덕을 끼치며 살 수 있었을 텐데, 왜 고독하게 살고 왜 비틀어진 인간으로 살아갑니까 자기가 남과 다르다는 생각, 바로 여기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 아닌 부부 간에도 그렇습니다. 부부는 이제 한 운명이지 않습니까 또 그만큼 오래 살기도 했어요. 그런데 아직도 다르다고 상각해요. 너와 나는 학번이 달라, 능력이 달라, 무엇이 달라.....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남과 나와의 다른 점을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쳐줍니다. 요새 유행어 가운데 이런 게 있습니다. “우째(어찌) 이런 일이..... 가만히 생각해보면 웃기는 말입니다. 안그렇습니까 어찌 이런 일이 없으라는 법 있습니까 저 집에도 있으면 내 집에도 있을 수 있지요. 그런데 ‘어찌’는 무슨 ‘어찌’입니까 있을 일이 있는 것 뿐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내게 있느냐고 하는 말은 한심한 소리입니다. 의식을 바꿔버려야 합니다. 그 의식이 바로 망조입니다.
오늘의 성경에 있는 내용을 보세요. 다른 사람이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세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하나는 저 사람과 나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마음대로 비판해요. 또 하나는 저 사람과 나는 같다, 저 사람이 실수했으니 나도 실수가 있을 수 있다, 해서 온유하게 대처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저 일이 저 사람만의 일이 아니다, 해서 책임을 같이 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남과 나와는 다르다는 사람--본질적으로, 지식적으로, 경험적으로, 운명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여기에 큰병이 있습니다. 남과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듯이 말하는 사람은 참으로 자신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않습니까 자녀를 둔 사람은 남의 자녀를 나무랄 수 없다고. 나도 자식 키우면서 남의 자식이 가출했으니, 어쨌느니, 함부로 말할 수가 없어요. 왜요 내 자식도 어느 때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가끔 남의 자식 문제에 대해서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을 보면 독신이거나 애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무책임한 소리를 할 밖에요. 여러분, 어찌 남의 자식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가 있습니까 언젠가 저에게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어떤 상담하는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은 독신이었어요. 하루는 한 어머니가 그 분을 찾아가서 자기 집아이가 가출을 했고,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고 얘기를 합니다. 당사자인 어머니에게는 그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그래 정신없이 아무 말이든 막 했습니다. 그런데 상담자가 “애를 어떻게 키웠기에 그 모양으로 키웠습니까 무릇 문제아는 없어도 문제 부모님은 있지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들은 어머니가 너무너무 속상해서 나한테 달려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상담자는 바뀌었습니다. 왜요 남의 아픔을 객관시하기 때문입니다. 내 자식이 없다고 해서 남의 자식을 함부로 말하는 것입니까 내 경우가 아니라고 해서 남과 나는 다른 것입니까 이러한 비판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남의 실수를 보고 나와 관계없는 것처럼 말하게 되는 순간, 나 자신을 보는 눈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눈의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못본다”--아무리 생각해도 좀 과장된 말입니다. 들보가 얼마나 큰데 눈에 들어갑니까 그실 자기 눈에는 들보같은 것이 있는데 남의 눈의 작은 티를 보고 어쩌구 저쩌구 말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자기 눈에는 들보가 있다는 것,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남을 비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리웠으니까요. 못보니까 무슨 말이든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남과 나는 다른 게 아닙니다.
또 하나, 나와 저와는 같습니다. 젊은 사람과 나이 많은 사람의 경우를 보십시다. 지금 젊다고 항상 젊은 것이니까 머지 않아서 어느 사이에 나도 늙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아파트에서 할머니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그 분이 지나가는 젊은 사람에게 뭐라고 한마디 했는데 젊은 사람이 영 말을 안듣습니다. 그러니까 나이 많은 그 할머니가 너무도 섭섭한 나머지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도 조금 있으면 나처럼 된다.” 제가 그 말을 듣고 아, 여기도 그렇구나 하고 웃었습니다. 자, 젊었다고 요샛말로 까불지 마세요. 별것 아닙니다. 곧 그 자리에 내가 옵니다. 바로 그 처지가 내 처지가 됩니다. 그런고로 다르다고 생각할게 없습니다.
또 모양새는 다르고, 형식은 다르고, 외형은 다르고, 겉으로 보기에는 다르지만 내적으로는 마찬가지입니다. 본질적으로 그 내면 세계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더라 그말입니다. 신학적으로 볼 때에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정복을 하게 하셨습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이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진멸하십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유황불로 멸하시든지, 아니면 가난과 지진이나 다른 여러 가지로 싹 쓸어버리시든지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가게 하셨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을 쳐서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이스라엘로 집행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너희도 범죄하면 이같이 되느니라--그 비참한 멸망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목도하게 하셨습니다. 그저 남의 얘기가 이니다, 너희도 범죄하면 이같이 된다고 확실하게 실물교육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나도 저 경우라면 그랬을 것이다, 나도 어찌할 수 없이 저와 같은 사람이다, 하는 그 느낌과 의식을 먼저 일깨워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자신을 돌아보고, 내면적 세계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하면 오늘 저 사건이 내 눈에 보인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라고, 내게 경고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나로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사에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이라고 계십니다. 그분이 저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자기 경험을 말씀해주신 것 중에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더운 여름날, 김익두 목사님은 모내기 하는 사람들이 점심 먹는 데 찾아가서 예수를 믿으라고 소리를 질렀답니다. 그런데 한 젊은 청년이 나서서 “목사님, 이 마을에서도 전도해도 잘 안될 것 같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물으니, “며칠 전 비오는 날, 나무에 벼락이 떨어졌는데 불이 붙어서 그만 나무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또 바위에도 벼락이 떨어져서 바위가 깨지고, 논바닥에도 떨어져서 논바닥이 이렇게 패였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렇게 하셨겠습니까 논바닥이 무슨 죄가 있고, 바위가 무슨 죄가 있고, 나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김익두 목사님은 돌아서서 “하나님, 저에게 지혜를 주십시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목사님은 그 청년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자네는 국민학고에 다녔나, 서당에 다녔나” “국민학고에 다녔습니다.” “국민학교 선생님의 손에 무엇이 있었던가” “막대기가 있었습니다.” “그 막대기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때때로 흑판이나 책상을 치고, 그러는 것이지요.” “흑판이나 책상이 무슨 죄가 있나” “아,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아이들이 조니까 졸지 말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아이들이 끝까지 졸면 어떻게 되겠나 마침내 그 막대기가 아이들 머리위로 떨어지지 않겠는가 그와 같이 벼락이 나무를 쳤고, 바위도 쳤고, 논바닥도 쳤다마는, 다음에는 사람들 머리에 떨어질 것일세.” “그것, 안되겠는데요.” “그러니 예수믿어.” 그래, 전도해서 교회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먼 나라에 흉년이 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어느 나라에 한발(旱魃)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어느 나라에 전쟁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먼 얘기로 생각하지 맙시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쩌면 나를 일깨우기 위하여, 내 영혼을 위하여 내게 주시는 경고입니다. 무서운 예언적 사건입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자, 정신차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 하나씩하나씩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다음 차례는 누구겠습니까 우리 교회에서는 1년에 약 300명의 장례식을 치릅니다. 또 내년에는 누가 떠날 것입니까 여러분, 어째서 남의 일처럼 생각합니까 이 모든 사건 하나하나가 곧 나 자신을 위해서 주시는 말씀이요, 구체적인 경고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십시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2절)”--이 ‘짐’이라는 말은 ‘바로스’라고 하는데 이는 무거운 짐을 뜻합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5절)”--여기의 짐이라는 말은 ‘포르티온’이라고 하는데 이는 개별적으로 지는 적절한 짐을 뜻합니다. 그런고로 내 짐을 내가 질 때에 나는 인격자요, 남의 짐을 함께 질 때에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여기에 덕이 있습니다. 말없이 책임을 함께 지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나와 같은 이야기요, 또 같은 책임을 졌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절)”
여러분,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여기저기에서 부정이 밝혀지고, 잘못된 얘기들이 들려옵니다. 그런데 나는 유유자적 팔장 끼고 앉아서 비판해도 되는 것입니까 남의 얘기라고 함부로 말해도 되는 것입니까 온유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것이 어찌 남의 얘기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물으십시오. 내 얼굴, 내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의 본문은 가르쳐줍니다. ‘자신을 돌아보라, 자신을 살피라. 그리고 짐을 함께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이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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